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인용]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과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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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비역2 작성일12-11-26 23:29 조회2,77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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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남, "대통령과 국가경영-이승만에서 김대중까지", 서울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1년, p.177~185
서울대학교에서 석사, 미국 미네소타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육군사관학교 교수와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를 지냈고 대통령 정무비서관과 공보비서관으로 9년여에 걸쳐 3명의 대통령을 직접 보좌했다. 휴버트 험프리 공공정책연구소 교환교수와 랜드 (RAND)연구소 아시아. 태평양연구센터 자문위우너 등을 역임했다. 1997년 이래 하와이 동서문화센터 연구위원으로 재직하면서 포스코 펠로우십(POSCO Fellowship)을 관리하는 동시에 대통령 리더십, 남북한관계, 한미관계 등을 연구해 왔다.
주요저서로는 『성공한 대통령 실패한 대통령』, 『정치사회화와 정치교육』, 『현대공산주의 분석』(공저), Korea and the Asia-Pacific Region(공편), A Changing Korea in Regional and Global Contexts(공편) 등이 있고 Leadership for Nation Building : Korean Presidents from Syngman Rhee to Kim Dae Jung이 현재 미국에서 출판중이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너무 막연히 알고 있었는데,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려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승만 대통령께서 대한민국 건국의 기틀을 닦으셨고, 그 뒤를 박정희 대통령께서 이어 받아 성장동력을 확보하셔서, 대한민국이 오늘날 세계 12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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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의 업적과 유산
대한민국의 건국초기와 그 이후 어려운 시기에 이승만은 위대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는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현대국가에 필요한 법적 ․ 행정적 기틀을 마련했으며 아울러 공산세력의 전복활동과 한국전쟁을 극복하여 대한민국을 보위했고 한미상호방위조약과 국군양성을 통해 안보의 기틀을 튼튼히 구축했으며 교육진흥 등 미래발전의 기본조건을 만들었다. 그의 거시적인 비전과 결단력 있는 리더십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건국은 이승만이 없었더라도 불가피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불가피한 것이라도 그것을 실현하는 데는 탁월한 영도력을 가진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미 ․ 소 공동으로 추진했던 신탁통치하의 좌우익 연립정부 수립계획에 대해 그의 단호하고 끈질긴 반대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아마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소련은 한반도에 공산정부가 아닌 어떤 정부도 거부했다는 것이 기록으로 밝혀지고 있다. 소련은 미국을 설득하여 한반도에 좌우익 연립정부를 세운 후 동유럽 국가들처럼 공산세력으로 하여금 연립정부를 완전 장악하려 했던 것이다.
이승만의 비타협적인 반공통일노선과 권위주의적 통치방식은 국내외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동유럽에서 공산세력이 연이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거대한 중국이 공산화되었고, 동남아지역에서 공산세력이 빠르게 팽창하고 있어서 한국은 공산세력에 둘러싸인 섬과 같았다. 따라서 한국이 공산화되지 않은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과 남한 내 좌익세력의 도전을 고려했을 때 이승만의 성공은 매우 값진 것이다. 이승만은 장제스(蔣介石)나 고 딘 디엠(Ngo Dinh Diem)이 실패한 곳에서 성공했다.
한국의 반공투쟁과 월남의 패망을 견주어 본다면 대한민국의 보위를 위한 이승만의 공로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어째서 한국은 살아남았고 월남은 그렇지 못했는가? 결정적 차이는 한국에는 강력한 반공지도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공산주의 위험을 계속 경고하며 강력한 반공정책을 추진한 위대한 반공지도자였다. 정부수립 초기 여수반란에 자극받아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요소요소에 침투해 있던 공산분자들을 뿌리 뽑았다. 한국전쟁 중 공산세력 주도의 통일 가능성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정부를 저버리지 않았으며 많은 젊은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군에 자원입대하여 침략자들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월남에는 존경받는 강력한 반공지도자가 없었으며 월남정부는 공산세력을 소탕하는데 성공하지 못했고 국민으로부터 신뢰와 지지를 받지도 못했다.
