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진보 니들, 빨갱이냐 종북반역자냐? 니들이 선택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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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반도 작성일13-01-12 23:49 조회2,37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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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진보 너희들 빨갱이냐 종북반역자냐?
1. 어처구니 없는 오해
빨갱이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는 만큼 빨갱이에 대한 오해도 넘쳐난다. 제일 많이 거론되는 오해는 대한민국이 빨갱이에 대해 너무 과민반응을 보여왔고 그 결과로 마땅히 존중되어야 할 빨갱이도 아닌 진보인사의 인권이 무참히 유린돼 왔다는 것이다. 반공 권위주의 정부의 정권안보논리로 색깔론이 악용되어 빨갱이도 아닌 진보인사마저도 그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빨갱이와 더불어 빨갱이로 내몰린 진보인사들은 역사의 희생자이고 분단의 피해자이며 현대판 마녀사냥의 제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가 여부를 가늠하는 시금석은 이제는 빨갱이와 진보인사들의 인권보장이라는 것이다. 즉 국가보안법이 폐지되고 공산당이 합법화되어 빨갱이와 진보인사들의 양심과 사상,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보장될 때 비로소 자유민주주의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툭하면 빨갱이 타령을 하는 것은 낡아빠진 냉전수구 골통들의 색깔론이며 야만적 정치공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두 번째로 많이 거론되는 오해는 실제로 빨갱이는 거의 없고 있더라도 극소수라는 것이다. 공안기관들이 빨갱이라고 잡아들여 콩밥을 먹인 사람들은 거의 대다수가 빨갱이가 아니며 민족주의자 또는 민주인사들이었으며 용공조작의 희생자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해방이후 역사상 최초로 민주세력이 이른바 수평적 정권교체로 집권한 김대중, 노무현정부에서 이들을 민주화 유공자로 포상하는 것은 국가권력에 의해 용공조작으로 내몰려 빼앗긴 인권과 명예 및 잃어버린 세월에 대한 국가범죄 피해자 보상법리에 따른 역사적 정의실현의 결과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세 번째로 언급할 수 있는 오해의 내용으로는 대다수 국민들이 빨갱이와 진보인사들이 역사적 사실을 잘 모르거나 친일청산, 반미감정, 독재혐오 등 주로 감정에 바탕을 둔 민족주의 또는 민주의식에 편향되어 좌경화된 것이므로 잔실을 밝혀 왜곡된 편향을 바로잡아주고 꾸준한 설득과 관용 및 포용으로 감싸주면 민주시민으로 자연스럽게 복귀할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해방이후 빨갱이들의 從蘇 반역질 때문에 나라를 두 동강내고 동족상잔의 6.25전쟁을 겪고 헤아릴 수도 없는 무력도발과 정치소요를 경험하고도 우리나라 국민들은 지금까지도 빨갱이와 진보인사들에 대한 순진한 오해를 가지고 살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의 위와 같은 허다한 오해의 이면을 들여다보며 빨갱이와 진보인사에 대한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 즉 빨갱이의 진면목을 알아보기로 하자.
2. 빨갱이에 대한 진실(빨갱이의 眞面目)
우리가 한반도 빨갱이의 원조로 간주하는 것은 김일성과 박헌영이다. 박헌영은 일본 제국주의 강점기부터 조선공산당을 만들어 공산화를 꿈꾸어 왔던 인물이며 김일성은 알량한 만주 항일투쟁경력을 무기로 내세워 붉은 군대의 꼭두각시가 되어 38선 이북에 똬리를 틀고 앉아 인민재판의 무법천지로 만들더니 마침내 인면수심의 동족상잔 만행을 자행한 6.25남침의 전범이다. 박헌영은 전쟁와중에 체포되고 정전협정이후 북에서 김일성에 의해 미제의 간첩으로 내몰려 처형되었다.
