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 침투한 300 명의 불순세력과 북한군 300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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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인민해방군 작성일09-11-27 21:42 조회3,61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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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은 망명을 꿈꾼다"라는 제목의 그의 저서에서 강명도는 광주사태 당시까지만 해도 전두환은 전혀 북한에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었음을 이렇게 서술한다 :
"광주에서 전쟁이 터졌다"
1980년 5월 18일 북한 주민들은 깜짝 놀랐다.
남조선에서 계엄군과 학생 시위대가 충돌해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일본 조총련을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비디오 테이프를 확보한 중앙 TV가 매일 그 테이프를 방영한 것이다. (....)
또 복면을 쓴 시민군이 탈취한 계엄군의 지프를 타고 시가지를 달려가는 것도 볼 수 있었다.
『노동신문』은 해설을 통해 학생시위가 광주사태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공수부대가 계엄군으로 출동, 엄청난 사태로 확대됐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공수부대 투입을 지시한 사람이 전두환이라고 보도했다.
내가 전두환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노동신문』은 전두환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238쪽, http://study21.org/518/document/nk-kang.htm)
5.18측 및 유언비어에 편승하는 미디어는 마치 광주사태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유명 인물이었던 것처럼 착각하도록 유도해 왔다.
그러나 만약 그가 남한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면 그 누구보다도 고급 정보를 갖고 있었던 강명도가 모를 리 있었을까?
정치 시사 분야의 전문가로 명성을 떨치던 김동길 교수조차도 1980년 6월 이전에는 전두환이란 이름 석자를 들어본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 광주사태 당시 광주에 투입되었던 계엄군은 전두환이 누군지 알았을까?
그 사실이 궁금하여 역사학도는 2007.07.11 13:05 에 한동석 중위에게 다음과같이 질문하였다:
먼저 광주에서 투사회보라는 이름의 벽보 혹은 삐라들을 통해서 5월 18일부터 전두환이란 이름을 광주시민들이 처음 듣게 되는데요.
사실 그 전에는 대부분의 국민은 전두환이란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는 민간인들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이름이었지요.
한동석님은 당시 소대장의 위치에서 전두환이란 이름을 들어 보셨었는지요.
이 질문에 대해 2007.07.11 15:47 에 한동석 중위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전혀 들어보지 못했읍니다.
도청 재탈환(5/27) 된 후에 2-3일 동안 시내 무기회수 작전에 부대의 간부(당시호칭: 하사관과 장교) 1명과 예비군 중대장(사복차림)과 사복 형사 ,3인조로 구성하여 어디인지 지역명은 잘 모르지만 우범지역이었던 것은 확실함.
이미 모두 도주한 상태여서 젊은 남성들은 만나보기 힘들었읍니다.
그리고 시내는 정리정돈이 되어 있는 상태였으나,시내를 조금 벗어난 지역에는 방화된 차량등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처참했던 상황들을 예상할 수가 있었읍니다.
그리고, 6월 초에 구례에 있는 예비군 관리대에 보직 명령을 받고 전출되어 구례읍내에서 영외거주(하숙) 하면서 하숙집 TV에서 당시 중앙정보부장 서리(?) 자격으로 연설하는 모습을 처음으로보았읍니다.
그전에는 전혀 "전두환"이란 세글자를 보지도 못했읍니다.
(http://blog.daum.net/sionvoice/10357845)
그러면 폭동진압작전에 동원되었던 공수부대원들은 전두환이 누군지 알았는가?
하급 장교들에게조차 그 이름은 아직 생소한 이름이었음을 당시 3공수여단 12대대 소속 김치년씨는 이렇게 증언한다:
구호들 가운데 나와 같은 하급장병들에게는 생소한 이름도 있었다.
다름 아닌「전두환」이었다...
그가 우리 부대를 지휘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더구나 지휘계통상에 있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었다.
이것은 진압군인들과 전두환씨와의 관계설정이 현실적으로는 이만큼 거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http://cafe.daum.net/518cafe/8yGb/80 )
그러면 광주시민군은 전두환이 누군지 알고 있었는가?
아니다.
대다수의 시민군은 그가 학생인지 공무원인지 서울 사람인지 광주 사람인지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나이 24세로 대입재수생이었던 시민군 이수범은 "우리는 전두환이 어떻게 생긴 놈인지도 몰랐는데 항쟁이 끝나고 나니 대통령으로 출마를 하네 어쩌네 하면서 난리를 떨었다. 그제야 그놈이 어떤 놈인지 알았다."고 증언한다.
