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탄10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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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평강 작성일10-05-10 22:37 조회3,167회 댓글2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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肉彈10勇士란
1949년5월4일 北韓에게 빼앗긴 開城의 松嶽山 高地를 奪還키 爲해
10名의 特攻隊員들이 砲彈을 가슴에 안고 敵의 機關銃 陣地를 向해
突進하여 이를 破壞하고 壯烈히 散華하였다
아로서 我軍은 빼앗겼던 高地를 奪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들의 殺身救國의 犧牲精神을 軍人氣相의 龜鑑으로 삼고 있다
國軍戰史에 길이 빛나는 이 崇高한 犧牲精神을 계승.발전하기 위하여
우리 國民은 每年 追悼式을 擧行하고 있다
肉彈10勇士 處理
**肉彈10勇士는 散華한지 2週日 餘 지난 1949.5.20. 서울運動場에서
李始榮 副統領 臨席下에 5萬餘 群衆이 參加한 가운데 葬禮式이 擧行되었다
**參戰 同僚 將兵. 遺家族. 社會 指導級人士 總網羅한 凡國民的 葬禮式이었다
**10名 全員에게 乙支 武功 勳章을 授與하였고 特進 追敍하였다
** 遺骸는 國立 墓地에 移葬, 顯忠碑는 國立墓地애 忠勇塔은 문산에 세움
**陸軍에서는 現在 “肉彈10勇士賞”제도를 신설하여 優秀副士官을 選拔
이들에게 施賞하고 있다 [副士官에게는 最高의 榮譽]
**每年 擧行되는 追悼式은 61週期가 된다[2010年]
이와 같이 온 國民이 推仰하고 받을고 있는 肉彈10勇士에 대하여
^^國防部 軍史編纂硏究所“에서 펴낸 6.25.參戰者證言錄”[2003年]에는
肉彈10勇士는 自爆이 아니라 捕虜가 되어 平壤에서 大大的인 歡迎을 받은
살아있는 人物이며 이는 순전히 최경록 中領의 造作에 의한 것으로 判斷된다,,,라고
金益烈 將軍의 證言이 실려 있다 [別添 # 1 證言內容 參照]
우리는 造作 捏造된 虛像을 놓고 軍神으로 모신다는 것이다
나는 金將軍의 證言을 보고 놀랬고 어이가 없었다
이를 編輯 發刊한 國防部 軍事 編纂硏究所의 所行이 疑心스러웠다
이 證言의 波及效果! 戰後젊은世代들에게 미치는 影響은 至大할 것이며
國家信賴度의下落, 國論分裂等을 생각할 때 무척 念慮스러웠다
그래서
2005년에 수차에 걸쳐 國防部 軍事編纂硏究所에 抗議하였고
金將軍의 證言을 削除해 줄 것을 要請하였으나 空念佛이었다
筆者의 削除要求와 抗議 內容을 보시려면
[1]國防部 軍史編纂硏究所 “” 공개계시판“”에 “육탄10용사”하고 입력하면
內容을 볼 수 있음
[2] Yahoo나 Naver 검색창에 “김익열장군의증언[육탄10용사]” 入力하면
여러情報가 나오는데 그 중에서[公開揭示] 題目을 크릭하면 됨
本人의 削除 要請에 對한 國防部 軍史編纂硏究所의 答辯은
**6.25.參戰者들의 個人別 證言錄을 加減없이 手錄한 것이며 公式化된
戰史가 아님을 말씀드림니다
**貴下께서는 同一한 內容으로 反復해서 提示하고 계심니다
저의 硏究所 側에서는 더 以上 追加的으로 答辯드릴 事項이 없음니다
無責任한 냄새나는 答辯. 결과 없는 싸움이었다. 支援勢力이 없었기에 나의 問題提起는 空念佛로 끝났다
천안艦 擊沈事件은 우리에게 많은 衝擊을 안겨 주었다
國力倍加에 盡力하라!! 우리들에게 奮發을 促求하는 事件이다
美國과의 共助體制 强化는 勿論 國力弱化를 꾀하는 무리들의 剔抉이
國力倍加의 길로 본다
김익렬장군의 證言은 國力弱化를 誘導하는 作用物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國力 倍加 側面에서 김익렬장군의 證言을 削除토록 國防部
軍史編纂硏究所에 强力히 要請하고 削除 目的을 達成시켜야 한다
한 두사람의 힘으로는 不可하다
사이버 攻擊, 융단爆擊 !! 이 方法으로 우리의 削除 要求를
貫徹시킬 것을 提案한다
너도 나도 키보드를 뛰들어서
軍史編纂硏究所를 攻擊[削除要求]한다
그들은 우리의 상이버 攻擊에... 많은 人員이 動員된 융단爆擊에는
降伏할 것이다. 뜻 있는 분들의 많은 參與를 付託드림니다
[우리도 한번 愛國을 해 봅시다]
別紙 # 1 金益烈 將軍의 證言
제1사단 제13연대 연대장 대령 김익렬
0 일시: 1964년5월4일
0 장소: 전국방장관 박병권 자택
0 대담: 국방주 군사편찬위원회
0 송악산지구 육탄10용사의 진상
# 세부 증원 내용
이 이야기는 1964년 5월 4일 14:30~17:00에 걸쳐 전 국방부장관 박병권댁에서 제5연대 창설에 대한 간담회 석상에서 김xx이 공개한 내용이다.
