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H운동의 명(明)과 암(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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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渤海人 작성일11-11-14 13:28 조회1,490회 댓글4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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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H운동의 명(明)과 암(暗)
渤 海 人
2011. 11. 14
지난 11월 11일은 농민의 날(얼마 전에 농업인의 날로 개칭함)이었다. 이날의 행사에 참석한 국무총리는 치사 후 주곡의 자급자족을 위해 노력하는 이들에게 포상을 하던 바로 그 시간, 진보 좌익 농민들은 여의도 국회의사당과 과천종합청사 앞에서 한ㆍ미 FTA 반대 집회를 했다. FTA가 되면 미국 농산물이 한국시장을 범람하며 농민을 다 죽인다고 주장하는 그들의 점심 식사는 밥이 아닌 햄버거와 코카콜라였다. 이것은 미국을 원수로 여기는 종북 진보 좌빨 교수와 정치인들이 그들의 자녀들은 미국 유학 보내고 그곳에서 생활토록 영주권을 받아주는 행동과 무엇이 다를까?
4-H운동은 위장의 식민지화에 기여했다
4-H운동은 미국에서 시작되었고 이것은 한마디로 낙후된 농촌부흥운동이다. 한국은 해방 이후 미군장교 엔더슨에 의해 도입되었고 6ㆍ25전쟁 중인 1952년 정부 시책으로 채택되었다. 운동의 주요골자는 ⌜智(지)=Head, 德(덕)=Heart, 勞(노)=Hands, 體(체)=Health⌟를 바탕으로 근면ㆍ자조ㆍ협동하여 가난과 문맹을 퇴치하자는 오늘날의 새마을운동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 특징인데 사실은 미국이 무상원조하는 밀가루로 식생활을 개선하여 쌀 대신 밀가루로 위장의 개조화가 숨겨진 4-H운동의 전략이다.
1954년 이전에는 완전 공짜였으나 이후부터는 PL480法에 의한 잉여농산물의 원조식 차관 형태로 지원되었다. 이러한 4-H운동은 비단 한국 뿐만 아니고 아세아권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한 정권인 일본, 태국, 대만,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한국, 필리핀 등 7개 국가에 꼭 같은 시기에 시작되었다. 지금 이 시간 아세아 권역에서 4-H운동이 왕성히 계속되는 나라는 한국 뿐이고 태국은 간판만 붙어 있고 다른 나라는 간판도 사라진 지 오래다. 현재 지구촌에 80여개 국가에 4-H운동 사무실이 존재하고 있다.
먹는 것으로 간접침략하는 행위는 비열하다고 호통친(?) 소련 수상 흐루시초프
1959년 미국 부통령 ‘리차드 닉슨’의 소련 방문 답방으로 워싱턴을 방문한 흐루시초프는 그때 미국 동부 농촌을 시찰하였고 미국에서 활동하는 KGB요원으로부터 앞으로는 총칼의 전쟁보다 식량의 전쟁이 더 위협적일 것이라는 보고를 듣는다. 이듬해인 1960년 뉴욕에 있는 유엔총회의 기조연설에서 흐루시초프는 공산ㆍ사회주의 국가가 자유민주주의 국가보다 훨씬 우수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자기도취에 흥분하여 신고 있던 구두를 벗어 연단을 내려치며 연설을 끝낸 후 퇴장하면서 객석으로 돌아와 미국측 대표들이 앉아있는 좌석을 쳐다보면서 남아도는 밀가루로 가난한 국가들을 회유하는 짓은 비열하다고 호통을 쳤다. 1961년 4월 소련 최초의 유인 인공위성으로 우주 여행을 하고 돌아온 ‘가가린’의 보고를 받고 “위대한 공산주의 소련연방은 이제 아세아 권역의 동맹국가들에게 자유민주주의 종주국인 미국보다 훨씬 앞선 기술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이제 우리는 동맹국가들에게 미국처럼 돈 받는 원조가 아닌 공짜로 가난한 동맹국에 식량을 지원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이리하여 소련 사람들은 먹지도 않는 쌀농사를 짓기 위해 연해주 지역 초대형 논농장 개발 프로젝트가 시작되었고 면적은 무려 80만ha 중 1차로 6만4천ha가 흐루시초프 실각 전에 완공되어 그들의 동맹국인 북한, 미얀마, 월맹, 라오스, 캄보디아, 네팔, 방글라데시 등 7개 국가에 공짜로 쌀 공급이 시작되었다.