더구나 이승만의 탁월하고 집념에 찬 외교적 노력이 있었기에 약소국이었던 한국이 초강대국인 미국으로부터 한미방위조약을 끝내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의 휴전반대에 대해 아이젠하워, 처칠 등 세계 지도자들은 입을 모아 그를 비난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강대국의 압력에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방위조약이라는 국가이익을 위해 미국과 정면 대결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이렇게 이루어진 한미동맹이라는 튼튼한 안보 울타리로 인해 한국은 그 후 안심하고 경제발전과 민주발전을 추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볼 때, 이승만의 한미상호방위조약 쟁취는 크나큰 역사적 공적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휴전협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었는가는 월남의 경우를 보면 명백하다. 미국과 월맹 간의 평화협정이 맺어진 지 2년 후 월남은 공산군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만약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없이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더라면 한국은 월남과 같은 결과를 초래했을 가능성이 크다. 한미동맹은 그 후 한국의 안전과 번영의 초석이 되었다. 여러 면에서 이승만은 중국 본토를 공산세력에 빼앗긴 장제스(蔣介石)나 나라를 패망시킨 월남지도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승만은 냉전구조하에서 한국이 갖는 지정학적 이점을 이용하여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과 협상하여 최대한의 지원을 쟁취하는데 성공했으며 그래서 그는 ‘외교의 귀신’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승만은 대외관계, 특히 미국과의 협상에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지만 국내정책에서는 별로 성공적이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승만은 경제문제나 다른 국내문제는 안보와 통일의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그의 교육배경과 망명시절의 활동 또한 외교문제에 국한된 것이었다. 미국의 한국에 대한 정책도 안보만을 중시했다. 당시 미국은 한반도의 휴전협정은 언제든지 전쟁으로 확대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부의 국내정책을 실패로만 보기 어렵다.
실제로 이승만 정부의 경제정책은 1960년대 이래의 경제기적에 가려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전쟁 후의 경제복구와 경제안정은 이승만 정부의 공로이며 그것은 그 후 급속한 경제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그 외에도 국내정책에서 이승만 정부의 노력이 돋보이는 것이 두 가지 더 있다. 그 하나는 토지개혁이다. 농촌문제는 이승만 정부가 이어받은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수많은 가난한 소작농들은 땅을 무상 분배하겠다는 공산주의 선전에 속아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그러나 토지개혁으로 자립자족하게 된 농민들은 전쟁 전후를 통해 이승만 정부를 적극 지지했다.
교육진흥은 이승만 정부 치적 중에서 주목받을 만하다. 이승만은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초등학교 의무교육 제도를 도입했다. 1945년 당시 국민의 78%가 문맹이었으나 의무교육제도와 유교적 가치관이 결합되어 교육의 폭발현상이 일어났다. 이승만 정권이 끝난 1960년에 이르러 국민 중에 문맹자가 별로 없었고 취학연력 어린이의 95% 이상이 초등학교에 재학했다. 초등교육이 의무교육이 됨에 따라 중고등교육이 급속히 팽창되었고 대학교육도 빠른 속도로 확대되었다. 1인당 소득기준으로 볼 때 한국의 교육수준은 비슷한 수준에 있던 나라들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박정희의 경제개발 정책이 조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1961년 당시 한국은 높은 교육수준, 훈련된 노동력 등 경제발전을 가능케 하는 기본여건이 어느 정도 마련되어 있었으며 그것은 박정희 정부의 급속한 경제성장의 자산이 된 것이다.
이승만에 대한 일반적인 비난의 하나는 그가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민주주의 실패의 책임을 그에게만 돌릴 수 없다. 당시 한국은 민주주의를 실시할 여건도 전혀 갖춰지지 않았고 민주제도에 대한 이해도 경험도 결여된 가운데 미국식 민주제도가 갑자기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민주정부가 제대로 운영되느냐 아니냐는 한 나라가 처한 여건에 크게 달려 있다. 한국은 건국 당시부터 비상사태와 같은 비정상적 상황에 계속 처해 있었다.
