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봉 / 원광대학교 교수, 평화연구소 소장
4월 7일 일요일 오후 1시 반쯤 서울의 한 기자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제가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북한 홍보 사이트 <우리민족끼리 (우민끼)> 회원이라고 <일간베스트 (일베)>에서 폭로했다면서 곧 경찰로부터 소환조사를 받게 될 텐데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고 묻더군요.
어느 정도 예상했던 터라 ‘올 것이 왔다’는 생각으로 <일베 (www.ilbe.com)>에 접속했습니다. 검색창에 ‘이재봉’을 치니 맨 위에 “우민끼 저장소 2차 명단 중 순수 한국인 20명 리스트”라는 제목의 글이 나오더군요.
“죄수번호 977, 이름 이재봉, 직업 원광대 교수” 등 제 신상 기록이 자세히 그리고 정확하게 공개되어 있었습니다. 반갑기도 하고 은근히 쫄기도 했습니다. 반갑다는 것은 지금까지 약 20년 가까이 ‘친북주의자’로 자처하며 국내외에서 수백 편의 글과 수백 회의 외부 특강을 해왔지만 제 책이 ‘불온도서’나 ‘금서’ 목록에 오른 적이 없고 제 이름이 ‘종북 백과사전’이나 ‘종북주의자’ 명단에 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바닥에서는 제 이름이 꽤 알려진 편인데 영광스러운 명단에 오르지 못해 제가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가 싶어 좀 섭섭한 면도 있었거든요. 쫄기도 했다는 것은 검찰이나 경찰에서 저에 대한 조사를 이미 시작했을 테니, 앞으로 언행에 조금 더 신경 써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고요.
검찰이나 경찰에겐 수사에 도움을 주고, 머지않아 언론에 간첩이나 종북주의자로 오르내릴 제 이름을 보고 놀라거나 실망할 국내외의 많은 지인들에겐 미리 귀띔을 건네기 위해 아래와 같이 제 ‘간첩행위’를 자수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990년대 말쯤 한 주간지에서 김일성에 대한 재미있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1994년 6월 미국이 북한을 폭격할 것이라는 일촉즉발의 위기를 맞아 카터 미국 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담판을 지을 때의 일화 두 가지였지요.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김일성이 집무실에서 카터와 마주앉아 얘기하다 갑자기 일어서더니 카터 옆으로 가서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당황하며 얼굴빛이 굳어지는 카터에게 김일성이 기분 나쁘냐고 짓궂게 묻고, 카터가 그렇다고 대꾸하자, 김일성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각하께서 가만 앉아 계시는데 제가 건드리니 불쾌하시죠? 우리 조선이 가만있는데 미국이 자꾸 건드리니 우리가 짜증나고 불안합니다. 우리 조선을 자꾸 건드리지 말라고 전해주십시오.”
다음날 둘이 대동강에서 배를 타고 평양에서 남포까지 가는데 강 가운데서 김일성이 갑자기 엔진을 끄라고 했다. 의아해하는 카터에게 김일성이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각하, 저기를 보십시오. 우리 인민들이 낚시를 즐기고 있습니다. 낚시에 방해되지 않도록 저만큼 지나서 시동을 다시 걸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카터가 김일성에게 인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지도자라며 감탄했다.
2005년부터 북한에 관한 교양서적 한 권 펴낼 것을 구상하면서 김일성에 관한 글에 앞의 일화 두 가지를 곁들이고 싶었습니다. 노회한 정치인의 배짱과 쇼맨쉽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니까요. 그런데 이 일화를 소개하려면 출처를 정확히 밝혀야겠는데 그 기사가 실린 주간지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고 정확한 시기도 알기 어려웠습니다.
마침 그 무렵 중국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북녘 학자들을 만나 위 일화를 들어봤느냐고 물었더니 한 학자가 다음과 같이 자랑하더군요. “그 때 카터가 우리 수령님한테 뭐라고 한지 아십니까? 미국에 훌륭한 대통령이 셋인가 넷이 있는데, 우리 수령님이 그 서넛을 합친 것보다 더 훌륭하다고 말했더랬습니다.” 그의 과장에 제가 장단을 맞추었지요. “내가 수령님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데, 수령님을 널리 자랑할 겸 그 일화를 소개하고 싶으니 그게 실린 신문이나 잡지를 구해줄 수 있겠습니까? 나는 인쇄된 자료가 아니면 그걸 인용해 글을 쓸 수 없습니다.”
다음 세미나 때 만나 그 자료를 건네받기로 했는데 불행하게 그를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2007년 겨울방학 때 미국에 두 달 간 머무르며 <조선중앙통신>, <우리민족끼리> 등에 접속하여 <로동신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조선로동당 규약>, <김일성 회고록>, <김정일 총비서 로작> 등을 쉽게 구할 수 있었는데 그 일화는 찾지 못했습니다.
