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선거와 이명박의 운명(5) - < 꼭 읽어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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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좋은나라 작성일11-11-04 19:40 조회1,600회 댓글2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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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趙 甲 濟
프랑스의 左右대결은 內戰을 불렀다
유럽에서 두 번째로
오랜 민주주의 역사를 가진 프랑스이지만 프랑스대혁명 169년 후인 1958년(4공화국 때), 171년 후인 1961년(5공화국
때)에도 군부 쿠데타 시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左右대결은 프랑스에서 시작된 정치행태이다. 左右대결을
정치의 軸으로 하는 한국은 프랑스型에 가까운데, 그렇다면 좌익 폭동과 우익 쿠데타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인가 自問(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제1공화국 등장, 루이 16세 부부 처형,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황제 등극,
1814년 왕정復古, 1815년 워털루 전투로 나폴레옹 몰락, 1830년 7월 혁명으로 새 왕조 등장, 1848년 2월 혁명으로
제2공화국 등장(나폴레옹 조카가 대통령에 당선), 1851년 나폴레옹 3세가 쿠데타로 공화정을 종식시키고 이듬해 황제로 등극,
크리미아 전쟁, 1871년 普佛(보불)전쟁에서 프랑스 패배, 왕정폐지, 제3공화국 등장, 內戰(파리코뮌).
대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82년간의 파란 많은 프랑스 민주화 과정에서는 여러 차례의 전쟁, 두 번의 혁명, 두 번의 쿠데타, 그리고
파리코뮌이란 內戰이 있었다. 이런 소용돌이의 본질은 地主-상공업자-교회-군 장교 중심의 우익과 노동자-농민-지식인 중심의 좌익
사이 계급적 대결이었다.
1870년 독일통일을 노린 프로시아가 프랑스를 친 普佛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가 직접 지휘한
프랑스군은 세단에서 大敗(대패), 항복하였다. 프러시아 軍이 파리로 진격, 포위하자 새 정부는 이듬해 프러시아에 막대한 배상금과
알자스-로렌 지방을 바치기로 하고 항복하였다. 노동자와 지식인들이 중심이 된 시민군은 항복을 거부하고 파리코뮌이란 독자 정권을
수립, 파리를 장악하였다. 베르사유에 본부를 둔 정부군(국회파)은 파리로 진격, 두 달 간의 치열한 시가전 끝에 코뮌 세력을
일소하였다. 약 3만 명(대부분이 파리코뮌 세력)이 죽었다. 빅톨 유고는 “파리는 이 內戰으로 最良의 남녀 10만 명을 잃었다”고
개탄하였다. 이 기간 프러시아는 포로로 잡았던 10만 명의 군인을 프랑스 정부군에 돌려보내, 진압 작전을 도왔다. 계급모순은
민족모순보다 더 강하다는 말이 있다.
파리코뮌의 참사가 일어난 것은 프랑스대혁명 82년 뒤였다. 민주주의가 성숙되기엔
너무 짧은 기간이었다. 2011년 현재 한국의 민주주의는 나이가 63세에 불과하다. 프랑스를 오늘날까지 흔들고 있는 左右 대결이
한반도에선 南北 사이뿐 아니라 남한 내에서도 2重으로 전개되고 있다. 프랑스보다 훨씬 복잡한 內戰구도를 안고 있다. 파리코뮌
같은 사건이 한국에선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하는 이들이 있다면 세계사 공부를 다시 할 필요가 있다.
대혁명 170년이 지나서도 군부 쿠데타 시도
프랑스나 스페인처럼 左右 대결 양상이 강한 나라에선 군대가 늘 중요한 정치적 변수이다. 左右 대결로 사회 혼란이 지속되면
불안해진 국민들이 군대를 國法 질서 수호자로 여기고 정치적 역할을 기대하게 된다. 5·16 군사혁명도 프랑스와 비슷한 類型이다.
1958년 5월 프랑스의 알제리 파견군은 알제리 독립 허용 움직임에 불만을 품고, 사실상 반란을 일으켰다. 자크
마쉬·라울 살랑 장군의 지휘 하에 알제리군은 코르시카 섬을 장악한 뒤 파리로 진격하겠다고 위협하면서 드골의 政界(정계) 복귀를
요구하였다. 軍의 집단행동은 제4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救國의 영웅 드골이 지도자로 돌아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12년간 고향에서 칩거 생활을 하던 드골은 수상 직을 맡는 조건으로 국회에 시한부 비상大權, 대통령 중심제로의 改憲을
요구, 관철시켰다.
1961년 4월엔 드골 대통령이 알제리를 독립시키려 하자 알제리 파견군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본토에 상륙하겠다고 위협하였으나 드골의 對국민-對軍 직접 호소로 좌절되었다.