시민군 이수범의 증언중 네번째 작은 제목 "진상이 밝혀지기를 간절히 바라" 이하.
시민군 최인영도 "우리는 이곳에서 주로 '전두환은 물러가라', '전두환을 찢어죽이자'는 구호를 외쳤는데, 나는 전두환이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나름대로 '광주사태'비극을 일으킨 장본인일 것이라고 단정지으며 목청껏 외쳤다." 고 증언한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510.html에서 세번째 작은 제목 "남평 무기고를 털다"의 끝단락.
시민군 김행주도 "5·18 당시도 전두환이 누군지도 몰랐었다."고 증언하며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619.html,
시민군 김용균도 "특히 수사관들은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나는 오히려 '전두환'이가 누구냐고 되물었다. 사실 나는 전두환이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수사관은 전두환의 이름 대신에 000으로 표시했다."라고 증언한다.
(http://cafe.daum.net/518cafe/8yGb/30
"활기 되찾은 광주"라는 제목의 위의 영상 뉴스가 제작되었던 6월 1일 공교롭게도 광주사태에 대한 정반대의 시각의 두 문서가 공개되었으니 하나는 계엄사 발표 『광주사태』 전문(http://study21.org/518/document/mleh-report.pdf )이요, 다른 하나는 "찢어진 깃발"이란 이름의 유언비어 책자였다.
계엄사 발표 『광주사태』 전문은 단 한번에 신문에 게재되었던데 비해, "찢어진 깃발"은 천주교 신부들의 주선으로 일본 기독교 신문들에 실리고, 로마 교황청에 보내진 후, 전국과 여러나라로 계속 유포되었다.
김건모와 김문 두가지 이름을 사용하며 "찢어진 깃발"이란 유언비어 책자를 제작하여 유포하였던 사기꾼은 광주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5월 19일 광주로 들어와 유언비어를 유포하다가 24일 홀연히 광주를 떠났기에 광주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도무지 알지 못한다.
5월 19일 광주로 들어온 외부인이 어떻게 5월 18일 사건의 목격자가 될 수 있으며, 어떻게 25일부터 27일까지 있었던 사건들에 대한 증언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유언비어 퍼뜨리기에도 바빴을 그 며칠간에 어떻게 200쪽이 넘는 책을 집필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어느 사기꾼이 극장에서 "불이야"라고 외쳐 겁에 질린 관객들이 한꺼번에 출구로 몰리다가 넘어져 압사당하는 사고가 발생하였을 때 그 가해자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자이다.
광주사태 때 유언비어를 퍼뜨려 폭동을 선동했던 김문은 분명 가해자였다.
그런 그가 목격자를 자처하며 "찢어진 깃발"이란 책자를 내었던 것이다.
계엄사 발표 『광주사태』 전문은 그 서술의 정확성이 날로 입증되는데 비해, "찢어진 깃발"은 그 거짓이 날로 드러나 이제는 5.18측에서조차 외면하거나 감추는 책자가 되었다.
유언비어를 책자로 퍼뜨린 이는 김문이었으나, 5월 18일부터 전화로 유언비어를 퍼뜨린 인물은 김상집이었다. 그는 여전히 이런 주장을 한다 :
외신 기자들은 우리에게 20일 첫날에는 열 손가락을 활짝 펴보이며 '열흘만 투쟁을 계속하면 우리가 이긴다'고 격려했다.
광주학살로 인해 국제적으로 궁지에 몰린 전두환이 결국 책임을 지고 물러나고, 대통령 선거를 통해 민주정부가 수립되리라는 것이었다.
열 손가락이 하나씩 줄기 시작하여 26일에는 세 손가락만 펴 보이며 '사흘만 더 버티면 우리가 이길 것' 이라며 격려했다.
(김상집의 주장을 오마이뉴스에서 더 읽기)
그런데, 아래 광주사태 당시 해외 뉴스 동영상이 있는바, 외신 기자들은 전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며칠만 더 버티면 광주시민군이 이긴다는 말은 외신 기자들의 말이 아니라, 윤상원의 말이었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 시각에서 광주사태를 바라보아야 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김동길 교수의 시각을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 단 한번밖에 광주사태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는 인물이 있다.
