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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방송국 전소시킨후 TV 본 5.18 치매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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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사논객 작성일10-03-13 02:22 조회2,9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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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 was May 20, 1980 that the 5.18 rioters set fire to the MBC station, burning all facilities and equipments to the ashes. What is so strange is that these rioters watch TV on May 22 in their 5.18 movie of 2007, "Hwaryeohan Hyuga" (or Operation Nice Vacation). And this is one of the many examples of how the 5.18 liars have distorted history during the last three decades.



지난 3월 5일 한 5.18논객이 역사학도의 블로그로 찾아와 광주사태 첫날 사건에 대하여 이렇게 주장하였다: "참 멍청한 넘이네, 당시 총 맞고 죽어서 즐비하게 늘어선 태극기 씌워진 관이 연일 TV로도 방영이 됬는데 총으로 쏘지 않고 연행만 했다는게 말이 되니 이거 점 모자란 넘 아니냐 아무리 생각이 없어도 그렇지...참 답답허다 왜 사니." 5.18 옹호론자들이 이런 억지 주장을 할 때 우리는 세가지를 물어볼 수 있다. 첫째로, 만일 그랬다면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인봉이 인상쓰며 TV에 계란을 던져야 했을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둘째로, 희생자 시신들을 상무관에 안치해 놓고 사진 촬영을 한 때는 광주사태가 끝난 5월 27일었는데, 어떻게 방송국들이 9일 후에나 촬영이 가능한 장면들을 5월 18일부터 방송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셋째로, 난동자들의 방화로 5월 20일 방송국들이 없어져 방송이 중단되었는데 어떻게 연일 방영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작금 제2의 5.18재판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 발단은 영화 화려한 휴가 내용이 사실이냐 아니냐에 대한 토론이었다. 2007년 가을 화려한 휴가 공식 카페 회원들이 대거 몰려와 역사학도의 시사토론 글방을 공격하였으며, 전사모 카페 역시 오마이뉴스 등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영화 화려한 휴가의 거짓과 역사왜곡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이듬해 봄에 5.18측에서 강수를 써서 수십 명의 네티즌 논객들을 대상으로 소송을 건 것이 이 재판의 발단이었다. 이 영화의 허위내용을 거부하는 네티즌들에 대한 고발사유는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이었다. 지금 이 재판의 초점이 북한세력의 개입 여부에 쏠리고 있지만, 본래의 고발 동기는 영화 화려한 휴가에 이견이었다.

도대체 5.18 사기꾼들이 제작한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어째서 난동자들이 방송국들에 방화하는 장면이나 시민군 버스가 경찰들을 깔아죽이고, 시민군 장갑차가 군인들을 깔아죽이는 장면이 안나오는지는 오랫동안 네티즌들의 관심사였다. 도대체 그런 장면들이 빠지면 어떻게 광주사태 영화가 될 수 있는가? 5월 20일의 방송국 방화는 아주 중요한 사건으로, 누구든 그 사건을 빼놓고 광주사태 스토리를 말할 수 없다. 그러면 수만 명의 난동자들이 화염병을 던져 방송국을 불태우는 장면을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시민군 인봉이 TV에 계란 한 개를 투척하는 장면만 잠깐 나온다.

http://study21.org/518/capture/5-20mbcnews.jpg

위의 동영상 5:53에서부터 아주 희얀한 장면이 연출된다. 1980년 5월 22일 전남도청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시민군이 부지사 등 공무원들에게 폭행을 가해 내쫓은 후 도청을 해방구 본부로 사용하기 시작한 첫날이다. 영화 제작자의 화려한 꼼수는 도청 안에서 시민군 세 명이 계란(계란처럼 생긴 음식?)을 먹으며 22일 오전 TV 뉴스를 시청하다가 시민군 인봉이 핏대를 내며 TV를 향해 계란을 던졌다는 스토리 전개이다. 그러나 아무리 역사를 왜곡하는 5.18 사기꾼들의 낯짝이 두껍다지만 이 정도면 역사 치매증이 의심되지 않는가! 아니, 난동자들이 방송국을 화염병으로 전소시켜 방송이 완전 중단되게 한지 이틀도 채 되지 않아 그들의 방화범죄 사실을 까맣게 잊었다는 말인가? 5월 20일 밤 9시 이후부터 광주에 방송국이 존재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도청 시민군이 22일 아침에 TV로 뉴스를 시청한다는 말인가?



