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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종삼/제주4·3위원회 전문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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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0월 15일) 최종 채택 예정인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충돌당사자들인 공산당(남로당)측과 미 군정측(군 및 경찰)의 활동상이 모두 망라되어야 하지만, 공산당측의 주요 대책회의와 주요활동 및 우익인사 처형 등 활동상은 덮어두고 군·경에 의한 주민희생과 심지어 희생자의 가족사항까지 기록하는 등 한쪽사항만 부각시켰다. 한마디로 진상을 규명하는 보고서가 아니라 인권침해에 초점을 맞춘 인권보고서가 되어버렸다.
필자는 작성팀의 한 사람으로서 제주도 공산당(남로당)이 수행한 모든 내용이 보고서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보고서 작성팀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제주도 출신 전문위원들(집필자 4명 중 3명)이 이를 묵살, 인권침해에 초점을 맞추어 작성한 후 별 수정없이 채택되었다.
보고서는 꼭 포함되어야 할 공산당(남로당)이 개최한 1948년 4월 15일의 제주도당대회, 미 군정의 조치에 대한 무장대 사령관과 군내 프락치 간의 2차례의 대책회의 내용, 제주도를 일거에 장악하려 했던 군·경 프락치사건 등이 누락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무장대에 토벌대 중대장이 전사하고 1개중대가 패전하여 많은 희생자를 낸 신엄리전투와 노루악전투, 그리고 야전에서 정면으로 부딪친 녹하악전투 등이 누락됐다. 이에 따라 마치 4·3사건이 공산주의자와는 별로 관계가 없으며 군·경이 공산무장대와는 별 전투도 하지 않았고, 일방적으로 주민을 학살한 것으로 착각하도록 만들었다.
남로당 제주도당이 무었을 노렸는가를 분석하는 작업을 소홀히 하고, 심지어 폭동지령이 있었는데도 ‘없었다’고 쓰는 등 몇 군데서 자료를 거꾸로 해석, 국가보고서로서는 부실한 보고서가 되어버렸다. 이는 제주도 출신 집필진이 희생자 명예회복에 주안점을 두고 작성하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채용시의 계약조건 때문에 6·25전쟁 이후 부분만 집필하고, 기타 부분은 의견을 제출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후 6개월간의 수정의견 제출기간이 주어짐에 따라 많은 수정의견을 제출하였으나, 집필자의 아집과 토의도 하지 않고 묵살해 버린 심사소위원회의 졸속처리로 잘못된 부분을 수정할 수가 없었다.
실질적으로 수정안을 심사한 민간위원 5명 중 군·경측 위원은 단 1명으로 파악되었다. 수정안 심사는 실제 10월 4일 달랑 하루뿐이었으며, 시간은 3시간 정도뿐이었다. 3시간에 350여 건의 수정요구를 모두 토의할 수는 없어 모 기관에서 제출한 수정요구만 검토하고는 모든 심사를 끝냈으며, 대부분의 수정요구는 심사도 해보지 못하고 부결처리되었다.
이는 수정안 제출 의미를 무색케 하는 조치였다. 이어 10월 7일 총리와 각료까지 참가한 소위원회가 열려 국방차관이 많은 요구를 했으나 중과부적으로 결과는 별무신통이었다고 한다.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은 집필진이나 심사소위원회의 인적구성이 불균형하게 구성되었기 때문이었다.
국가가 작성하는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모든 진상이 소상하게 규명되어야 하건만, 이해당사자인 제주도 사람들이 주류가 되어서 한풀이식의 인권조사보고서와 비슷한 보고서를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진상조사보고서를 더 이상 수정할 수 없다면 차라리 이번 보고서에는 ‘인권침해를 중심으로’란 부제를 달아 발간하고, 진상규명을 위한 보고서를 별도로 발간하여야 한다.
(나종삼·제주4·3위원회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