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국군 군관 박정희는 광복군 첩보장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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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일 작성일09-11-25 16:47 조회4,212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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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빨들이 친일인명사전을 만들었을 때 우리의 우려는 과연 이 사기꾼들이 감별사를 자처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병아리 감별사들은 촉각으로 병아리 암수를 가려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무지한 좌빨들은 어떻게 그들의 정적에게 친일파 낙인을 찍는가? 1910년 일본육사에 이청천과 홍사익이 있었다. 그런데, 한일합방 소식이 들리자, 이청천은 학업을 중단하고 독립운동하러 떠났으며, 홍사익은 일본군에 남아 봉급의 절반을 독립군 가족들 생활비로 지원하며, 독립군을 지원하기로 약속하였다. 이청천과 홍사익간의 그 약속은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지켜졌다. 민족문화연구소는 독립군 가족에게 얼마나 생활비를 나누어주었는가? 일본군 중장까지 진급했던 홍사익 장군은 전범으로 체포되기 직전까지 평생 자신의 봉급 절반을 독립군 가족 생활비로 보냈다. 그리고, 일본 패망 직전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과 더불어 일본군 공격작전을 시도하려 하였다. 과연 그는 엉터리 감별사들이 주장하듯 친일파였는가?
위 동영상에서 2004년 3월 2일 김희선 의원(반민특별법 법안 발의자)이 "세계 여러 나라처럼 우리도 과거의 잘못을 반성의 자세로 충실하게 기록함으로써 역사의 교훈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떠든다. 이어 박한용 연구원(민족문제연구소)이 "실제로 보면 알겠지만 군 계통에서 일선에서 독립군을 토벌했던 사람들은 하사관이라든지 소대장급들입니다"라고 지껄인다. 박한용의 이 말에 맞장구치며 넉달 후 7월 14일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은 "농사꾼이 논에서 잡초 뽑을 때 가리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http://imnews.imbc.com//news/2008/politic/article/1101364_5670.html ). 그러자, 과거에 신기남 의원 부친 신상묵씨로부터 고문을 당했던 어른들이 신기남 의원은 일본 헌병 오장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언하였으며, 아래의 그의 친일 문건도 공개되었다. 연해주의 조선족 역시 김희선 의원 부친 김일련은 만주국 특무경찰이었다고 증언하였으며, 그 사실 역시 문서로 확인되었다.
이외에도 열린우리당의 이미경 의원, 정동영 의원, 유시민 의원 등의 조상들이 모두 친일파였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2005년 8월 29일 윤경로(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 위원장)이 말을 이렇게 바꾼다. "악질적인 그런 헌병대 출신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하사관으로까지 할 수 있는 건 너무 확대하는 것 아니냐." "농사꾼이 논에서 잡초 뽑을 때 가리지 않는다"더니 자기네 조상들이 악질적인 헌병대 출신들로 밝혀지자 친일파 감별의 잣대가 확 바뀐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과연 좌빨들에게는 객관적인 기준이라는 것이 있는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시대에나 화가의 일은 그 시대상을 화폭에 남기는 것이다. 조선시대 화가가 인터넷 시대를 화폭에 담지 않고 그 시대의 민속 풍류를 그렸다 해서 수구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운보 김기창 화백이 1945년 봄에 일본군 모습을 그렸기 때문에 친일파라는 논리이면 그 당시 일본군복 입고 내선일체 선전 연극 공연을 하던 김대중(아래 사진의 붉은 원)의 모습에 대한 좌빨들의 해석은 무엇인가?
지난 5일 민족문제연구소는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의 박정희 만주군관학교 지원 기사를 공개하며 박정희를 친일인명사전을 공개하였는바, 이 신문은 만주국 국민이 보는 신문도 일본인이 보는 신문도 아니라, 민족문제연구소측이 침략자로 규정하는 만철 기관지였다. 아마 민족문제연구소는 김구 선생과 그의 광복군 동지들의 증언을 더욱 신뢰해야 할 것이다.
그 기사가 공개되기 훨씬 오래 전에 이미 광복군 관계자들이 박정희가 그때 만주군관학교 진학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만주군관학교에 입학 하려던 청년 박정희는 1939년 3월 어느날 김정균을 통해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났다. 김정균은 상해임정에서 비밀첩보원을 하던 김구 선생님의 수족과도 같은 분이었다. 그때 박정희는 20대 초반으로 아주 적극적인 사고를 지닌 청년이었다고 김정균의 일기는 적는다. 신영학을 통해 박정희를 소개받은 김정균은 이 청년이 뚜렷한 역사 의식과 조국 광복의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것을 보고는 김구 선생에게 소개를 하였다. 그때 박정희를 처음본 김구 선생은 박정희를 1시간동안 부동자세로 세워 두었다. 김구 선생이 본 박정희는 키는 크지 않았지만 부릅뜬 두 눈을 보고는 멈칫 놀랐다고 박정희가 나간후에 김정균에게 말했다고 한다.
박정희 청년은 1시간 부동자세로 서 있었지만 자세하나 흐트러 지지 않았다. 김구 선생이 박정희 청년을 세워두고 외출을 하여 40여분만에 돌아 왔으나 박정희는 그때까지 부동 자세로 서 있었다. 그때 김구 선생은 박정희가 서 있는 자리에 비밀 표시를 해 두었다. 그랬는데 박정희는 그자리에서 1cm도 움직이지 않고 1시간을 서 있었다. 감탄한 김구 선생은 박정희 청년이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후에 그곳에 모인 광복군 동지들에게 말했다. 이를 계기로 김구 선생은 박정희를 예의 주시하였다.
