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공권력이 지만원 박사님에게 가한 '폭력'과 '린치'를 퍼뜨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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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금강야차 작성일10-07-31 17:10 조회3,021회 댓글6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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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가만히 앉아서 있을수 없습니다.
지만원 박사님이 작성하신 글을 널리 이롭게 전파하여 모든 국민이 볼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가 그래서 중요한 단어와 문장에 밑줄과 굵은 표시를 하고 글자를 크게 하여 가독성을 높였습니다. ----시스템클럽 회원 여러분 께서는 각자 네이버, 다음 같은 곳에다가 자기 개인 블로그에만 올려 놓아도 시간지 지나면 검색어에 '지만원' '5.18' 로 사람들이 검색을 하면 '이 글'이 검색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시간이 되는 분들은 '광주지방경찰청' '서울지방경찰청' 대구지방경찰청' '경찰청' 같은 곳에 국민제안에 글을 올려주시기 바라고, 각 도청,시청, 군청, 광역시청, 검찰청, 법원 등등에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각자가 속해있는 까페 같은 곳에도 이 글을 전파해주셔서 많은 국민들에게 얼마나 이 나라가 '좌경화'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 여기서 부터 사진과 함께 쭉~ 끝까지 드래그 또는 전체선택 해서 복사해서 붙여넣기>
25. 광주공권력이 필자에 가한 폭력과 린치 -지만원 박사
5.18은 광주인들 만이 독점하는 지역의 역사가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 전체가 공유하는 국가의 역사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5.18역사는 광주가 독점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역사에 대한 평가는 분석가들의 몫이다. 학자가 해야 할 일을 정치인들이 대신한다는 것은 학문에 대한 영역침해이며 전체주의 국가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한국의 정치인들은 학문의 영역을 침범했다. 학문적 조사가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인들이 나서서 화해, 타협, 절충 차원에서 민주화운동이라는 딱지로 5.18의 상처를 봉합한 것이다. 이러한 봉합은 상처에 대한 봉합일 뿐, 진실에 근거한 것은 아니었다. 그 후 5.18의 진실을 캐는 일은 학문적 차원에서 추구돼야 할 숙제가 돼야 했다. 하지만 인터넷 바다에 게시된 1,500만개 규모의 글들, 시중에 나도는 책들 그리고 제4공화국, 제5공화국 등 수많은 방송프로들에는 5.18의 성역화를 다지는 내용들과 왜곡된 내용들로 가득하고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내용들은 별로 없다. 영화 ‘화려한 휴가’는 그냥 전두환과 공수부대를 모략하기 위한 허위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이 역시 역사왜곡 작전의 하나였다. 그 많은 표현물들 중에 진실은 보이지 않는다. 방대한 원천 자료들에 대한 접근이 어려운 데도 기인했겠지만 이보다 더 큰 이유는 5.18이 이미 성역화로 굳어져 있는데다 그 성역을 방어하는 세력의 힘이 너무나 엄청나기에 감히 누구도 그 도도한 물살을 거스를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5.18은 민주화의 상징이요, 광주는 민주화의 성지”로 더욱 공고하게 굳어져가고 있다.
민주화의 광풍은 한국판 쓰나미였다. 그 쓰나미 앞에서는 진실이 허위가 되고, 정의가 악이 되고, 논리도 무시됐고, 일사부재리를 규정한 헌법도 무시됐다. 계엄사령관이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비상계엄 관리의 속도를 내게 한 것이 헌법 기능을 마비시킨 폭동이자 내란으로 내몰리고, 광주시위는 헌법을 수호하려는 준-헌법기관으로 등극한 반면, 이를 진압한 계엄군은 내란목적 살인마가 됐다.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지만 이는 엄연히 서슬 퍼런 대법원의 판결이다. 민주화 세상이 아닌 국가에 충성한 것이 반역으로 처단되는 무서운 세상을 맞이한 것이다. 5.18 성역을 지키는 병정들이 수십-수백만에 이르고, 대다수 국민들의 마음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고정관념이 형성돼 있고, 서슬 퍼런 대법원의 판결문이 있는 것이다. 누가 감히 이런 대세에 거슬리는 연구를 할 수 있겠는가? 감옥에 갈까, 테러를 당할까, 좌고우면 하지 않는 현대판 돈키호테가 나오기 전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세인들의 생각이다.
