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단독인터뷰에 대하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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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비탈로즈 작성일10-04-22 20:46 조회3,098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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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을 암살하려고 탈북자로 가장해서 입국한 간첩들이 검거되었다고 하니 그 바람에 황장엽이 최고로 중요한 인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면 황장엽의 발언에 더 무게가 실리고 황장엽이 북한 김정일 집단에 이로운 발언을 할 경우 국민들의 안보관에 자연스럽게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 종이 신문 톱과 조선닷컴 대문의 황장엽 단독 인터뷰만 분석해도 황장엽의 본심이 파악된다. 그렇다면 전면전을 할 배짱이 없는 김정일은 어떻게 남한을 도발할까?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게릴라전과 같은 비정규전이며 북한특수부대를 활용하는 것이고 천안함에 대한 게릴라 공격으로 이미 증명되었다.
마침 조선일보 종이신문 헤드라인의 제목이 - "北 인간어뢰 조심하라”, 해군 올 초에 통보받아-였다. 만약 인간어뢰가 해군함정이 아니고 육지의 주요 보안 목표물을 타격했거나 한다고 생각해 보라. 바다보다 육지에서 생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을 것이니 인간어뢰급 북한특수부대원들이 내륙과 연안의 주요 발전시설(핵발전소포함)을 포함한 기간 산업 보안 교통 통신 시설 등을 강타한다면 대한민국 사회는 극심한 혼란에 직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전면전을 하면 대한민국은 물론 엄청난 타격을 받겠지만 한미동맹만 작동하면 김정일은 끝이다. 그래서 김정일은 전면전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전작권 전환이 되어버리면 지금의 정부와 국방 담당자들의 자세와 처신으로 봤을 때 매우 위험하고 답답한 처지에 직면할 것이 자명하기 때문에 전면전을 막으려면 전작권 전환 백지화 및 장기간 연기로 국민들의 불안을 해소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남침땅굴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정도의 깊이와 거리로 대한민국 지하를 거미줄처럼 엮고 있을 것이므로 남침땅굴 색출이 전면전 방지와 승리의 전제조건이라고 할 것이다. 남침땅굴은 그러나 비정규전에도 유용한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국방부 내의 세작 색출을 통해 반드시 규명해야만 하며 특히 국방부 땅굴탐지과는 폐지해서 안보관이 투철한 민간탐사자의 영역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국민들이 힘을 실어줘야만 한다. 연천땅굴 화성땅굴 탄현땅굴 김포땅굴 홍천땅굴 등 17개 이상의 루트 20여개 이상의 남침땅굴들은 영남 호남 충청을 위협하고도 남을 것이다. 서울의 요소요소 특히 학교 운동장 등으로 출구를 내고 있다는 것은 남침땅굴 서훈공로자 이종창 신부님의 수고로 밝혀졌다.
아직도 전방 일원의 남침땅굴에만 연연하는 것은 이것도 저것도 다 놓치는 것이다. 이미 국방부(탐지과)는 구제불능이며 남침땅굴을 확인해 달라고 귀가 따갑게 부탁해도 전방 일원은 죄다 시추공을 뚫고 확인해 봤다고 우길 것이다. 신중철의 행방조차 잘 모르면서 말이다. 신중철과 김부성이 귀순한 후 대한민국의 남침땅굴 찾기는 사실상 끝나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또 한명의 말뚝이 제대를 한 후에도 건재하게 버티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전방만 고집하는 것은 남침땅굴을 탐지하지 말자는 것이다. 김대중의 사주로 노무현 들어 덮어버렸던 화성남침땅굴, 방송들 중에 그나마 호국애국의 여운이 남아있을 적에 큰맘 먹고 sbs에서 방송하여 모든 전문가들이 남침땅굴임을 증명해줬음에도 김대중이 권력으로 탄압해서 유야무야 시켰던 연천땅굴은 더 말해 무엇하랴..