이후 남녘 땅에 잔존하던 남로당 잔당들은 조봉암 진보당을 계기로 또다시 김일성에 충성을 맹세하고 조선노동당 내란집단의 하수인으로 새출발을 하게된다. 그들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6.25전쟁을 겪고 인면수심의 만행을 서슴지 않던 빨갱이들을 몸소 경험한 국민들이 가진 빨갱이라면 치를 떨던 국민감정 때문에 그들은 철저히 자신의 사상을 숨기고 민주화 인사로 때로는 민족주의자로 위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이 먼저 나서서 빨갱이를 비난하고 욕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박정희의 남로당 군사총책 경력은 좋은 먹잇감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기수법이 오랫동안 통할 수는 없었다. 박정희는 과거 경력이 어떠했든 反共을 앞세우고 이를 철저히 실천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국민들이 자유의 파수꾼 군대와 박정희의 반공국시정책을 철저히 신뢰했고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었을 지 몰라도 대한민국에 대한 박정희의 헌신과 애국심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다. 다소 불만이 있어도 박정희를 헐뜯지는 않았다.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박사가 4.19로 불명예 퇴진을 하게 된 이후부터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박정희를 건전한 비판의 범위를 넘어서 인신공격하거나 헐뜯는 자들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건드리는 자들이며 조선노동당 내란집단을 편드는 남로당 잔당들의 영향을 받는 자들일 거라는 국민들의 통찰은 정확한 것이었다. 김일성과 결별한 좌파들은 존재감이 없었고 실제로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은 정체성을 갖추어나가는 과정에서 우익이냐 좌익이냐 사상을 논하기 전에 조국을 먼저 선택하는 것이 일차적인 것이다. 조국이 대한민국이라면 조국에 대한 반역집단과 결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당연히 좌익사상으로의 진전에 제동이 걸리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조선노동당 내란집단의 혁명사업과 남로당잔당들의 활동이 비합법공간에서 일체화되면서도 철저하게 민주화운동으로 위장됐고 좌경적 내용을 학습할 경우에도 미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학문적 차원의 탐색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따라서 학문과 예술, 언론의 자유 등 표현의 자유에 대한 탄압이라는 논리로 대응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핵심부 활동의 내용은 공안당국의 감시의 틀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통혁당, 인혁당과 민청학련, 남민전과 민투, 크리스찬 아카데미사건, 무림, 학림, 민추위사건 등이 그것이다. 공안당국은 핵심을 찾아내 궤멸시키고 핵심과 대중을 차단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하지만 이것은 미봉책에 불과했다.
광범위한 공산주의 서클형태의 세포조직(cell Org)이 번성했고 이 조직들이 투쟁과 별도로 재생산되고 관리되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혁명운동권이 필요에 따라 공안당국에 먹잇감으로 제공한 부분만을 사냥하는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공안당국의 이른바 지속적인 조직사건 수사에도 불구하고 조직활동과 투쟁활동은 합법적 지위를 취득하지 못했을 뿐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날로 번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80년대 중반에 이르면 대학가에서 그야말로 물반 고기반의 상황에 이른 것이다.
여기서 조선노동당과의 연결부위가 극도로 은폐된 조건에서 대한민국 자본주의의 발전된 내용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북과는 관련없는 또는 대등한 독립적인 사회주의 운동지향이 나타나면서 이를 제압하는 흐름으로 남한 혁명운동의 조선노동당 주인선언(강철서신)이 나오게 된 것이다. 공안당국과의 싸움에서 조직보위를 위해 조선노동당과의 연결부위가 극도로 폐쇄적으로 은폐되어 있을 뿐 사실상 지휘부였던 조선노동당이 김영환의 자발적인 충성맹세를 빌어 공개적인 주체사상 혁명운동으로 전환된 것이었다. 은밀하게 학습되어오던 주체사상과 관련돤 북의 서적들이 대중적 수준에서 대량으로 유통되면서 옳고 그름을 떠나 유행이 돼버렸던 것이다.
너나없이 주체사상의 혁명운동가를 자처하는 마당에 공안당국은 그야말로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늦었지만 국민을 설득하고 대대적인 척결작업에 나서야 했으나 북과의 체제경쟁은 벌써 끝났다느니 시대착오적인 사상은 본인의 인생을 망칠 뿐이라느니 하면서 수수방관하고 여전히 간첩단 사건 발굴 수준의 미온적 이벤트적 대응으로 일관했다.