김정균의 일기 또한 하나의 사료이다. 그리고 모든 사료의 신빙성은 역사학적 해석의 과제이다. 김구 선생과 청년 박정희가 1939년 3월 어디서 상면하였는지 우리는 상세히 알 수 없으나, 그럼에도 이 자료가 민족문제연구소 주장보다 훨씬 신뢰성이 있다. 박한용 연구원은 지난 12일의 100분 토론 때 박정희가 광복군에 지원안하고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하였으므로 친일파라는 주장을 하였는데, 이는 코미디였다. 1939년에는 아직 광복군이 창설되지 않았을 때였다. 민족문제연구소 주장은 그 연대가 명백한 오류이니 1939년 3월 김구 선생이 박정희에게 만주군관학교 지원을 권유했다는 김구 선생 최측근의 기록이 훨씬 더 신빙성이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 사료의 중요성은 박정희 비밀광복군설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비밀광복군은 실재하였는가? 비밀광복군은 정말로 있었다. CIA가 정말로 있는가? 정말로 있다. 무엇이 미국 CIA의 전신이었는가? 1942년 6월 창설된 OSS(미국 전략첩보국)이었으며, 그 핵이 바로 광복군 OSS였다. 이것이 팩트이다.
비밀광복군설의 ‘원전(原典)’은 1967년 박영만(사망)씨가 쓴 소설 ‘광복군’이다. 광복군 출신인 박씨는 이 책에서 박정희의 일제 말기 행적을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소상히 묘사했다. ‘광복군’에 따르면 만주국군 소위 박정희는 1945년 2월 광복군에 가담한 뒤 뜻이 맞는 한국인 동료들과 부대 안에 비밀조직을 만들고 훈련 때면 사병들에게 우회적 방식으로 독립사상도 고취했다. 이어 광복군 제3지대장이던 김학규 장군으로부터 “부대를 장악하고 있다가 적당한 기회에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대기하던 중 일제가 예상보다 빨리 항복하는 바람에 거사 시기를 놓쳤다는 게 골자다.
“대통령이란 그분의 위치가 위치인만큼 오해를 사기 쉬워 도에 넘칠 정도로 그분에 관한 것을 파고들었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직접 본인의 교열까지 받았다. 박정희 동지는 격무 속에서도 원고를 자세히 읽어 주셨으며, 몇 군데 고쳐 달라는 당부까지 하셨다.”고 저자는 ‘광복군’ 서문에 썼다. 비밀광복군설에 반대하는 자들은 박 대통령이 책을 받으신 다음 ‘내가 어디 광복군이냐. 누가 이 따위 책을 쓰라고 했냐’고 화를 내셨다는 풍문을 인용한다. 그러나 대통령이 비밀광복군설 공개를 원하지 않으셨다고 해서 비밀광복군이 없었는가? 미 국방성이 몇 해 전에 광복군 OSS 상륙훈련작전 영상물을 공개한데 이어, 지난 해에도 미 국립문서보관서가 광복군 OSS 요원들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자료를 공개했다.
자, 모든 독립운동 사료들이 광복군 OSS 첩보전이 미국의 이승만 박사와 상해임정의 김구 선생 주도 하에 진행되었으며, 그 첩보전 실행의 핵이 박정희였다고 밝히고 있다. 자, 여기 아래에 만주국군 소위 시절의 박정희의 사진이 있다. 독립운동 사료의 시각에서 보면 이 사진은 박정희가 광복군 OSS 첩보요원이었던 시절의 모습이다. 일본 편에서도 박정희를 일본군으로 간주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였다는 물증이 바로 박정희는 일본육사 다닐 때도 일본육사 정규생도가 아니라는 표시로 만주군 복장을 해야 했다는 사실이다. 영친왕은 일본육사시절 당연히 일본 사관생도 복장을 해야 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아래의 복장으로 유학생반에서 따로 수업을 받아야 했다. 박정희는 일본군은 아니었으되 일본군 내부를 깊숙히 알고 첩보전을 벌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김일성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만주에서 태어나고 만주에서 중학교를 중퇴한 김일성은 자신을 만주인으로 여기고 있었으며 만주의 공산화를 위해 투쟁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북한판 용비어천가, 즉 항일투쟁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어째서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이 광복군 OSS 첩보작전에 협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기를 원치 않으셨을까? 그 단서는 1960년대에 항일 관련 여러 유적지 정비를 지시하며 하신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경제적인 부흥을 하려면 일본하고 경제적인 여러 가지 유대를 가져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제일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의식(意識)을 가지고 일본을 대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역사상 일본이 우리를 침략한 역사의 교훈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즉,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의 명예보다 경제적 국익을 우선시하셨던 것이다. 미국 역시 광복군 OSS 작전을 반세기가 넘도록 극비로 하였던 이유가 있었다면 필시 박 대통령에게도 그 이유가 있지 않았겠는가? 무엇보다도 경제적 국익을 위한 문제가 있었다. 무지한 좌빨들은 누가 대통령이었다고 해도 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처럼 착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였다. 만약 누가 대통령이라도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면 지금 왜 그토록 많은 빈곤국이 존재하는가? 자원 없고, 기술 없고, 자본 없고, 시장 경험 없는 나라에서는 경제 발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국제정치학적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이 1960년대 초의 한국의 냉엄한 현실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경제 첩보전이 있었다. 1960년대의 일본은 군사 첩보전의 대상이 아니라 산업 첩보전의 대상이었다. 대다수의 후진국들이 영구 후진국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산업기술이 없기 때문이다. 산업기술을 선진국으로부터 이전해 오더라도 비싼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다. 자, 어느 후진국에서 삼성에 비싼 로열티를 내고 반도체 기술을 이전해간다고 해도 비싼 로열티를 내면서 반도체 시장에 뛰어들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는 박정희 대통령이 매일 산업 첩보전으로 최첨단 기술을 이전해 오셨기 때문에 산업이 발전하고 선진국이 될 수 있었다. 만약 한국의 산업첩보 전략이 미리 알려졌었다면 일본은 물론 미국도 방어하였을 것이다. 일본은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방어하였을 것이며, 미국은 국제정치의 역학관계 때문에 방어하였을 것이다.
여기 1945년 만주국군 소위 박정희는 비밀광복군이었음을 서술한 세 권의 책이 있다. 왼편부터 ‘광복군’(1967년), ‘창군전사’(1980년), ‘육사 졸업생’(1984년).