군은 전방에 있는 남침땅굴조차 찾지 못했으면서 자그마치 20여년 동안 남침땅굴을 찾지 못한 책임을 통감 반성하기는 커녕 민간 탐사자들을 탄압까지 했던 친북좌파 10여년 + 알파의 세월이다. 이명박 정부도 똑같이 한다면 한통속이 될 것이다. 김영삼과 함께
(추가)
서북청년단이 제주도 경찰과 합류했던 이유는 부족한 제주도 경찰을 보조하기 위함이었다. 제주 경찰과 서북청년단원을 합친 수로 어느 정도 빨치산유격대 수와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경비대(국군)은 4.3이 일어나기 전과 4.3 초기에 세작들의 침투와 공작으로 인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김달삼을 위시로 한 빨치산유격대는 경비대를 협상으로 회유하여 경찰과 서북청년단을 제압하고 제주도를 완전 공산화시키려고 했다.
---(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김달삼이 자기와 같은 일본군 학병 출신인 점을 감안하여 이 자를 설득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 끝에 이를 승낙하고(국방경비대 창설 당시 경비대에 침투한 오일균 소령[남로당 당원으로 연대장과 일부 우익계열 장교들을 암살하고 김달삼 일당과 합세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로서 좌익세포 문상길과 비밀 회합]이 공비두목과 연대장의 만남을 주선), 대대장 오일균 소령과 정보장교 이윤락 중위를 대동하고 남제주군 대정읍 구억리의 공비훈련장에서 만나게 되었다.- 경비대를 포섭할 생각이 없었으면 암살 했을 것, 결국 빨치산유격대만으로는 제주도를 완전 점령하는데 부족함을 느끼고 작업을 한 것임, 암살을 하지 않고 후일 성사(경비대-빨치산 합작)를 위해 보류했을 것-
이 자리에서 김달삼은 "제주도 인민과 인민해방군의 투쟁목표는 경찰타도이며 경비대는 우리의 적이 아니다. 서로 적대시하지 말자"고 제의했다. 이에 대하여 연대장은 "우리는 피를 나눈 동포이다. 무고한 양민을 괴롭히고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은 죄악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죄과를 뉘우치고 귀순하라. 그것만이 너희들이 살길이다"라고 자수를 권유하였으나 김달삼은 끝내 이에 응하지 않아 결국 협상을 결렬되었다. 연대장은 수 차 병력을 출동시켜 토벌작전에 임하였으나 공비를 포착할 수조차 없었다. 그 이유는 오일균과 문상길 등이 조종하는 좌익계 하사관들이 사전에 작전계획을 공비에게 누설시켰기 때문이었다. 연대장이 때때로 최초 작전계획과 상이한 지역으로 이동하여 공비들과 조우할 때가 있었으나, 공비들은 신속히 경비대와의 접전을 회피하고 달아나 버렸다. 따라서 경비대는 공비와의 접촉을 전혀 이루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어 전과도 없고 피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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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미군정이 제주에 진주하기 전부터 제주도 공산당이 박헌영의 인민공화국(인공) 체제에 따라 제주도를 지배한다. 중국 팔로군에서 전투를 경험한 과격한 좌익계 인물들을 영입한 제주도 공산당은 행정을 장악하고 감언이설로 민주주의 교육이라고는 받아 본 적이 없는 가난한 도민들을 현혹하여, 가문 전체, 마을 전체를 집단적으로 좌경화하여 좌경인구는 80%에 달했다.
남로당 군사부 총책 김달삼(본명 김승진, 당시 25세, 직업 교사, 후에 월북, 평양영웅묘지 안장)은 남로당 중앙당 간부 강문석의 사위가 되었고 인민유격대(인민해방군) 총사령관 겸하며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한라산에 매몰한 무기와 탄약을 찾아내 빨치산 유격대를 무장시키고 팔로군 출신들의 지도하에 유격전술을 지도한다. 무장병력은 500명, 여기에 동조자 1000여명을 합함으로써 유격대 인원은 1500명에 달했다., 이들은 경찰지서를 습격하고 우익인사를 살해하는 등 섬 전체를 위압하는 강력한 세력으로 커가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제주도 도민의 8할이 좌경화, 행정 마비), 미 군정청 산하 경무부에서는 1947년 2월 17일 서울철도경찰과 충남경찰에서 800여 명의 경찰을 차출하여 제주도 경찰국에 파견했다. 그 뒤를 이어, 해방 후 평안도 황해도 등지에서 월남한 반공단체인 서북청년단 500여 명을 제주도에 보내 적극적인 소탕작전을 펼치게 했다. 이에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는 공공기관을 습격하는 등 각종 만행을 자행함으로써 기선을 빼앗기려 하지 않았다.
