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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일 작성일10-01-04 13:04 조회3,71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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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圭夏대통령 정보부장서리에 全斗煥중장 임명. 국군 보안사령관 겸임 조선일보 1980.04.15.발행 / 1면 ![]() |
金大中씨 대통령출마 밝혀 신당창설…민주화상황보아 결정, 어제 저녁 관훈클럽서 연설 조선일보 1980.04.26.발행 / 1면 ![]() |
全斗煥 정보부장 회견내용. 계엄령 해제시기는 몰라…나의 권한 밖, 북괴 4월 일본에 통혁당 대표부 설치 조선일보 1980.04.30.발행 / 2면 ![]() |
정보부조직·운영 축소 정비. 겸직…정치발전 저해안해, 안보…정치적이용은 곤란, 全斗煥부장회견 조선일보 1980.04.30.발행 / 1면 ![]() |
치안본부 교외시위 주동 학생 형사처벌 "사회질서 위해 방관못해"
조선일보 1980.05.03.발행 / 7면
(寫) 시위 이란인 체포 조선일보 1980.05.03.발행 / 2면 ![]() |
대학가 「시국성토」농성 일단 해제 정상수업준비. 서울대 2천2백77명 문무대 입소, 고려대 7일부터 정상수업, 경희대 본질적인 투쟁위해 일단 농성시위 중지 조선일보 1980.05.06.발행 / 7면 ![]() |
대학가 시위 재연. 외대-숭전대 경찰과 충돌…6개대 대치, 지방대도 민주화 열기 조선일보 1980.05.07.발행 / 7면 ![]() |
17개대서 시위-성토 경찰과 산발적 충돌 철야하며 "횃불농성"도 조선일보 1980.05.08.발행 / 7면 ![]() |
대학가시위 중대경찰과 충돌, 숙대생 철야 농성, 이대대학원생도 성명서 조선일보 1980.05.09.발행 / 7면 ![]() |
문교부집계 학원진통…유형별로 본다. 「현실비판」시위…23개교, 총·학장사최요구…22개교, 어용교수 퇴진…27개교 조선일보 1980.05.09.발행 / 6면 ![]() |
23개 대학 학생대표 9개항 결의. "「평화적 학내 시위」만" 조선일보 1980.05.10.발행 / 7면 ![]() |
「15일 교외시위」않기로. 26개대 총학생회장단 3차 결의 조선일보 1980.05.13.발행 / 7면 ![]() |
강의실은 "만원' 대학가…열기속에도 진지한 분위기 "학업태만" 인상 안주게 「릴레이 시위」 조선일보 1980.05.13.발행 / 4면 ![]() |
6개대학생들 광화문서 시위. 경찰충돌…30분만에 강제해산, 3천여명 곳곳에서 분산집결 스크럼 짜고 달리며 "계엄 철폐" 조선일보 1980.05.14.발행 / 7면 ![]() |
연대생 가두시위 조선일보 1980.05.14.발행 / 7면 ![]() |
경북대 교내시위, 계명대도 경찰과 투석 조선일보 1980.05.14.발행 / 7면 ![]() |
6개대학생들 광화문서 시위. 본사기자 4명맞아 1명입원 조선일보 1980.05.14.발행 / 7면 ![]() |
27개대 총학장회장 가두시위 결의 조선일보 1980.05.15.발행 / 7면 ![]() |
전국 대학생 가두시위. 서울역에 두차례 집결 시청·광화문으로 산발진출 조선일보 1980.05.15.발행 / 7면 ![]() |
전국 대학생 가두시위 심야에 자진해산. 서울시내 17개대학 시내로 도시상가 철시·교통 큰 혼란, 경찰 숫적열세…데모학생 저지못해 조선일보 1980.05.15.발행 / 6면 ![]() |
[ 聞外聞 ] 학생 가두시위 확산으로 숨가쁘게 돌아가는 중앙청 조선일보 1980.05.16.발행 / 2면 ![]() |
학생시위 신축대처 경찰로만 사태악화 막기로, 관계장관회의 조선일보 1980.05.16.발행 / 1면 ![]() |
청와대서 심야시국대책 회의. 崔圭夏대통령 하루앞당겨 어젯밤 급거귀국, 학생시위로 인한 국내정세 申鉉碻총리등 관계각료들 보고 조선일보 1980.05.17.발행 / 1면 ![]() |
"가두시위 일단중지…정상수업" 시국추이 난망키로, 24개대 학생대표 결의 조선일보 1980.05.17.발행 / 7면 ![]() |
수원6개대 시위 조선일보 1980.05.17.발행 / 7면 ![]() |
"국민반응 차갑다" 대학가 자성론. 시위효과 자체평가 만발 열띤 찬반토론…새방향 모색
金泳三-金大中씨 계엄령 즉각 해제요구 학생들도 자제 하도록, 시국수습 6개항발표 |
5.19. 첫 총상자 (김영찬) 발생- 장갑차에서 지면으로 쏜 실탄이 튕겨져 복부에 맞음.
5.19. 나온 구호: ① 위대한 민족의 횃불 金大中 선생을 구하자. ② 광주시민을 주축으로 위대한 全南國을 만들자. ③ 現 정부는 미국의 앞잡이다. 위정자는 떠나라
다음날 격렬함은 상승되었다. 데모대들이 경찰소유물을 파괴했고 2 개 방송국을 점거했고 다량의 차량에 불을 붙였다.
5.21. 아세아자동차, 남평지서, 교도소 습격.
5.21. 계엄사 발표내용.
5.18. 전남대 669명 계엄해제 요구 시위시작, 21일오전현재 군경 5명 민간1명 사망, 군경 30명부상.