바로 1967년에 출판되었던 도서 "광복군" 중 핵심 내용을 보여주는 두 페이지 사진이 있다. 이 책의 내용을 간추리면 만주국군 소위 박정희는 1945년 2월 광복군에 가담한 뒤 뜻이 맞는 한국인 동료들과 부대 안에 비밀조직을 만들고 훈련 때면 사병들에게 우회적 방식으로 독립사상도 고취했다. 이어 광복군 제3지대장이던 김학규 장군으로부터 “부대를 장악하고 있다가 적당한 기회에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대기하던 중 일제가 예상보다 빨리 항복하는 바람에 거사 시기를 놓쳤다는 것이다. 소설 형식의 이 증언이 입증되기 전까지는 소설로만 간주되었다. 그러나 최근 미 국방성과 미 국립문서보관소가 광복군 OSS 자료들을 연달아 공개하면서 독립군 역사를 새로 써야 할 만큼 이 책의 내용이 정확하다.
좌빨들은 만주에 독립군이 존재하였던 것처럼 주장해 왔으나 이것은 엄청난 거짓말이다. 1920년의 청산리전투를 끝으로 독립군은 러시아령 자유시로 이동하였으나, 러시아의 조종을 받은 조선인 공산당 무장단체의 공격을 받아 태반이 사살되었으며, 생존자들은 여운형이 배심원이었던 재판으로 처형되거나 강제노역소로 끌려가 독립군이 괴멸되었다. 이후 독립군은 다시 형성되지 못했다. 그리고 1940년에 창설된 광복군 소재지는 만주가 아니라, 중국 임시수도 중경이었다. 그리고 광복군의 주요 임무는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정규전이나 게릴라전이 아니라, 첩보전이었다. 태평양전쟁 참전국으로서의 임정 광복군의 주요임무는 비밀광복군, 즉 광복군 OSS를 통한 첩보전이었음을 광복군이 쓴 역사소설 "광복군"은 증언한 것이며, 그것이 실제 역사적 사실이었음이 이제 명확하게 입증된 것이다.
만약 비밀광복군 박정희의 역할이 없었다면 조선은 영영 독립하지 못하였을지 모른다. 미국은 몇차례 일본과의 휴전을 고려해야 하는 기로에 있었다. 왜 미국이 한국전쟁 때 북한과 휴전하였는가? 유엔군의 승리할 승산이 있음을 보여주는 첩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때는 그 출처가 박정희로 거슬러올라가는 첩보가 있었다. 이른바 관동군 주력부대가 남양군도로 이동하였다는 첩보였다. 연합국으로서는 이 중대한 첩보가 절실히 필요했으나, 오로지 광복군 OSS를 통해서만 이 첩보를 얻을 수 있었고, 광복군은 박정희를 통해서만 이 첩보를 얻을 수 있었다. 박정희는 일본군의 고급기밀을 빼올 수 있는 유일한 조선인 만군 군관이었다.
신징(新京) 교외 제3독립수비대 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관동군 대좌 아리카와 게이이치(有川圭一)가 바로 박정희의 대구사범학교 시절 교련 스승이었으며,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진학이 가능하도록 도와준 후원자였으며, 박정희에게 독립운동을 격려하며 관동군 기밀을 빼주었다. 아리카와 대좌가 남양군도로 출전하면서 박정희에게 이런 유언을 편지로 보냈다: <이 전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일본은 망할 것이요, 조선은 독립할 것이다. 나는 죽으러 가나 자네는 자네 조국을 위해 살게>. (그 편지에서 말한 대로 그는 1945년 6월 오키나와에서 전사하였음.) 일본은 연합국이 전혀 눈치챌 수 없게 관동군 주력부대를 남양군도로 빼돌리고 있었는데, 이 군사기밀을 아리카와 대좌가 박정희에게 누설하였으며, 이 정보가 광복군에게로, 광복군을 통해서 미국으로 전해져, 미국이 광복군과 합동으로 상륙작전을 준비하는 동시에 러시아에 태평양 전쟁 참전을 요구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항복을 선언하였을 때 미국이 깜짝 놀랐다. 원자폭탄 두 개를 투하하였으나, 일본이 그토록 쉽게 항복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천황이 항복으로 마음을 정하게 된 일차적 이유는 원자폭탄의 위력이 아니라, 관동군이 러시아군의 침공에 별 저항도 못하고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일본 군부는 최후의 일인까지 결사저항 국민명령을 내리려 했는데, 천황이 선수쳐 항복선언을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박정희를 통해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입수하여 연합국에 전달한 관동군 고급군사기밀 첩보에 어떤 중대한 의미가 있었는지 분명하지 아니한가!
박정희 비밀 광복군설을 뒷받침하는 근거자료가 백범일지에도 실려있다. 아래는 백범 김구 선생의 『 아. 그리운 조국 산하』에서 발췌한 단락이다:
<<『 1944 년』
이 모양으로 광복군이 창설되었으나 인원도 많이 못하여 얼마동안을 유명무실하게 지내다가 문득 한 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50 여명 청년이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정청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들은 우리 대학생들이 학병으로 일본군대에 편입되어 중국 전선에 출전하였다가 탈주하여 안휘성 부양의 광복군 제 3 지대를 찾어온것을 지대장 김 학규 장군이 보낸 것이었다. - 중략-
이 것이 인연으로 우리 광복군이 연합국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미국의 OSS 를 주관하는 서젠트 박사는 광복군 제 1 지대장과 합작하여 서안에서 윔츠 중위는 제 3 지대장 김 학규와 합작하여 부양에서 우리 광복군에서 비밀 훈련을 실시 하였다... - 이하 중략 - >>
그리고, 이 광복군 OSS, 즉 비밀광복군에 대한 김구의 이 기록의 사실성은 미 국립문서보관소가 지난 해(2008년)에 공개한 자료로 다시 한번 확증되었다. 이기청 (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방송인)도 증언하기를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안돼서 한 젊은이가 마지막 임정요인이었던 백강 조경환 선생 면목동 집으로 찾아와 큰절을 하였다. 동행한 사람이 “대통령이십니다” 하기에 보니 박정희였다. 그는 "박 대통령은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입니다'하는데,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놀랍고도 반가웠습니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보충해야 할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박 중좌의 도움은 컸다고 합니다"라고 말하는데 사실이었다. 미 국립문서보관소가 최근 공개한 자료가 밝히듯이 미국 OSS는 그때 광복군에 200명을 더 모병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었다 (http://www.sundayjournalusa.com/article.php?id=14994&page=4&s=&o=&k= ). 광복회 자료에 따르면 이때 탈출한 학병과 일본군 조선인들 중에서 탈출 학병 12 명과 징병학병 탈출 160 명을 광복군 제 1 지대 3 구대에 편성 배치하였고, 제 3 지대에도 50 여명의 탈출 학병들을 충칭으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 역시 미국 국립문서보관서 기록과 일치하며, 박정희가 만주군 보병8단에서 근무한 시기와도 일치한다.