이때 흐루시초프는 연설에서 “미국은 아세아 사람들이 먹지도 않는 밀가루를 공급하지만 우리 소련 연방은 소련인민들은 먹지 않지만 아세사인들을 위해 그들이 즐겨먹는 주식인 쌀농사를 지어 보내주었다. 미국이 인도주의냐 소련이 인도주의냐 전체 인민은 판단할지어다”라고 했다.
세월은 흘러 소련으로부터 쌀을 무상원조받던 미얀마와 베트남(월맹), 라오스, 캄보디아 등은 쌀 수출국가가 되어 소련의 원조가 필요없게 되었고 오로지 북한 김일성만 소련을 쳐다보게 되었으나 고르바초프에 의한 소련연방붕괴와 러시아 연방의 시장 경제 자유민주주의 국가체제 전환으로 식량에 굶주리는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최첨단 수리안전답인 연해주 쌀농장 14개 중 11개 농장을 필자가 주선한 결과 한국인들이 49년 장기 소유 운영하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위장의 식민지가 더 위험하다
4-H운동을 선두로 하여 “빵이 밥보다 더 영양가가 높다”, “혼ㆍ분식 장려하여 국민 건강 이바지하자” 등의 구호와 함께 요리교실은 밀가루 위주의 빵과 과자 만들기 일색이었다. 이러한 밀가루 홍보행위의 결과 2010년 현재 한국의 밀 자급율은 1.7%뿐이나 밀 수입량은 사료용 포함하여 쌀 생산량보다 훨씬 많은 4백90만톤을 미국 등으로부터 수입한다. 국민 1인당 연간 빵과 국수 등 식용으로 소비되는 밀가루는 약 34kg정도로 쌀 소비량의 2분의 1정도이나 2025년 쯤에는 밀가루의 쌀 소비량은 같아지고 이후는 밀가루 소비가 쌀보다 많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쌀은 남아돌아 처치곤란이고 밀가루는 모자라서 미국적 곡물 메이저에게 고개 숙여 수입하는 이러한 현상은 한국 뿐만 아니다. 오히려 일본과 대만은 한국보다 밀가루 소비량이 훨씬 많고 이들 역시 국제경쟁력으로 자국산 밀가루 생산은 포기한 지 오래다.
한국의 경우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를 만들어 국산 밀가루 소비를 장려하였지만 이미 국민들이 미국산 ‘강력분 밀가루’에 입맛이 길들어져 국내산 통밀가루는 외면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미국으로부터 잉여농산물을 공급받던 7개 아세아 국가들 중 필리핀을 제외한 대부분이 쌀은 남아돌고 밀가루는 모자라는 기이한 현상에 처해있다. 일본과 대만의 경우 밀가루 빵에 길들어진 국민들에게 쌀가루 빵을 아무리 권장해도 씨알이 먹히지 않아 애를 먹는 것은 우리의 입장에서도 남의 일이 아니다.
식량은 공공재(公共財)다. 완전한 자유무역에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사례다. 위장의 식민지가 주권의 식민지보다 더 위험하다는 논리도 존재한다.
고르비는 “미국의 시장경제원리는 위대하다”고 했다
역사가들은 “밥을 먹는 민족은 수성(守城)을 하지만 빵을 먹는 민족은 공격(攻擊)을 한다” 또 “밥은 마을을 만들지만 빵은 길을 만든다”라고 했다.
1989년 고르비는 연해주 주지사의 쌀농장들의 경작 포기에 대한 보고를 받고 “흐루시초프는 시장경제를 모르고 손수하기만 했다. 쌀을 원조받던 국가들의 자급율 재고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반면에 미국은 밥을 먹는 국가들의 인민들 위장을 빵을 먹도록 개조하여 영원히 식량의 종속화로 만들었다. 얼마나 위대하냐”라면서 “자유시장경제의 탁월한 술수에 감탄한다”고 했다.
한편 같은 시기 미국 대통령은 ⌜뉴욕청과 상조회 한국인의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백악관을 방문한 한국인 대표단과 기자들에게 “미국은 네덜란드에 밀 1톤을 160달러를 받고 12일을 운송하여 6개월 어음을 받는데 네덜란드 꽃장사들은 카사블랑카 백합 1단(20포기 1단으로 무게는 2kg)을 오전에 비행기로 싣고 와서 오후에 헌츠포인트 꽃시장에서 160달러를 현금으로 바로 받아 간다. 미국 농민 뺨치는 것이 네덜란드 상인”이라고 했다.