그럼에도 여기 그 누구보다도 광주사태에 대한 여론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 있다.
양김씨는 김동길 교수의 지지가 있었기에 정계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한민통이란 간첩단 출신의 김대중에게 김동길 교수의 지지는 신원보증수표와 같았다.
김대중이 그의 내란 음모를 진행하던 때에 김동길 교수의 이름을 최대한으로 팔았다.
김동길 교수는 그런 사실을 모른채 김대중이 자기 이름을 팔도록 내버려 두었다.
김대중은 김동길 교수의 이름을 팔며 민주팔이 횡재를 하였고,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피해자는 김동길 교수였다.
연세대 총장 후보감이었던 그는 몇년간 강단을 떠나야 했다.
김동길 교수가 김대중을 지지하였을 때는 무엇이든 김대중이 하는 일은 민주화운동으로 인식되었다.
김문은 유언비어 유포를 김대중 지지 수단으로 삼았다.
그리고 김대중 지지에 발벗고 나선 이들은 악성 유언비어에 너그러웠으며, 심지어 목적을 위한 한 수단으로 정당화하였다.
1988년 김동길 교수는 여전히 김대중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이 광주사태를 "광주민주화운동"으로 호칭할 것을 발의하였을 때 유독 반대 의사를 칼럼으로 기고하였던 이가 김동길 교수였다.
무장봉기를 민주화운동이라 부르면 역사논리가 잘못되기에 그는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그는 김대중은 사기꾼이라고 강연하며, 전두환 전 대통령의 말이 모두 옳았음을 역설한다.
사실 광주사태의 피해 당사자였음에도, 역사학자로서 역사의 진실 편에 서기를 선택한 것이다.
김동길 교수는 광주사태에 개입되어 있었는가?
김대중이 김동길 교수 이름을 팔기 위해 작성했던 주동자 명단으로는 그러했다.
그래서 그런 오해를 살 여지가 있었으나, 그럼에도 한번도 무장봉기를 옹호한 적이 없었다.
그러면, 이번에는 과연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폭동진압작전에 개입했었는지 물어보자.
광주사태 현장에 있었던 김치년씨는 "...그가 우리 부대를 지휘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더구나 지휘계통상에 있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었다."고 증언한다.
도대체 무엇에 근거하여 5.18측은 "전두환 광주학살 작전"을 주장하였는가?
"찢어진 깃발"이란 책자에 담긴 유언비어들을 무조건 맹신하여 달라고 어떤 광주시민들은 요구한다.
그러나 유언비어가 객관적 진실을 지배할 수 있는가?
지금 노무현과 박연차 회장 사이의 수백만 달러의 금전 거래에 대하여는 그 물적 증거와 증언 등이 너무도 명백하다.
이것은 이미 객관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다.
그러나 "전두환 광주학살작전" 유언비어에 털끝만한 객관성이라도 있는가?
광주청문회 당시 도저히 지휘체계 이원화를 말장난으로라도 입증해 볼 심산으로 "지휘권 지휘권 해서, 의원들이 증인에게 물은 것이 별개의 표 나는 지위소를 설치해서 이원화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증인의 지휘권은 계엄을 물계엄이라고 일부 장군출신들은 얘기를 합디다만, 사령관께서도 당시에 증인은 사령관으로써 그러한 물렁물렁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 바로 지휘체계 이원화라고 지적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준열 장군은 "저는 군생활을 통해서 그와 같이 생활을 안했습니다. 누구한테 지휘권을 침해당하거나, 저의 주어진 임무를 누구에게도 침해 안 당했습니다"라고 시원스러이 대답한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 지금으로부터 20 년 전의 광주청문회 때 노무현의 손이 전두환 전 대통령 얼굴에 던질 명패를 집으려 폼잡는 것도 도저히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과 광주폭동진압작전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었는지 찾을 수도 입증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
그것은 "찢어진 깃발"이란 유언비어 책자가 광주사태에 대한 노무현의 지식과 논리의 한계였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광주사태 유언비어는 무성하였으되, 5.18측에서는 그 누구도 그런 정보의 출처를 제공하는 이기 없다.
그러나 북한이 광주사태에 개입하였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김일성의 어록도 있고, 탈북자들과 탈북군인들의 증언은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의 육하원칙에 입각한 서술이 너무도 명확하다.