만약 난동자들에게도 일말의 양심이 있었다면 이틀 전 방송국에 불지른 것을 그 날 아침에는 조금이나마 뉘우치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그런데,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시민군 인봉이 그것을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성질내며 애꿋은 TV에 계란을 던진다. 아무리 5.18 사기꾼들의 꼼수가 화려하다지만 그래도 이것은 지나친 역사 사기이다. 20일 시위대가 방송국들에 방화한 후 광주는 고도처럼 방송이 완전 중단된 도시였다. 이것이 기본적인 팩트인데 어째서 영화에서 해방구 시절에 시민군이 TV를 시청한다는 말인가? 20세기 이전에는 TV 방송이라는 것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듯, 1980년 5월 21일 이후의 해방구 시절의 광주에는 TV 방송이라는 것이 없었다. 해방구 시절의 시민군이 TV 시청을 하는 장면은 이만저만한 역사왜곡이 아니다.



그러면 5.18 난동자들이 방송국들에 방화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친북세력에 내린 김일성의 비밀지령이 그 유력한 단서이다: “결정적 시기가 포착되면 지체 없이 총 공격을 개시해야 합니다. 전국적인 총파업과 동시에 전략적 요충지대 곳곳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전신 전화국, 변전소, 방송국 등 중요 공공시설들을 점거하는 동시에 단전과 함께 통신 교통망을 마비시키고 임시혁명정부의 이름으로 북에 지원을 요청하는 전파를 날려야 합니다. 그래야 남과 북의 전략적 배합으로 혁명적 대 사변을 주동적으로 앞당길 수 있습니다.”

5월 20일 김대중의 조직들은 난동자들에게 광주의 방송국들에 대한 두가지 행동 지령을 내렸는데, 하나는 불태우라는 지령이요, 다른 하나는 점거하라는 지령이었다. 즉,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6_2007.html에 그 전문이 있는 "결전의 순간이 다가왔다"는 제목의 유인물에서는 관공서를 불태워라 하였으며, 그 지령대로 그 날 방송국들과 세무소와 파출서 등 30 여개의 관공서들이 방화되었다. 이런 시국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불순세력의 지령 "전시민 관공서를 붙태워라!"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난동자들이 이 건물 저 건물에 불을 지르는데도 방치할 국가나 정부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6_2018.html에 그 전문이 있으며 하루 후에 작성된 5월 22일자의 투사회보에서는 김대중의 조직이 시민군에 KBS 방송국을 접수하라는 지령을 내린다. 불태워라는 지령과 접수하라는 지령은 일관된 지령이 아니므로 여러 5.18 유인물간에 지령의 혼선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지령의 혼선이 있었듯 행동의 혼선이 있었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신애의 실제 인물인 전옥주를 김대중의 사조직이 데리고 다녔는데, 그 전옥주가 인솔한 시위대가 5월 20일 MBC방송국을 장악하려 한 바로 그 때에 만 명이 넘는 다른 군중은 그 방송국에 방화를 하였던 것이다.

지난 30년간 5.18측은 방송국 방화 이유를 20일 저녁 9시 뉴스에 대한 반발이었다고 변명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낯짝 두꺼운 거짓말일 뿐이다. 이미 7시간 전인 오후 2시에 1차 방화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명 광주향토사단이었던 31사 96연대 소속 중위로서 방송국 방화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한동석 중위가 바로 계엄군 편에서의 그 사건의 목격자요 증인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직후인 1979년 10월 26일에 비상계엄이 선포됨에 따라 그때부터 군인을 계엄군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계엄 하에서는 국가 보안 목표물 경계근무를 경찰이 아닌 군인이 수행한다. 단지 명령을 받고 근무하던 한동석 중위 입장에서는 그가 5월 14일 광주 문화방송국에 배치된 경위가 이러했다: "저희들은 시내 도로에 출동하지 않고 국가 보안 목표물(언론사, 전신전화국, 한국은행, 수원지, 등등 )을 이동하면서 계엄군으로서 경계근무를 했었읍니다. 그러다가 겨울이 지나고 봄인 5월 중순경에 저는 MBC 방송국에 배치가 되었었지요" ( http://blog.daum.net/sionvoice/10357845 댓글 2007.07.19 12:30 ). 만약 명령대로 배치되는 한동석 중위 편에서 모르고 있었을 사건이 있었다면, 그가 배치되기 몇시간 전이었던 그날 5월 14일 궁동 문화방송 사옥이 시위대로부터 위협을 받은 사건이 있었다.

