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검찰총장님께 진정서를 제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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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땅굴이야기 작성일11-12-02 10:09 조회1,582회 댓글3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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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검찰총장님께 진정서를 제출합니다.
진정인: 이창근
죄 목: 직무유기 및 이적행위, 반역죄, 허위사실 보고 및 유포죄.
혐의자: 국방부 정보 본부장, 군사 정보부장, 작전처장, 합참대침투정보과장, 탐지과장.
존경하는 검찰총장님? 상기 진정인은 위 성문된 특정인을 “죄목”으로 아래 내용으로 진정하오니 사실을 조사하여 주시길 헌법에 명시된 개인적 공권을 가진 국민의 한사람으로 국가기관인 대검찰청에 청원합니다.
사실이 아니라면, 이는 대한민국의 고급장교들을 귀청에 발고함으로서 무고의 죄를 달게 받겠으며 앞으로 단체를 해체하고 다시는 남침땅굴의 징후제보를 하지 않을 것을 고합니다.
내용: (직무유기 및 이적행위) 본인은 “남침땅굴민간대책위”의 대표이자 “남침땅굴을 찾는사람들의 모임” 이하 “남굴사” 발굴단장인 이창근입니다.
2008년 8월 6일 뜻을 같이한 동지들과 같이 청와대 방향으로 향한 남침땅굴의 제보를 접수 “파주 탄현 기독교 묘지”3부 능선에서(파주시 탄현면 금산리 산52-1) 물리탐사를((주)지오텍 윤종렬박사 010-3317-0406) 하고 시추를 하였습니다.
이에 세 번째공 시추후, 2008년 8월21일 새벽 01;36분 68미터에서 물이 낙수되고 찬바람이 에어컨 바람처럼 올라오고 쾅하는 소리가 밖에 있던 자동차가 흔들릴 정도에 진동을 동반하여 울린 뒤 괴도차가 지나가는 청음이 1분가량 들렸으며 시끄럽게 무엇인가 작업소음이 난 후, 시추공에 다시 물이 차올라 왔습니다.
저는 당시 이러한 민원을 당시 신문고에 기 신고하였고 아직도 아무런 대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동지들과 깊게 상의 한 후, 우리가 장거리 남침땅굴을 증거할 수 있는 길은 직접 이를 찾아 국민에게 들어내어 보이는 일이라고 판단한 후, 과거 징후가 많이 나온 곳을 찾아 심도가 깊지 않은곳을 절개를 강행 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탄현면 문지리 아쿠아랜드 입구에 물리탐사를 시행하였습니다.
아쿠아랜드에 집중한 것은, 본인이 애기봉 김포반도 주 오피 관측요원으로 군사기밀2급 비취인가자로 적동향을 수년간 감시해 왔던 점과 동지인 백마부대 포병 중사 홍광락의 제보와 귀순자 주성일씨의 “DMZ의봄”의 제보, 전 국가 안전기획부 수사기획관 김철희님의 첩보존안일지를 분석하여 아쿠아랜드를 집중하게 된 것입니다.
2009년 3월 9일 우리는 탄현면 문지리의 아쿠아랜드 입구 갓 농로에 5개공 시추후 15미터에서 105미리를 시추하여 관통하고 찬바람이 올라오는 것을 그대로 휘발류 40리터를 넣고 가정용 가스를 밸브를 열어 불을 붙여 터트렸습니다.
검은 연기에 불이 꺼지지 않고 한참동안 타는 것을 본 후, 역시 이튿날이 되니 찬바람이 나오던 시추공에 물이 차오르고 있었습니다.
우리 동지들은 이 곳을 안전하게 절개를 할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자금을 모아 반듯이 절개를 하자고 결의를 다지게 되었습니다.