이승만 박사가 창설에 큰 기여를 한 OSS(미국 전략정보국) 아시아 지부 광복군 OSS의 첩보전 만군 소위 박정희가 큰 기여를 했다는 증언은 김구 계열의 광복군 인사들만 한 것이 아니다. 우사 김규식의 비서실장이었던 송남헌이 김대중 정권 시절 출간한 아래의 도서 "해방 3년사를 보라."
이 책 26쪽은 이렇게 기록한다. "1945년 2월 9일 만주군 제8단위문하기 위해 [신 태양 악극단] 찾아 왔다. 박 정 희 소위는 조선에서 新太陽樂劇團(단장 金 履 泰)이 보병 제 8단을 위문 공연차 왔을 때 樂劇團의 잡부로 변장하여 일하던 李 龍 基(光復軍特殊要員)와 접선하여 광복군 사령관 李靑天 장군의 밀서와 함께 光復軍 第3支隊 金 學 奎의 지령을 받았다." 이것은 1967년 광복군이 출간한 도서 "광복군"과 일치하는 증언이다. 그리고, 독립운동가 출신 송남헌은 좌파 진영에서는 누구보다도 독립운동사에 해박한 인물이었다.
좌빨들은 좌파 사하계의 거장 송남헌의 이 기록을 부정하지 못한다. 이 기록을 부정할 때 좌파 사학계는 무너지기 때문이다.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에서 러시아 붉은군대의 지원을 받아 독립군을 괴멸시켰던 여운형, 해방을 앞둔 시기에는 학도병 지원 권유 격문을 썼던 여운형이 그래도 독립운동가로서의 생색을 내려면 건국동맹 활동을 인정받아야 한다. 그런데, 군사행동을 위한 건국동맹의 실제적 주역은 만주건국동맹이었고, 만주건국동맹이란 여운형을 추종하던 만주국군 군관 박승환이 만주군에 군적을 둔 조선 출신 장교를 상당수 규합, 만주 일대에 산재한 독립전하의 연계를 도모하고 인근 주재 부대와 통합하여 1개 사단의 병력으로 국내 진공을 계획한 것을 말한다. 이것이 실제 있었던 사실이었다.
미국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할 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8월 중 한반도 침투작전을 실시하는 것이 중요하였으며, 이 작전을 위해 조선인 병력이 절실히 필요했다. 미국은 광복군에 병력 추가 모집을, 그리고 본토에 침투 작전시 협력할 연계 세력을 확보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는 민족주의 계열이냐 공산주의 계열이냐를 따질 겨를이 없이 조선인 독립운동 단체들이 모두 힘을 합쳐야 할 시기였다. 그래서, 광복군 사령관 이청천 장군이 박정희 만군 소위에게 국내 진공 계획에 참여하라고 밀서로 지령을 보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면, 어째서 박정희가 비밀광복군이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여태 모르고 있었는가? 언론의 자유가 넘치는 미국에서조차 미주 한인 80 여명이 첩보기관 OSS에서 근무했다는 사실을 60 여년간 감추어 왔다. 일본에서도 맥아더 장군의 요구로 일본 정부가 원산상륙작전에 참전케 한 일본인들이 국익을 위해 그 사실을 평생 비밀로 하여야 했다. 극동 CIA 전신인 비밀광복군의 임무는 비밀을 지키는 것이었다. (1961년 5월 극동 CIA 담당자가 혁명 주체는 박정희 장군이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미국의 입장은 군사혁명 지지를 기정사실화한 사실을 상기해 보라.) 박정희의 상관이었던 문용채는 비밀조직으로서 만주국군 내에 비밀광복군이 있었다는 사실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임을 이렇게 증언한다:
<<"1945년 4월 박승환,박준호,이상열,최창륜과 나는 [조선건국동맹 만주분맹 군사
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때 봉천비행단에는 박임항과 최창륜이 있었는데 최창륜
이 2기 대표로 박정희를 추천했다.나의 계급은 만군대위였고 그는 소위 시절이
다. 박정희는 반벽산(半壁山)에서 근무했고 나는 그곳에서 가까운 금주헌병대에
있었기 때문에 몇번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박정희는 술자리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신랄히 비판하며 오래가지 못할 것
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조국광복의 방략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이역땅에서 향수를 되씹으며 서로의 회포를 털어 놓았다. 그는 만군 제 8단의 일
본인 장교들의 감시를 피해가며 조국광복운동에 참여했다.