한동석 중위는 불과 얼마전까지 대학생 신분이었던 ROTC 장교였다. 광주사태 당시 군복을 입고 있었을 뿐 마음 속으로는 여전히 대학생들을 자신과 동질집단으로 보고 있었다. 그리고 금남로에서 몇 불록 떨어진 MBC방송국 주변은 19일까지는 평온한 분위기였다.
여기 취재기자의 카메라에 잡힌 이 한 장의 사진이 19일까지는 한동석 중위가 인솔한 소대원들이 얼마나 평온한 분위기에서 보초 근무를 서고 있었는지 말하여 준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처럼 아이들이 무서워하는 군인이 아니라, 아장아장 가까이 걸어가는 그런 군인이었다.

그런데, 20일 오후 2시부터 갑자기 MBC방송국 주변에서 난리가 났다. 만약 위의 사진이 20일 오후 2시 조금 전에 찍힌 사진이요, 2시 조금 넘어 시위대 돌에 맞아 머리가 터진 병사가 위 사진의 주인공이라면 어떻게 오후 2시경 광주사태 쓰나미가 그 시간대에 문화방송국 주변을 덮쳤는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오후 9시경 두번째 방화 시도가 있었을 때 이미 그곳은 하나의 전쟁터였다. 불타는 건물에서 빨리 빠져나오지 못하면 불에 타 죽는다. 그런데 바깥에 있던 사람들이 인명 구조를 하려 하였던가? 아니다. 군인들은 방화범들에 발각되면 오히려 생명이 위험했다. 그 위기의 순간을 한동석 중위는 이렇게 회고한다: "저는 그 당시의 상황을 감히 <군인과 민간인과의 戰爭>이라고 생각하고 있읍니다. 저(31사단 경계근무 병력)도 그 당시 민간인들에게 잡히면 어떻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철수명령을 받기 전에 병사들의 생명과 저의 생명을 담보로 <무전기를 끄고 불타오르는 MBC방송국>에서 <비상 탈출>을 시도한게 아니겠읍니까?" (위 블로그 댓글 2007.07.18 10:23)

금남로 대로에서 거세게 일던 광주사태 쓰나미가 세 블록 건너 편 MBC방송국 주변을 강타하기 시작하던 오후 2시경 한동석 중위는 방송국 옥상에서 상황 보고를 하고 있었고, 두 명의 병사가 방송국 바깥에서 보초 근무를 서고 있다가 방송국 샤터문이 내려지는 순간 고립되어 돌맹이로 몰매를 맞고 머리가 터졌는데 그 상황을 한동석 중위가 이렇게 서술한다:
 
5월 20일 오후 2시경 (방송국 제1차 피습: 제가 명명)에 금남로 대로 쪽에서 차량을 전복 시키고 불을 질러 시가지에 검은 구름이 처음으로 올라 갔지요. 저는 방송국 옥상에서 상황 보고를 하고 있었읍니다. 그때 부터 시위대가 과격해 져서 차량 방화를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한 블록 옆에 저가 있는 방송국 방향으로 몰려와서 보도블록을 조각내어서 방송국 건물로 던졌읍니다. 저는 황급히 옥상에서 1층 현관까지 계단을 따라서 뛰어 내려왔지만 이미 청원경찰이 샤터문을 내리고 난 후였읍니다. (그리하여 샤터문을 열것을 강력히 요구하였지만 들어주지 않아서 ) 결국 경계근무 중이던 2명(고참병 과 신참의 복초근무형태였음.)의 병사와 지휘자인 저는분리되고 말았지요. 20 여 분쯤 지나서야 가까이에 있던 특전사 병력이 대형을 갖추어 방송국 방향으로 이동하여 시위대를 퇴각시켰읍니다.