1차 물리탐사 자료에서 우리는 갱도 침투가 2개가 침투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절개를 강행하기 전에 더 정밀한 조사를 해야 겠다는 인식과 또, 절개를 하는 자금이 수월하지 않다는 고민 중에 과거 “연천제5땅굴을 밝히자”는 구호에 애국 활동을 하고 계시는 부산대 철학과 교수이신 최우원교수님이(010-2579-0828) 어렵게 저를 찾는 다는 소식을 듣고 저는 부산대 지질학과 교수이신 김진섭교수님을 소개 받아 “(주)하나 엔지니어링 조진동박사”께서 무료로 다시 아쿠아랜드를 정밀 탐사를 수차에 걸쳐 해주셨으며,결론은 확실하고도 분명한 “인위적 동공이다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특히, 물리탐사결과 나타난 이상대 주변에 지진계와 같은 파도도 탐사가 죄어 찢어 진 듯한 파형은 분명 인위적일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 였습니다.
처음 정밀 탐사전 저는 미리 분명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현장 답사시에 “이곳에 갱도가1개가 있으며 우측에 또하나가 있다” 물리탐사가 정확하다면, 하나는 작년에 제가 관통하여 “인민군이 발각되어 수맥을 발파하고 도주 했으니 물에 체워진 체로 나타나야 한다”고 말입니다.
최우원교수님과 김진섭교수님 하나엔지니어링 사장님과 조박사님 모두 웃었고 나를 제외하고 논의를 하더니 “김진섭교수님은 웃으며 물리탐사를 하면 결과가 분명하게 나옵니다. 과학은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추후, 최교수님은 다들 나를 믿지 않고 이상하게 본다고 한마디로 땅속을 어떻게 아느냐? 또라이라고 했습니다.
1주일이지나고 2주가 지났고 물리탐사결과가 나왔습니다.
(주)하나엔지니어링에서 물리탐사한 자료, 그대로 제가 사전에 언동한것과 일치되게 물리탐사가 나왔으며 하나는 물이 체워진 체로 푸르게 나왔으며 다른 하나는 큰 동공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결과를 설명하신 위 거론된 박사님들은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고 심각하게 말씀하셨고 특히 조진동 박사님은 수년간 군에서 의뢰를 하여 물리탐사를 해왔지만 이러한 결과는 처음이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즉시 이를 국민신문고에 2010년3월 기신고를 하였고 탐지과장에게 전화로 징후신고를 직접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사나 응대도 없었습니다.
탐지과장은 전화로 민원업무는 직접 탐지과가 받지 말라는 합참의 지시가 있었다며 모든 작전은 합참에 지시에 의한다며 신고를 받지 못한다는 허망한 답변이었습니다.
저는 절개를 결심하고 2010년 추석이 끝나는 다음날, 절개를 강행했습니다.
2010년 11월21일 확인심도 12미터 지점에서 지하에서 발파소리와 함께 몸이 흔들려 본인과 김성식부장이(010-4014-0768)놀라 쓰러졌으며, 동년 11월 22일 역시 12시경 큰 발파소리가 나서 관계 파주경찰서에 112신고를 하였습니다.
발파소리에 후사면에 위치한 백마부대 포병 선임하사2명은 달려와서 발파소리가 우리 절개 현장 아래에서 분명히 났다며 우리가 발파한 것이 아니냐고 언급 했고 백마부대 탐지 소대장은 군 청음도 12시경 청음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화약도 발파허가도 전혀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경찰관은 합동으로 조사를 해갔습니다.
저는 정식으로 이젠 명백한 남침땅굴 징후이니 나는 분명하게 군과 경찰서에 기 신고한다고 말씀드렸고 당국의 확인 가능한 조치를 주문했습니다.
11월22일12시 우리는 발파소리가 난 후에 이튿날인 23일 연평도포격이 나던날 갑자기 양수기 1대로 물이 통제 되던 절개 현장에 물이 홍수처럼 올라왔으며 급기야 양수기3대를 가동하여 양수하여 작업을 재개해야 했습니다.
이것을 본 아쿠아랜드 관계자나 인근 주민은 이곳에 아쿠아랜드가 물을 찾기위해 여러곳을 팠어도 물이 나오질 않았는데 도데체 어디서 이러한 물이 나온것이 깜짝 놀라 문의도 하였습니다.
