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에 대한 끝장토론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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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일 작성일10-01-25 14:50 조회3,33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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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님은 "고 김경철님은 18일 금남로에서 공수에 끌려가신게 맞고,"라고 하시길래, 제가 병원으로 끌려갔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 광주에서는 병원 후송을 "끌려간다"라고 말하는지 궁금했거든요.
이데아님이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가 밝혔다며 "그는 친구들과 점심식사 뒤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공수부대의 눈에 띄어 무차별 구타당했다. 부상당한 그는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으나"를 인용하셨습니다.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라면 종종 거짓말 지어내어 허위 주장하는 단체 맞는가요? 군 과거사위의 허위주장이 여기서 또 한번 들통나는군요. 군과거사위가 새로운 사실 밝혀낸 것이 아니라,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3627.html 에 있는 자료를 근거로 또 하나의 픽션소설을 쓴 것뿐입니다. 제가 아래 일부 캡쳐해 드립니다.
명확한 사건 시간 확인을 위해 제가 몇 문장 인용해 드립니다:
<그날, 그러니까 80년 5월 20일 오전 10시께 전남 청각 장애자 복지회'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광주 적십자 병원 에세 그곳으로 '김형렬'이란 농아가 입원해 있다는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영안실이 어딘지도 모르고 물어서 찾어 갔지요. 근디 김형렬이란 사람이 어제 저녁에 죽어서 시체로 있다가 밤9시쯤 국군 통합병원으로 실려 갔다고 그럽 디다. 근디 이름은 틀린디 거기 사람들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생김생김이 우리 아들하고 비슷 하드란 말이오.">
<어머니는 며느리와 함께 국군통합병원으로 달렸다. 차츰 내 아들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실감으로 다가왔다. '김형렬'의 시신을 보여 달라는 어머니를 군인들은 면회소에 앉혀 놓고 기다 려라고만 했다. 며느리는 바싹바싹 타 들어가는 속마음에도 말 한마디 내뱉지 못하고 '윽! 윽!' 하는 신음 소리와 함께 쿨쩍 쿨쩍 흐느끼기만 했다. 그렇게 한시간이 가고 두 시간. 세시간이 지났다. 어머니는 종이 조각 팔락거리는 소리에도 불침이라도 맞은 듯 화들짝 놀랄 만큼 숨막히는 긴장으로 온몸이 굳어 있었다. 흐느끼던 며느리의 눈시울은 언새 퉁퉁 부어 올랐다.
"따라 오세요."
면회소에서 3시간 여를 기다리던 끝이었다.>
자, 이 증언대로라면 김경철군 유가족이 김경철군 사망을 확인한 시각은 5월 20일 오후였습니다. 여기서 정확한 시간 판정의 잣대는 "80년 5월 20일 오전 10시께 전남 청각 장애자 복지회'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입니다. 분명하게 객관적 사실은 전남 청각 장애자 복지회가 김경철군 집으로 오전 10시에 전화를 걸었다는 것, 그리고 그날 오후 김경철군 사망이 확인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때렸느냐의 문제가 있습니다. 즉, 김경철군을 광주 조폭이 때렸느냐, 시위대가 때렸느냐, 공수부대가 때렸느냐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공수부대가 때렸다는 군 과거사위의 주장은 오로지 위 사이트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3627.html 에 있는 농아 박인갑씨의 주장에 의거합니다. 님이 인용하신 "그는 친구들과 점심식사 뒤 집으로 돌아오던 중"에서 친구들이란 박인걸과 황종호를 말합니다.
자, 위 증언에서는 임금단씨가 아들의 죽음을 확인하고 귀가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시간은 21일 오후 4시였습니다. 그렇다면, 공수부대가 김경철을 때렷다고 주장한 박인갑이 김경철군 죽음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시점도 그날 오후 4시 이후였습니다. 이것이 팩트입니다.
자, 김경철이 공수부대원에게 맞는 것을 보았다는 유일한 목격자는 박인갑입니다. 5.18측과 군과거사위는 오로지 이 사람의 주장에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 자신을 5.18민주화유공자로 포함시키며 이 즈언을 하고 있는데, 몇가지 수상한 점이 있습니다. 아래 캡쳐해 드렸듯이 박인걸은 자신을 5.18시위에 동참한 유공자임을 나타내며 증언합니다.
그런데, 과연 박인걸이 시위에 참가하였을까요? 그가 시위에 정말로 참가하였느냐의 여부가 공수부대가 그를 때렸다는 그의 주장의 신빙성 여부를 결정할 것입니다.