박정희가 만군에 있을때 조선의 독립군과 연관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고 학자
들 간에 논란이 있는 모양이나 그당시 우리는 비밀활동을 했기 때문에 겉으로 드
러나지는 않았고 [조선건국동맹]이라는 것은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국내파 독립
운동단체이다.>>
이외에도 모든 증언들이 박정희가 비밀광복군이었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으며, 당시 태평양전쟁 전개 과정과, 이를 둘러싼 일ㄹ련의 사건들 및 모든 사건의 정황들이 만주국군 보병 8단 박정희 소위는 비밀광복군이었음을 입증한다. 적어도 만주국군 내에 조선인 장교단이 주축이었던 만주건국연맹이 있었다는 사실을 좌파 학자들은 부정할 수 없다. 이것을 부정하면 여운형은 완전 부정되며, 여운형이 완전 부정되면 좌파의 역사 논리는 설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 박정희는 일본군이 아니었음을 입증한 김대중
만주국군 군관 박정희는 광복군 첩보장교였다
들통난 민족문제연구소의 혈서 기사 조작
조작으로 판명된 盡忠報國 滅私奉公 혈서설
북한 534부대 지휘관의 5.18사건 고백(1): 자폭서약
위 동영상에서 2004년 3월 2일 김희선 의원(반민특별법 법안 발의자)이 "세계 여러 나라처럼 우리도 과거의 잘못을 반성의 자세로 충실하게 기록함으로써 역사의 교훈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떠든다. 이어 박한용 연구원(민족문제연구소)이 "실제로 보면 알겠지만 군 계통에서 일선에서 독립군을 토벌했던 사람들은 하사관이라든지 소대장급들입니다"라고 지껄인다. 박한용의 이 말에 맞장구치며 넉달 후 7월 14일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은 "농사꾼이 논에서 잡초 뽑을 때 가리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http://imnews.imbc.com//news/2008/politic/article/1101364_5670.html ). 그러자, 과거에 신기남 의원 부친 신상묵씨로부터 고문을 당했던 어른들이 신기남 의원은 일본 헌병 오장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언하였으며, 아래의 그의 친일 문건도 공개되었다. 연해주의 조선족 역시 김희선 의원 부친 김일련은 만주국 특무경찰이었다고 증언하였으며, 그 사실 역시 문서로 확인되었다.
이외에도 열린우리당의 이미경 의원, 정동영 의원, 유시민 의원 등의 조상들이 모두 친일파였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2005년 8월 29일 윤경로(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 위원장)이 말을 이렇게 바꾼다. "악질적인 그런 헌병대 출신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하사관으로까지 할 수 있는 건 너무 확대하는 것 아니냐." "농사꾼이 논에서 잡초 뽑을 때 가리지 않는다"더니 자기네 조상들이 악질적인 헌병대 출신들로 밝혀지자 친일파 감별의 잣대가 확 바뀐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과연 좌빨들에게는 객관적인 기준이라는 것이 있는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시대에나 화가의 일은 그 시대상을 화폭에 남기는 것이다. 조선시대 화가가 인터넷 시대를 화폭에 담지 않고 그 시대의 민속 풍류를 그렸다 해서 수구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운보 김기창 화백이 1945년 봄에 일본군 모습을 그렸기 때문에 친일파라는 논리이면 그 당시 일본군복 입고 내선일체 선전 연극 공연을 하던 김대중(아래 사진의 붉은 원)의 모습에 대한 좌빨들의 해석은 무엇인가?
지난 5일 민족문제연구소는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의 박정희 만주군관학교 지원 기사를 공개하며 박정희를 친일인명사전을 공개하였는바, 이 신문은 만주국 국민이 보는 신문도 일본인이 보는 신문도 아니라, 민족문제연구소측이 침략자로 규정하는 만철 기관지였다. 아마 민족문제연구소는 김구 선생과 그의 광복군 동지들의 증언을 더욱 신뢰해야 할 것이다.
그 기사가 공개되기 훨씬 오래 전에 이미 광복군 관계자들이 박정희가 그때 만주군관학교 진학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만주군관학교에 입학 하려던 청년 박정희는 1939년 3월 어느날 김정균을 통해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났다. 김정균은 상해임정에서 비밀첩보원을 하던 김구 선생님의 수족과도 같은 분이었다. 그때 박정희는 20대 초반으로 아주 적극적인 사고를 지닌 청년이었다고 김정균의 일기는 적는다. 신영학을 통해 박정희를 소개받은 김정균은 이 청년이 뚜렷한 역사 의식과 조국 광복의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것을 보고는 김구 선생에게 소개를 하였다. 그때 박정희를 처음본 김구 선생은 박정희를 1시간동안 부동자세로 세워 두었다. 김구 선생이 본 박정희는 키는 크지 않았지만 부릅뜬 두 눈을 보고는 멈칫 놀랐다고 박정희가 나간후에 김정균에게 말했다고 한다.
박정희 청년은 1시간 부동자세로 서 있었지만 자세하나 흐트러 지지 않았다. 김구 선생이 박정희 청년을 세워두고 외출을 하여 40여분만에 돌아 왔으나 박정희는 그때까지 부동 자세로 서 있었다. 그때 김구 선생은 박정희가 서 있는 자리에 비밀 표시를 해 두었다. 그랬는데 박정희는 그자리에서 1cm도 움직이지 않고 1시간을 서 있었다. 감탄한 김구 선생은 박정희 청년이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후에 그곳에 모인 광복군 동지들에게 말했다. 이를 계기로 김구 선생은 박정희를 예의 주시하였다.
김정균의 일기 또한 하나의 사료이다. 그리고 모든 사료의 신빙성은 역사학적 해석의 과제이다. 김구 선생과 청년 박정희가 1939년 3월 어디서 상면하였는지 우리는 상세히 알 수 없으나, 그럼에도 이 자료가 민족문제연구소 주장보다 훨씬 신뢰성이 있다. 박한용 연구원은 지난 12일의 100분 토론 때 박정희가 광복군에 지원안하고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하였으므로 친일파라는 주장을 하였는데, 이는 코미디였다. 1939년에는 아직 광복군이 창설되지 않았을 때였다. 민족문제연구소 주장은 그 연대가 명백한 오류이니 1939년 3월 김구 선생이 박정희에게 만주군관학교 지원을 권유했다는 김구 선생 최측근의 기록이 훨씬 더 신빙성이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 사료의 중요성은 박정희 비밀광복군설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비밀광복군은 실재하였는가? 비밀광복군은 정말로 있었다. CIA가 정말로 있는가? 정말로 있다. 무엇이 미국 CIA의 전신이었는가? 1942년 6월 창설된 OSS(미국 전략첩보국)이었으며, 그 핵이 바로 광복군 OSS였다. 이것이 팩트이다.
