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호나무와 찔레꽃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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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li0046 작성일10-01-05 10:25 조회4,460회 댓글2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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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호나무와 찔레꽃 노래
渤 海 人
(
존경하고 친애하는 탈북자 동지 여러분.
말 많고 탈도 많았던 기축년이 지나가고 희망찬 흰호랑이해(음력 1월1일) 경인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올해는 여러분이 꿈꾸어온 모든 일들이 소원성취할 것입니다.
20여 년 전 극동 러시아 노동현장에서 저의 감언이설(?)에 속아 조국이라고 찾아왔던 대한민국에서 인간대접 못 받고 소외 당한 국민으로 생활하시던 분들 중에서 안부가 두절되어 불안해할 때 찾아온 소식은 혹시라도 정 붙일 곳 있을까 하고 찾아간 이국 땅에서 한(恨)만 남기고 세상을 하직했다는 연락을 접한 저는 마치 큰 죄인이 된 것 같아 조용한 산사를 찾아 탈북자 여러분들이 하시고자 하는 모든 일들의 소원성취 기원과 함께 부처님께 빌고 또 빌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대한민국이라는 진정한 조국이 있어 탈북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아직까지 여러분들을 동물원 원숭이 보듯 하고 범죄자 취급하는 시각들이 잔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전부가 착한 사람이 될 수는 없어도 한 두 사람의 잘못한 죄로 인해 전체가 덤탱이를 뒤집어 쓰는 오늘의 환경은 저로 하여금 안타깝게 합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마저 문제의 한 두 사람을 매도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들은 경우에 따라 ‘필요악’의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옛말에 “미운 놈 떡 하나 더 줘라”는 말이 있습니다.
쌀밥 속에 쌀알만한 한 두 개의 돌멩이는 급하게 먹는 식사를 천천히 먹게 하는 효과가 있고, 불편하기는 해도 조심스럽게 그리고 꼭꼭 씹는 맛과 즐거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득 담은 밥그릇도 돌이 세 개만 넘어도 ‘쌀밥’을 ‘돌밥’이라고 표현을 달리하는 것이 우리 사회입니다. 문제의 인물들을 여러분들이 감싸주고 상처 난 마음을 달래주어야 합니다.
북에서 도둑질하다 도망쳐 이곳에 왔는데 여기서도 그 버릇 못 고치고 사고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찾아오면 저는 고발해도 여러분들은 숨겨주고 자수하도록 설득해주어야 합니다. 그래도 아직까지 우리사회는 成文法보다 不文法이 우선하는 사회입니다.
사실 여러분들을 가장 반겨주고 사랑해야 할 사람은 친북 좌ㆍ빨 인사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난 10년 동안 무던히도 여러분들을 괴롭혔습니다. 만약 적화통일이 되면
여러분들을 중국 조선족 동포들과 비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분명 조선족 동포들보다 여러분들이 월등히 대우받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족 동포들은 중국이라는 국적이 있고, 태어난 동북3성으로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당신은 돌아갈 곳이 있지만 탈북자들은 통일되기 전에는 돌아갈 곳이 없는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불쌍한 분들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우리사회가 정말 지랄같습니다. 간첩이 장군을 불러 신문하고, 그들이 국가유공자로 대우받고, 민주화란 미명아래 온갖 부정을 저질러도 그들의 것은 미화되고, 진작 조국과 국가와 민족에 헌신하는 인사들은 불이익을 당했는데 여러분들의 불이익이야 두말한들 무엇 하겠습니까?
저는 과거 육군행정학교와 경찰대학에서 接長생활을 한 적이 있어 남들과 다른 지식과 정보로써 판단컨데,
● 구호나무 사건
제가 태어난 고향 경남 金海 三芳洞이라는 마을은 지금의 신도시 개발 전에는 載寧 李氏 집성촌이었습니다. 그곳 동뫼(마을동산)에는 포구나무(팽나무)가 한 그루 있고 옆에는 해방되던 해 기념으로 심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각각 자라고 있는데 포구나무는 조선시대 선조대왕으로부터 하사 받은 것으로 약450여년이나 되어 김해市가 老巨樹로 보호하고 있습니다.
6.25전쟁이 끝나고 한참 후 어느 핸가 나무에 올라가 보니 “
20여년 전 북한의 구호나무 사건이후 문득 생각이 나서 고향에 간 걸음에 포구나무를 둘러보니 깊게 파인 글씨가 지금은 어렴풋이 흔적만 남아 있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사랑채 李선생은 동네사람들로부터 ‘빨갱이 같은 놈’이라고 야유를 받았지만 꽤 유식했는데, 왜 ‘
이번 연휴기간에 묵은 비망록을 정리하다가 러시아 아무르 강변의 구호나무 사건에 대한 내용이 있어 옮겨 봅니다.
1992년초 아무르 강변에 연어와 철갑상어잡이로 파견된 북한 어업일꾼들이 항일독립군 88여단이 있었던 비야츠코예 마을 선창가에 이백년이나 묵은 물푸레 나무에 올라가서
● 찔레꽃 노래
저는 6.25전쟁 이듬해(1951년)에 김해 활천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교실은 미군에 징발되고 운동장은 L-19 경비행기 활주로로 바뀌어서 공부는 神魚川 뚝방길의 천막 속에서 하였습니다. 어느 날부터 학생들이 갑자기 불어났고, 졸지에 한 반인 한 학급이 두 반으로 늘어났습니다. 피난 온 학생들이 몰려왔기 때문인데 저보다 한 학년 위인 黃OO이라는 피난 온 여학생은 저의 눈에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였습니다. 그녀는 2년 정도 학교를 다니다 서울로 갔는데, 공부도 잘하고 노래도 엄청 잘 불렀습니다.