"김경철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농아들도 거리에 나섰다." 김경철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때가 언제인가요?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앞서 그는 경철이가 의식을 잃은 채 트럭에 실려 광주천 쪽으로 실려가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경철이 가족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1988년에야 5.18측 월간지에 그렇게 증언하였습니다. 20일 오후 4시 넘어 귀가한 김경철 군 어머니 임금단도 전혀 언급 안합니다. 설사 박인걸이 5월 20일 오후 4시 이후에 김경철군 사망 사실을 김경철군 가족으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해도 그가 그 소식을 듣고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시외버스 공용 정류장으로 달려갈 수 있는 시간은 오후 5 시 이후입니다. 상식적으로 유가족을 찾아가 위로하는 것이 순서였을텐데요.
그런데, 5월 20일 오후에 그가 시위에 참가했다는 주장은 사실 성립이 불가능합니다. 그때 공수부대는 도청 분수대를 최후저지선으로 밀려 있었으니까요. 시외버스 공용 정류장에는 그날 군인 그림자도 없었습니다.
여기서 이데아님은 박인걸이 5월 19일 오후에 시위에 참가했다고 주장하시려 할지 모르는데요. 그런 주장 또한 불가능합니다. 시위대와 계엄군간에 시외버스 공용 정류장에서 충돌이 있었던 유일한 날은 5월 18일이었습니다. 5월 21일 정오까지 도청을 점령한다는 일정에 따라 5월 19일의 시위대 주 공격목표는 금남로였습니다. 더욱이, "김경철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농아들도 거리에 나섰다." 이 주장은 그가 5월 18일에 시위에 참가하였다는 주장이 불가능하게 합니다. 김경철군 사망일자를 5월 19일로 본다 하더라도 "김경철씨가 5월 19일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농아들도 그 하루 전인 5월 18일 거리에 나섰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니까요.
"우리는 장갑차 속으로 끌려 들어갔어요." 이 말 또한 거짓말이지요. 7공수에 무슨 장갑차가 있습니까? 그리고 시민군 장갑차가 시민들을 장갑차 속으로 끌어당기는 일은 있었을지언정, 군인들이 그렇게 한 적은 없었어요. "어깨에 무궁화 하나를 단 군인이 쌍안경을 들고 진두 지휘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이 말 역시 새빨간 거짓말이쟎아요. 7공수에서 장갑차 타고 시위진압 지휘한 소령이 있었습니까?
자, 박인걸이 이런 증언으로 어떤 포상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그의 증언은 허위증언입니다. 확인되었지요? 인정하십니까? 박인걸이 시위에 참가하였다는 증언은 새빨간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럴진대 김경철군 가해자가 군인들이었다는 그의 증언은 결국 허위주장이었던 것입니다.
김경철군 사망 후에 자기가 시위에 참가했다는 박인걸의 위의 주장은 김경철군 사망 후에는 시외버스 공용 정류장에서 계엄군과 시위대가 충돌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허위주장임이 드러났는데요. 오후 3시나 4시경 의식을 잃은 사람들이 상무대로 연행되었다는 증언 또한 거짓말입니다. 김대중의 인맥이었던 광주향토사단 사단장 정웅 소장이 7공수33, 35 대대에 시위자들을 상무대로 연행해 오라고 명령을 내린 시간은 오후 4시 40분이었습니다. 실제로 연행이 가능했던 것은 오후 6시 이후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오후 3시에 김경철군이 연행되었다는 주장은 사실성립이 불가능하고요. 정웅 소장 명령은 과격시위자들과 주동자들을 연행해 오라는 것이었지, 의식잃은 사람들을 연행에 오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상무대가 무슨 병원입니까? 그 어느 지휘관이 의식잃은 사람들을 상무대로 연행해 갑니까? 5.18측 사주를 받은 박인걸이 픽션소설을 써서 오랫동안 국민을 속여왔지만, 그의 픽션소설은 사실성립이 도저히 불가능해요.
김경철군을 공수부대원이 죽였다는 주장은 결국 아무런 목격자 없는 주장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런 주장이 사기꾼들의 주장이었다면 이제 남은 가능성은 김경철군에 대한 가해자는 광주조폭이나 시위대였다는 것입니다.
자, 다음 주제로, "헬기 기총소사 유언비어"에 대한 주제로 넘어갑시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6_2037.html 에 있는 흑색선전 " "헬리콥터의 기총소사로 온몸이 벌집이 되어 죽은 대학생이 있는가 하면"이 흑색선전이 아니라고 우기시는 이데아님이 이렇게 인용하셨습니다.