비밀광복군설의 ‘원전(原典)’은 1967년 박영만(사망)씨가 쓴 소설 ‘광복군’이다. 광복군 출신인 박씨는 이 책에서 박정희의 일제 말기 행적을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소상히 묘사했다. ‘광복군’에 따르면 만주국군 소위 박정희는 1945년 2월 광복군에 가담한 뒤 뜻이 맞는 한국인 동료들과 부대 안에 비밀조직을 만들고 훈련 때면 사병들에게 우회적 방식으로 독립사상도 고취했다. 이어 광복군 제3지대장이던 김학규 장군으로부터 “부대를 장악하고 있다가 적당한 기회에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대기하던 중 일제가 예상보다 빨리 항복하는 바람에 거사 시기를 놓쳤다는 게 골자다.
“대통령이란 그분의 위치가 위치인만큼 오해를 사기 쉬워 도에 넘칠 정도로 그분에 관한 것을 파고들었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직접 본인의 교열까지 받았다. 박정희 동지는 격무 속에서도 원고를 자세히 읽어 주셨으며, 몇 군데 고쳐 달라는 당부까지 하셨다.”고 저자는 ‘광복군’ 서문에 썼다. 비밀광복군설에 반대하는 자들은 박 대통령이 책을 받으신 다음 ‘내가 어디 광복군이냐. 누가 이 따위 책을 쓰라고 했냐’고 화를 내셨다는 풍문을 인용한다. 그러나 대통령이 비밀광복군설 공개를 원하지 않으셨다고 해서 비밀광복군이 없었는가? 미 국방성이 몇 해 전에 광복군 OSS 상륙훈련작전 영상물을 공개한데 이어, 지난 해에도 미 국립문서보관서가 광복군 OSS 요원들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자료를 공개했다.
자, 모든 독립운동 사료들이 광복군 OSS 첩보전이 미국의 이승만 박사와 상해임정의 김구 선생 주도 하에 진행되었으며, 그 첩보전 실행의 핵이 박정희였다고 밝히고 있다. 자, 여기 아래에 만주국군 소위 시절의 박정희의 사진이 있다. 독립운동 사료의 시각에서 보면 이 사진은 박정희가 광복군 OSS 첩보요원이었던 시절의 모습이다. 일본 편에서도 박정희를 일본군으로 간주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였다는 물증이 바로 박정희는 일본육사 다닐 때도 일본육사 정규생도가 아니라는 표시로 만주군 복장을 해야 했다는 사실이다. 영친왕은 일본육사시절 당연히 일본 사관생도 복장을 해야 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아래의 복장으로 유학생반에서 따로 수업을 받아야 했다. 박정희는 일본군은 아니었으되 일본군 내부를 깊숙히 알고 첩보전을 벌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김일성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만주에서 태어나고 만주에서 중학교를 중퇴한 김일성은 자신을 만주인으로 여기고 있었으며 만주의 공산화를 위해 투쟁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북한판 용비어천가, 즉 항일투쟁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어째서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이 광복군 OSS 첩보작전에 협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기를 원치 않으셨을까? 그 단서는 1960년대에 항일 관련 여러 유적지 정비를 지시하며 하신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경제적인 부흥을 하려면 일본하고 경제적인 여러 가지 유대를 가져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제일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의식(意識)을 가지고 일본을 대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역사상 일본이 우리를 침략한 역사의 교훈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즉,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의 명예보다 경제적 국익을 우선시하셨던 것이다. 미국 역시 광복군 OSS 작전을 반세기가 넘도록 극비로 하였던 이유가 있었다면 필시 박 대통령에게도 그 이유가 있지 않았겠는가? 무엇보다도 경제적 국익을 위한 문제가 있었다. 무지한 좌빨들은 누가 대통령이었다고 해도 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처럼 착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였다. 만약 누가 대통령이라도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면 지금 왜 그토록 많은 빈곤국이 존재하는가? 자원 없고, 기술 없고, 자본 없고, 시장 경험 없는 나라에서는 경제 발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국제정치학적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이 1960년대 초의 한국의 냉엄한 현실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경제 첩보전이 있었다. 1960년대의 일본은 군사 첩보전의 대상이 아니라 산업 첩보전의 대상이었다. 대다수의 후진국들이 영구 후진국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산업기술이 없기 때문이다. 산업기술을 선진국으로부터 이전해 오더라도 비싼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다. 자, 어느 후진국에서 삼성에 비싼 로열티를 내고 반도체 기술을 이전해간다고 해도 비싼 로열티를 내면서 반도체 시장에 뛰어들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는 박정희 대통령이 매일 산업 첩보전으로 최첨단 기술을 이전해 오셨기 때문에 산업이 발전하고 선진국이 될 수 있었다. 만약 한국의 산업첩보 전략이 미리 알려졌었다면 일본은 물론 미국도 방어하였을 것이다. 일본은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방어하였을 것이며, 미국은 국제정치의 역학관계 때문에 방어하였을 것이다.
여기 1945년 만주국군 소위 박정희는 비밀광복군이었음을 서술한 세 권의 책이 있다. 왼편부터 ‘광복군’(1967년), ‘창군전사’(1980년), ‘육사 졸업생’(1984년).
바로 1967년에 출판되었던 도서 "광복군" 중 핵심 내용을 보여주는 두 페이지 사진이 있다. 이 책의 내용을 간추리면 만주국군 소위 박정희는 1945년 2월 광복군에 가담한 뒤 뜻이 맞는 한국인 동료들과 부대 안에 비밀조직을 만들고 훈련 때면 사병들에게 우회적 방식으로 독립사상도 고취했다. 이어 광복군 제3지대장이던 김학규 장군으로부터 “부대를 장악하고 있다가 적당한 기회에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대기하던 중 일제가 예상보다 빨리 항복하는 바람에 거사 시기를 놓쳤다는 것이다. 소설 형식의 이 증언이 입증되기 전까지는 소설로만 간주되었다. 그러나 최근 미 국방성과 미 국립문서보관소가 광복군 OSS 자료들을 연달아 공개하면서 독립군 역사를 새로 써야 할 만큼 이 책의 내용이 정확하다.