나는 당시 김석원 장군이 지휘하는 제1사단 휘하 제13연대장으로 있었다.
적이 송악산을 점령하고 피아 교전이 전개되었을 때 제11연대(연대장 최경록 중령)가 공격하고 있었는데 제 11연대가 지탱하기가 곤란하면 제13연대(당시 예비연대)가 투입되겠끔 대기상태에 있었다.
제11연대장은 송악산에서 격전중인 일선부대에 박격포탄을 보급하기 위하여 공병소대장(박모)으로 하여금 10명을 공동 지휘하여 박격포탄을 짊어지고 송악산으로 출발시켰다. 그러나 박소위는 지형을 숙지하지 못하여 이동도중 적과 불의에 조우하게 되자 부하들을 수습지휘하지 못하고 혼자서 탈출하였다.
대원 10명은 박격포탄을 진채 모조리 적에게 포로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정보주임은 계통에 따라 사단 G-2에 보고하였다. 사단장 김석원 장군은 대노햐여 당장 박소위를 총살하라 하였다.
이때 변호한 것이 제11연대장 최경록 중령이었다. 사실상 박소위와는 친구지간으로서 일본 학병의 동기인가 하여 막역한 사이였다. 따라서 박소위를 총살에서 구출하기 위하여서는 사단장에게 거짓말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연대장은 사단장에게 정식보고를 하는데 있어서 "사실은 참모보고는 사실이 아니고 대원 10명이 모조리 포탄을 안고 적진에서 자폭한 것이라고 정정보고를 하게 되었다."
이 보고를 듣고 사단장은 그 자리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일본군에는 육탄 3용사가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육탄 10용사가 나왔다고 하면서 이 사실을 대통령에게까지 보고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최중령이 자기 친구인 박소위를 살리기 위한 일시적인 임시조치에 지나지 않는 허위
조작한 보고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사단장은 연대장의 보고를 사실로 알고 상부에 건의하여 대대적인 장례식 행사준비를 하였는데 당시 채병덕 참모총장은 장례식 하루 전까지 행사를 불승인하였다.
그러나 이종찬, 이용문 대령 등이 채총장에게 육탄 10용사는 국군의 전통과 사기진작에도 좋으니 행사를 하자고 권고하게 되어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채장군은 어느 정도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당시 김석원 장군과 채장군과는 남북교역문제로 극히 감정대립이 악화되어 있었거 채장군으로서는 육탄10용사를 냈다고 이박사에게 보고하여 김장군의 사기가 올라가는 것에 시기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하간에 장례식행사는 서울운동장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그러나 자폭했다는 육탄10용사는 포로가 되어 평양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살아 있다는 방송도 하고 가족들에게 편지도 보냈다고 한다.
김익렬 장군이 평양에 입성하였을 때 육탄10용사가 꽃다발을 받고 있는 사진을 보고 놀랬다고 하면서 이는 순전히 최경록 중력의 조작에 의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김석원 장군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당시의 북한방송 등을 녹음한 것이 정부기관에 보관되어 있을 것으로 알고 있다.
(주: 박모 소위는 대령으로 승진하여 예편하였는데 이름이 불명하다.)
**국방부 군시편찬얀구소 6.25.참전자 증언록 [2003년]
댓글목록
inf247661님의 댓글
inf247661 작성일
'최 경록'장군은 1960.4.19 발발 후 집권한 민주당 정권에 의하여 육군총장에 임명.보직된 장군! ,,. 민족주의 성격이 강했다는 주변 평이었지만 실은 이것만 봐도 좌익적 성격이 없지 않,,. 사실, 총장 시절에 미군원 문제차 來韓한 ' 팔머' 대장{동란 기간 중; 주한 미제10군단장, 미제8군사령관 보직?}과 자유당 시절 장군들에게 부정 선거문제를 핑게로 대대적인 숙정을 하려하자, 그건 좀 잘못이라고 말하자; '최 경록'총장은 '내정 간섭' 운운하면서 反駁(반박), 美軍과 불편한 긴장을 자초! ,,,.
일본군 '준위' 출신이던 '최 경록'장군은, 특무대장{기무사령관} '김 창룡'소장 시절에는 빨갱이 좌익성 장교로 분류, 맥을 추지 못했었다함! ,,. 그리하여; 총장에서 제2군사령관으로; 미국 유학 교육 파견시까지; 잠정 보직되었었는데,,.
그러다가, 1961.5.16 발발 후; 어디론지 증발, 연락도 되지 않고,,. 하여간 수상한 면이 없지 않,,.
1977년 全北 이리역(裡里驛) 폭발 사고 발생 당시 교통부 장관이었는데, '박'통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진 사퇴! ,,. 1951년 초, 육군헌병사령관으로 '채 명신'소령을 경기도에서 대구까지 직접 jeep 에 태워 육본 '정 일권'총장에게 호송, 인계시켜 준 분 ㅡㅡㅡ '채 명신' 대위가 중대장 때, 제1사단 제11연대장이었으니. ↔ "사선을 넘고 넘어(蔡 命薪 회고록)"에서 거론되는 부분,,,.,
inf247661님의 댓글
inf247661 작성일'이 종찬'도 ,,. 좌익성,,. 분대장의 즉결 처분 총살제도를 폐지, 결국, 군부를 약화시킨 장본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