<* "도청 쪽에서 사직공원 쪽으로 이동하는 헬기에서 지축을 울리는 기관총소리와 불빛을 내는 것을 봤다. 헬기는 지상 1백30미터 정도의 높이로 날아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부동교(불로동다리) 주변을 향해 쏘았다고 들었다." (구술 : 조비오, 현사연 조사)>
5월 21일 오후에 도청광장에서 총성이 울렸습니다. 그러나 그 요란한 총성은 시민군 기관총이 내는 소리였습니다. 그날 시민군이 발사했던 기관총 사진이 위에 있는바, 그 사실을 "1995년 서울지검-국방부 검찰부의 광주사태 조사보고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일부 시위대는 전남의대 부속병원 12층 屋上에서 LMG 2정을 설치하고 전남도청과 軍헬기를 향해 사격을 했다.
14시 45분경 20사단 61연대장이 11공수여단과 병력을 교대하기 위하여 61항공단 203대대장이 조종하는 UH-1H 헬기를 타고 전 남도청 上空에서 공중 정찰을 하던 중 시위대의 對空 사격으로 6발이 헬기에 맞았다. 15시50분경 광주통합병원 상공에서 宣撫放送 을 하던 같은 機種의 61 항공단 방송용 헬기도 6발의 총격을 받았다. > (http://blog.daum.net/sionvoice/11045264 )
즉, 진실은 시민군 편에서 헬기를 향하여 기관총을 쏜 것이었음에도 광주청문회 때는 거꾸로 말한 사기꾼의 큰 목소리가 이겼던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조비오 신부의 엄청난 사기극이 출발이었던가요? 5.18측은 "민족과 역사의 심판"이란 제목의 그들의 증언록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렇게 그때 나는 우선 도청 앞 분위기를 살펴보려고 밖으로 나왔다. 사제관을 나와 성당 앞 철문에 막 이르렀을 때이다. 헬기가 기수를 광주공원 쪽으로 향해 가면서 광주천 불로동 다리쯤의 상공에서 불빛이 50센티미터에서 거의 1미터 정도로 쭉 뻗으면서 '드드득 드드득 드드득' 세 번이나 갈기는 기총사격 소리가 들렸다.
혼비백산한 나는 반사적으로 담벽에 바짝 붙어서서 헬기를 응시하였다. 순식간에 헬기는 공원을 넘어 월산동 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너무도 놀라 가슴이 뛰고 다리가 후들거려 성당을 나서지 못하고 사제관으로 되돌아갔다. 다른 신부들도 기관총소리에 매우 놀라 밖으로 나오면서 웬 기관총소리냐고 겁먹은 표정으로 묻는 것이었다. 나는 헬기에서 기총사격을 한 소리라고 말했다.> (5.18기념관 DB에서 자세히 보기 )
조비오 신부는 헬기에서 기총사격을 한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단지 시민군 기관총이 헬기를 향하여 사격하는 소리를 들었을 뿐이었습니다. 헬기 조종석에는 그 큰 기관총이 들어있을 공간이 없다. 그 기관총은 전남의대 부속병원 12층 屋上에 설치된 시민군 기관총이었던 것입니다. 조비오 신부는 그의 거짓말을 1989년 2월의 광주청문회 때까지 끌고왔을 뿐만 아니라, 1995년 검찰 수사로 조비오 신부의 거짓말이 전부 들통이 났는데도 여전히 "金永三정부는 광주의 진실을 밝힐 수 없다며 차기 정권에 그 처리문제를 기대하고 있었다" 등의 말을 하였습니다 (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1039 ).
자, 조비오 신부는 시민군 기관총이 헬기를 향하여 발포하는 소리를 듣고, 헬기에서 쏜 것으로 오해하고 거꾸로 말해 이른바, 헬기 기총소사 유언비어를 퍼뜨렸던 것이며, 그 유언비어가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6_2037.html 유언비어 대자보에서는 "헬리콥터의 기총소사로 온몸이 벌집이 되어 죽은 대학생이 있는가 하면"이란 유언비어로 뻥튀기기 되었던 것입니다.
헬기 기총소사로 온 몸이 벌집이 된 민주열사가 있는가요? 없다면 그 대자보의 그런 문구들은 흑색선전입니다. 그럼에도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6_2037.html 유언비어 대자보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겠다는 것인가요? 광주망신, 나라망신 시키는 일을 기여코 하겠다는 것인가요? 일단 그런 유언비어 대자보들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면 그 내용이 영문으로 공개되기 시작하여 그 유언비어의 사실들이 폭로되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광주사람들이 그토록 세계적으로 사기꾼의 명성을 날리고 싶다 하더라도, 조국의 명예 또한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2010년 1월 24일 역사학도
http://cafe.daum.net/issue21/3Fdk/4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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