이때 동석한 필자 일행에게 레이건 대통령은 이제 한국 농업도 상당 수준에 도달했음으로 먹는 농산물은 금방 배가 부르는 유한 소비재이다. 아무리 보아도, 들어도, 냄새 맡아도, 배부르지 않는 불요불급한 무한성 소비재 중심의 농사를 지으라고 충고해주었다. 영화배우 출신인 레이건의 눈에는 먼 미래세상이 눈에 보이는 모양이라고 필자는 생각했다.
댓글목록
도사님의 댓글
도사 작성일
발해인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러나
주곡자급에 관한 내용에 대하여 현실적인 입장에서는 맞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때의 그 시절의 국민 식습관의 선호도는 미곡위주였으며 또한 화폐가치의 기준이 쌀이였습니다.
또한 쌀과 보리 만으로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국민의 먹거리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정부에서도 궁여지책으로 대안식을 밀가루로 대처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아신다면 먹거리를 이용한 침략(식민지화)하였다는 것은 조금 지나친 내용이라고 생각 되는 군요.
앤더슨 씨야 말로 어느면에서는 자유대한민국에 일찍이 민주주의를 설파하신 선각자라고 말하고 싶군요
4-H의 못토는 知, 德, 勞, 體라고 하지만 서두에 "민주시민의 역량"에 있음을 밝혔습니다.
또한 그들의 지도자적 역량은 새마을 기초운동의 믿거름이 되었던것 역시 부정되어서는 않되는 것입니다.
저는 분명하게 말씀드리고 싶군요.
4-H 운동이나 새마을 운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았다면 더욱 발전된 국민운동으로 승화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군요.
조금의 내용적 차이점이 있으리라 믿으면서 결례가 있었다면 용서 하십시요. 감사합니다.
발해의꿈님의 댓글
발해의꿈 작성일
존경하는 도사님께
미천한 저의 글을 읽어 주시고 지적까지 해 주신 것에 대하여 무한한 감사를 올립니다.
도사님의 글 내용을 보아 저와는 거의 동년배 같아 보입니다.
제가 어릴 때 고향에서 공부하면서 이광수선생의 “흙”과 심훈선생의 “상록수” 소설을 읽고 4-H회원이 되었고 이후 농과대학을 다니면서 원예학과 육종을 배웠습니다.
한국 최초로 아버지를 도와 주한 미군에 기업적 형태의 농산물 납품도 하고 일본에 수출(당근, 연근, 셀러리등) 도 하였지요. 자유당 시절 저의 형 되는 사람은 외무고등고시(요즘의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무부 “미국과장”으로 근무했습니다.
영어가 워낙 유창하여 원조 밀가루 얻으려고 업무시간을 거의 대부분 미국 농무성 문앞에서 구걸하다 싶이 하는 생활을 했다고 했습니다.
5.16군사혁명 후 드디어 밀가루는 사료용 밀기울이 부산물로 나오는 통밀을 원조 받기 시작했습니다. 월남파병을 요청하려 존슨 대통령이 방한 했을 때 형님은 존슨과 박정희 대통령의 통역을 맡았고 이후 박대통령께 잘 보였던지 일약 농림부 농정국장으로 승진했으나 미국에 LP480법 잉여농산물 얻으려 미국 가는 업무는 외무부 있을 때와 다름없었습니다.
이즈음 일본, 대만,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등 식량확보 대표단은 미국 측에 밀보다는 벼를 달라고 요청했고 사실 아칸소, 미시시피, 루지에나 지역의 쌀 생산 농가들은 생산한 벼를 처리 못하여 매일같이 요즘의 한국처럼 데모를 하고 있었고 미시시피강 하구 부두에는 창고가 넘쳐나서 바깥인 노지에 수백만 톤을 야적방치하고 있는 것을 보았고 쌀생산 농민대표들은 대표단 통역인 형님께 밀보다 값싸게 줄테니 미국정부에 벼 또는 쌀을 달라고 요청하라고 통원하였으나 카길등 다국적 기업에 힘이 빼앗긴 농무성은 시원한 대답을 못했다고 했습니다.
