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正熙 大統領 二十八週忌 追悼式에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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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渤海人 작성일11-11-22 11:25 조회1,355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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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正熙 大統領 二十八週忌 追悼式에 다녀와서
(이 글은 2007년 10월 26일 국립묘지 추도식 현장에서 김정렴 비서실장께서 불과 2달 전인 8월 15일 영부인 육영수 여사님의 추도식에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추모객들이 한나라당의 대통령 경선 때 박근혜 의원이 패배하자 썰물처럼 빠져버린 모습을 보시고 허탈해 하시면서 “자네는 책 만드는 사람이니 느낀 바를 글로 써보라”고 말씀하셔서 쓴 글입니다. 앞머리의 글은 4년이 지난 지금과는 맞지 않아 생략하였습니다.) … 중략 …
4. 조국에 충성은 고통스럽습니다.
“님"의 서거로 인한 국민들의 충격이 안정되어 갈 무렵인 12월초 고향후배이자 제 집사람과는 초등학교 동기인 김오랑 소령이 용산에 있는 신갈농민학교 서울사무실(종묘수출입회사 및 농산물가격조사실)에 찾아왔습니다. “정병주 사령관은 안녕하시냐”고 안부를 물으니 박통이 돌아가신 후 매일 저녁 양주를 한 병씩이나 마시면서 “주군(主君)이 없는 세상에 살아서 무엇 하느냐고 이상한 말씀을 한다”고 했습니다. 당시 김소령은 특전사령관 부관이였습니다.
12월13일 아침, 한남동 순천향병원에서 어떤 군인이 전방에서 지뢰를 밟아 사망했는데 시신확인을 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김오랑 소령이 총맞아 죽은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동작동 국립묘지 29번구역 장교묘에 고향후배는 잠들어 있습니다. 정병주 장군은 12.12사태 얼마후 소나무에 목매어 자살했고 역시 국립묘지 장군묘역에 잠들어 있습니다. 1980년 1월13일 서빙고의 국립호텔에 다녀왔습니다. 집사람에게는 제주도 강연 간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무서운 「국보위」가 해산되고 전두환 장군이 체육관 선거로 제11대 대통령이 된 8월27일 이후 청와대에서 종전처럼 농산물 재배공급과 검역도 하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 해 가을 김장배추와 양념을 준비하여 성북구 사저에 격리 생활하는 큰 영애님(박근혜)께 가져다 드렸습니다.
다음날 보안사로부터 “그곳에 드나들면 죽인다”는 경고를 받았고 “나는 이제 민간인이다. 죽이려면 죽여라” 고 맞받아 싸웠습니다. 청와대 한식요리장 윤병옥씨는 저와 같은 꼴을 당하고 병들어 돌아가셨습니다. 그 해 겨울은 정말 추웠습니다. 큰 영애님의 사저 관리관인 박한영씨(박정희 장군시절 당번병)가 만나자는 연락에 찾아 갔더니 비단금침 한 벌을 주었습니다. 웬 이불이냐고 물으니 큰 영애님께서 “덮을 일도 없을 것이니 기흥농장의 이선생 애들에게 주라고 하더라. 아버지가 궁색해서 집을 잘 지어 주지 못하여 슬레이트 지붕에 시멘트 블럭으로 지었으니(1972년 5월 대통령 자신의 기거용으로 설계한 새마을 주택1호를 말함) 얼마나 춥겠느냐며 이선생 가족 걱정을 하면서 이곳은 위험하니 앞으로는 오지 말라고 하더라.” 그날 저는 저 가녀린 여인을 먼 곳에 계신 “님”을 대신하여 주군(主君)으로 모시기를 맹세하였습니다.
全斗煥 대통령의 제5공화국시절 문교부 장관과 비서실장을 지낸 먼 촌수로 일가 되시는 이규호(李奎浩) 박사 덕분으로「신갈농민학교」는 자영농과 학생들의 연수기관으로 지정되었고 훗날 ‘86아세안게임’이후 조선족 등 해외 동포들의 의무(사상)교육기관으로도 활용되었고 전문대학 내인가를 받았지요.