20일 지역감정의 유언비어 유포시작,
경상도군인이 전라도에와 닥치는대로 밟아죽이고 있다. 18일 40명 죽었고 금남로 피바다, 군이 여학생 브러지어 찢다.
공수부대가 아들.딸 대검으로 난자, 팬티와 브러지어만 입히고 장난.
공수부대가 몽둥이로 시민을 무차별 구타 눈알빠지고 머리가 터졌다.
한신대생 1명 18일 다쳐 죽었다. 학생들 50명이 피흘리며 끌려다니고 있다.
계엄군이 출동하여 장갑차로 시민을 깔아죽였다. 계엄군이 점거한 카톨릭건물에 시체6구가 있다.
데모군중이 휴가병을 때리자 공수부대가 대검으로 시민을 찔러죽였다.
달아나는 시민에게 계엄군이 대검을 던져 복부에 박혔다.
진압군인은 경상도만 골라보냈다.
서울의 유언비어: 계엄군이 성균관대에서 여학생을 욕보였다.
崔圭夏대통령 광주소요사태 수습위해 朴忠勳총리서리 광주에 급파
조선일보 1980.05.22.발행 / 1면
5.22일 낮 12:30각계대표 15명 5.18 사태 수습위 결성. 사태수습전 계엄군 투입말라.
5시12분 합의내용,도청광장에서 발표. 21일밤 총기의한 강도.강간사건으로 총기회수시작,
처음에 시위를 조직한 학생 지도자들 중 몇이 망연자실해졌다. 그들은 통제를 잃었으며 거기엔 너무 급진적이고 너무 폭력적 요소들이 많았다. 한 대학생은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가 의도한 것이 결코 아니다. 대중들이 성원하는 동안 시위대는 처음에는 확산되었고 대다수 광주시민들이 폭동의 상승에 충격받았다.
5월22일 광주소란을 진정키 위한 위원회가 60명의 광주시민 그룹으로 결성되었다. 의사, 변호사, 저널리스트, 종교자들,
그 그룹은 공권력과 폭도들 간에 중재를 제안했다. 그 위원회는 또한 무장한 시민들에게 5,008 라이플총기와 395 단총과 288,680 회의 화약들과 526 개의 수류탄과 3000박스의 다이너마이트를 포기하도록 요구했다.
광주일원 소요사태 나흘째 학생·시민합세 계엄사 「광주사태」발표
조선일보 1980.05.22.발행 / 1면
金大中씨 중간수사내용, 계엄사 발표
조선일보 1980.05.23.발행 / 3면
광주사태 자제·대화를 가열되면 외세 오판위험, 미국무성
조선일보 1980.05.23.발행 / 1면
계엄사령부 광주사태에대해 무기 반납하면 요구 호의수락
조선일보 1980.05.23.발행 / 1면
광주사태 수습기미. 교통·통신 두절상태 각계대표 15명 당국과 협의 "유혈을 피하자"설득에 동의, 강경파 일부 설득 실패' 뉴욕보도: 광주소요 32명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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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방송 일반프로전면 중단 광주사태 계속보도 조선일보 1980.05.23.발행 / 1면 ![]() |
폐허같은 광주…데모 6일째. 목포선 복면 쓰고 시위. 공포발사도…학생들 "자제"호소
조선일보 1980.05.23.발행 / 7면
서울역서 시위선동 남파간첩 1명검거. 남해한침투 광주잠입 못하자 상경
조선일보 1980.05.25.발행 / 7면
5월26일 계엄군이 광주를 향해 여러 곳에서 진출하기 시작했다. 격렬하고 잘 조직된 저항세력과 조우했다. "시민군"은 광주시를 단단히 거머잡고 있었고 시스템적 명령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그 응답으로 계엄령하 공권력은 행동을 결심했다. 폭동의 확장에 처하여, 광주를 재탈환한 계엄군은 잘 계획되고 작전을 잘 수행했는데 부상자를 최소화하고 시의 손상을 줄였다. 항공사전답사 사진과 정보들이 광주시 내에 있던 계엄군 연락자들로부터 모아졌다. 공권력은 반도들의 강한 세력을 정확히 조준했다.
계엄군 광주장악. 李光均문공부장관 이런비극없게 자성 피해시민들에 죄송 5월27일 다수 시민들이 잠들어 있을 때, 새벽 1시, 군부대는 이동하여 들어갔다. 작은 차량과 쪽집게 공격을 수행하면서, 계엄군의 의무는 수시간 내로 광주시를 탈환하는 것이었다. 단 17명의 반도만 사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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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 광주 장악 17명사망 2백95명 보호중. 어제새벽 전견 진입 백분만에 끝나, 시내출입 잠정제한 조선일보 1980.05.28.발행 / 1면 ![]() |
가장 쟁점적인 사안은 광주봉기에서의 사상자 숫자이다. 공식 사망자수는 10일 간 조사끝에 191 명이었고 구성은 시민은 164 명, 군인 23 명, 경찰 4명이 죽었으며, 합계 852 명이 부상당했고 122명이 중상이다고 발표되었다. 이 숫자는 너무 작은 숫자라고 조롱거리가 되었다. 그런 저항은 주로 공화국 정부에 비판적인 외국보도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뉴스 보도는 산발적으로 정부의 발표숫자를 인용하면서도, "모처에서는 사망자가 실제는 훨씬 높다고 주장한다. 몇몇 보고서는 가식없이 최소한 천명은 죽었다. 고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또 다른 보도는 선언하기를 " 공신력있는 사망자 수는 나오지 않았다. 최소 천명에서 많게는 이천명이다. "라고 했다. 이런 선언들은 억측들에 의존하고 완전히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 기운 글체는 헤리티지 보고서에서 따온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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