백마부대 탐지 소대장은 언급하기를 상급 부대에 모든 보고를 다했으며, 이창근 단장님이 아는 것보다 많은 사실을 상급부대에 보고를 했습니다.
아직도 아무런 조치가 없는 것이 도데체 어떠한 생각과 판단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오히려 심각하게 생각하였습니다.
동년, 11월25일 저는 남침땅굴을 찾아 확인하는 절차로 진행중인 줄 알았던 저에게 의정부시청 도로관계기관의 11월30일까지 메우라는 행정명령이 나온 것이며 이를 우리 뿐만 아니라 절개작업을 하고있는 파주건설기계협회와 지주에게도 통보하여 작업을 못하게 중지명령을 문서와 유선으로 하였습니다.
국기사항인 남침땅굴을 징후신고를 발원하여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아주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특히, 백마부대인 9사단 위수령 부대가 아닌 국방부 합참장교들이 아쿠아랜드 본사인 김 모 이사와 관계지인에게 조사도 않고 땅굴이 아니니 작업을 못하게 하라고 직접 찾아와 말했다는 사실을 김이사에게 듣고 참으로 어이가 없었습니다.
특히 거짓말은 아쿠아랜드 김이사에게 들은 사실을 그대로 적시하면 “국방부에서 온 장교들이 이곳을 수백공을 시추하여 사실이 아니라고 설명하는데 아쿠아랜드 창업 후에 단 한번도 군에서 시추한 적이 없는데 도데체 어디에 시추를 해서 조사 했다는 것인지 군도 신빙성이 없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내게 말해 준 것입니다.
시추조사도 하지도 않고 했다고 허위로 상급자에게 보고하고 백마부대 탐지 소대장도 부인하는 조사조차 없었던 조사를 해서 땅굴이 아니라는 보고를 장관과 언론에게 보고하는 저의는 무엇인지 분명하게 밝혀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중장비를 동원하여 작업을 못하게 업체에게 까지 보이콧을 당한 우리는 절개 현장 임진각 쪽에 새벽만 되면 무엇인가 지나다니는 소리를 자주 들어서 2010년12월초순경, 그곳을 다시 (주)하나엔지니어링 조진동박사님에게 의뢰하여 물리탐사를 2차 실시하니 폭5미터 이상의 “이상대”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이상대에 조진동박사님은 이상대가 분명하고 “고비저항 이상대다”
“그 규모가 상대적으로 크게 나타난다”
“빈 공동 형태다”라고 설명을 하였습니다.
저와 김성식부장은 현장이 중장비로 작업을 못하게 되니 지금 나타난 “이상대”가 과연 어디까지 남하하여 침투를 했는지 이를 라지에스터지 탐사법으로 따라가 보기로 하였고 우리는 산을 5개나 넘어서 남양주시 수동면 입석리 공장부지와 도농동까지 확인을 하던 중, 남양주시 화도읍 묵현리의 발파소음을 듣게 되어 남양주시 화도읍 묵현2리에 청음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청음은 2011년1월17일부터 하게 되었고 묵현2리 부녀회장 부지에 약1미터50정도를 파서 청음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우리는 물리탐사를 해야 할 최적의 장소를 물색하던 차에 묵현2리 이장의 허락 하에 (주)넥스지오 윤종렬박사와 한원석박사(010-4274-0471)님에 의해 물리탐사를 시행하여하였고 또한, GPR장비로 (주)글로버스 글로버스 손강희박사님의 탐사결과에 4개의 이상대가 존재한다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이때 우리는 장소가 민가의 중심에 있고 시추로 확인 하고자 540미리 시추기로 주변을 지질 조사하였고 이상대 주변을 추후 절개를 강행하기 좋게 6개공을 시추하였으며 맨 나중에는 제일 이상대가 높은 자리에(고비저항치가 높게나온) 청음기를 묻고 이를 밤새워 근무하는 자치 기동 순찰대장 전우길님에게 청음기 일체와 건전지를 드리고 청음을 부탁하였습니다.