(수사기록으로본 12.12와 5.18 참고 및 발췌)
3. 4·3事件의 發生과 鎭壓作戰
(1) 4·3事件의 發生
南勞黨은 1947년 3 1사건을 선동한 좌익계 주동자들의 일부가 검거되고 경찰의 강력한 단속과 우익 반공세력이 진출하게 되자 일단 표면상의 투쟁을 멈추고 지하에서 준동하게 되었다.
이들은 한라산에 매몰되어 있던 일본군 무기와 탄약을 계속 찾아내고, 또 한편으로는 제9연대에 침투시켰던 좌익분자들을 통해 그들의 조직을 강화시켰으며, 한라산에 아지트를 구축하고 군사훈련을 계속하면서 한라산 공비의 모체라고 할 수 있는 소위 '人民解放軍'을 양성하였다.
당시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 경비대 제9연대는 제주도 향토방위를 위해 1946년 11월 16일 모슬포에서 창설되었으며, 그 병력은 1개 대대에 불과하였다.
1948년 3월 15일, 4·3 투쟁작전을 위해 전남도당 올구가 재차 제주도에 와서 회의를 개최하였다.
투쟁의 목적은 ① 조직의 수호와 방어수단으로서 ② 단선·단정반대 구국투쟁의 방법으로써 적절한 시기에 전도민은 총궐기 시키는 무장반격전을 기획 결정하였으며, 3월 25일까지 준비를 완료하도록 계획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3월 28일에 재회의를 갖고 거사일을 4월 3일 02:00∼04:00시로 결정하였다.
남로당 군사부 총책인 김달삼과 올구는 제9연대내 좌익세포 조직책과 비밀리에 모의하여 무장폭동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계획은 제9연대가 감찰청과 경찰서를 습격하고 인민해방군이 일시에 제주도내 전 지서를 습격, 방화하여 경찰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고 행정관서를 장악함으로써 제주도를 공산화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로당의 단선·단정반대는 남로당과 북한정권의 허위임이 들어났다. 왜냐하면 북한은 1945년 9월 20일 "북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동년 10월 10일부터 13일까지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을 설치하였으며, 2개월 후인 12월 17일 북조선 공산당으로 바꾸고 이듬해 1946년 2월 8일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설치, 실질적인 정권기관을 출범시켰다. 그리고 좌익 민족주의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46년 11월 3일 북한 전인민이 참가하는 가운데 북한만의 단독선거를 실시하여 도·시·군 인민위원회의 각급 인민위원들을 선출했다. 이어서 1947년 2월 17일 평양에서 각 도·시·군 인민위원회 대회를 열어 최고 立法機關으로 北朝鮮 人民會議를 수립하였으며, 또한 1948년 2월 8일에 조선인민군이 창설됨으로써 북한만의 단독정부를 완료시켰다.
따라서 북한에서는 이미 單選·單政 노선을 완료한 상태에서 유엔의 결정에 의한 남한의 단정·단선 노선을 반대하여 통일국가를 수립하자는 남로당의 주장부터가 모순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를 기하여, 한라산 정상을 위시한 주요 고지에 일제히 봉화가 오르는 것을 신호로 삼아 이들은 무장폭동을 일으켰다. 제주도내 총 15개 지서 중에서 14개 지서가 이들의 습격을 받아 불에 타거나 파괴되었으며 경찰관 13명이 살상당하고 민가 4채가 불에 탔다.
共匪들은 좌익세력과 대결하던 警察官, 西北靑年團, 大同靑年團, 獨立促成國民會 등 우익인사들이 포함된 숙청대상자 명단을 가지고 사무실을 습격하여, 미처 피신하지 못한 청년당원과 그 가족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서슴치 않고 자행하였으므로 제주도민들은 유혈의 참화 속에서 공포와 불안에 떨고 있었다.