먼저 1976년 4월 김일성이 대남 공작원들과 했던 담화 내용을 살펴보자:
노동계에 침투하는 방법도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투쟁에서 단련되고 검열된 조직원을 산업현장에 새로 입사시키는 방법과 각 공장 노동자들 속에서 경향성이 좋은 노동자들을 외부에서 몰색하여 포섭하는 방법 등 크게 두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에 가장 좋은 방법은 학생운동 출신 핵심당원들을 고졸자로 신분위장하여 취직시키는 방법이고, 후자의 경우는 중요 위장취업 조건이 여의치 않은 공단지역 곳곳에 '노동상담소' '야학방' 같은 것을 차려놓고 노동자들이 몰려오게 하여 자연스러운 대인관겡를 형성해 가지고 물색 포섭하는 방법입니다.
지하당 조직들은 현실 실정에 맞게 각 산업현장에 핵심들을 침투시켜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노동자들을 의식화, 조직화해야 합니다.
과연 김일성의 목적이 남한에서의 민주화운동이었겠는가?
그리고 이처럼 김일성이 원하는 역할을 윤상원이 그대로 수행하고 있었음이 어찜인가?
들불야학을 통해 청소년들을 의식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대졸자 신분을 감추고 노동자로 위장 취직하여 노동자들을 의식화시키고 있었다.
광주사태를 점화시킨 이들은 항간에 잘못 알려진 대로 전남대생들이 아니라, 바로 이 들불야학 청소년들과 노동자들이었다.
청진에 소재한 3호청사가 바로 광주사태 때 유언비어 삐라를 살포한 곳이었다.
그러면 1979년 11월 3호청사 부장회의에서 김일성이 내린 교시를 살펴보자:
10.26사태는 결정적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징조입니다.
박정희가 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은 권력층 내부의 모순과 갈등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첨예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적들은 지금 계엄상태를 선포해 놓고 서로 물고 뜯고 하고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연락부에서는 이 사태가 수습되기 전에 손을 써야 합니다.
남조선의 모든 혁명 역량을 총동원하여 전민봉기(민중봉기)를 일으킬 수 있도록 적극 유도해야 합니다.
김일성은 10.26사태를 적화통일의 결정적 시기를 앞당길 호재로 이용하려 하였으며, 그 방법으로 전민봉기를 선택했다.
김대중 역시 그 무렵부터 전민봉기(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킬 준비에 착수하였으며, 광주사태는 그의 전민봉기음모가 광주에 국한되어 일어난 사태를 말한다.
남한에서의 전민봉기 음모가 성공했다면 그 다음은 무엇이었는가?
전민봉기는 김일성이 이기기 위한 수순이었다.
우리는 광주사태 주동자들이 "며칠만 더 버티면 우리가 이긴다"라고 한 말의 의미를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북한 사회 안전부 소속 특수부대 군관 출신 탈북자, 특수부대 정치군관 출신으로 임 천용씨와 더불어 자유북한군인연합 공동대표인 최 중현씨는 1980년 5월 광주사태 직전 3호청사 부장회의에서 김일성이 내린 비밀교시를 이렇게 인용한다:
남조선에서 노동자들이 드디어 들고 일어났습니다.
사북 탄광의 유혈사태는 반세기에 걸친 식민지 통치의 필연적 산물이며, 인간 이하의 천대와 멸시 속에서 신음하던 노동자들의 쌓이고 쌓인 울분의 폭발입니다.
남조선 혁명가들과 지하혁명 조직들은 이번 사북 사태가 전국으로 확산 되도록 적극 불을 붙이고 청년학생들과 도시 빈민 등 각계각층 광범한 민중들의 연대투쟁을 조직 전개하여 더 격렬한 전민 항쟁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결정적 시기가 포착되면 지체 없이 총 공격을 개시해야 합니다.
전국적인 총파업과 동시에 전략적 요충지대 곳곳에 무장봉기를 일으켜, 전신, 전화국, 변전소, 방송국, 등 주요, 공공시설들을 점거하는 동시에 단전과 함께 통신 교통망을 마비시키고 임시 혁명정부의 이름으로 북에 지원을 요청하는 전파를 날려야 합니다.
그래야 남과 북의 전략적 배합으로 혁명적 대 사변을 주동적으로 앞당길 수 있습니다.