이 청음자료는 본인이 직접한 것도 아니며 자치지구대장님과 대원들이 한 지하 청음자료를 군 합참대침투과장은 “분석해보니 지하음이 아닌 것으로 판명 되었다”고 주민여러분에게 허위발표하였습니다.
우리는 묵현2리를 절개를 할려고 했으나, 토지의 주인이 45명이나 되고 민가의 중심에 있고 절개 기부금을 1000만원을 묵현2리 이장의 요구에 동지들의 반대의견이 있었으며, 특히 1991년,1995년,1998년, 연천땅굴과 동두천땅굴, 의정부땅굴을 분쇄하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던, 권영해전 국정원장님과 25사단장이시며 한미야전군 부사령관이셨던 김무웅장군께서 직접 묵현리 일대를 조사하시고 지하에서 나는 청음을 들으시고 “많이 노출이 되지 않은 곳을 다시 찾아라, 민가 주변에는 이목이 있어 절개지로 적합치 않다, 역공작으로 우리가 묵현2리에서 실패했고 다시는 작업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인근 주민에게 알리고 그곳에 나타나지 말고 은밀한곳을 다시찾아라”는 하명에 우리는 묵현2리에서 지금도 파고 있는 소음과 물리탐사로 묵현5리 천마산 밑을 시추하고 절개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역시 물리탐사업체도 주식회사 넥스지오에서 했으며 갱도 역시4개의 분명한 이상대가 나타났습니다.
이를 10미터 70까지 절개를 강행하였을때, 쉬잇 탁 쾅! 하는 폭발음이 2번 연속으로 발생하였고 현장에 에어가 들끓고 하루종일 나오다 역시 이튿날 물이 차오르는 것을 사진으로 찍어 보고하였고 절개작업을 계속하자 묵현5리 주민은 공청회를 통하여 주민이 작업을 동조하였는데 샛강건너 묵현2리 주민의 빗발친 항의와 집단의 데모로 작업이 도저히 진행을 할 수가 없게 되자 그간의 징후를 모두 군에 신고하여 전 국정원장이시자 전 국방부장관을 지내신 권영해님과 김무웅장군님 김국환장군님의 조력으로 군에서 이양하여 작업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 때도 분명 지하15미터를 절개하면 분명, 이상대의 갱도가 남침땅굴이 명백하게 나온다고 브리핑을 했으며 서모작전처장과 정모대침투과장에게 약속을 받았으나, 결과는 13미터10센치를 파고 종결하였으며 “땅굴은 없다”고 10월28일 발표를 하게 된것입니다.
당시, 군은 3군사령부 제1야공단이 절개작업을 하였는데, 당시 포크레인 선임병 상병 권범진은 “밑에서 계속 울립니다, 포크레인 부레카로 이곳저곳을 두들겨 보았는데 속이 빈것 같이 심도를 내려 갈수록 더 크게 울립니다.
이를 보고 했더니, 물에 잠겨 있어서 그런것이라고 그렇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물은 시작할 때부터 계속 잠겼었는데, 처음부터 땅굴을 찾으려고 작업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저는 시키는 데로만 할뿐이지 제가 내년5월경 전역인데 전역하면 지금 작업에 대해서 우리들은 할 말이 많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특히, 민원인인 본인을 작업 현장에 오지 못하는 것을 군에서 요구하여 참관이나 참여를 시키지 못하게 김무웅장군님과 약속하고 민원인이 요구한15미터를 파지 않고 종결시켰으며, 마을 사람들과 특히, 지주인 이모씨와 배정숙부부에게 “이창근 단장이 작업을 못하게 막으라고 우리집 처와 나에게 부추긴다. 차마 이단장에게 말 할수 없을 정도의 말을 하면서 땅굴이 아니라고 작업을 못하게 하라고 선동한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김관진 국방부장관에게 “이창근 단장이 다시는 남침땅굴민원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썼다”고 허위로 보고하고 연천땅굴은 “자연동굴”로 판명이 났으며 재판에서도 군이 승소를 해서 SBS에 1억씩배상을 받았다는 허위 날조된 보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내 앞에서도 언동한 정모 대침투정보과장에게 당시 상황을 알고 있는 SBS고철종기자(010-8517-9100)에게 정말로 군에게 정정보도를 해준 사실이 있는지 1억씩 방송사가 배상해준 사실이 있는지 여부를 전화 걸어 확인을 시켜주니 육본에서 보고가 그렇게 되었고 자연동굴로 판명이 되었다고 억지를 쓰고 이를 장관과 그 관계참모에게 보고를 받았다고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명백한 허위사실을 주민과 기타지인에게 날조하고 있으며, 자신들이 절개로 확인까지 해주었다는 시추조사도 했다는 거짓인 것입니다.