3. 빨갱이와 從北反逆
오늘날 종북이란 개념은 2008년 민노당 분당사태에서 나온 것으로 돼 있지만 조봉암의 진보당사건에서 나타난 간첩 양명산의 자금유입과 조봉암이 김일성에 보낸 충성맹세 편지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박헌영의 맥을 잇는 남로당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언이며 남한에서의 혁명운동은 김일성에 대한 충성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맹세이다. 4.19이후 김일성에 의한 본격적인 자금지원과 지하당 구축활동 및 학생운동 조직화 중심의 범국민 반체제활동은 양심적인 민주화운동을 표방했으나 실제로는 김일성의 조선노동당 내란집단이 지휘하는 혁명활동이었던 것이다.
특히 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예비군 폐지, 4대국보장 중립화통일론, 공화국연방제,민족자립 대중경제론 등 선명한 용공노선(김일성의 고려연방제를 수용하는 통일진보노선)을 주창하고도 박정희와 박빙의 승부를 펼쳤던 풍운아 정치인 김대중의 등장은 김일성이 주도하는 통일혁명운동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것은 혁명운동의 1차적 목표인 적화통일 1단계 진보적 용공정부 수립의 간판스타 수권주체인 대중적 혁명운동의 지도자 탄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미 김대중은 1971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된 후 도쿄 프라자호텔에서 조총련 국제국장 김병식(북한 부주석)으로부터 20만 달러 공작금(선거자금)을 받은 사실을 북이 주장했으나 자서전에 고백하지 않았다.
김대중은 대선 이후 해외에서 10월 유신을 맞게 되고 귀국을 늦춘 채 조총련 등 김일성이 파견한 공작원들과 함께 유신반대 망명정부에 해당하는 한민통을 결성하여 반국가활동에 가담하게 됨으로써 강제납치 또는 제거대상이 되기에 이른다.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국제적인 민주인사로 부각됐으나 실상은 형법 93조 적국과 합세하여 대한민국에 항적하는 여적죄의 반역사범 또는 반국가단체를 결성하고 수괴에 자리에 오른 자인 것이다. 실제로 한민통은 대법원에서 반국가단체로 판시된 바 있으며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후에 재심을 청구했으나 기각됐다. 김대중은 김일성과 함께 반국가단체의 수괴였던 것이다. 다만 조선노동당 내란집단과 달리 한민통 조직이 유야무야 된 것만 다르다.
4. 從北 또는 從北反逆
빨갱이를 빨갱이로 부르지 못하고 주눅들어 부르는 명칭이 종북이라는 지만원 박사의 주장은 6.25 전쟁경험세대 그 분의 시각이다. 해방공간과 6.25남침전쟁 등 인면수심 빨갱이의 야만성과 잔혹성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왜곡된 역사관과 교육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면 누가 빨갱이라는 지적은 낡아빠진 색깔론으로 들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말이다. 진보주의 이념성향 또는 진보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군사독재정권이 하던 대로 색깔론으로 몰아부치는 것에 다름아니라는 인식과 비판이 그것이다.
빨갱이라는 용어가 공산주의자를 지칭하는 만국공통어이고 김일성의 6.25남침전쟁을 겪은 세대에게는 두말할 필요조차없는 민족반역과 조국배반자를 지칭하는 용어이지만 전후세대에게는 다르게 들린다는 점을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헌법가치와 헌법정신을 존중하고 수호하는 우익 애국세력에게 수구골통이라는 낙인이 씌워지게 된 것은 대중적 공감 국민적 공감을 상실한 빨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부당하게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는 색깔론을 펼친다는 점이 주효했던 것이다. 자칭 진보진영의 역공세가 오히려 국민적 공감을 가져왔던 것이다.
본질은 여전히 해방공간의 빨갱이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좌익세력이 오히려 민주화운동세력 또는 민주인사로 대접받게 된 것도 이와 같은 역효과와 무관하지 않다. 빨갱이라는 용어가 먹어서는 안되는 색깔만 화려한 독사과 또는 독버섯이라는 역사적 경험의 공유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좌익세력의 용어혼란전술에 국민을 내준 꼴이 되었던 것이다.
반면에 종북이라는 용어는 2008년 민노당 내부에서 대립갈등의 사상투쟁의 과정에서 등장한 것으로 진보진영의 특정 계파(종북주사파)를 지칭하는 용어로 국민들에게 광범한 공감을 불러왔다. 이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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