좌빨들은 만주에 독립군이 존재하였던 것처럼 주장해 왔으나 이것은 엄청난 거짓말이다. 1920년의 청산리전투를 끝으로 독립군은 러시아령 자유시로 이동하였으나, 러시아의 조종을 받은 조선인 공산당 무장단체의 공격을 받아 태반이 사살되었으며, 생존자들은 여운형이 배심원이었던 재판으로 처형되거나 강제노역소로 끌려가 독립군이 괴멸되었다. 이후 독립군은 다시 형성되지 못했다. 그리고 1940년에 창설된 광복군 소재지는 만주가 아니라, 중국 임시수도 중경이었다. 그리고 광복군의 주요 임무는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정규전이나 게릴라전이 아니라, 첩보전이었다. 태평양전쟁 참전국으로서의 임정 광복군의 주요임무는 비밀광복군, 즉 광복군 OSS를 통한 첩보전이었음을 광복군이 쓴 역사소설 "광복군"은 증언한 것이며, 그것이 실제 역사적 사실이었음이 이제 명확하게 입증된 것이다.
만약 비밀광복군 박정희의 역할이 없었다면 조선은 영영 독립하지 못하였을지 모른다. 미국은 몇차례 일본과의 휴전을 고려해야 하는 기로에 있었다. 왜 미국이 한국전쟁 때 북한과 휴전하였는가? 유엔군의 승리할 승산이 있음을 보여주는 첩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때는 그 출처가 박정희로 거슬러올라가는 첩보가 있었다. 이른바 관동군 주력부대가 남양군도로 이동하였다는 첩보였다. 연합국으로서는 이 중대한 첩보가 절실히 필요했으나, 오로지 광복군 OSS를 통해서만 이 첩보를 얻을 수 있었고, 광복군은 박정희를 통해서만 이 첩보를 얻을 수 있었다. 박정희는 일본군의 고급기밀을 빼올 수 있는 유일한 조선인 만군 군관이었다.
신징(新京) 교외 제3독립수비대 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관동군 대좌 아리카와 게이이치(有川圭一)가 바로 박정희의 대구사범학교 시절 교련 스승이었으며,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진학이 가능하도록 도와준 후원자였으며, 박정희에게 독립운동을 격려하며 관동군 기밀을 빼주었다. 아리카와 대좌가 남양군도로 출전하면서 박정희에게 이런 유언을 편지로 보냈다: <이 전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일본은 망할 것이요, 조선은 독립할 것이다. 나는 죽으러 가나 자네는 자네 조국을 위해 살게>. (그 편지에서 말한 대로 그는 1945년 6월 오키나와에서 전사하였음.) 일본은 연합국이 전혀 눈치챌 수 없게 관동군 주력부대를 남양군도로 빼돌리고 있었는데, 이 군사기밀을 아리카와 대좌가 박정희에게 누설하였으며, 이 정보가 광복군에게로, 광복군을 통해서 미국으로 전해져, 미국이 광복군과 합동으로 상륙작전을 준비하는 동시에 러시아에 태평양 전쟁 참전을 요구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항복을 선언하였을 때 미국이 깜짝 놀랐다. 원자폭탄 두 개를 투하하였으나, 일본이 그토록 쉽게 항복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천황이 항복으로 마음을 정하게 된 일차적 이유는 원자폭탄의 위력이 아니라, 관동군이 러시아군의 침공에 별 저항도 못하고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일본 군부는 최후의 일인까지 결사저항 국민명령을 내리려 했는데, 천황이 선수쳐 항복선언을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박정희를 통해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입수하여 연합국에 전달한 관동군 고급군사기밀 첩보에 어떤 중대한 의미가 있었는지 분명하지 아니한가!
박정희 비밀 광복군설을 뒷받침하는 근거자료가 백범일지에도 실려있다. 아래는 백범 김구 선생의 『 아. 그리운 조국 산하』에서 발췌한 단락이다:
<<『 1944 년』
이 모양으로 광복군이 창설되었으나 인원도 많이 못하여 얼마동안을 유명무실하게 지내다가 문득 한 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50 여명 청년이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정청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들은 우리 대학생들이 학병으로 일본군대에 편입되어 중국 전선에 출전하였다가 탈주하여 안휘성 부양의 광복군 제 3 지대를 찾어온것을 지대장 김 학규 장군이 보낸 것이었다. - 중략-
이 것이 인연으로 우리 광복군이 연합국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미국의 OSS 를 주관하는 서젠트 박사는 광복군 제 1 지대장과 합작하여 서안에서 윔츠 중위는 제 3 지대장 김 학규와 합작하여 부양에서 우리 광복군에서 비밀 훈련을 실시 하였다... - 이하 중략 - >>
그리고, 이 광복군 OSS, 즉 비밀광복군에 대한 김구의 이 기록의 사실성은 미 국립문서보관소가 지난 해(2008년)에 공개한 자료로 다시 한번 확증되었다. 이기청 (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방송인)도 증언하기를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안돼서 한 젊은이가 마지막 임정요인이었던 백강 조경환 선생 면목동 집으로 찾아와 큰절을 하였다. 동행한 사람이 “대통령이십니다” 하기에 보니 박정희였다. 그는 "박 대통령은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입니다'하는데,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놀랍고도 반가웠습니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보충해야 할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박 중좌의 도움은 컸다고 합니다"라고 말하는데 사실이었다. 미 국립문서보관소가 최근 공개한 자료가 밝히듯이 미국 OSS는 그때 광복군에 200명을 더 모병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었다 (http://www.sundayjournalusa.com/article.php?id=14994&page=4&s=&o=&k= ). 광복회 자료에 따르면 이때 탈출한 학병과 일본군 조선인들 중에서 탈출 학병 12 명과 징병학병 탈출 160 명을 광복군 제 1 지대 3 구대에 편성 배치하였고, 제 3 지대에도 50 여명의 탈출 학병들을 충칭으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 역시 미국 국립문서보관서 기록과 일치하며, 박정희가 만주군 보병8단에서 근무한 시기와도 일치한다.