1983년 겨울 돌아오지 못하는 편도여권으로 중남미 국가에 새마을운동을 전파시키고 북한대사관을 철수시키는 공작 업무차 기약 없는 길을 떠났습니다. 하이티ㆍ온두라스ㆍ과테말라ㆍ코스타리카ㆍ파나마, 싱글로브 장군이 이끄는 우익 게릴라 콘트라가 활동하는 니카라과 등, 저는 다른 요원들과는 달리 죽지 않고 풍토병이 걸려 살아왔고 후방물자담당관인 장덕희 회장(첼리스트 장한나양의 할아버지)은 한국에 후송된 후 운명했습니다. 저는 이때 “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조국에 충성하는 길이 해외농업개척임을 찾아내었습니다.
1984년 봄부터 1987년 7월까지「신갈농민학교」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교육당국으로부터 일년이상 수료생에 대하여 “비정규 전문대학 학력인정” 증서를 발급하는 권리를 부여 받아 상당수의 수료생들이 일본의 각 현(縣)에있는 농업자(農業者)대학에 2학년으로 편입학 하였고, 미국정부의 이민국에서는 신갈농민학교가 발급하는 “농업용수기능장” 소지자에 한하여 농업이민을 허가 해주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혜택이었습니다. 이민브로커들이 기능장 한 장과 25평 아파트 한 채와 맞바꾸자고 찾아올 정도였지요. 농업용수 기능장 소지는 우선 전기·산소용접기술과 동력펌프수리, 트랙터운전 및 수리, 자동차면허는 물론이고 스프링쿨러 표준형 34개 거취 설계도면과 이동식 가설도 할 줄 알아야 발급했기 때문에 기능장을 가지고 미국에 이민간 수료생들 모두가 실력을 높게 평가 받았습니다.
이즈음 저는 전경환씨가 회장으로 있는 “새마을운동 중앙본부”에 초청강의를 나가고 있었는데 “청와대와 새마을본부가 음모하여 당신 학교와 시스템을 뺏으려고 하니 경계하라”고 문교부 당국자가 알려주었으나 주위어른들과 의논해 보니 두들겨 맞고 빼앗기기 보다는 그냥 바치고 혜택을 요구하는 것이 좋다는 권고에 새마을 운동 중앙본부 부설 영종도「사회지도자 교육원」에 전부이관 시켜주었으나 그곳에서 교육생들에게 너무 강도 높은 심신단련교육으로 사상자가 여러 명 생겨 얼마 가지 못하고 당국으로부터 자격 박탈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 이후 정부는 미안했던지 껍데기뿐인「신갈농민학교」에 외무부가 관장하는 해외농업이민교육기관으로 채택해 주었으나 얼마 후 “님”으로부터 나라발전에 보태 쓰라고 물려받은 농장과 학교 부지를 통째로 빼앗으려는 촉수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어 1987년말 급하게 처분하여 10억5천4백만원을 받았습니다. 5천4백만원은 양도소득세로 내고 10억원중 2억원은 빚 갚고 나머지 8억원중 2억으로 전라도 구례와 고흥에 연수원부지를 확보하고 남은 6억원은 「국제농업 인력개발원」을 설립하여 본격적인 해외농업개척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1988년 1월초 노태우대통령 당선자가 적극적으로 지원할 테니 용기를 내라고 격려해 주어 월간잡지「상업농경영」이라는 당시에는 생소한 용어를 잡지이름으로 하여 1988년 2월에 창간하고 지구촌을 누비면서 해외지사 설립을 함과 동시에 한국 농민들의 해외 이주는 일본 외무성처럼 파격적인 지원 없이는 불가능함을 알고 1989년말 재단을 농림부로 이관하여 「국제농업개발원」으로 개칭하였고 2년 후 11개 국가에 해외개발 거점을 마련하였습니다. (2007년 12월 현재는 32개 해외지사 있음)
5. 渤海의 海東盛國을 위하여
1989년 봄 구소련 대통령 고르바쵸프가 국제 공모한「국영 유리온실농장 작부 체계도」에 ‘국제농업인력개발원장 이병화’ 이름으로 응모하여 당당히 일등 하였고, 저는 소련정부 초청으로 시베리아 알타이 평원에 있는 비스크시 핵무기연구소가 운영하는 유리온실에서 고르바쵸프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그는 저에게「극동러시아지역 대통령 농업경제 자문위원」이라는 직함을 주었습니다.
