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은 공산 주의자 였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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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좋은나라 작성일11-11-13 21:27 조회1,532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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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이글은 일본 山崎一 씨가 일본 월간지 「政界 (1996년 2월호)에 쓴글」을 '이주천"씨가 옮겨쓴 것이다. 이글을 다시 옮겨 쓰는것은 '古. 金大中'씨가 개인적으로 미워서가 아니라 국민들을 속여 나라에 큰 해를 입혀온 사실과 많은 국민들이 이같은 공산주의자 에게 속아 그를 때통령까지 만들어 軍 내부에까지 간첩과 종북자들이 들끓게 하고 지금 FTA가 쇠고기 광우병때 처럼 반대 집회가 들불처럼 번져가는 상황을 보면서 친북(종북)자들이 대통령이 되면 그나마 나라가 망하겠다는 우려에서 이다. 늦은감은 있으나 공산주의자 '김대중'을 보면서 다시는 좌파정권이 들어서 나라를 망치지 못하게 하는것이 국민 모두의 책임이며 도리가 아닌가 생각 되어 2회로 나누어 소개를 하려한다. ( 하 늘 소 리 )
다 시한번 '김대중'의 정체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 12년전 일본 월간지.政界(siekai). 1996년 2월호(pp.114-118) 에 山崎 -씨가쓴 '김대중'광련기사.<김대중은 공산주의 활동가 였다> 전문을 싣기로 했다. 이 기사는 '김대중'의 과거 좌익 행적과 한국전쟁 직후 총살형 위기에 처한 "김대중'의 목숨을 살려준 그의 절친한 친구 '김진하'씨의 생생한 증언이 담겨있다. 이 기사가 한국 주요 언론에서 대서특필 되지 않은 이유가 밝혀져야 한다. 왜 어떤 이유로 97년 대선때 한국 언론들은 '김대중'의 좌익 행적과 사상 검증을 회피했나? 이제는 사회적 공기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한국 언론이 양심 고백을 해야 할때가 되었다. ( 이 주천 )
' 노태우. 전두한' 전 대통령의 연이은 체포로 한국 정계는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당시 '김영삼 현 대통령'은 바야흐로 가장 중요한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사람의 '김대중"씨는 스스로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전 대통령'으로부터 비밀 자금의 제공을 받았다고 시인하고 '김영삼 대통령'도 선거 자금을 명백히 밝히라며 "김영삼'씨와 대결 자세를 분명히했다. 이런 와중에서 '김대중'씨의 숨겨진 경력(經歷)을 폭로하는 충격적인 '뉴스'가 미국으로 부터 날아왔다.
한 국의 민주화 투쟁가로서 알려지고 또 야당의 지도자로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있던 '김대중'씨는 1992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씨에게 패한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많은 한국민으로 부터 그의 용기를 칭찬 받으며 국민의 박수속에 일단은 정계에서 사라졌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김대중'씨는 2년이 채 안되어서 국민과의 약속을 내 팽개치고 1995년 여름 당돌하게 정계에 되돌아와 新政治 國民會議라는 신당을 결성하고 스스로 총재에 취임 함으로써 이번에는 국민들로 부터 반감을 사고 그 행위는 경멸받고 있다.
이 러한 상황에서 '김대중'씨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 부정축재 했다고 일컬어지고 있는 6억5천만 달러 중에서 250만 달러를 받은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에 신당 결성후 정치 생명에 위협을 느까고 있었다. "김대중'씨가 정계 은퇴를 번복하고 국민을 우롱하고 있는것에 대하여 국민들 사이에서는 비판 세력이 급증하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 '김대중'씨 에게 정치적 치명상이 될 새로운 사실이 폭로 되었다.
' 김대중'씨는 1950년의 한국 전쟁시에 '공산 당원'이었던 사실과 당시 체포되어 미해군 함정에서 '총살형'직전 '미군 정보부'에 있던 '김대중'씨와 동향의 친구 助言(조언)덕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사실이 46년만에 미국에서 알려진 것이다. 한국전쟁은 1950년6월25일(일요일)새벽 5시 북한 인민군이 38도선을 돌파하여 한국을 기습 침공 함으로서 시작 되었다. 인민군은 침공 3일만에 수도 서울을 함락 하였다. 한국군은 주말 휴가 중이어서 교전 체제에 들어 가는데 시간이 걸렸고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인민군에 밀려 후퇴 하면서 체제를 정비하였다.
후 퇴하는 중에 경찰과 국군은 후퇴지역에 있던 '공산 당원'과 친공. 또는 동조세력'이 지역에 남아 인민군과 합류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하여 '공산 당원'들을 체포. 살해 하였던바 그 수는 전국에서 수만명에 이른다고 이야기 하고있다. 당시 우리 지역에 서도 보도연맹들 33명이 처형됐다. 군과 경찰이 퇴각 하면서 경기도 이천군 장호원읍 진암리 "백족산 기슬 계곡'에서 처형했다. 당시 내(본인)나이 14세였다. 우리와 절친한 집안(현재 형제들은 미국에 거주)에 아들도 처형됐다.