1991년 이후 군에서 민원인에게 시추조사를 하거나 절개를 한것은 이번 이 처음이고 당시국방부장관 과학기술보좌관인 윤여길박사님(010-6267-1609)의 당시 조사에서도 단 한군데에도 절개로 군이 적극적으로나 소극적으로 작업을 한곳은 없었습니다.
연천제5땅굴은 오히려 모든 각계의 전문가와 지질학,지반공학 박사님들이 틀림없는 남침땅굴로 판명되었고 서울남부지원2000가합6552사건이 군의 3주간에 걸친 설득과 대군이미지 재고를 위해 합의해달라고 당시 탐지과장 김병조대령이 수차에 걸쳐 찾아와 그간 군당국과의 소송4건을 없었던 것으로 합의에 의해 강제조정결정으로 종결되고,이를 다시 당사자인 본인이 다시 소를 제기해 2005머12892 서울중앙지원 사건 역시 군과 강제조정결정으로 “본인 입회하에 군이 비용과 오력을 들여 절개를 하라”는 법원의 명령에 이의를 제기 하기에 이르러 마치 포상금을 노리고 땅굴을 찾는 다는 나쁜인식에 보일 수있다는 동지들의 제고에 민사소송의 인지대등을 감안 소송을 이끌어 가지 못한 것입니다.
연천땅굴 발굴 당시도 정모 국방부정보본부장과 정보부처관계관 5인이 국회국방위의 소회의실에 당시 간사이셨던 박세환의원의 중재로 본인이 군과 공동으로 군무원이 되어 같이 찾으라는 당시 천용택 국정원장과 국방부장관 여야 국방국회의원의 공동의 뜻을 전달하는 과정에서도 “먼저 연천땅굴을 인정하고 만인에게 공개 가능하도록 절개를 하지 않으면, 중재안을 거절한것이 였습니다.
그러한, 연천땅굴 문제를 “자연동굴로 판명되었고 SBS가 사죄하고 정정보도를 하였으며, 각기1억원씩 배상을 받았다는 허위사실을 아직도 주변 지휘관이나 지인에게 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양주시 화도읍 묵현5리의 남침땅굴징후는 청음기가 돌아가는 불빛과 폭발소리 기계소음등을 직접 이 밭을 관리하는 송모씨가(010-9867-0406) 들었으며 내게 알려주었으며,이를,절개전,시추업자배모사장 (010-5022-8829)이
15미터 지점에서 관통되어 2미터가 내려가는 것을 모두가 지켜보았고, SBS
이광우PD가 직접 촬영하여 배사장을 인터뷰까지 하였습니다.
또한, 절개 현장에서는 10미터70정도 절개 현장에서 4미터50시추중 2미터가 내려가고 롯트가 낙하한 후, 물이 빨려 들어가고 에어가 올라와서 지인 인 김수현(010-7358-8404)과1명이 지켜 보았으며, 최의수 기술고문은(010-5784-8850) 직접 내려가 라이타불이 꺼지는지 물이 빨려 들어가는 것을 목격까지 했습니다.