필자는 대선을 앞둔 2002년 8월 16, 동아일보 및 문화일보에“대국민 경계령! 좌익세력 최후의 발악이 시작됩니다”라는 제하에 4,500자에 해당하는 의견광고를 냈다. 그 광고문에는 이런 구절이 들어 있었다.“쌀, 마늘 사건 등으로 농민을 분노케 해놓고, 거기에 노동세력, 홍위세력 등 좌익들이 불을 댕기면 광주사태의 확대판이 나올 수 있습니다. 광주사태는 소수의 좌익과 북한에서 파견한 특수부대원들이 순수한 군중들을 선동하여 일으킨 폭동이었습니다. 소요사태를 일으켜놓고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선거도 없고, 우익들이 잡혀가고, 김정일이 무혈로 서울을 장악하는 사태가 올 수 있습니다.”
이 의견 광고문이 나가고 많은 국민들로부터 격려를 받았지만 호남인들로부터는 도끼로 머리를 두 쪽 내겠다는 등의 험한 전화폭력에 시달렸다. 민주당은 2회에 걸쳐 성명서를 내 정부에 강경대응을 주문했고, 오마이뉴스는 필자를 정신분열증환자로 매도했다. 그 다음 5.18단체가 나섰다. 5.18부상자회 회장 김후식씨가 2002년 8월 20일, 검은 유니폼을 갖춰 입은 11명의 어깨들을 이끌고 올라와 다수의 경찰이 보는 앞에서 충무로에 소재한 필자의 사무실에 들어와 기물을 부수고 소리를 질렀다. 건물주에게 협박을 가하면서“사무실을 거두어들이겠다.”는 각서까지 받아갔다. 5층 건물에 세 들어 업무를 보던 수많은 사람들이 한동안 공포에 떨었다. 이어서 안양에 소재한 필자의 아파트로 달려와 수많은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차를 부수고, 대문을 부수며 무력시위를 벌였다. 주민들로부터 빈축을 받자 이들 검은 유니폼의 어깨들은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일제히 허리를 굽혀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외친 후 철수했다. 그나마 필자와 가족들이 현장에 없었던 것은 어느 경찰이 빨리 대피하라고 귀띔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경찰들은 이들의 행패를 구경만 했다.
그다음에는 MBC 손석희씨가 필자와 전화를 연결하여 인터뷰를 했다.“현직 대통령을 드러내 놓고 빨갱이라고 하시는데 한 가지 근거라도 대 보십시오”라고 했다. 필자는“김대중은 23세에 노동당에 가입했고, 광주사태를 배후 조종했으며, 대통령이 되어서는 알게 모르게 적장에게 군자금을 대주면서 지뢰제거, 남침통로건설 등 남한의 안보를 통째로 허문 좌익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아침 7:30분의 인기프로를 청취하는 국민에 생방송 되었다. 그 다음에는 광주검찰이 나섰다. 최성필 검사(현 서울중앙지검 공안부)가 5.18측으로부터 고소장이 제출됐으니 광주로 내려와 조사를 받으라고 했다. 필자는 변호인의 조력을 받아 관할지역인 수원이나 행위지인 서울에서 조사를 받게 해달라며 사건이송요청서를 제출했다. 이에 대해 아무런 연락이 없던 광주검찰은 2002년 10월 22일, 16:00시에 최성필 검사실 조사계장 김용철을 필두로 광주서부경찰서 순경 3명(이일남, 박찬수, 이규행)을 이끌고 필자의 아파트에 들이닥쳤다. 러닝머신을 한 다음 샤워를 하고 팬티바람으로 있는 필자를 옷도 입지 못하게 하면서 무작정 끌어내려 했다. 종이조각(체포영장?)과 신분증을 눈앞에 슬쩍 스치게 하면서 대검찰청에서 나왔으니 가자고 했다. 자세히 보자고 했더니“너 같은 놈에게 이런 걸 왜 보여주냐”하면서 옷도 입지 못하게 하고 끌어내리려고만 했다. 필자는 이들이 조폭인 줄로만 알았다.