1968년 5월 학생과 노동자 및 좌익정치 세력의 反정부 시위가 격화되고 대통령 관저인 엘리제궁이 군중으로 포위되는 위기를
맞았을 때 드골은 한때 하야를 고려하였다. 5월 말 드골은 헬리콥터를 타고 독일의 바덴바덴에 있는 駐獨 프랑스군 마쉬 사령관을
비밀리에 방문하였다. 마쉬는 2차 대전 때부터 드골의 부하였고, 알제리 주둔군이 드골을 추대하는 사실상의 반란을 일으킬 때
주모자였다. 마쉬는 드골에 대한 군부 지지를 확인시키면서 下野를 만류하였다. 자신감을 회복한 드골은 파리로 돌아오자 말자 對국민
연설을 통하여 “공산당이 정권 장악을 음모하고 있다”면서 국회 해산과 총선거를 발표하였다. 이 연설 직후 드골을 지지하는 우파
시민들이 파리의 거리로 몰려나왔고 총선에선 드골파가 대승하였다.
1930년대 스페인 內戰 때 군부는 우파 편에 섰다.
1931년의 王政(왕정) 폐지로 공화국이 선포되고, 1936년 선거에서는 좌익세력이 근소한 표차로 정권을 잡았으나, 계급투쟁적인
사회혼란을 수습할 힘이 없었다. 여기에 지역 분리주의 운동까지 가세하였다. 모로코 주둔군 사령관 프랑코가 스페인의 國基 수호를
명분으로 내걸고 집권 좌익세력 타도에 나서면서 4년간 스페인 內戰이 벌어졌다. 유럽의 지식인들이 좌익을 지원하고, 헤밍웨이나
피카소 같은 예술가들이 좌익을 미화하는 바람에 좌익 공화파가 善이고 우익 민족파가 惡이란 인상을 남겼지만, 左右 양쪽이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한 점에선 비슷하다. 좌익 공화파는 교회를 파괴하고 7000명의 신부들과 300명의 수녀들을 학살하였다.
스페인 내전엔 독일과 이탈리아가 우파 편에, 소련이 좌파 편에 서서 개입하였다. 이데올로기적 내전에선 상대를 치기 위하여 外勢를 끌어 들이는 경향이 있다. 계급적 적대감이 민족애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 하 늘 소 리 )
댓글목록
inf247661님의 댓글
inf247661 작성일
!!!
'SPAIN 내전! ,,. 북서AFRICA 해외 주둔군 군사령관이었던 SPAIN 의 '프랑코' 장군은 자국 내에서 '왕당파'와 '빨갱이'들과의 유혈 사태 내전이 발발하자! ,,. 국내로 주둔군을 상륙시켜 우선 빨갱이들을 진압하면서 이탈리아 '뭇쏠리니' 정권의 고정익 항공기 및 차륜식 반무한궤도 장갑차'등을 지원받았는데,
진압이 성공하자 부패/무능한 '왕당파'마저도 붕괴시키고 스스로 총통이 되면서 교묘하게 외교술을 구사;
독일 '히틀러' 및 이탈리아 '뭇쏠리니'와를 공히 배신, 엄정 중립을 선언!
그리하여 참혹한 게계제2차대전으로부터 자국민을 완벽히 보호해 낸 구국의 위대한 인물! ,,. ///
'박'통 때 '백 선엽'대장님을 보은 차원에서 유럽 전권대사로 파격적 임명!
당시 SPAIN '프랑코' 총통에게 SPAIN 전권대사' 겸직 agreement 를 제출하면서 악수하시는 장면은 귀한 사진이었죠. '프랑코'는 1950.6.25 동란 시 중립국이었지만 물자들을 많이 지원햇던 역사적 사실이 있읍니다.
그러하기에 '프랑코'를 비난하는 人들은 120 % 빨갱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
예전에 고론 빨갱이 논설꾼롬들의 글을 많이 접할 수 있~ /// 모조리 쥑여야! ,,. 빠드~득!
하단부는 물론, 문잔을 좀 건너띄기를 해 주세요. 그러면 더욱 읽기에 좋! /// 여불비례.총총
inf247661님의 댓글
inf247661 작성일
★ '훼밍웨이'도 빨갱이었죠. ,,. For whom the bell toll? 뉘를 위해 슬픈 종은 우느냐?
여기서 찦씨들 틈에 섞여서 미국대학교 교수가 의용군으로 참전, '프랑코'군과 싸우는 걸 미화한 내용!
{'하이 눈'의 '케리 쿠퍼'가 주연한 선동 영화였었는데도 공공연히 자유당 시절에 공연해서 히트했다니! ../ 한심한,,.}
화가였던 '피카소'놈도 물론 빨갱이! ,,. 하여간 빨갱ㅇ;ㅣ롬들은 논리적인 것보다는 간특하게도 인간 감정에 파고드는 수법을 즐겨 사용! ,,.,
국민들에게 논리성 및 차디 찬 리성 교육을 알기 쉽고도 철저히 반복 교화시키는
지도자가 훌륭한 대통령입니다. 그런 면에서도 '박'통은 우수! 再 여불비례.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