그리고, 31사단 수색대 병력 3-40 여명에 증파되어 어느 정도 정리정돈(2층까지 모든 유리창이 파손 됐음.) 됐을 무렵 수색대 병력은 또 다시 다른 곳으로 긴급하게 이동하였읍니다. 조금 전에 본대와 분리되어 방향을 잃고 시위대 방향으로 도피한 이등병은 시위대들에게 돌로 뭇매를 맞고 머리가 터져 피를 흘리고 있어서, 신참 *** 이등병을 데리고 바로 옆 건물인 개인 병원에 가서 <장교 신분증 까지 맡기고 치료를 요구 했으나 끝까지 의사는 치료를 거부하였읍니다. 화가 치민 저가 지혈 및 응급처치를 위해서 약품을 마구 찾으니 (저는 대학시절 R.C.Y 적십자 봉사활동으로 인명구조원 출신입니다) 한 젊은이(아마 인턴 인듯 싶네요)가 나서서 압박붕대로 지혈을 해주었답니다. 그리고, 사단 수색대가 지원 나왔을때 온 차량으로 후송을 시켰읍니다. 그리고, 땅거미가 질 무렵, 더욱더 많은 시위대가 어두워지면서 더 격렬하게 저희들을 공격해 왔읍니다. 결국 시위대는 소방소에서 <불자동차>를 몰고와서 내려진 샤터문을 부수고 절반은 건물안으로 처 박은 상태에서 화염병 투척으로 방화를 시도했읍니다. 주간에 1차 피습당한 후에 방송국 임원들의 협조로 꽤 많은 량의 소화탄을 준비 했지만 불가항력으로 1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2층으로 번지기 시작하여서 9시경에는 방송국 내부에는 직원들까지 위험해서 모두 대피한 상황이었지요. 그런데도 저와 저의 병력은 1층과 2층 사이의 계단을 2층 사무실 책상과 의자를 모두 가지고 와서 바리케이트를 치고 대치하고 있어서 위층에서 모두 철수한 사실도 모르고 있었는데. 한 용감한 직원 한명이 건물 뒤에있는 비상문으로 들어와서 "빨리 대피해야한다!"고 알려주고 급히 먼저 탈출했읍니다. (http://blog.daum.net/sionvoice/10357845댓글 2007.07.13 18:40)

한동석 중위가 인솔한 병력은 휴식이나 식사는커녕 극도의 공포감에 짓눌려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전차 한 대만 달랑 왔다가 시위대 장악된 사건에 대한 희미한 기억을 더듬으며 자신이 창문을 통해 본 것이 전차가 맞는지 궁금히 여긴다:
 
저도 아직 희미한 기억이라 궁금하게 생각되는 게 한가지 있읍니다. 5월 20일 땅거미 질 무렵(대략 오후 8시-8시반경) 저희 병력이 MBC방송국 방화 사건이 있기 직전에 지원병력인줄 알고 기뻐했다가 크게 실망한 이야기입니다. 전차(탱크)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 병력 10 여명이 수만 이상의 시위대에 포위되어 화염병이 수도 없이 날아오고, 돌멩이가 날아오는 상황에서 피습의 위기를 당하고 있어 공포감에 휩쌓여 있는 순간에 전차(?)의 굉음과 진동이 있어서 저가 2층 창문으로 통해 보았을때 전차(?)의 포탑 위에 수많은 시위대가 올라타고 있었던 광경이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 (Ibid. 2007.07.19 16:14)

그런데 광주매일『정사 5·18』 특별취재반이 출간한『정사 5·18』266쪽에 그의 궁금증에 대한 답변이 있다: "밤 9시께 노동청 앞에서부터 제봉로와 중앙로가 만나는 구시민관 사거리까지 운집한 1만여 군중을 해산시키려는 듯 육중한 굉음을 울리며 장갑차 한 대가 맹렬한 속도로 달려온다. 황급히 흩어지는 시민들. 그러나 잠시후 거리는 다시 모여든 군중들로 가득 메워지고...."

MBC 방화사건은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시민군 인봉이 TV에 계란 한 개 던진 그런 가벼운 사건이 아니었다. 만약 한동석 중위 일행이 끝까지 버텨주지 않았더라면 MBC 직원 수십 명이 불에 타 죽을 뻔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용감한 직원 한명이 "빨리 대피해야한다!"고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10 여명의 군인이 모두 불에 타죽을 뻔한 아슬아슬한 사건이었다. 20일 밤 9시 경 불이 얼마나 빠르게 2층, 3층으로 옮겨붙었었는지를 『정사 5·18』 268쪽은 이렇게 기록한다: "1층 세트실 안에는 목제와 분장도구들이 가득했고 불이 여기에 붙자 도료 등 휘발성 물질이 타면서 불은 삽시간에 2층, 3층으로 옮겨 붙는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MBC 박봉간 보도부 부부장도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불은 시민들이 셔터를 부수고 진입, 1층 로비에 먼저 질렀으나 시멘트 바닥이어서 잘 붙지 않았고 이어 현관 앞 분장소도구와 도료 페인트 등이 쌓여있는 자제실 쪽에서 화염병 등이 날아와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불이 붙는다. 이어 맹렬한 기세로 타올라 방송자재 전부가 전소된다" (270~271쪽).