당시 남로당은 ① 美帝는 즉시 물러가라. 美 帝國主義를 타도하자, ② 憺選擧 憺政府 결사반대, ③ 조선 통일 독립만세, ④ 리승만 매국도당 타도하자, ⑤ 경찰대와 테러집단을 즉시 철수시켜라, ⑥ 信託統治를 찬성한다, ⑦ 5 10 總選擧 결사반대라는 구호와 요구사항을 내걸고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제9연대의 제주감찰청과 경찰서 습격은 없었다.
이런 정황 아래에서 4월 중순이 되자 남로당 제주도 당부에서는 회의를 열고 무장능력을 한층 강화하기 위해서 종전의 自衛隊를 해체하고 전투 경험이 있는 핵심분자를 각 읍 면별로 30명씩 뽑아 3개 연대와 2개 독립대의 人民遊擊隊를 편성하여 관할지역을 분담하였다. 또한 이들은 10명 이상으로 편성된 무장조를 부락마다 배치하여 동조 주민들의 이탈을 방지하는 한편 이들로 하여금 폭도들의 작전을 돕기 위한 가교역할을 하도록 강요하였다.
이와 같이 공비들은 4 3폭동사건 초기에 무력으로 제주도를 장악하였으므로 제주도는 사회질서가 무너진 혼란의 소용돌이속에 휘말리게 되고, 민심은 극도로 동요되어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태로 빠져들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이들은 5 10총선거를 무력으로 저지하기 위한 행동지침을 마련하고 지능적인 방해공작을 자행함으로써 選擧登錄事務가 중단되고 선거 당일에는 협박과 난동 때문에 유권자들이 투표를 할 수 없는 가운데 일부 지역에서는 선거사무소가 습격당하기도 하는 등 극도의 혼란과 공포 분위기가 제주도내를 뒤덮게 되었다.
(2) 警察의 初期 鎭壓作戰
1) 경찰 투입과 경비대의 출동
제주도에서 폭동사건이 발생하여 혼란상태가 지속되자 경무부에서는 각도 경찰국에서 1개 중대씩 8개 중대 1,700여명의 경찰을 급파하여 김태일 경무관과 최치환 총경으로 하여금 이미 파견되어 있던 100여명의 경찰병력을 통합지휘하여 사태를 수습하게 하였다. 그러나 國防警備隊와 경찰과의 관계는 경비대 창설 당시부터 생긴 알력으로 군·경간의 협조가 원활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으며, 공비들은 과거 전투경력이 많은 무장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어 경찰의 단독작전으로는 많은 희생자만 발생할 뿐이었다.
한편, 국방경비대 총사령부에서는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는 제9연대의 전투력이 1개 대대에 불과했으므로 4월 10일 부산에 주둔중인 제5연대 제2대대를 제주도로 공수하여 제9연대에 배속하였다.
그러나 제주도에 도착한 제5연대 제2대대장 吳一均 소령은 대대장병의 훈련이 미숙하다는 이유로 토벌작전을 보류한 채 경찰의 횡포와 西北靑年團의 과격한 행동을 비난하는 내용과 警備隊는 경찰과 민간인과의 싸움에 개입하지 말고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요지의 정신교육만을 1개월간에 걸쳐 실시하였다.
이러한 정신교육을 받은 일부 경비대 장병들은 이에 감화되어 경찰에 협조하지 않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오일균은 경찰의 간곡한 출동 요청이 있어도 이를 교묘한 말로 회피하면서 출동을 거절하였으며, 주민들의 공비출현 신고를 받고도 이를 묵살한 채 출동하지 않았다.
2) 경비대 연대장과 공비 두목과 비밀협상
吳一均은 본시 국방경비대 창설 당시 경비대에 침투한 남로당 당원으로서 연대장과 일부 우익계열 장교들을 암살하고 김달삼 일당과 합세하는 것이 그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이에 오일균은 제9연대 내 좌익세포 조직책인 문상길 중위(육사 3기, 생도 당시 구대장이었던 오일균으로부터 공산주의 사상의 洗腦敎育을 받은 자)와 비밀리에 회합하고, 남로당 제주도 군사부 총책인 김달삼과 은밀히 내통하면서 경비대원들에게 좌익사상을 주입시켜 군 내부의 좌익 세포조직을 확대시켜 나갔다.