변성암지대에 강한 편마암이 사재해 있고 발파석들이 지속적으로 나오는 것을 주장해도 군은 15미터 절개를 하지않고 근본적인 민원인을 배제하고 김무웅장군님의 뜻대로 팠다고 절개지의 상황을 종결하였습니다.
특히, 정모대침투 과장은 주민을 선동하여 2011년10월28일 현장에 나온 주민들을 선동하여 땅굴이 아니라고 사전유포를 하고 작업을 못하게 항의하라고 몇몇주민에게 주문을 하는것을 토지주와 몇몇동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행위를 하였습니다.
또한, 발표시, 당일날 제일먼저 민원인을 연락을 하고 참석하는 것은 당연지사인데 배제 시켜놓고 우리를 지원해주시는 권영해전국정원장,김무웅,김국환장군님에게 연락했는데 오지 않았다는 어처구니 없는 작태를 보이는 것입니다.
본인과 동지들은 당년당월10월28일 오전11시15분경 통보를 해놓고 말입니다.
존경하는 검찰총장님?
저는 1998년 2월16일 당시 천용택 국반부장관의 퇴근 차량을 막고 “장거리 남침땅굴의 민원”을 전달한 바 있습니다.
요지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귀순자에게 받은 첩보들을 종합하면 북은 장거리 남침땅굴을 후방깊숙하게 팠고 이를 유사시에 기습 남침하여 모든 관공서를 마치 군사 구테타처럼 점령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장거리 남침땅굴을 발견하면 북은 서해오도의 경계선을 주장하며 서해에 교란하고 동쪽은 잠수정으로 교란한뒤, 휴전선에서는 국지전을 일으켜 서해와 동해 휴전선일대에 긴장으로 아군의 전투력을 분산시킨 후에 후방 깊숙이 장거리 남침땅굴로 척후방을 교란 일시에 기습한다고 말입니다.
1999년 6월5일 현충일 하루전 우리는 당시 연천경찰서로부터 발파허가를 득한뒤 연천땅굴을 발파했습니다.
6월6일 군사정전위에 북한인민군 장령들은 예고도 없이 참석했으며, 서해에는 경량급 북한 군함이 나란히 도열했습니다.
이후, 제1차 연평해전이 시작 되었습니다.
1992년 저는 전 6사단 사단장 정명환장군님께 제가 군에서 취득한 첩보사항을 관측존안일지를 일기형태로 작성하여 정명환장군님과 이종창신부님을 차로 모시고 전방을 탐사와 남침땅굴을 조사했습니다.
결론은 황해남도 개풍군 하조강리 관산포리 밑으로 남침땅굴을 팠으며 이는 한강하저로 파고있다는 정명환 장군님의 결론을 얻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를 이미 당시 월간조선(1992년12월호) 조갑제부장님에게 제보하여 정명환장군님의 분석과 조사대로 하강하저 밑으로 이미 파고 있다고 발표를 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확공 내지는 굴진 할때에 무진동 발파라도 분명 징후가 나타난다고 확신을 하고 있었고, 이윽고 사고가 터졌습니다.
1차 벽산건설의 행주대교 붕괴입니다.
당시 조사를 보면 13번 교각이 떨어지기전에 폭음이 있었고 그 소리에 놀란 전경이 다리 쪽을 보니 이제야 교각이 떨어지는 것을 목격했다고 했습니다.
그 이후, 신촌로타리에 서강대교진입방향 3번교각에서 진동 및 라지에스터에 대한 징후가 나타았고 용산구 이촌2동 대림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반응 이나타났으며, 이후 성수대교가 아침에 무너졌습니다.
당시생존자들의 증언에도 먼저 밑에서 폭음이 난것은 말할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은 중지도를 관통하여 강변 테크노마트에 올들어 3번째 폭음이 들렸고
제 조사에는 2개의 땅굴이 이미 굴진하였습니다.
이 뿐이 아닙니다.