(한국논단 2007년 2월호)
그리고 아래의 대자보에서 보듯 5월 22일 윤상원이 광주에 해방구를 설치한 후에 발행한 투사회보를 통해 지시하는 전민 항쟁 전개 수순이 김일성의 비밀교시 내용과 상당히 흡사함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전략적 요충지대 곳곳에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있었으며, 방송국 등 주요 공공시설들을 점거하는 동시에 단전과 함께 통신 교통망을 마비시키고 있었으며, 해방구 본부가 임시 혁명정부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2006년 12월 20일의 기자회견중 “5.18 당시 함경남도에 위치해 있던 저희 부대는 전투동원상태에 진입하라는 상급 참모부의 명령을 받고 완전무장한 상태에서 신발도 못 벗고 24시간 진지를 차지하고는 광주사태의 긴급 속보를 전해 들으면서 20여일 이상을 출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당시 경험을 전한 최대표는 그 후 7군단 10사단장이었던 여 병남과 참모장 김 두산의 대화를 통해 ‘특수부대 1개 대대가 광주에 투입됐는데 희생이 컸지만 공로도 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여기서 북한군 침투설에 대한 흔한 반론이 "1개대대라면 5백명 정도의 인원인데, 이 많은 인원이 광주에 들키지 않고 진입하는게 가능 하였을까?"이다.
그런데, 이런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은 최 대표의 이어지는 증언을 귀담아 듣지 않았거나 아직 광주사태의 분명한 팩트를 보지 못하고 있기에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다.
모든 탈북군인들과 탈북자들의 일치하는 증언은 600명이 동시에 침투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300명씩 두 떼거리로 나뉘어 한 때거리씩 침투하였다는 것이다.
최 대표는 4군단 70정찰대대 출신 이 덕선 씨에게 당시 인민 무력부 정찰국 소속 정찰 대대들이 광주에 투입된 정황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들었다고 했다.
이 덕선씨에 따르면 광주에 투입된 인원은 모두 600명. 선봉 부대는 2군단 정찰대대 300여 명이었다.
나머지 300여 명은 인민군 각 군단, 저격여단 등에서 차출한 정예 병력으로 구성했다고 한다.
대동강 하류에 있는 남포시 인근에서 고깃배로 위장한 대형 공작선에 300명을 태우고 출발, 공해상을 거쳐 북한에서는 백암이라고 알려진 서해상으로 침투했다.
나머지 300명은 북한 동해안 신포지역의 馬養島(마양도)에서 출발해 잠수함을 타고 전남 지역으로 투입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정찰국 5부장이 공해상에서 대기 중인 배에 타고 현장을 지휘했다고 한다.
사회 안전부 소속 특수부대에서 수송 장교였던 탈북자도 1980년 5월 당시 ‘머구리(潛り=잠수라는 일본말이 전화됨) 작전’이라는 비밀 임무를 목격했다고 한다.
그는 “이때 8명에서 12명 정도의 사람들이 M-1소총을 들고 남조선 군복을 입고 대동강 하류로 빠져 나가는 것을 봤다”며 북한군에서는 거의 보기 어려운 M-1 소총과 남조선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그렇게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뮤지컬 요덕 스토리의 안무가로도 유명한 김영순 씨는 요덕 수용소 생활 후 ‘장진광산’이라는 곳에 있으면서 특수부대 군관 출신들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이때 군관 출신들은 “광주 사건 당시 500~700명 정도 투입되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그녀는 증언한다.
이렇듯 모든 탈북자들의 증언은 300명씩 두 팀이 침투하였다는 사실을 가리키거니와 그 사건 전개 과정에 대해 이어지는 증언을 좀 더 들어보자.
1980년 초에 김일성은 현 북한노동당 비서 김 중린을 개별적으로 불러 한국내의 현 정세를 이용하여 비밀공작 조직을 더욱 활발히 움직이는 데 대한 구체적인 지시를 주었다.
당시 김일성은 한국내의 비밀공작 조직들을 통해 광주에서 대규모 항쟁이 준비되고 있다는 정보를 보고 받고 현 북한노동당 비서 김 중린을 불러 광주항쟁에 대비한 북한군의 지원 작전을 지시하였고 김 중린은 북한 정찰국 및 특전사부대들을 광주봉기에 투입할 것을 당시 북한군 정찰국장으로 있던 장 성우와 정찰국 5부장 이 하일에게 구체적인 지시를 하달하였다.