이들은 수갑을 뒤로 채운 채 5시간 이상 차속에서 린치를 가했다. 온갖 저속한 욕설을 했다. “우익새끼들은 모조리 죽여버려야 한당께, 야 이 개새끼야, 네깟 놈이 무얼 안다고 감히 5.18을 건드려, 뭐 이런 싸가지 없는 개새끼가 있어, 야, 이 새끼야, 너 이회창으로부터 얼마나 받아 챙겼냐, 이런 새끼가 무슨 대령 출신이야, 이런 새끼가 무슨 육사 출신이야, 대령질 하면서 돈은 얼마나 챙겼냐, 부하 꽤나 잡아 쳐먹었을꺼다” 등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언어폭력에 시달렸다. 뺨도 때리고 머리도 쥐어박았다. 한 30차례 되었다. 검사실 김용철과 서부경찰서 이일남이 가장 악질적이었다. “야, 이 새끼야, 네깟 놈은 가다가 중간에서 죽여도 표도 안 날 꺼다, 네깟 놈이 때렸다고 말해도 증인이 있냐? 증거가 있어?”그야말로 자식 벌 되는 사람들에게 수모를 당한 것이다. 이 땅이 과연 대한민국인가 싶었다.
광주검찰 615호실에 도착하니 최성필 검사가 잡아먹을 듯 소리를 질렀다. 조사를 하는 중에도 뒤로 채운 수갑을 풀어주지 않았다. 최성필 검사의 이웃 검사로 보이는 여성이 와서 합세했다.“당신이 시스템공학 박사요 엥, 시스템공학이란 게 있당가, 어디서 학위를 받았소?, 처음 듣는 건디 이거 가짜 아냐? 좀 알아봐야 겠구만, 어이 좀 알아보소, 당신 눈에는 광주시민 전체가 빨갱이로 보이요? 광주가 아니었다면 한국에 무신 민주주의가 생겼겠소. 어림도 없재이 참말로 잉~”저녁 식사를 하라면서 수갑을 풀어주었는데 손이 두껍게 부어오른 데다 팔 자체를 들어 올릴 수 없었고, 손가락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깨는 물론 등판 전체가 손바닥 보다 더 두껍게 부어올라 부기가 가시는 데만도 4개월 정도 걸린 것 같다.
2002년 10월 2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영장실질심의를 맡은 부장급 판사 정경현(당시45세 1957년생 전남 함평)은 필자의 변론을 맡은 광주출신 변호인(당시66세)에게“변호인은 광주 시민들에게 무슨 욕을 들으려고 서울 사람의 재판을 맡았소”라며 아버지 벌 되는 분에게 모욕을 주었다. 변호인이 필자의 경력과 훈장 받은 사실들을 나열하자“시끄럽소, 지저분한 신문은 집어치우시오”라고 또 한 차례 면박을 주었다. 이어서 정경현 재판장은 필자를 삼킬 듯이 노려보면서“당신이 광주에 대해 무얼 아요? 나는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소. 구속영장은 발부됩니다. 이상이오” 할 말이 있으니 발언권을 달라고 요구했더니 그는 매우 못마땅해 하면서“구속영장은 발부되니 말해보시오”라고 했다. 나는 구속사유를 저지르지 않았으며 이 사건은 구속 요건에 해당하지도 않는다는 요지로 말을 하려 했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불과 두 마디 정도 듣고서는“시끄럽소”하며 노려보았다. 10월 30일, 구속적부심 재판이 열렸다. 김용출 부장판사(1959년생 전남 장성)가 시니컬하게 웃으면서“나의 형님도 아무런 죄 없이 계엄군에 가서 몇 시간 동안 고초를 받고 왔소. 이런 건 어떻게 해석해야 되요?”