언제 화마가 부하들을 집어삼킬지 모르는 이런 극한 상황에서 탈출 명령을 받지 못한 소대장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상황 장교에게 그 위급한 상황을 알려도 "잠시대기!"라는 응답만 들었을 뿐이었다. 20일 밤 9시를 좀 넘어 그 긴박했던 순간을 한동석 중위가 증언한다:
 
5월 20일 밤 8-9시경, 광주 MBC방송국 앞! 수만(?)의 성난 시위대(?)가 "방송국 안에 군인이 있다!" "계엄군 죽여라!"라는 함성과 건물 내부로 번져 올라 오는 화염과 연기를 직면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야는 극도로 좁아지고 종심도 짧아진다는 걸 살면서 처음으로 경험했답니다. 그래서 바깥 상황은 함성소리만 쩌렁쩌렁 울릴 뿐 바깥을 내다 볼 수 있는 여유는 더더욱 없었고요. 죽음이 눈앞에 와 있는데 무슨.....함성소리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건물 내부인데도 무전기 교신을 할 수 없을 정도였읍니다. 그래서 최종 <철수 명령을 허락> 받기 위해서 3층 중역실(사장실)로 올라가 텅빈 사무실에서<이미 직원 모두 도피했음> 유선(경찰망 비상전화)를 이용하여 연대 상황실 근무하는 상황 장교와 통화를 하였지만 "잠시대기!" 라는 응답만 듣고 말았답니다. 그래서 2층 병사들이 집결되어 있는 곳으로 내려 오면서 <명령 없이 탈출>할 작심을 하고 무전기를 끄고 3층 비상 계단을 이용하여 탈출을 시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생각 뿐이 없지요! (http://blog.daum.net/sionvoice/10357845 댓글 2007.07.14 16:01)

여기서 2차 방화의 정확한 시점에 대한 질문이 대두된다. 김대중의 사조직의 거두 김상윤의 부인 정현애는 위 동영상 3:09-3:33에서 시위대가 MBC방송국에 방화한 때가 20일 오후 9시 10분 뉴스 직후라는 주장을 한다. 긜고 이것은 방화를 한 이유가 20일 오후 9시 뉴스에 대한 반응이라고 주장하려는 5.18측의 꼼수이다. 그러면 무슨 일이 있었는가?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처럼 인봉이 TV에 계란을 던진 것이 아니라, 오후 9시 10분에 뉴스가 갑자기 중단되고 그때부터 방송이 완전 중단되었다. 정현애가 주장하는 것처럼 9시 10분 이후에 시위대가 방송국에 방화한 것이 아니라, 한동석 중위가 증언하는 대로 이미 9시 이전부터 방송국이 불에 타고 있었다. 방송국 방화의 정확한 시점에 대한 한동석 중위의 증언이 정확하다는 사실은『정사 5·18』266쪽에서 확증된다: "광주 MBC 건물에 갑자기 불기둥이 치솟아 오른다. 20일 밤 8시 40분께 전남여고 앞 제봉로 일대는 수많은 시민들의 함성과 MBC 건물에서 솟은 불길로 시민봉기의 절정을 이룬다."

자, 무엇이 난동자와 시민의 차이인가? 난동자들은 MBC 건물에서 솟은 불길을 보고 그저 좋아한다. 그러나 시민이라면 MBC 건물 안의 광주향토사단 장병들을 구조해야 하지 않았는가? MBC 직원들이 화마를 탈출할 시간을 벌어준 그들이 무슨 죄가 있기에 구조해 주지 않고 "계엄군 죽여라"를 외친다는 말인가? 빨리 손쓰지 않으면 불에 타죽게 될 향토사단 장병들을 돕지 않는 자들을 우리는 난동자들이라고 부른다. 저 위의 두 사진 중에서 흑백사진이 어떻게 한동석 중위 일행이 높은 가시밭길을 헤치고 비상탈출할 수 있었는지 상상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 사진을 함께 보면서 한동석 중위가 어떻게 그 솟구치는 불길로부터 비상탈출하였는지 설명해 준다:
 