충남 계룡대의 계룡시 금암동 폭발음은 2009년 5월8일 발생하였고 대전대덕구와동과 유성구 노은동 문지동은 올해로 20011년3월, 2번의 폭음이 발생하여 조사를 해보니 이미 군참모부가 있는 계룡대를 감싸고 있으며, 대덕구 연구단지 원자력발전소를 향해 뻗어 있는 것을 탐사하였습니다.
이는 기초과학인 물리탐사와 토모그래피탐사로 지반공학 지질학 박사들의 소견을 믿어야지 이러한 학자말을 무시하고 땅굴이 없다는 주장은 어부성설인 것입니다.
군 담당자는 자신들의 소견과 식견을 가지고 장거리 남침땅굴이 없다는 주장이지만 저는 과학적 텍스트자료와 물리탐사자료를 가지고 장거리 남침땅굴을 주장하는 것이 치산자로 왜곡되어지고 진실이 허위로 알려지는 것에 울분을 토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존경하는 검찰총장님?
저는 1995년 일본에 건너가 조총련 간부에게 북송선제의를 받았고 당시 서울지하철 공사도 지도와 역사등이 나온 지도를 8계단좌표를 함께 가지고오면 당시일본돈 500만엔과 일본내의 조총련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사업을 제의받았습니다.
전 이 사실을 전 안전기획부 일본과장과 수사기획관을 지내신 김철희과장님에게 신고를 했으며 더불어 장거리 남침땅굴이 이미 대전이남까지 진출되었다고 신고하였습니다.
1998년 말 부부간첩이 생포되었고 서울대 고모교수와 사당역의 고정간첩이 생포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가십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이라고 느끼는 우리 동지들은 군내부에 좌파성향의 군간부가 없다고 단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줄기차게 전 4땅굴제보자인 신중철을 이중간첩으로 기관에 신고해왔고 현재는 중국으로 건너가 무역상사란 회사만 남은 체, 행방자체가 확인이 않되고 있습니다.
그는, 대위로 넘어와 우리군 정보사령부에 대령으로 예평과 즉시 수개월만에 중국으로 도주하다시피 떠났습니다.
군은 장거리 남침땅굴을 존재자체를 확인도 기술력등 배수환기, 전력등으로 불가하다고 탁상에서만 논하고 부정적으로 식견과 주관으로만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조사에 의하면 1000분의3공법이 반원을 수작으로 그려가며 반원을 3미터 구배로 큰 원을 그려가며 3미터씩 작은 원을 그리며 위로 상승한다는 것입니다.
반원과 반원이 마주치는 곳에는 수로와 배수로 뒤의 반원으로 점핑을 해가며 15-12-9-6-3으로 상승한다는 것이며 전기는 동력선을 케이블에 깔고 필요시6량의 자가동력의 갱차로 반원의 낙하에너지로 오르락 내리락하며 이동하는 것을 우리는 청음을 통하여 물리탐사를 통하여 알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군은 연천땅굴 강상 현장과 화성땅굴과 같이 시간이 지나면 암반을 자연스럽게 석축을 쌓아올린듯이 위장하고 그 반원에 턱을 모조리 발파허여 발각된곳에 밀어 넣여 에어 쑛트를 치고 그라우팅을 하여 감쪽같이 속인 다는 것입니다.
존경하는 검찰총장님?
최소한 우리는 땅굴을 담당하는 군정보판단부서를 밎지 못합니다.
입만 열면 상식이 통하는 논리가 아니고 거짓말과 둘러치기와 안한것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곽상현 부장 판사님은 법정에서 군에게 물었습니다.(2005머12892)
“이창근(원고)는 연천땅굴이 맞다는 증거와 증인 그리고 전문가의 의견서를 제출했으니 군측(피고)도 땅굴이 아니라는 증거와 증인을 확보하여 제출하세요?”
3번의 기회와 6번의 출석에도 군은 그 증거나 증인 학계의 전문가 어느누구도 군측에 입장을 대변하지 않았고 조정위원2분은 강제조정결정을 하기에 이르렇습니다.
이것을 사기치고 있습니다.