체포되기 전, 필자는 5.18단체들이 필자에 가한 폭력행위에 대해 서울지검에 고소했다. 정작 서울에서 다뤄야 할 이 사건이 또 광주로 이송됐다. 이 사건을 이송 받은 최성필 검사는 이들에 무혐의 및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이때 필자에게 비친 광주는 대한민국 상위에 존재하는 점령군사령부였고, 대한민국 상위에 군림하는 광주공화국이었다. 그런데 매우 기이하게도 필자가 출소한지 몇 달이 되자 광주검찰이 필자를 법정의 증인으로 불렀다. 서울과 안양에서 벌였던 김후식 등의 폭행사건에 내렸던 기소유예 결정을 취소하고 다시 기소하여 재판을 연 것이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필자에 대한 1심재판부는 처음‘고단’으로 분류된 단독사건이었으나 2002년 11월 27일에 갑자기 합의부로 전환됐다. 신중히 했다는 모양새를 갖추려 한 것으로 보이지만 판사 3명이 모두 호남출신(재판장: 전성수, 판사: 조재건 윤영훈)이었다. 형사소송법 제15조는 지역정서가 작용하는 본 사건을 광주지법 이외의 다른 지역 법원으로 이송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필자의 변호인들은 이 지역정서와 관할권을 이유로 관할이전신청을 3회씩이나 냈지만 광주지법은 이러한 법의 정신과 실정법을 무시했다. 대법원에 상고를 했지만 대법원은 검찰과 법원이 저질렀다는 그 정도의 사실들만으로는 광주가 지역정서를 가지고 재판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결론을 냈다. 서울 사람이 서울에서 광고문을 냈다 해도 광주의 정서를 건드렸다면 광주에 가서 재판받는 것에 아무런 하자가 없다는 취지의 판결을 낸 것이다. 광주 앞에서는 대법원도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광주지법 판결문의 범죄사실은 이러했다.
5.18 민주화운동은 1980.5.18을 전후하여 전라남도 및 광주시민들이 비상계엄의 철폐를 요구하는 등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하여 벌인 민주화운동으로 국회에서 의결, 공표된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광주민주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 광주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등에 관한 법률 등에 의하여 정립된 지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5.18민주화운동 유공자들 및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사망한 자들이 마치 소수의 좌익과 북한에서 파견한 특수부대원들에 의하여 선동되어 일으킨 폭동인 것처럼 묘사하여 위 5.18민주화운동 유공자들 및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사망한 자들을 비방할 목적으로 문화일보와 동아일보에 광고하여 공연히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여 피해자 이동춘, 같은 김후식 등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들의 명예를 훼손함과 동시에 사자인 피해자 정지영 등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명예를 훼손하였다.