이러한 가운데 오일균의 계략에 따라 공비 두목 김달삼은 연대장에게 "한번 만나서 이야기나 해보자"고 제의하였다. 연대장 金益烈 중령은 김달삼이 자기와 같은 일본군 학병 출신인 점을 감안하여 이 자를 설득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 끝에 이를 승낙하고, 대대장 오일균 소령과 정보장교 이윤락 중위를 대동하여 남제주군 대정읍 구억리의 공비훈련장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김달삼은 "제주도 인민과 인민해방군의 투쟁목표는 경찰타도이며 경비대는 우리의 적이 아니다. 서로 적대시하지 말자"고 제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연대장은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며, "같은 학병 출신이라는 동지적인 입장"이라고 전제한 후 "우리는 같은 피를 나눈 동포이다. 무고한 양민을 괴롭히고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은 죄악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죄과를 뉘우치고 귀순하라. 그것만이 너희들이 살길이다"라고 자수를 권유하였으나 김달삼은 끝내 이에 응하지 않아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다.
사실상 김달삼의 협상목적은 딴곳에 있었으니 국방경비대 연대장과 회담을 통하여 교묘히 이들을 이용한다면 경비대에 의한 소탕작전은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형식적인 회담을 하였다고 그들의 투쟁보고서에 기술하고 있다.
제9연대장은 수 차 병력을 출동시켜 토벌작전에 임하였으나 공비를 포착할 수 조차 없었다. 그 이유는 오일균과 문상길 등이 조종하는 좌익계 하사관들이 사전에 작전계획을 공비에게 누설시켰기 때문이었다. 연대장이 때때로 최초 작전게획과 상이한 지역으로 이동하여 공비들과 遭遇할 때가 있었으나, 공비들은 신속히 경비대와의 접전을 회피하고 달아나 버렸다. 따라서 경비대는 공비와의 접촉을 전혀 이루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어 전과도 없고 피해 또한 없었다. 그러나 경찰의 피해는 점차 늘어났다.
한편, 경비대 총사령부에서는 제9연대장 이하 간부들이 김달삼과 비밀리에 접촉하였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진상조사에 나섰다. 조사 결과 연대장은 협상동기가 명백하여 혐의는 풀렸으나 보직이 해임되었으며, 오일균은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고 정보장교인 이윤락 중위을 파면시키는 온건한 조치로 끝나고 말았다.
경찰은 단독작전으로 희생이 증가하자 공비들의 거점을 소탕하기 위하여 작전에 방해가 되고 있는 산간에 산재해 있는 민가를 불태워 없애고 주민들을 하산하게 하여 평지에 미리 준비한 임시 주택에 이주시키는 작전을 계획하였다. 경찰은 이와 같은 작전을 군·경 합동으로 수행할 것을 경비대에 제의하였으며, 이 제의에 따라 경비대는 해안을 경비하고, 경찰은 공비의 거점인 한라산을 소탕하기로 협의가 되었다. 이에 오일균 소령은 의심을 받지 않으려고 출동할 것을 승낙하였으나 경비대의 좌익세포인 일부 하사관들은 출동을 중지하도록 그에게 압력을 가하는 한편 작전계획을 공비들에게 알려주었다.
원래 제주도의 '人民解放軍'이라는 공비들은 산간에 거주하는 빈농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경찰이 산간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강제 소개시킨다는 소문이 퍼지자 산간부락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입산하여 공비들과 합류해 버렸다.
3) 공비의 만행 ......
(제주 4.3사건의 진상-前국방군사연구소 선임연구원, 정석균 중에서 일부 인용)
아래의 링크들은 창이 따로 열리지 않으므로 보신 후 좌측 상단의 뒤로 를 통해 복귀 요망
제주 4 : 3 사건의 진상 -前국방군사연구소 선임연구원,정석균
http://cafe.naver.com/jejusea.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7047
김달삼이 북한으로 도주한 사진이 있는 좌편향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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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RILOVE님의 댓글
JURILOVE 작성일조선일보 기자가 전작권에 대해서 황장엽 옹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연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아니면 그냥 그대로 넘겨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물어봤으면 좋았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