이승만 박사가 창설에 큰 기여를 한 OSS(미국 전략정보국) 아시아 지부 광복군 OSS의 첩보전 만군 소위 박정희가 큰 기여를 했다는 증언은 김구 계열의 광복군 인사들만 한 것이 아니다. 우사 김규식의 비서실장이었던 송남헌이 김대중 정권 시절 출간한 아래의 도서 "해방 3년사를 보라."
이 책 26쪽은 이렇게 기록한다. "1945년 2월 9일 만주군 제8단위문하기 위해 [신 태양 악극단] 찾아 왔다. 박 정 희 소위는 조선에서 新太陽樂劇團(단장 金 履 泰)이 보병 제 8단을 위문 공연차 왔을 때 樂劇團의 잡부로 변장하여 일하던 李 龍 基(光復軍特殊要員)와 접선하여 광복군 사령관 李靑天 장군의 밀서와 함께 光復軍 第3支隊 金 學 奎의 지령을 받았다." 이것은 1967년 광복군이 출간한 도서 "광복군"과 일치하는 증언이다. 그리고, 독립운동가 출신 송남헌은 좌파 진영에서는 누구보다도 독립운동사에 해박한 인물이었다.
좌빨들은 좌파 사하계의 거장 송남헌의 이 기록을 부정하지 못한다. 이 기록을 부정할 때 좌파 사학계는 무너지기 때문이다.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에서 러시아 붉은군대의 지원을 받아 독립군을 괴멸시켰던 여운형, 해방을 앞둔 시기에는 학도병 지원 권유 격문을 썼던 여운형이 그래도 독립운동가로서의 생색을 내려면 건국동맹 활동을 인정받아야 한다. 그런데, 군사행동을 위한 건국동맹의 실제적 주역은 만주건국동맹이었고, 만주건국동맹이란 여운형을 추종하던 만주국군 군관 박승환이 만주군에 군적을 둔 조선 출신 장교를 상당수 규합, 만주 일대에 산재한 독립전하의 연계를 도모하고 인근 주재 부대와 통합하여 1개 사단의 병력으로 국내 진공을 계획한 것을 말한다. 이것이 실제 있었던 사실이었다.
미국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할 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8월 중 한반도 침투작전을 실시하는 것이 중요하였으며, 이 작전을 위해 조선인 병력이 절실히 필요했다. 미국은 광복군에 병력 추가 모집을, 그리고 본토에 침투 작전시 협력할 연계 세력을 확보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는 민족주의 계열이냐 공산주의 계열이냐를 따질 겨를이 없이 조선인 독립운동 단체들이 모두 힘을 합쳐야 할 시기였다. 그래서, 광복군 사령관 이청천 장군이 박정희 만군 소위에게 국내 진공 계획에 참여하라고 밀서로 지령을 보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면, 어째서 박정희가 비밀광복군이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여태 모르고 있었는가? 언론의 자유가 넘치는 미국에서조차 미주 한인 80 여명이 첩보기관 OSS에서 근무했다는 사실을 60 여년간 감추어 왔다. 일본에서도 맥아더 장군의 요구로 일본 정부가 원산상륙작전에 참전케 한 일본인들이 국익을 위해 그 사실을 평생 비밀로 하여야 했다. 극동 CIA 전신인 비밀광복군의 임무는 비밀을 지키는 것이었다. (1961년 5월 극동 CIA 담당자가 혁명 주체는 박정희 장군이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미국의 입장은 군사혁명 지지를 기정사실화한 사실을 상기해 보라.) 박정희의 상관이었던 문용채는 비밀조직으로서 만주국군 내에 비밀광복군이 있었다는 사실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임을 이렇게 증언한다:
<<"1945년 4월 박승환,박준호,이상열,최창륜과 나는 [조선건국동맹 만주분맹 군사
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때 봉천비행단에는 박임항과 최창륜이 있었는데 최창륜
이 2기 대표로 박정희를 추천했다.나의 계급은 만군대위였고 그는 소위 시절이
다. 박정희는 반벽산(半壁山)에서 근무했고 나는 그곳에서 가까운 금주헌병대에
있었기 때문에 몇번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박정희는 술자리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신랄히 비판하며 오래가지 못할 것
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조국광복의 방략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이역땅에서 향수를 되씹으며 서로의 회포를 털어 놓았다. 그는 만군 제 8단의 일
본인 장교들의 감시를 피해가며 조국광복운동에 참여했다.
박정희가 만군에 있을때 조선의 독립군과 연관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고 학자
들 간에 논란이 있는 모양이나 그당시 우리는 비밀활동을 했기 때문에 겉으로 드
러나지는 않았고 [조선건국동맹]이라는 것은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국내파 독립
운동단체이다.>>
이외에도 모든 증언들이 박정희가 비밀광복군이었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으며, 당시 태평양전쟁 전개 과정과, 이를 둘러싼 일ㄹ련의 사건들 및 모든 사건의 정황들이 만주국군 보병 8단 박정희 소위는 비밀광복군이었음을 입증한다. 적어도 만주국군 내에 조선인 장교단이 주축이었던 만주건국연맹이 있었다는 사실을 좌파 학자들은 부정할 수 없다. 이것을 부정하면 여운형은 완전 부정되며, 여운형이 완전 부정되면 좌파의 역사 논리는 설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 박정희는 일본군이 아니었음을 입증한 김대중
만주국군 군관 박정희는 광복군 첩보장교였다
들통난 민족문제연구소의 혈서 기사 조작
조작으로 판명된 盡忠報國 滅私奉公 혈서설
북한 534부대 지휘관의 5.18사건 고백(1): 자폭서약
댓글목록
오리모가지님의 댓글
오리모가지 작성일
즤 애비 잘못한 일이나 지껄이지 않고!!!!!!!!!
왜 남 이야기는 저렇게 잘하누???????
남 이야기라고??????
날 도둑년같으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