국회가 의결한 것이면 모두가‘진실한 사실’이며, 이에 어긋나는 사관은‘허위사실’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근 무효화되고 있는 세종시특별법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와 같이 필자는 정치인들이 의결한 내용과 다른 내용으로 사관을 피력했다는 죄로 투옥된 지 101일 만에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의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광주인들은 한 학자의 역사관을 법정에 세웠고, 역사관에 죄를 때린 것이다. 광주의 분서갱유라 아니할 수 없다. 이른바 좌경학자들이 썼다는“해방전후사의 인식”이 이 나라 일각에 왜곡된 역사관을 심었다. 최근에는 이를 뒤집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라는 역사책이 발간되었다. 김대중-노무현 시대에는 1948년의 4.3사건에 대해서도 기존의 사관을 뒤집는 새로운 역사를 썼고, 1989년의 동의대사태에 대해서도 역사를 다시 썼으며, 6.25와 건국에 대한 기존의 역사관을 뒤집는 새로운 역사관들도 나오고 있다. 우후죽순처럼 기존의 역사관들을 뒤집는 좌익사관들은 공론의 시장에 자유롭게 등단하고 있는데 유독 5.18에 대해서만은 공론의 시장에 올라올 수 없다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필자가 5.18에 대해 피력했던 역사관은 5공시대에 형성됐던 역사관 그대로였다. 단지 5공 시대에 형성됐던 역사관을 피력했다 해서, 당시를 살았던 현역 중령으로서 그리고 그 후 군사 및 안보 전문가로 활동하면서 세월을 통해 나름대로 형성했던 역사관을 피력했다 해서, 5.18 제 단체들로부터는 물론 광주경찰과 광주검찰로부터 생지옥 같은 폭력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 재판부로부터는 5.18에 대해 다른 시각을 거론하지 말라는 취지의 판결을 받은 것이다. 필자는 많은 국민들이 5.18을 민주화운동이라 부르고 광주를 민주화의 성지라 생각해도 이를 틀렸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사회에서는 필자의 판단도 그들의 판단도 다 같이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가 광주로부터 당했던 폭력과 판결은 그들의 판단만 존중돼야 하고 필자의 판단은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5.18을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린치를 당하고 광주에 있는 감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5.18의 폭력이요 광주의 폭력인 것이다. 이러한 폭력과 재판은 민주화라는 거룩한 개념에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분쟁의 당사자인 호남출신 법관들이, 분쟁의 다른 당사자를 광주로 끌어다가 재판한다는 것도 폭력이요 승복력을 상실하는 떳떳치 못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일반상식은 물론 법 상식마저 통하지 않는 광주에서, 필자의 심정은 호소할 길 없는 막막한 어둠의 공화국으로 잡혀 왔다는 느낌이었으며, 먼 외딴 섬으로 인신매매단에 잡혀 온 여인의 심정이 바로 이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997년의 민주화법원이 일사부재리를 규정한 헌법을 무시하고 1980년 법원의 판결을 뒤집은 것도 민주화의 폭력이라 생각하며, 수도권에 사는 필자를 광주로 끌어가면서부터 가했던 물리적 언어적 폭력과 재판도 헌법을 무시한 민주화의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민주화라는 거룩한 이름으로 자행하는 이런 폭력은 비단 신군부나 필자 만에 대한 폭력이 아니라 국민 모두에 가하는 협박이요, 그 협박의 수단으로 필자를 희생물로 삼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감히 어떤 놈이 5.18을 건드려!”그러나 누가 뭐라 해도 지구는 돈다. 5.18 역사는 반드시 공론의 장에서 자유롭게 연구되고 표현돼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소신이다. 공론화의 자유를 박탈하는 행위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터넷 검색엔진 구글(goole.co.kr)에서“5.18”이라는 검색어를 치면 2008년 7월 4일 현재 13,500,000개의 글이 뜬다. 윤상원을 검색하면 53,000개의 글이 뜬다. 내용들을 보면 이 많은 글들은 대부분 이른바 민주화세력과 그 주변세력에 의해 게시되었다. 거의 모든 언론매체들이 5.18에 대해 긍정적인 기사를 썼고, MBC 드라마 제5공화국은 그 파급효과에서 절정을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것들이 정말로 5.18 역사를 정직하고 진실하게 묘사하고 있는가? 누구라도 그렇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유로운 역사의 규명작업은 수사자료를 공개하라는 대법원의 판결이 확정되고, 2004년 11월 11일, 검찰이 12.12 및 5.18 사건기록의 공개범위를 확정한 이후부터 시작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터넷 바다와 그 많은 언론매체에 떴던 자료들은 대부분이 수사기록을 참고하지 않은 것들이어서 그 신빙성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은 그 기록들을 참고하여 쓴 최초의 것이다. 따라서 본 책자를 범죄시하고 탄압한다는 것은 부정확하게 쓰인 기존의 역사자료들만 존재할 수 있고, 수사 자료에 근거한 보다 새롭고 정직한 역사자료는 써서는 안 된다고 하는 또 다른 분서갱유식 폭력이 될 것이다. 필자는 5.18단체와 광주 법관들로부터 입은 아픈 상처를 딛고 이 책을 쓰면서 이로 인해 5.18단체와 광주의 법관들로부터 또 다른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안고 있다. 이 나라가 정말로 민주화된 나라라면 이런 공포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에 민주화를 세웠다는 그 민주화세력이 법 위에 군림하는 두려운 폭력세력으로 등장해 있는데다 왕왕 법정의 독재가 상식과 과학을 뒤엎는 판결을 내놓는 마당이라 공포심을 갖는 것이다.