1980년 5월 초. 김일성은 루마니아 대통령의 초청으로 루마니아방문이 예정되어 있었고 5월 말까지 루마니아에 이어 구라파 방문일정을 소화하게 되어있었다.
루마니아 방문 출발 직전에 김일성은 김정일과 김 중린을 불러 장차 한국에서 벌어질 수 있는 사태에 대응할 구체적인 지시를 주었다.
(김 중린의 증언을 사적인 자리에서 직접 청취하였음)
김일성은 광주사태로 인한 향후 한반도의 정세변화에 대비하여 5월말까지 예정 되었던 루마니아 방문일정을 단축하고 5월 13일 귀국하였다.
남포에 집결한 전투인원들을 환송하는 연회장에 김정일을 대동 하여 김 중린. 이 하일이 참가했으며 김정일은 당시 전투원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그들을 고무하였다.
그 자료는 현재 평양시 룡성 구역 룡추2동 대남 사적관 지하전시실 2관에 보관되어있다.
환송회를 마친 남파 인원들은 1척의 대형 공작선에 승선하여 남포항을 출발하였다.
당시부터 남파된 부대의 전체 지휘는 정찰국 5부장 이 하일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남포루트를 통해 침투되었던 당사자들은 공해상에서 민간인 복장을 하고 남한 서해안의 백암이라는 지명으로 불리는 지역으로 들어갔다고 증언하였다.
당시 총책 이 하일은 공해상에서 광주현장에 침투된 무장인원들을 지휘하였다.
현장을 총괄 지휘하던 이하일은 계엄군에 의해서 광주정세가 역전되자 인원들의 철수를 지시했으며 1980년 5월25일. 부상인원을 포함한 약 400명 정도의 남파되었던 인원들이 1차로 남포항으로 도착했고 나머지 인원 70 여명은 광주에서 죽은 40 여명의 시신에서 일부 부위만을 채취하여 중부전선인 강원도 철원군 상요리 일대의 전선을 넘어 귀대하였다.
(한국논단 2007년 2월호)
그런데, 현 북한노동당 비서 김 중린이 광주사태에 깊이 개입하였다는 사실은 강명도의 1995년 저서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 238~251쪽으로 입증이 되거니와 (http://study21.org/518/document/nk-kang.htm ), 과연 당시 총책 이 하일이 300 명씩 두 떼거리를 광주에 침투시킨 사실이 있는지 남한 기록을 살펴보자.
여기서 300명이란 숫자가 중요한 것인데, 놀랍게도 5.18측 자료들이 300명씩 두 떼거리가 광주로 침투한 사실이 있음을 입증해 주고 있지 아니한가!
먼저 위 사진을 살펴보자.
집총 자세의 이들은 누구인가?
전경이 아니었다.
그때는 아직 시위 진압을 전담하는 전경 부대가 없었던 시대였으며, 또 전경이 M-1 총으로 무장하지도 않았다.
이들은 공수부대원들도 아니었다.
그러면 이들은 누구였는가?
시민군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광주사람들로 구성된 시민군이었는지 아니면 외부에서 침투한 시민군이었는지의 문제이다.
시민군이 전경 제복을 빼앗아 입을 수는 있어도 군화는 발의 사이즈가 달라 도저히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런데, 위 사진의 무장단체는 한결같이 같은 모양의 단화를 신고 있다.
만약 광주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면 신발 모양이 각각 달랐을 것이다.
위 사진은 외부에서 침투한 무장단체가 있었음을 강력히 암시한다.
그리고 탈북자들 및 탈북군인들의 증언들처럼 남한의 기록에서도 300명이란 사람 숫자가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5월 22일 계엄군 철수 이후의 광주상황은 이러하다.
계엄군이 광주시를 전면 철수한 5월22일에도 2천여 명의 군중이 도청 앞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3백여 명의 극렬시위자는 경찰복과 공수단 복장을 하고 복면을 한 모습으로 40 여대의 군용차량을 몰고 송정역에 집결하여 공포를 쏘면서 시위를 하였고, 관광호텔, 전일빌딩, 전남의대, 유진온천 등 건물 옥상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광주에 이르는 도로에 바리게이트를 설치하였다.
여기서 경찰복장을 한 3백여 명의 극렬시위자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저 위 사진을 보면 알 수 있지 아니한가!