이때부터 소련 전역을 돌아다녔고 고려인들을 만났습니다. 1990년 8월 처음으로 연해주를 갔고 제 인생에 성장 이후 두 번째 은사인 “프리모리스키 국립농업아카데미” 총장인 A.A 데민 박사를 만났습니다. 그는 저에게 “연해주가 바로 당신이 찾아 다닌 「한민족 해외식량영토」구축지임을 지적해주었고, 이곳은 옛 발해 땅이고 1937년 이전에는 고려인들이 농사짓는 곳이다. 내가 적극적으로 도와줄 테니 우선 내 밑에서 석ㆍ박사과정을 시작하라”고 허가해 주었고 러시아를 못하는 저를 위해 일본어와 영어ㆍ고려말(한국어)로 강의를 듣도록 조치해 주었습니다. 당시는 북한출신 교환교수들이 많았습니다. 연해주 방문 한달 후인 9월30일 한ㆍ소 국교수립이 되어 철의 장막인 소련이 한국인에게 문을 열었습니다. 이것의 대가로 차관 14억7천만불이 제공되었고 연이어 15억3천만불이 제공되려는 찰라 소련은 붕괴되고 러시아 연방이 승계하여 이듬해인 1991년 12월7일 한ㆍ러 국교수립이 되었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자문위원 직책도 자동 승계되어 연해주를 포함한 극동러시아 지역의 활동영역이 훨씬 넓혀졌습니다.
1992년 10월 구소련 고르바쵸프 대통령은 러시아 엘친 대통령과 합의된 사항이라면서 한ㆍ소 수교때 빌려준 차관 14억7천만불과 연해주 달레네골스키 지역(제주도 넓이 3배, 광산지역)을 서로 바꾸자는 제의에 따라 제가 현장조사를 하였고, 농지가 없어 거부하고 농지가 있는 다른 지역을 물색과정에서 고르비의 실권(失權)으로 이후로는 거론치 못했으나, 저는 연해주에 차관 상환금 연계나 한국의 투자금으로 식량 안보영토 구축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1993∼94년도 사이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주민 3,800여명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고려인들의 갈등이 심각함을 알았습니다. 내용인즉, 1945년 8월15일 2차세계대전 종전후 일본영토인 남사할린이 소련에 편입되어 졸지에 소련사람이 된 사할린 동포들과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했다가 연해주로 재이주해 온 고려인, 고향이 공산주의 북한 땅인 고려인과 자유민주주의 남한 땅인 고려인 등 4부류의 고려인들은 물과 기름처럼 화합되지 못하였습니다. 이들을 융합하여 고려인 조직체를 활용한 식량기지 구축은 불가능하여 한국의 영농기업이 진출하는 “3위 일체 공생농업(이것은 한국의 자본과 기술, 북한의 노동력, 러시아의 지원이 결합하는 것을 말함)”을 추진하여 고려인들을 포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이것을 논문으로 제출하여 농업경영학박사(칸디닥트) 받았고, 이 논문은 러시아 국가정책으로 채택(1999. 5. 20.)되어 다시 경제학박사(독토르) 학위를 받았습니다. 1995년 봄부터 한국의 많은 기업과 단체들을 연해주 농업에 투입시켰으나 익숙치 못한 러시아 법령과 자연환경, 그리고 가장 큰 문제인 자금력에 고전하고 있을 때 이 소문을 들은 전두환 前대통령은 11월23일 “나도 연해주에 가서 자네를 돕겠다”면서 63억을 투자지원 했으나 송금 직전 김영삼 대통령에게 압류당했고, 이듬해 8월 권영해 안기부장은 그 동안의 추진사항을 듣고 자신이 직접 남북한 식량기지 사업을 하겠다고 저와 약속했으나 북한의 위조달러 사건으로 우리 측 정보요원 한 명이 10월1일 살해 당하자 사업은 잠정 중지되었고, 1997년 가을에 불어 닥친 IMF 한파는 국가위기 상황으로 전개되어 이 사업을 추진하는 저 역시 큰 곤경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1998년 3월 국민의 정부 국정원장으로 취임한 이종찬씨는 다행스럽게도 김대중 대통령을 설득하여 연해주에서 한국 기업이 농사지은 곡물을 수매하여 지원하는 방안을 마련해 주어 저는 대통령(DJ) 임기 5년 동안 28차례 러시아 열차에 곡물을 싣고 북한 전지역에 실어 날랐습니다.