서 울에서의 전투가 치열함에 따라 한국정부와 미군은 서울을 버리고 대전 이남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6월27일 전라남도 목포에 주둔하고 있던 미 해군에게도 부산으로의 후퇴 명령이 내려졌다. 목포를 본부로 하여 인근 해역에 주둔하고 있던 미 해군과 해병대는 부산으로 후퇴를 준비 하던중 본부 지시에 따라 경찰이 체포한 목포지역의 '공산당 세력' 약450여명을 해군 함정에 태우고 있었다. 함정에 실린 '공산당원'과 그 지지자 들은 부산으로 가는 도중 남해안 해상에서 총살 하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체 포된자들 속에는 '김대중'씨가 끼어 있었던 것이다. 이 총살형 직전의 '김대중'씨를 발견하여 목숨을 살린 사람은 '김대중'씨의 보통학교때 부터 고향의 학우로 舊制5년과 정의 상업학교까지 함께 공부하고 형제와 같이 지내던 '金鎭夏"씨 이다. 만약 '김진하'씨를 만나지 못하였 다면 '김대중'은 바다의 풀 덩굴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비밀이 한국동란 후 46년간 이나 알려지지 않다가 지금에 와서 튀어나온 것은 건강을 해친 '金鎭夏'씨가 '교회 목사'에게 '신앙 고백'을 한것에서 시작 되었다. '김진하'씨가 그 숨겨왔던 가슴속을 털어놓은 것은 미국 와싱턴 DC에서 한국어로 발행되고 있는 주간지 (Washington Today)의 1995년 8월24일자 1면에 크게 보도 되었다.
지금까지도 '김대중'씨의 정적은 '김대중'씨가 청년시절에 '공산당 활동'가 였다고 공격은 해 왔지만 전중전후의 혼란기의 기록이 없기 때문에 확실한 증거를 지적할수 없어 소문의 영역에 머물렀다. 한편 '김대중'씨는 이것을 중상모략 이라고 부인하고 전쟁시 북조선 인민군에 체포되어 죽을뻔 했다고 주장하며 역으로 자신을 공격하는 메카시즘 수법 이라고 반격해왔다. 하지만 '김대중'씨는 철저한 '공산주의자'였고 총살 직전에 기적적으로 생명을 이어 냈다는 새로운 사실이 명백해 지고 현장에서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 당시의 자세한 경위를 증언한 것이다.
아직 한국에서 소개되지 않은 이 증언 사실을 한국민이 알게될때 어떠한 반응을 할것인가?가 큰 관심 거리이다.
◆ 지속 적으로 국민을 우롱해온 '김대중'씨
「Washington Today 」지 는 1페이지 반에거처 '김대중'은 행동하는 야심가 인가? 행동하는 양심가 인가?. 과거의 경력 의혹을 꼭 밝혀라.라는 표제로 K씨의 증언 고백 기사를 크게 보도했다. 이 기사는 미국안보(ANSC)한반도 안보 연구소의 소장인 김영훈(金映勳)박사의 서명(署名)이 들어간 특별 기사 이지만 증언자를 K씨 라고만 밝히고. 그 K씨는 와싱턴 근교에 사는 사람 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K씨는 '김대중'씨가 '공산주의 활동'을 한 까닭에 미 해군함정 상에서 총살형의 위기에 있었음을 발견하고 미군 장교에게 자기의 친한 친구임을 보증하여 '김대중'씨의 목숨을 구하고 있다.
K씨는 '김대중'씨와 동향으로 보통학교와 목포 상업 고등학교의 동창이며 당시 K씨는 미군 정보기관 에 근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후 2~3년전 까지 '김대중'씨와 는 서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고 한다. K 씨의 생생한 증언에 의하면 목포에 주둔하고 있던 미 해군에게 부산으로 후퇴 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것은 한국 전쟁이 일어난지 이틀후인 6월27일 오전 이었다. 그때 '공산주의 자'나 동조자등 수백명이 경찰에 체포되어 미 해군 함정에 수용 되었다. 그중에 K씨는 '김대중'을 발견하고 자기가 갖고있던 메달을 건네면서 '김대중'에게 이름을 호명 하더라도 절대로 대답을 하지 마라. 대답을 하게되면 총살 된다고 말해 주었다.
그 후 미해군 장교가 체포자 명부를 갖고 확인 작업에 들어 갔으며 '김대중'의 이름을 불러도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 장교는 이름이 호명되지 않은자는 앞으로 나오라고 지시 하였으며 '김대중'은 K씨로부터 받은 메달을 손에들고 앞으로 나왔다. 메달에는 미군 정보국 소속 요원을 증명하는 K씨의 이름이 들어 있었고 K씨는 그 장교에게 이사람은 나의 친구로 정보 수집을 위해 메달을 건네 주었다. 이사람은 '김대중'이 아니다 라고 가짜로 신분 보증을 했기 때문에 '김대중'은 총살을 면했다고 한다.
이 러한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씨는 내가 젊었을때는 민족주의 운동에 참가한 일은 있으나 '공산주의 운동'에는 참가한 일이 없다. 경찰을 돕기 위하여 민간해상 경비대를 조직하여 정부에 협력 했다는등 거짓말을 주장해왔다. 그의 저서에도 이와같은 거짓을 기술하고 있다. '김대중'씨는 '공산주의'에 가담하고 있지 않었다는 것을 뒷 받침 하려고 한국전쟁이 발생한 1950년 6월25일 에는 사업 관계로 서울에 있었는데 결국 피난을 가지 못하고 北朝鮮軍이 점령한 서울에 숨어 있다가 수일후 서울을 탈출하여 20일간을 걸어서 400Km 나 되는 목포에 도착 했다고 당시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K씨 증언에 의하여 '김대중'씨의 지금까지의 주장은 허위로 꾸며낸 이야기 라는 것이 백일하에 드러났다고 보도하고 있다.
★ 다음에 2회가 계속 됨니다.
( 하 늘 소 리 )
댓글목록
북극곰님의 댓글
북극곰 작성일
저의 아버지 친구분이 5*18 민주화 항쟁 참변 군인입니다.
그 아저씨 , 그당시 광주가서 시민에게 잡혀서 들었던 소리가
김대중 받들라는 등 결국 거긴 좌파가 자리잡은것 그리고 공산주의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