저에게는 감개무량한 사진들입니다. 먼저 위의 칼러 사진은 다른 곳에서도 오래 전부터 보아왔던 사진이고요, 아래에있는 흑백사진은 오늘 처음으로 보는 사진입니다. 저에게는 매우 소중한 자료입니다 역사학도님의 질문부터 답하겠습니다. 역사학도님의 예상대로 전,후로 따지면 아래 쪽에있는 흑백 사진이 먼저입니다. 그이유는 5월 21일의 모습인 듯 합니다. 전날밤(5/20) 광주문화방송국이 불탄 후에 가전제품 대리점으로 기억하고 있던 곳이 <금성사 대리점>이란 것을 오늘 사진으로 확인을 한 셈이네요. 5월 20일 밤 9시 30분경 - 10시 경에 비상 탈출 할때에 기억으로는 방송국 담장이 매우 높고, 그 위에 철조망이 쳐있어서 가전 제품대리점에서 제품포장용 나무박스(그 당시에는 귀중한 가전제품의 포장을 지금같이 스치로폼이 아니고 나무각목으로 포장하였음)를 쌓아 계단을 만들고 높은 담장을 넘어서 탈출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흑백사진에는 전날 밤 방송국의 화재로 옆에있던 가전제품대리점(금성사)과 주변 가게에 불이 옮겨 붙을 까봐 두려워서 건물 내부에 있는 집기비품을 도로 밖으로 옮겨 놓은 상태로 추측이되며, 도로에 차량이 다닐 수 없는 상황으로 여겨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칼러 사진은 위에서 이야기 했듯이 버스가 달리는 상황에서 찍힌 것 같은데 그 버스안에는 꽤 많은 시위대가 탑승하여 있는 상태로 보아서, 적어도 3-4일 후인 23일 - 24일 쯤으로 추정이 가능합니다. 도로가 정리정돈 된 후에야 버스가 질주할 수 있을 게 아닙니까? (http://blog.daum.net/sionvoice/10752484 댓글)

무엇이 9시 뉴스였는가? 그것은 20일 사망자 수에 대한 뉴스였다. 그날 군경 5명과 시민 1명의 사망이 있었다. 시위대 차량이 경찰 4명과 군인 1명을 깔아죽인 사건이 있었다. 어디 이것이 보통 뉴스인가? 살인을 해놓고 뉘우치기는커녕 군경 사망자 숫자조차 방송 못하게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날 아침 시민 1명의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전날 19일 시위대가 인근 공사장에서 쇠 파이프들을 탈취할 때 노동자 김안부씨가 막다가 시위대가 휘두른 쇠 파이프에 맞은 것이 사인이었다. 여하튼 20일의 총 사망자 수는 군경 5명 시민 1명이었으며, 방송은 사실 그대로 방송하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뉴스 방송이 나가기 20분전인 8시 40분부터 방송국에 이미 불이 붙어 9시 10문경 방송 장비가 모두 불타고 직원들도 대피하면서 방송이 갑자기 중단된 것이었다.

그리고 21일 오후 도청앞 공수부대 실탄의 출처가 바로 이 사건에 있다. 7공수는 19일부터 11공수에 배속되어 있었으며, 아래의 20일 상황 지도에서 보듯 이십 만명의 시위대에 겹겹이 포위당한 공수부대는 급식을 받을 수도 조선대 교정에 마련된 임시숙소로 이동할 수도 없으며 잠을 잘 수도 없는 채로 전남도청을 지켜야 했다. 21일 오후 늦게에야 군 자위권이 발동되었으며, 본부가 시민군 점령지역을 뚫고 싵탄을 전달해 주는 것이 불가능했으므로 21일 도청 앞의 공수부대에게는 자위권 발동이 원초적으로 불가능했다. 영화 화려한 휴가의 장면과 같은 집단 발포는 없었으나, 12시 58분에 먼저 시민군 진영에서 몇 발의 총성이 울리자 1분간 공포탄을 발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무엇이 공포탄으로 사용된 그 실탄의 출처였는가?

http://study21.org/518/photo/daily/map5-20.jpg
(클릭하거나 http://study21.org/518/photo/daily/map5-20.jpg로 이동하시면 본래 크기로 볼 수 있음.)