5.18단체의 집요함은 끝이 없다. 2008년 6월 필자는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의 머리말 초안을 필자가 운영하는 홈페이지‘시스템클럽’에 게시했다. 여기에는 이런 글이 있다.“필자는 10.26, 12.12, 5.18, 김대중 내란음모, 1995~97년에 걸친 역사바로세우기 재판 이 모두에 대한 기록들을 열람하였다. 이 모든 기록들을 보면서 필자는 5.18은 김대중 등이 일으킨 내란사건이라는 1980년 판결에 동의하며, 북한의 특수군이 파견되어 조직적인 작전지휘를 했을 것이라는 심증을 다시 한 번 갖게 되었다. 불순분자들이 시민들을 총으로 쏘는 것은 물론 제주 4.3사건에서처럼 잔인한 방법으로 살인을 저질러 놓고, 좌익들이 이를 군인들에게 뒤집어씌우는 소위 모략전을 반복적으로 구사함으로써 민주화 운동으로 굳혀가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심리적 내전’이 바로 5.18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에 5.18단체(신경진 부상자회장, 정수만 5.18현제자매가족회 등)들이 2008년 6월에 필자를 고소했고, 동시에 5.18에 대해 반대 시각들을 인터넷에 표현한 전사모(전두환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 등 38명을 무더기로 고소 고발했다. 2009년 7월 16, 수원지방검찰청 안양지청의 박윤희 검사가 필자의 위 글을 대상으로 정식 기소를 했고, 2009년 11월 12일에 열린 제2차 공판이 열렸지만 그날 증인으로 호출된 고소인 신경진은 오지 않았다. 형사재판 일정은 통상 2주 간격으로 잡히지만 이번 사건을 맡은 판사는 2개월 2일을 늦춰 2010년 1월 14일로 공판기일을 잡았다. 2010년 3월이면 판사들의 인사가 있다고 한다. 필자는 그를 휘몰아칠 46개의 증인신문용 질문지를 자료들과 함께 마련해 갔고, 이 재판에 관심을 보여주는 120여명의 시스템클럽 회원들이 법정의 바닥에 앉아서까지 신경진을 기다렸지만 그 시각 그는 나주에서 판사로부터의 전화를 받고 있었다.
지만원의 시스템클럽
http://www.systemclub.co.kr
키워드,태그 : 광주폭동, 광주민주화운동, 광주사태, 전두환, 5.18, 김재규, 정승화, 장세동, 북한, 자유북한군인연합, 최규하, 12.12, 내란목적살인죄, 내란죄, 김대중, 유언비어, 대학살, 계엄령, 5.18 특별법, 화려한휴가,민주화운동, 동의대사태, 민주화투사, 민주화열사, 민주화, 국가유공자, 연금, 가산점, 호남지역, 전라도, 광주, 광주광역시, 지역감정, 경상도, 빨치산, 통일운동가, 문근영, 류낙진, 비전향장기수, 여순반란사건, 제주 4.3사건, 14연대, 이승만, 자유민주주의, 김정일, 김일성, 독재국가, 노태우, M16, 다이너마이트, 님을 위한 행진곡, 임을 위한 행진곡,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순국열사, 애국열사, 4.19, 좌익, 386주사파, 호남출신, 홍어, 홍어족, 흉노족, 경상디언, 전라디언, 수사기록으로 본 12.12 와 5.18 , 솔로몬, 베트콩, 조총련, 박정희, 박근혜, 육영수, 권영달, 장태완, 허삼수, 노태우, 박흥주, 차지철, 무기고, 탈취, 교도소 습격, 죄수, 해방, 석방
댓글목록
금강야차님의 댓글
금강야차 작성일
저는 제 블로그 야후,다음,네이버에 올렸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이 검색하면 그 검색어에 걸려서 몇명이 글을 보게될겁니다.