당시 우리의 입장에서는 절대적 식량부족으로 기아선상에서 헤매고 있을 때라 밀이건 옥수수건 주는 대로 받을 수밖에 없었고 주는 것도 고마워 시비를 걸 처지는 아니었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4-H운동의 보이지 않는 이면적 배경을 본 것은 71년 말부터 79년 10.26일 박정희 대통령 서거 때까지 모시면서 많은 것을 보았고 PL 480법 잉여농산물에 대한 것을 조사하다보니 4-H운동이 한국농촌부흥에 미친 긍정적 영향이 지대했기 때문에 지금도 존재하고 있지만 부정적 측면도 있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아마도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4-H문제는 지적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 글에 대한 비판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알려드릴 것은 아세아대표단이 미시시피 항구를 다녀간 그 다음날 야적해 놓은 벼는 불이 나서 전부 타버렸고, 벼는 타버려도 형태가 그대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것은 훗날 수경재배 밑바탕 재료가 되었습니다.
요즘은 펄라이트를 이용합니다만 90년대 초반까지 벼를 태운 숯으로 수경재배를 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미국에서는 수경재배라는 신기원을 마련해주었습니다. 형님은 훗날 농림부 차관과 농협과 축협 중앙회장까지 지냈습니다.
도사님께 다시한번 감사를 드리면서 시스템 가족 여러분들도 건승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발해인 올림
김종오님의 댓글
김종오 작성일
발해인 李ㅂㅎ 박사님!
누가 뭐라든 나는 4H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티끌이야 무엇엔들 없겠습니까만......
도사님의 댓글
도사 작성일
발해인님
여름 등산모임에서 처음 뵈었습니다.
저에게는 참으로 좋은 만남이였습니다.
그곳에서 선생님의 소개말씀을 듣고 한번 더 뵙고 싶었습니다.
저는 선생님보다 연하 일 것입니다.
54년생입니다.
선생님 글에 비판을 하고자하는 것은 아닙니다.
70년대와 80년초
정치적 사회적 격동기 속에서 사회교육은 저희세대(농촌의 젊은이)에게 많은 희망을 주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위정자들의 계산된 교육도 일부 있었으리라 생각 합니다만, 스나미처럼 밀려드는 개개인들의 욕구속에서 민주주위의 현실속에 살면서 그 고마움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을 현혹한 민주화라는 위장된 평화전술 속에서 길을 잃은 양때들의 모습처럼 방황하면서도 4-H를 통한 교육은 나름대로 오늘날 자유대한민국의 현 주소를 직시 할 수있는 바탕이 되지 않았나 하는 자부심이 있었기에 말씀 드린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종북 빨갱이들의 중군에는 이재오의 하수인들 세력속에는 4-H출신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정말 가슴아픈 현실입니다.
그 시절에 정부에서 새마을 운동과 더불어 길러진 지도자들을 제대로 관리를 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
그러한 방황속에서 83년 네델란드 총영관에서 계최하는 시사회에 참석하여 처음으로 우르과이라운드를 알게되었으며 이미 여타선진국에서는 이미 모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허탈감을 맛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앉아 있을 수도 없었으며 뒤이어 몰아 닦친 "농촌총각 결혼비관 자살" 그들을 만나면서 좌익세력들이 순수함을 이용하고 있다는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속에도 4-H 출신들이 그렇게 물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현제도 그들은 꿈속에서 살고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며 그들은 자기가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지조차도 모르는 자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조직의 맛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좌익 빨갱이들이 노리는 가장 좋은 먹감인것은 사실입니다.
오늘날 자유대한민국을 파괴하려는 보이지 않는 암적 존재인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은 김대중이가 저들을 위하여 존재했다고 믿고 있으며, 김대중이가 정말로 저들을 사랑한것으로 착가하면서 살고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저들의 씨앗자루를 통채로 외국에 팔아 넘겨도 잘한다고 박수를 친 놈이니 말해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조금 이야기가 길어졌나 봅니다.
선생님께서 참고가 되리믿으면서 올려보았습니다.
저는 지금 자원생물에 대하여 수집과 활용에 대하여 조금씩 노력하고 있습니다.
풍수와 천체물리에 관하여도 나름데로 원고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과 대화를 할 기회가 있다면 대한민국의 농촌현실과 해외농업에 관하여 대화를 나누고싶습니다.
지자체에서 친환경농업이다, 인증제다 등 갖은 내용을 쏟아내것에 환멸을 느껴서 "환경과 농업"이라는 책을 만들어 그들의 허구성을 알려보기도 하였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