제가 재판에 졌으며, 자연동굴로 판명되고 저도 인정했다고 말입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은 아직도 미제입니다.
저는 두가지 내용을 진성서에 기록으로 남기고 싶습니다.
연천땅굴을 발굴당시 연천지역 지역사령관이신 25사단장 김무웅장군께서(010-703-7957) 제게 식사도중 하신말씀입니다.
“내가 사단장할때 직접 경험한 것인데, 감악산에는 분명히 땅굴 출입구가 있어 인민군들이 들락날락 하는것 같다. 그곳에서는 세가지 사건이 발생했기때문이다. 하나는, 훈련 도중에 완전군장 차림의 전초병이 산속에서 행방불명이 되었다. 전부대원이 빈틈없이 수색했으나 흔적도 없었다. 훈련중에 탈영은 불가능 하나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연고지인 광주에 헌병을 보내 찾아보았으나 허사였다. 두번째, 감악산일대 두곳에서 지뢰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그런데 그곳은 지뢰를 매설한곳이 아니다. 현재 그곳은 지뢰위험지역으로 설정해 놓고 출입을 금지 시키고 있다. 세번째, 통신감청중에 감악산에서 북한군과 교신하는 것을 포착하고는 현장에 출동하여 수색했으나 아무런 흔적도 발견치 못했다. 교신내용을 보면, " 앞에 하늘이 보인다. 산이 보인다 " 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교신내용은 인민군이 땅굴 속에서 밖을 보고 말한것이고, 땅굴출구 근처에 인민군이 지뢰를 매설한 것으로 보이며, 행방불명된 병사는 인민군이 땅굴속으로 납치한것으로 생각된다. "고 말했다. 문제가 발생한 감악산은 연천군 양주군 파주군이 접해있는 곳이고 연천땅굴임진강건너이며, 6.25시에 영국군 1개 대대가 전멸했던 곳이며, 북측입장에서 볼때 수도권을 장악하는데 매우 유리한 군사 요충지인 것입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은 화성땅굴 일대에 있는 것이며, 남자의 음모하나가 발견 되었습니다.
이 음모는 남한 사람의 음모가 아니고 추운지방 함경북도등 조선인이지만 추운지방의 음모였습니다.
화성의 모든 남자를 대질했지만 유전자 일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범인은 라디오 매체를 이용한 난수표의 지령이 많았던 때 였으며 사고는 달이 없는 비가오는 때가 많았고 남한 내 50년간 강간후 살해자에 교자형태로 묶은 형태는 아직도 중국에서나 북한에서 인질이나 범인등을 항거불능의 상태로 만들때의 포박형태와 아주 흡사한 것입니다.
존경하는 검찰총장님?
마지막으로 다시금 이 진정서에 나온 글들이 한치에 거짓이 있다면 저는 무고와 허위사실유포죄를 받겠습니다.
진실이라면, 국기사항인 남침땅굴문제를 직무를 유기하거나 소홀하게 함으로서 결과적으로 적에게 이롭게한 이적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국가를 대변하고 국가를 보호하는 검찰총장님에게 마지막으로 호소하는 진정서를 이렇게 기대를 하며 물리탐사 자료등 일체 증거로 제출하고 위법사항을 판단하여 주시길 소원합니다.
남침땅굴을 찾는 사람 이창근상서
댓글목록
한가람님의 댓글
한가람 작성일
이 진정서를 받아들이면...
검찰총장을 존경하겠습니다.
콘사이스님의 댓글
콘사이스 작성일
영삼이때부터 땅굴숨기기에 여념이없었습나 이후 두정권때야 오죽랬겠습니까 그리고 지금도
같다고 사료됩니다 남굴사 애국자님들 존경합니다 같은 우익에서도 사기꾼들이라고 매도하는사람들이 있드군요 여튼 대단한성과 있스시기를 하나님께빕니다
황룡님의 댓글
황룡 작성일검찰총장님이 취임 하실때 하신 말씀을 실천 하시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