그 실탄의 출처는 바로 MBC방송국에서의 경계근무를 위해 한동석 중위 일행이 소지하고 있던 실탄이었다. 그리고 그 실탄은 인마살상용 실탄이 아니라 경계용 실탄이었는데, 그 실탄의 성격을 한동석 중위가 설명한다:
 
군인이 실탄을 사용할 수 있는 요건에는 평소에는 사격 훈련목적으로 사용하는 교탄(교육용 실탄)을 사용할 때에도 사격통제관의 통제에 따라서 사용을 할 수 있읍니다. 경계용 실탄 역시 봉인된 상태로 보관하고 있다가 엄중한 통제권자의 통제에 따라서 사용하게 되어 있읍니다. 사격명령을 내리기 전에는 반드시 <실탄 분배 지시>가 이루어 진 후에야 발포가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저희 부대도 MBC방송국에 출동할 때에, 비록 경계용 실탄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실탄 분배 지시>도 <사격 명령>도 상부로 부터 지시를 받지 못했읍니다. MBC방송국에서 탈출할 때에도 그렇게 위급한 상황이였지만 어쩔 수 없이 명령을 받지 못했기에 소대장의 <단독판단>으로 저와 병사들의 생명을 위해 <도피 및 탈출>을 시도했던 것입니다. 비록 정식 철수 명령은 받지 않았지만 추후에 곰곰히 생각해 보면 올바른 판단이었다고 자위합니다. (지금도 나의 휘하에 있었던 병사들은 정상적인 철수 명령을 받고 철수 한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상부로부터 <자위권 발동 명령>을 받은 것은 5월 21일 오후 늦게 담양부대에 복귀해서 지시를 받은 것으로 기억이됩니다. 특별한 지시가 없는 한 장교라도 실탄을 개인적으로 보유할 수가 없었읍니다. (경계용 실탄도 20발 들이 탄창에 15발씩 장전하여 청테이프로 봉인한 후에 다시 탄창을 탄통에 넣고 봉인을 하고 있었읍니다.) (http://blog.daum.net/sionvoice/10357845 댓글 2007.07.21 22:22)

영화 "화려한 휴가"에 스토리가 있는가? 시민군 인봉이 먹던 계란을 TV에 던진 것이 광주사태 스토리가 아니었다. 진짜 스토리는 철수 명령 없이 불타는 MBC방송국으로부터 부하들을 탈출시킬 것을 결단하여야만 했던 한동석 중위의 체험담이다. 그가 이끈 일개 분대는 일층과 이층 사이를 막으면서 방송국 직원들이 대피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용산참사에 견주어 그 상황을 생각해 보라. 만약 한동석 중위 일행이 끝까지 경계 임무를 수행하지 않았다면 그날 수많은 MBC 직원들이 불타는 건물로부터 대피할 기회를 놓쳤을지 모른다. 그리고 화마가 부하들을 삼키기 전 비상 탈출을 하였으나, 구조해 주려 하기는커녕 "계엄군 죽여라"를 외치는 시위대를 피해 무등산으로 갔다가 다시 도청으로 가 밤을 새고, 21일 오후 1시경 31사 헬기로 탈출하기 직전 사지에 남은 공수부대에 미안함을 느끼며 자신의 탄통을 전달해 주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그는 역사학도의 블로그 http://blog.daum.net/sionvoice/10752484 에서 댓글로 이렇게 증언한다:

<<저는 그 당시 31사단 96연대 1대대 소속의 한동석 중위입니다.80년 5월 20일 밤 9시 30분경에 시위대의 방화로 불타오르고 있는 MBC방송국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당시 향토사단 군인 소대장입니다" MBC 방송국에서 우여곡절 끝에 비상 탈출하여, 밤 11시 경부터 다음 날인 5월 21일 <도청 발포사건>직후까지 (불행 중 다행으로 도청광에 공수부대와 같이 포위 되어 있었던) 도청광장에 있다가 오후 1시 반경에, UH-H 헬기로 31사단 연병장으로 철수했던 장본인입니다. 헬기로 철수작전하기 전에 , 5월 20일 밤까지 MBC방송국과 기독교방송국,전일방송국(?) 에 배치되어 있었던 3곳의 경계용실탄 3탄통(한 탄통 안에는 M-16소총 20발 짜리 탄창에 15발씩 장전되어 있었음)을 제7공수 *** 대위님께 전달하고 철수했던 바, 도청 광장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직접 경험한 사람으로 .... 27년 전에 발생한 그 상황의 진위를 가리는데 한가닥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심정에서 글을 올렸습니다.>>