1966년 봄 비무장지대 225고지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내 고향은 남쪽나라 살구 꽃 붉게 피는 地內洞(몇년 전 중국 민항기가 추락한 지역마을) 못안 입니다. 국군장병 여러분,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따뜻한
얼마 후 그는 6군단 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 받았고 28사단장
아이러니한 일은 車하사의 아버지(김해시 상동면)와 故
존경하고 친애하는 탈북자 동지 여러분.
2편의 이야기가 여러분들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겠지만, 저에게는 ‘구호나무’건은 그렇다 치더라도 ‘찔레꽃 노래’건은 뒤돌아 보기 싫은 잔인한 추억일 수 밖에 없습니다. 무뇌인간
이명박 정부는 뼈를 깎는 아픔이 있어도 공갈에 고개 숙여 식량을 지원하는 일은 우리 모두 말려야 합니다. 식량지원은 오로지 낚시와 그물로 고기를 잡겠다는 확답(이것도 사기일 수 있지만)이 있을 때 만이 지원해야 할 것입니다.
존경하고 친애하는 탈북자 동지 여러분.
3년 전 꼭 같은 시기에 탈북자 5명(남자 2명, 여자 3명)과 중국동포 5명(남자 3명, 여자 2명)이 입국했습니다. 탈북자들은 약간의 정부지원을 받았고, 중국동포들은 아무런 지원이 없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이 시간 현재 지원 못 받은 중국동포들이 훨씬 잘 살고 있습니다. 반면 여러분 동료들은 아직도 헤매고 있습니다(실제로 이러한 비교조사를 관계기관에서 하고 있음).
제가 추측컨데 이유는 이렇습니다.
① 중국동포들은 비록 사회주의 속에서 살았다 해도 시장경제를 배웠기 때문에 정착이 빨랐고,
② 중국 동포들은 분명 탈북자 여러분보다는 웃는 얼굴입니다. 여러분 2만명 모두는 얼굴이 경직되어 있습니다. 여기는 자유스러운 대한민국입니다. 제발 힘들더라도 웃어야 합니다. 내가 웃어야 남도 웃습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③ 여러분들이 용감해서, 또 불쌍해서 등으로 선교단체와 NGO에서 맹목적 지원을 해주는 사례가 비일비재합니다. 이것은 중독성이 있습니다. 즉, 계속 얻어먹으면 헤어나지 못합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이 글이 비록 가슴 아프게 느껴지더라도 하루 정도 생각하시고 감정을 표현하시기 바라면서 글을 끝내겠습니다. 추운 날씨에 꼭 건강 챙기셔야 합니다. 건강해야 모든 일들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녕히 계세요.
渤海人 올림
댓글목록
금강인님의 댓글
금강인 작성일정말 渤海人님 말씀 너무 가슴에 와 닿는 말씀입니다.
김종오님의 댓글
김종오 작성일
발해인 님!
놀랍습니다.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필명이 'Pli0046'이라 했기에 지나쳐 버렸다가, 제목보고는 '무슨 시(詩) 한 편인가?'하고 들어 왔다가 그 예의 발해인님일 줄이야! 그리고 여기 주제와 관련된 엉뚱한 얘기를 한다면......,
1). 구호나무 /
연전에 하와이에 가보니 나무에 칼로 새긴 낙서를 많이 해 뒀던데, 하와이 주정부의 관광 안내인에게 들으니 '얼마든지 낙서를 하십시오'라 했습니다. 단 수종은 타~잔 나무(늘어진 가지가 다시 뿌리를 내려 무진장으러 뻗어나감/온 산이 한 나무라고 함)인데, 그 낙서가 세월따라 그대로 있기에 신혼부부들이 자기의 낙서를 다시 볼려고 찾아오고, 애들 낳아서 또 그 애들에게 '너희 아빠 엄마가 여기서 널 임신하고 기념으로 새겨둔것' 이라며 찾아온 답니다. 나무 낙서가 일종의 관광 상품인듯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2). 찔레꽃 노래 /
글 가운데 경남 김해의 地內洞을 '못안'이라 하셨는데, 그렇다면 아마 地內洞이 아니라 池內洞일 겁니다. 제고향 경북 예천에도 '모단마을- 못안마을- 池內동'이 있고, 그 연못 뒤엔 '모띠마을- 못뒷마을- 池後洞'이 있습니다. 당시 '모단' '모띠' 애들과 저는 중학교를 같이 다녔습니다.
3). 탈북인들의 자세 /
국내에 들어온 중국동포들은 잘 사는데, 탈북인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말씀은 정확한 말씀입니다. 부모의 과보호를 받은 어린이는 고아원 출신 어린이들보다 나약하기 마련입니다. 이 엄동설한에 휴전선을 지키고 있는 최전방 국군 장병들과, 집에서 승용차로 출퇴근하는 공익요원들과는 그 정신무장면에서는 천양지 차이가 있다고 저는 확신 합니다.
발해인 님!
한만 국경을 가운데 두고, 삼각관계의 북한- 중국- 러시아 관련 생생한 소식을 자상하게 전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
아직은 음력으로 동짇달 중순, 이제 섣달이 지나면 庚寅년이 중-러-한반도에 찾아 올것입니다. 새해에도 健筆해 주시기를 거듭 기대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