1998년 가을 연해주에서 농사지은 쌀 두 가마니를 한국에 가져와 떡을 만들어 10월26일 당신께옵서 잠들고 계신 동작동 국립묘지 영전에 “연해주 쌀로 빚은 떡입니다.”라고 글을 써 붙이고 절을 올렸지요. 현충원 원장과 의장대 및 참배객 모두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날 현충원 관계자 모두가 “당신의 충성심에 지하에 계신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기뻐할 것”이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존경하는 “님”이시여!
「남ㆍ북한 식량영토 기지구축」은 이제 결실을 눈앞에 두고 90%의 고개를 넘어 남은 10%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대순진리회」라는 민족종교 지도자께서 제가 안내한 연해주 흥개(興凱)호 평원일대와 우수리 평야 등에 500억원을 투자하여 제주도 넓이 2배되는 농지를 확보하여 식량기지를 구축하였습니다. 이제 그곳에 기왕 살고 있는 현지 주민인 러시아인ㆍ고려인들과 건물과 모든 부동산을 포함한「고ㆍ러 연해주 농업개발 협력지구」를 남·북한과 러시아가 함께하여 서명만 하면 됩니다. 저는 이것의 해결을 위해 고양이 목에 방울 달듯이 북한 김정일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 그리고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 3인이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도록 지난 5년 동안 러시아 전문가들과 노력했으나 김정일의 무리한 욕심으로 좌절되어 지금 저는 무척 힘들고 고단합니다.
조국에 충성하고 “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이처럼 고통스러울 줄은 미쳐 몰랐습니다. 연해주 식량기지 구축에 투자하는 대순진리회의 지도자(이유종 종무원장)도 저처럼 고단합니다. 이분은 정의롭지 못한 무리들과 3천억원이나 되는 금전사건으로 대법원에 재판중 입니다. 승소는 당연합니다만 재판이 하루 빨리 끝나야 3천억원이 계속 연해주로 투입되어 명실상부한 「발해 해동성국」을 건설할 것입니다.
“님”이시여! 한민족 식량 영토를 구축하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힘을 주십시요. “님”께서는 1977년 중·남미 농업조사단 출장 신고식때 “한국의 농업은 해외로 가야 산다”라고 강조 말씀하셨습니다. 철의 장막이 없어진 연해주는 과거 고구려와 발해 땅이었습니다. 이곳이 바로 한국농업의 미래입니다. 저는 “님”께서 곱게 자라라고 칭찬해주시던 아들 녀석을 연해주에 보낸 지 벌써 8년째 입니다. 세상에 자식을 힘들게 하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만 “님”을 향한 우리 부자의 충성심이 바로 조국과 민족에 충성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고 아울러 우리 집의 가훈(家訓)이기 때문입니다.
“님”이시여! 28주기 추도식에 다녀와서 이렇게 글을 올리는 저를 굽이 살펴 주십시요. 「고ㆍ러 연해주 농업개발 협력지구」가 지정 선포될 때 그 곳의 쌀로 빚은 떡을 다시 영전에 올릴 것을 약속드리며 글을 끝내겠습니다.
삼가 명복을 비옵니다.
“故 박정희 대통령 각하를 추모하며 이병화 올림”
2007.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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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손님의 댓글
오른손 작성일님이 가신지가 벌써 28년이나 되었나요? 엊그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전 국민과 온 세계가 울었던 그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