광주사태 당시 가짜 연고생 300명이 광주에 침투해 있었다는 사실은 시민군 사이에 잘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전옥주가 "담양쪽에 연ㆍ고대생이 서울에서 내려와 계엄군의 제지를 받고 있다고 해 그쪽으로 가보면 없고, 그 뒤 곧 송정리, 목포쪽에서 온다는 소문이 계속 나돌았습니다."고 말할 때에 그 연ㆍ고대생이란 300명씩 두 떼거리를 말한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3010.html ).
만약 그 두 떼거리가 침투한 것이 사실이라면 600명이 침투한 것이 된다.
그리고 한 떼거리는 목포쪽, 즉 서해안으로부터 침투하였다면 탈북자들의 증언이 맞아들어가는 것이다.
목포쪽 침투 경로는 1968년 통혁당이란 지하당 창당을 위해 목포로 침투할 때부터 북한에서 침투 경로를 환하게 알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 가설을 생각할 수 있다.
김 중린이 광주사태 기간 내내 유언비어 삐라를 살포했다는 강명도의 증언을 고려해 본다면 전옥주는 남파공작원이 전해주는 쪽지대로 선무방송을 한 것이었다는 가설이 가능하다.
선무방송 내용을 전옥주가 창작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계속 쪽지를 건네 주었다.
전옥주 본인도 그 쪽지를 건네준 자들의 정체를 전혀 모르고 있었고, 시간이 경과한 후에야 자기가 어떤 세력에 이용당했을 가능성을 표현했던 것이다.
두번째 가설은 과연 가짜 연고생 300명(두 떼거리였을 경우 600명)의 정체가 무엇이었느냐에 관한 것이다.
당시 시위의 주축은 이해찬, 심재철, 유시민, 한홍구 등 서울대 운동권이었는데, 과연 서울대와 이화여대를 제외시키고 연고대만 광주에 침투하였겠는가?
고대생 수백 명이 광주로 침투한 사실이 없었다는 사실의 증인은 당시 고대 총학생회장으로 노무현의 측근인 신계륜 의원이다.
그는 그때 도망다니기에 바빴다.
연대생 수백 명이 광주로 침투한 사실이 없었음도 훗날 5.18행사 때 "찢어진 깃발"이란 유언비어 책자를 인용하여 대자보를 만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어떻게 그 숫자가 299명도 301명 아니고 300명이었다는 말인가?
5월 21일 이후 광주사태에 침투하는 것은 국군과의 전투를 위해 침투하는 것을 의미했는데, 과연 사격 훈련조차 받지 않았던 대학생 수백명이 우르르 자원하여 몰려왔을까?
만약 왔다면 어째서 서울의 연고생으로 구성된 시민군 중에서는 단 한 명도 사망자나 부상자가 없었던 것일까?
그리고 왜 그들 중에 단 한 명의 유공자도 없고, 단 한 명의 증인도 없는 것일까?
그래서 가짜 연고생들의 정체가 의심스럽다는 가설이 가능하다.
이 가설 외에는 가짜 연고생 300 명의 정체를 설명할 다른 가설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북한군은 연고생이란 간판을 걸어 신분을 위장하고 침투하였던 것이었다는 가설이 제기되는 것이다.
1989년 1월 26일자 광주청문회 동영상인 위 동영상 3:08에서부터 "김영택 씨는 또 5월 22일에는 서울에서 왔다는 대학생 300여 명이 시위에 합류했으며 오후부터는 복면을 쓴 사람들이 시위 군중 속에 나타나 강경 구호를 외치거나 시민군의 총기 반납을 저지하는 등 석연치 않은 행동을 보여 이들의 정체에 의심이 들었다고 말했습니다."라는 멘트가 들린다.
외부에서 300 여명이 광주로 침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그들의 등장과 동시에 복면부대가 출현하였다.
그리고, 그 복면부대를 김영택 기자는 외부에서 침투한 불순세력으로 규정한다.
(http://study21.org/518/photo/rioters-in-mask.htm )
이 경우 서울에서 왔다는 대학생 300 명의 진짜 정체는 외부에서 침투한 불순세력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탈북자들도 북한군 300명이 침투했다고 증언한다.
그렇다면 광주에 침투한 300 명의 불순세력과 북한군 300명 사이의 관계는 무엇이냐는 질문은 과연 그들의 정체성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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