그리고 트위터에 올리는 방법은
1. 현재 시스템클럽 화면 중간쯤에서 마우스 오른쪽 클릭 --> 속성클릭
2. URL 주소 복사
3. 트위터에 붙여넣기
4. 트위터에서 URL 축소 클릭
5. 전파~.
중랑천님의 댓글
중랑천 작성일
저는 오래전부터 의문점이 있었습니다. 광주광역시에만 100만명이 넘게 살고 있다고 하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지역만 같을 뿐 학력, 소득, 가정환경등 모든 것이 다를것입니다. 그렇다면 100명중에 한명정도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나오지 않을까요? 99명이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라고 하더라도 그중에 한명정도는 교도소습격한게 무슨 민주화냐고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까요? 지지율 97.3%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박사님에 대한 글을 보니 배운 사람이나 아닌 사람이나 똑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비극적인 일입니다. 판사, 검사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보통 사람들과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똑같군요.
며칠전, 50대 후반의 교양있는 여성 한분을 만났는데 고향이 전남이라고 하시더군요.
사회적 위치도 있고 학식도 있는 분이었는데, 전라도얘기가 나오니까 흥분하시는 겁니다.
이런 말씀도 하시더군요. 서울에 빌딩주인은 경상도사람이고 전라도 사람들은 경상도사람 빌딩지어주는 일만 했다는 겁니다. 즉, 빌딩 짓는 건설노동자들(노가다꾼)들은 전라도라는 겁니다.
살만큼 사는 분이 이렇게 피해의식에 빠진 말씀을 하시더군요.
전 지박사님을 대한 광주의 판검사들도 피해의식에 지배당한다고 생각합니다.
며칠전에 만난 분이 전라도사람들 못산다고 하소연 하는 것도 똑같습니다. 누구나 할것없이 전라도 사람들은 피해의식이 강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이 못사는 것은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에서 전라도사람들이 대체적으로 하류층을 이루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성공한 사람 찾기가 타지역에 비해 쉽지는 않지요. 하지만 이 사람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사람이 돈도 많이 벌고 성공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주위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지 않으면 힘들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전라도 사라들은 신뢰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성공못하는 이유가 이것때문 아닐까요?
서울 변두리에가면 전라도사람들 엄청 많습니다. 서울에서 소득이 낮은 지역보면 민주당이 강세지요. 전라도인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왜 그들이 못살겠습니까? 예전에 서울에 올라온 사람들 모두 가난했습니다. 무일푼으로 시작해 지금의 부를 이룬 사람들이 대한민국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전라도사람들이 주로 한국의 하류층을 이루고 있습니까?
정답은 제 생각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못사는 겁니다. 신뢰를 못얻드니까 돈을 벌수 있는 기회를 남들보다 적게 얻었던 것입니다.
나비님의 댓글
나비 작성일저도 제 블로그에 올렸으며 네이트 판등 여러 인터넷 게시판등에 올려서 많은 국민들이 읽을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흐훗님의 댓글
흐훗 작성일5.18들에게 당한 폭력을 역사를 바로잡는 저술로 승화시키셔서 호남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먼훗날 호남인들에게 김대중은 거시기로 박사님은 은인으로 평가받을 것입니다. 반드시,,, 아니면 인민공화국(빨갱이나라)이 되는 거죠.
금강인님의 댓글
금강인 작성일개시키들! 꼭 복수해 주마.
애국을위하여님의 댓글
애국을위하여 작성일5.18의 모순을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