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을 받고 숨을 거둔 10·26사건 현장에 있었던 신재순(54·당시 H대 연극영화과 3년)씨. 그녀는 83년 이후 미국 LA 근교에서 살고 있었다. 3년 전부터는 가디나에서 구이집을 경영하고 있다.
구이집에는 지난 9월 초 처음 들렀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카운터에 서 있는 여인이 신재순씨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음식을 주문하고 소주가 몇 순배 돈 후 종업원을 통해 신씨를 모셨다. 앉자마자 기자 신분을 밝히고 음식점에 들른 것이 인터뷰 때문이라고 솔직히 말했다. 그녀는 단칼에 거절했다. 인터뷰는 하지 않겠다고. 음식이나 맛있게 들고 가라고 했다. 첫 대면은 그렇게 끝났다. 일주일 후 다시 그곳을 찾았다. 이번에는 첫 만남보다는 많이 부드러워진 상황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인터뷰는 사양하겠다고 했다. 쉽지 않았다. 그날 이후 여러 차례 다시 찾았다. 마침내 그녀는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인터뷰 날짜가 정해졌다. 언론과의 인터뷰는 약 14년 만이다.
“10·26 사건 이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총을 쏘기 전에 ‘각하, 이 버러지 같은 놈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올바로 되겠습니까?’라고 말했다고 법정에서 진술했습니다. 이는 보안대(당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를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에서 시켜서 한 말입니다. 시키는 대로 해야 할 것 같았어요. 94년에 출간한 자전적 소설 『그곳에 그녀가 있었네』에도 한결같이 주장했었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조사 과정에서 요원들은 ‘함께 자리했던 심수봉이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너는 왜 다르게 이야기하느냐’며 다그쳤고 지속적으로 세뇌시켰습니다. 나중에는 나 자신조차 어느 게 진실인지 혼란스러울 정도였습니다. 그 발언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는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김 부장이 차 실장에게 총을 쏘기 전에 무슨 말을 했느냐는 지금도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같은 자리에 있었던 심수봉씨는 신씨의 책이 나온 후 4개월쯤 뒤에 펴낸 『사랑밖에 난 몰라』라는 책에서 “김 부장이 대통령 앞에서 다른 참모들과 다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 “버러지 같은…”이라는 발언은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다. 신씨의 이번 증언으로 김재규의 ‘버러지’ 관련 발언 부분은 새로운 정리가 필요하게 됐다. 당시 외부의 사건 목격자 두 명 얘기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반면 한겨레신문은 79년 11월 30일 류택형 변호사가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김재규를 찾아가 나눈 대화의 녹음을 공개하면서 김재규가 ‘버러지’ 발언을 한 것으로 지난 18일 보도했다. 한겨레가 전한 김재규의 관련 육성은 “나는 이 버러지 같은 새끼, 하고 이 말을 하고 ‘빵! 빵-! 하고”로 돼 있어 그해 11월 6일 합수부 발표와 유사하다. ‘버러지’ 부분 발언은 심수봉·신재순씨-합수부·김재규 간에 차이가 있어 계속해서 미스터리로 남을 가능성이 있다.
-10·26 사건 이후 어떻게 지냈나요.
“10·26사건은 나에게는 운명적인 사건입니다. 전혀 상상도 하지 않았던 뜻밖의 일입니다. 평생 지울 수 없는 사건으로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만약 그 사건이 나지 않았다면 연예계 쪽으로 풀렸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습니다. 정말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참석한 자리에 대통령이 앉아 있었고 거기서 부하에게 총격을 받고 돌아가신 거예요. 이후 10·26사건을 무던히도 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어요. 아직도 충격이 남아 있습니다. 그 사건은 내가 태어나서 사람이 죽는 것을 처음 목격한 것이었습니다. 또 총격 사건이었기 때문에 총에 대한 공포가 여전합니다. ‘땅’ 소리만 나면 지금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하지요. ”
-당시의 총격 현장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아마 자신들이(김재규 부장과 거사 계획에 가담했던 중정 요원들) 계획했던 일이 성공했다고 확신해서 안 죽였을 거라는 생각은 해봤습니다. 데려다 주면서 ‘오늘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얘기도 하지 말라’고 했었습니다. 그 이후 입이 무거운 여자가 됐지요.”
-박정희 대통령과는 짧고도 비극적인 만남이 됐는데요.
“ 독재를 하기는 했지만 경제적으로 나라의 발전을 많이 이루고 국민을 위했던 분입니다. 사건 현장에서 총상으로 피를 흘리면서도 ‘나는 괜찮아’라고 한 말을 잊을 수 없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의연했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카리스마가 넘치는 분이었어요.”
그는 또 다른 고백을 했다. 10·26 사건 당시 이미 결혼해 딸까지 둔 이혼녀였다고 했다. 대학생 미혼 여성으로만 알려졌던 것과는 달랐다.
-대학생 때 결혼을 한 계기가 있다면.
“대학 2학년 때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과 함께 휴학했었지요. 재력가 집안의 아들이었지만 가정적인 남자는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도 차를 몰고 다닐 정도로 여유 있는 생활을 했습니다. 막 20대를 넘긴 젊은 나이였고, 참으며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 딸을 데리고 집을 나왔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이후 자식의 미래를 걱정한 친정어머니가 어느 날 손녀를 친가로 데려갔습니다. 5~6년 전에 큰딸로부터 연락이 와 다시 만났습니다. 지금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잘살고 있습니다. 대형 은행의 간부로 일하고 있지요.”
그는 이혼으로 끝난 두 번째 결혼에서도 딸을 하나 얻었다. 현재 같이 살고 있다. 큰딸이 낳은 딸과 작은딸이 낳은 두 딸 등 모두 3명의 손녀를 두고 있다.
신재순씨에겐 작은 소망이 하나 있다. “자식들, 손녀들 잘되고, 하고 있는 비즈니스가 잘됐으면 좋겠어요. 또 내가 받은 만큼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고요. 그리고 나중에는 다시 한국에 가서 살고 싶습니다. 조용한 시골에서 전원생활을 하며 아름답게 마무리했으면 좋겠어요. 만약 기회가 된다면 연극도 해보고 싶어요. 언제든지 오면 받아준다는 학교 선배가 대표로 있는 극단이 있어요. 자신은 없지만 하고 싶어요.”
신씨는 두 달 전부터 교회에 나가고 있다. 심수봉씨가 권유했다고 한다. 새로운 신앙인의 삶을 꾸려 가며 마음의 평안을 찾고 있다.
LA 중앙일보 김병일 기자
◆관련기사
▶‘버러지 같은 놈’ 당시 김재규는 그런 말 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