<<어떻게 글로 설명하기가 그렇습니다만, 전쟁터라고 생각하시는 게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50월 20일 밤 상황은 시민들한 테 잡히면 끝장입니다. 그래서 챙피스러운 이야기지만, 무기로 시민들을 제압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무작정 돌과 화염병을 맞을 수도 없고, 외부에서 지원병력이 시내로 들어올 수도 없이 고립이 된 상황인데, <귀가>라니요! <야영> 잠을 잘 수가 있나요? 목숨이 촌각에 달려 있는 데... 오죽하면 저가 단독으로 MBC방송국에서<탈출을 결심>하고 무전기 까지 끄고 병력을 인솔하는데 방향만 무등산 쪽으로 향했겠습니까?

그런데 운 좋게도 광주 경찰서(?) 까지 1차 탈출에 성공하여 잠시 쉬고 있는데, 뒤를 돌아 보니 MBC 방송국 건물과 옆의 병원 옥상까지 불길이 완전히 쌓였던 장면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무전병이 실수로 무전기를 개방하여 교신하는 과정에서 2소대(분대병력)와 3소대(분대병력) 가 안전한(공수부대가 집결되어있었음) 도청광장으로 먼저 대피를 하게되었고, 저희 병력은 경찰서에서 간편한 복장으로 무기와 실탄만 챙겨서 무등산 방향으로 2차 탈출을 시도하다가 우연히 2,3소대 병력을 만나게 되어서 선임 소대장인 저가 96연대 1대대 소속 3개팀(선임소대장 저를 포함하여 두명의 소대장<중위 & 소위>)을 재편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가 자정 무렵(5월 21일 0시) 입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영화에도 나오는 젊은 여성의 선무방송은 지금도 소름이 끼칠 정도 입니다. (계엄군은 포위가 되었으니 투항하라는 식의 엠프 방송) 장교인 저도 감당이 안되는 상황이어서 40여명의 병사들은 도청 별관 복도에 가면(쪼그려 앉아서 잠시 눈을 붙이는 정도의 수면 상태) 하도록 지시하고 장교 두명과 함께 교대로 도청 광장을 살피면서 밤을 새우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인데. <귀가> <침구> <야영> 그것은 사치스런운 이야기지요.>>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집단 발포 다음날 시민군 인봉이 TV에 계란을 던진다. 그러나, 사건순서는 정반대였다. 20일 방송국 방화 사건이 먼저 있었고, 그때 비상탈출한 한동석 중위가 그날 밤 도청 안으로 피해있다가 그 다음날인 21일 오후 1시경 31사 헬기로 탈출하면서 7공수 군수장교에게 전해준 것이 도청 앞 공수부대 실탄의 출처였다. 그리고 그 세 통의 실탄은 그의 소대가 MBC 와 KBS와 기독방송 등 세 방송국 경계근무를 위해 14일부터 소지하고 있었던 실탄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한동석 중위는 이렇게 증언한다:
 
<실탄 인수인계>라는 용어를 저가 표현한 것 뿐입니다.. 특전사 병력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서 그냥 전달해주었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군요. 아주 급박한 상황에서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들이라 그 당시에 순간순간 지휘자(본인)의 판단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지 상부에 보고하고 할 겨를도 없었읍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7공수 대대장은 31사단 병력이 헬기로 철수하는 지도 몰랐을 것이며, 특전사 *** 대위도 사후에야 실탄 습득에 대한 보고를 했을 것이라 추측됩니다. 정상적인 보고후 지시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시위대가 순간적인 기습 공격으로 인간 바리케이트 방어대형이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대형 트럭의 질주<공격>로 대기 중이던 대형이 각자 흩어져서(도청 정문 을 통해 내부로) 부대를 재정비하는데 지휘자들은 정신이 없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읍니다 (Ibid.).


역사학도 2010. 3. 10
http://www.study21.org/518/


복음과 문화


두 달 앞으로 다가온 광주사태 30주년

광주사태 주동자들의 친미 유언비어와 반미 행동

MBC 방송국 전소시킨후 TV 본 5.18 치매증

광주시민군 총성이 먼저 울렸다 (계엄군 한동석 중위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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