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는 한국에서도 '잊혀진 전쟁'(a lost war)이 되는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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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피터 작성일13-06-22 12:01 조회3,11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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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는 한국에서도 ‘잊혀진 전쟁’(a lost war)이 되는것인가?
- 한국을 구하기위해 피흘린 미국 친구들의 희생도 잊을것인가?-
김피터 박사
#북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이 발발되자,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명령으로 불과 닷새만에 한 미지상군 부대가 부산에 상륙하였다. 그때 최초로 한국전에 투입된 미군은 일본 ‘구슈’에 주둔해 있던 24사단, 21연대 휘하의 촬스 H. 스미스 중령이 이끄는 540명의 ‘스미스’특별부대(Task Force Smith)였다. 이들은 곧장 북상하여 오산 북쪽 죽미령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7월5일, 탱크를 앞세운 북한 침략군 제 4사단 병력이 6마일의 긴행렬을 보이며 나타났다. 장대같은 비가 쏟아지는 속에서 스미스부대원들은 총탄과 포탄이 다 떨어질때까지 악전고투하며 싸웠으나, 결국 이 최초의 전투에서180여명의 전사자 및 실종자를 내고 패퇴하고 말았다. 최초의 6,25참전 미군의 희생이었다. 이 첫 전투에서 미군 포병지휘관이었던, 밀러 페리 중령이 북한군 탱크병의 총탄에 쓰러졌다.
# 그해 8월, 미24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은 대전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파죽지세로 밀어 닥치는 침략 적군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위급한 사태속에서 사단장이 직접 3.5인치 로켙포를 들고 적의 T-34탱크를 폭파시키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는 본진에서 낙오되어, 산속에서 홀로 36일동안을 비참한 몰골로 해매고 다녔다. 그런데 현상금(불과 5달라)에 눈이 먼 한 한국인의 밀고로 그는 북한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장군으로 포로가되는 치욕의 세월을 3년간 보내는 동안 온갖 학대, 곤욕을 당했다.
# 이듬해, 1951년 겨울, 중공군의 인해전술, 대규모 공세에 밀려 한국군과 미군은 일제히 후퇴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12월23일,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뚫고, 의정부 북쪽의 후미진 도로를 달리던 미군 찦차 하나가 앞쪽에서 마주 달려오던 한국군 트럭에 충돌되면서 박살이 났다. 그 안에 타고 있던 미군 장성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그 장군이 누구인가? 바로 미8군의 최고 지휘관인 월튼 H. 워커 중장(후에 대장으로 추서됨)이었다. 그는 후퇴중에서도 전과를 올린 제 24사단 장병들에게 ‘부대표창’을 주기 위해 달려가던 길이었다.
그때 그의 아들 S. 워커 대위도 한국전에 참전하여, 24사단 예하의 한 일선 보병중대장으로서 중공군과 싸우고 있었다. 워커중장은, 아버지를 따라 한국전에 참가한 아들을 한번 만나보지도 못한채 전사하고 만것이다.
그런데 그 워커중장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같은 도로, 거의 같은 장소에서 50년이 지난, 2002년에 두 한국 여학생이, 훈련중이던 미군 장갑차에 치여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워커중장을 교통사고로 죽게한 한국군 트럭 운전병은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그때 워커중장의 아들 S 워커 대위를 비롯한 미군참모들이 이승만 당시 대통령에게 사형면제 탄원서를 제출하여 그를 구명해주었다. 하지만 두소녀의 미군 장갑차에 의한 교통사고 사망에 대해서 한국인들은 용서치 않고, 촛불시위를 하고, 미군의 만행이라면서 미군 떠나라고 데모를 했다.
# 1952년 4월, 그때 미 8군 사령관은 밴프릿트 장군이었다. 한데 그의 아들 지미 밴프릿트 2세 공군 중위도 한국전에 참전하고 있었다. 그는 그때 막 해외 근무를 마치고 본국으로 귀환한 상태였으므로, 한국전에 참전하지 않아도 되는 입장이였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가 사령관으로 있는 한국전에 자원했던것이다. 4월2일 새벽, 밴프릿트 중위는 압록강 남쪽 지역 폭격의 임무를 띄고 출격했다. 새벽 3시경 배프릿트의 전투기는 표적을 향해 날아가다가 레이더 망에서 사라졌다.
곧 수색작전이 시작되었다. 이틀후 밴프리트 사령관은 보고를 받고, 즉시 수색작업 중지 명령을 내렸다. 이유는‘적지’에서의 수색작전은 너무 위험하다는것이었다. 그는 아들의 전사를 슬퍼하면서도, 참모회의에서, ‘친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것보다 더 위대한것은 없다’라는 예수의 교훈을 얘기했다고 한다(성경, 요한 15:13) 밴프릿트 장군은 한국인들을 ‘친구’라고 말한것이다.
6,25전쟁 중에, 미군 ‘장성의 아들’들이 참전한 숫자는 142명이었다. 그중에 35명이 전사했다. 한국의 고위층 중에서 자식들이 갖가지 이상한 이유로 병역 면제를 받은 경우가 많은데, 남의 나라 전쟁에 아들을 기꺼히 보내 전사케한 미국 장성 아버지의 심정을 조금이라도생각해보았는가?
6,25전쟁에서 미군은 전사자 3만 6천여명, 부상자 약 10만명, 실종 3,737 명, 포로 4439명의 희생자를 냈다. 누구를 위해서? 워싱턴, 한국 참전 용사기념비에 있는대로, ‘그들이 알지도 못했던 나라, 만나보지도 못했던 국민’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을 지키기위해서 목숨바쳐 희생한것이다.
한데 지금 한국인들은 대한민국을 적의 침략에서 구해낸 미국인들의 희생에 대하여 기억하며 감사하고 있는가? 최근 박대통령이 언급한대로 현재 한국의 고등학생 약 70%가 6,25는 ‘북침’이라고 대답했다니, 이제 ‘6,25 남침전쟁’은 한국에서도 ‘잊혀진 전쟁( a lost war) 이 되고 있는것인가?
최근에, 유명한 관광지, 아리조나주 세도나에서 ‘한인회’의 주관으로 ‘한국전 참전 용사 기념비’가 세워졌다. 미국 여러 도시에 ‘한국전 참전비’가 세워저 있지만, 다 미국인들이 세운 것이다. 한인들이 세운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금 뉴욕, L.A. 를 비롯한 미국 여러 도시에서 ‘위안부 기림비’ 가 세워지고 또 계속 건립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위안부문제는 사실 미국과 직접 관련없는것이다. 미국 각도시에 한국전에서의 미군들의 희생을 기리는 ‘미군 참전 용사 및 전사자 기림비’를 세우는것이 더 역사적으로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것이다.
북에 의한 ‘6,25남침전쟁’은 이른바 ‘잊혀진 전쟁’으로 되어 있다. 유명한 2차대전과 월남전 사이에 끼어 있어서일 것이다. 세도나에서 있었던 ‘한국전 참전 용사 기념비’ 제막식에서 L.A. 주재 총영사는 ‘6,25는 잊혀진 전쟁이 아니라 ‘승리의 전쟁’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우리의 ‘친구’ 미국이 도와 주었기에, 폐허와 잿더미에서 불과 40년만에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번영과 승리에 연결되는것을 의미한다. 한국인들에게 ‘625’는 절대 ‘잊혀진 전쟁’이 되어서는 안된다. 항상 기억하고, 잊지말아야 할 교훈들을 후세들에게 전해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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