회원으로 등록해 관리자에게 그 자료를 요청하는 이메일을 두어 번 보냈지만 책 원고를 마무리할 때까지 아예 답장조차 받지 못했고요. ‘죄수번호 977 간첩’ 또는 ‘우민끼 회원’이 된 과정과 2008년 6월 출판된 제 책 두 눈으로 보는 북한의 “김일성의 항일독립운동: 김일성은 ‘가짜’가 아니다”라는 항목에 위 일화를 끝내 삽입하지 못한 배경입니다.
제 책을 읽어본 분들 가운데는 “이 책은 중고등학교 교사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거나 “전 국민이 애독해야 할 책”이라고 과분한 평가를 내려주었는데도 많이 팔리지는 않았습니다. 제 책이 출판된 뒤 변호사들로부터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기소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통일운동가들을 위해 ‘전문가 증언’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지금까지 7-8회 법정에서 판사와 검사들을 상대로 제 책 내용을 강의하다시피 증언해오고 있습니다만 저는 아직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걸려들지 않았고요.
참고로 제 책의 핵심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공산주의의 목표는 매우 훌륭한데 추구하는 방법이 바람직하지 못하다. (2) 북한 정부를 세운 사람들은 대부분 항일운동을 했던 공산주의자들로 북한도 정통성이 있다. (3) 김일성이 해방 이후엔 6.25남침과 독재정치 그리고 부자세습 등의 악행을 저질렀지만, 해방 이전엔 항일독립운동이라는 선행을 했다. (4) 주체사상은 긍정적 측면과 배울 점이 적지 않지만, 김정일에 의해 변질이 되어 독재와 부자세습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었다. (5) 선군정치는 김정일이 나라 안팎의 위기를 맞아 단결력과 충성심이 높은 군대를 로동당보다 우위에 둔 정치다. (6)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은 미국의 위협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미국을 상대하기 위한 것이다. (7) 연방제보다 바람직하면서도 실현가능성이 높은 통일방안은 없다.
그런데 이 책이 2년 전까지 모두 팔려 다시 찍어내야 하는데 벌써 5년이나 지나는 바람에 수정하고 보완할 내용이 적지 않아 올 가을 개정판을 펴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 헌법과 로동당규약 그리고 최고지도자 등이 바뀌었고 인공위성 발사와 핵실험 등이 추가되었으니까요. 이번 여름에도 미국에 들어가 <조선중앙통신>이나 <우리민족끼리> 등에 접속하여 북한 자료를 수집해야 하는데 또 ‘간첩’이나 ‘종북’으로 고소될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절판된 제 책의 내용이나마 조금 보시려면 4-5년 전 만든 블로그 <이재봉의 평화세상 (blog.daum.net/pbpm21)>에 접속하시면 됩니다. 블로그의 <북한 바로 알기>엔 친북적인 글로 꽉 찼고 <미국 바로 알기>엔 반미적인 글이 넘치니 앞으로는 ‘친북’에 ‘반미’까지 덧붙여져 극우세력들로부터 이중으로 비난과 위협을 받게 되리라 예상합니다.
거듭 밝히건대, 우리가 이승만 정부 때처럼 무력북진통일을 추구하거나 전쟁으로라도 통일하는 게 바람직하다면 ‘반북’을 해야 마땅하지만, 전쟁을 피하고 화해협력을 통해 평화통일을 지향하려면 ‘친북’을 하는 게 당연하다며 저는 글과 강연을 통해 공개적으로 친북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수백편의 글을 발표하면서 어디에든 단 한 줄도 비겁하게 익명이나 가명으로 쓴 적은 없고요.
한편, 이미 몇 차례 겪었듯이 <일베> 운영자들처럼 떳떳하게 신분을 드러내지 못한 채 저를 ‘종북주의자’나 ‘간첩’ 또는 ‘죄수’로 매도하는 등 치졸한 공격을 일삼는 극우세력에게는 어떠한 대응도 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요.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자체가 그들을 정상적 인간으로 취급하는 셈이니까요.
2013년 4월 8일 ‘죄수번호 977 간첩’ 이재봉
비판적 요약과 충고
지성의 요람 상아탑 대학강단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라는 지엄한 신분을 가진 학자가 자수와 자백의 의미도 모른다니 충격적이다.
자수는 임의로 사법당국을 찾아가 자신의 죄를 밝히고 뉘우치고 선처를 호소하는 것이다. 자백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한 행위를 자신이 한 것이 맞음을 인정하고 밝히는 것이다. 기고문을 보면 죄를 뉘우치는 개전의 정이 없는데 어찌 자수라고 하는가?
죄를 뉘우침이 없이 공개적인 기고문 형식을 빌어 실정법 위반사실을 밝히고 학자적 양심과 평소 소신에 치부하는 것은 사정의 칼을 여론의 힘을 빌어 피해보려는 언론플레이에 지나지 않는 비양심적 비학자적 정치행위 선전선동에 지나지 않는다.
자수하려면 제대로 하고 죄를 뉘우치고 선처를 호소해야 할 것이며, 여론의 힘을 빌어 사정의 칼을 무디게 하고 국가보안 실정법질서를 무력화시키려는 악의적 의도가 있다면 차라리 종북간첩 커밍아웃을 하고 학자적 양심,민족적 량심을 들먹이며 종북세력과 함께 두려움없이 정치투쟁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