로시터(Rossiter)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 가지 위기가 있다고 했다.1) 그 첫째는 전쟁이다. 전쟁 중에는 정부가 모든 정부조직과 사회제도를 전쟁지원 체제로 전환시켜야 하기 때문에 정부의 권한은 강화되고 국민의 권리는 제약될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위기는 반란이다. 많은 사람들이 정부의 정당성을 공개적으로 부정하는 경우다. 셋째는 경제위기다. 경제이기도 전쟁이나 반란처럼 민주주의에 직접적인 위협이 된다. 1950년대의 한국은 이 같은 세 가지 위협을 동시에 직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1) Rossiter, Constitutional Dictatorship, p.6.
새로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기어가는 것을 배우기도 전에 뛰어야만 했다. 민주적 전통이나 근대적 정부, 그리고 민주적인 시민을 육성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당시 한국에는 정당다운 정당도 없었고 정부도 형식만 갖추었을 뿐 주어진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으니 대통령의 역할이 커 보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한국의 현실은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를 요구하고 있었다. 계속되는 위기상황 속에서 전설적 지도자인 이승만이 절대적 존재로 보였을 수밖에 없다. 당시 한국의 현실은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를 요구하고 있었다. 계속되는 위기 상황 속에서 전설적 지도자인 이승만이 절대적 존재로 보였을 수밖에 없다.
물론 자유당정권 말기에 이르러 부정선거 등 몇 가지 무리한 조치가 있었고 만연된 부정부패에 대해서도 국정의 최고책임자였던 이승만이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그러나 40년간의 망명생활을 했고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도 없었으며 연령도 80대에 이르러 국내 실정에 어두웠고 정부를 제대로 통제하기 어려운 가운데 자유당 실력자들이 적지 않은 과오를 범하여 국민들의 원성을 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는 어느 것도 이승만과 관련된 것이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으며 이승만은 오히려 일생을 매우 검소하게 살았고 권력을 이용하여 한 푼의 재산도 축적하지 않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마지막 여생을 하와이 미국 육군병원 병상에서 보낼 때도 하와이 교민과 미국인 독지가의 도움을 받으며 어려운 생활을 했던 것이다.
미국 역사에서도 전쟁과 같은 위기시 대통령 권한을 확대해서 행사한 경우가 몇 차례 있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의 한 사람으로 칭송되고 있는 링컨(Abraham Lincoln)은 남북전쟁이라는 국가위기에 직면하여 헌법에 보장된 인권을 빈번히 무시했다. 그는 징집을 기피하거나 반대하는 사람, 적대세력을 지원하거나 호의적으로 대한 사람들은 모두 군사재판에 회부하여 처벌했다. 그는 국회 동의 없이 군사작전을 명령했고 인권을 무시했으며 자신의 정책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수천 명을 재판 없이 투옥했고 비판하는 신문사 발행인들을 체포했으며 군인들을 선거에 개입하게 했고 야당의원들을 의회에서 추방했으며 그래서 그는 언론으로부터 독재자 또는 폭군으로 불리기도 했다.2) 그러나 그는 “평상시 헌법에 위배될지 모르지만 그 같은 조치들은 나라를 보위하고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3)
2) 토마스 리로렌조는 링컨에 대하여 1만 6천 권의 책이 있지만 대부분은 고의적으로 미화된 것이라고 했다. Thomas J. Dilorenzo, The Real Lincoln (Roseville, Calif.: Forum, 2002), p.6. 그래서 클린턴 로시터는 '링컨은 위대한 독재자'라고 했다[Clinton Rossiter, Constitutional Dictatorship (New York: Harcourt Brace, 1948), p.226].
3) John G. Niolay and John Hay, Complete Works of Abraham Lincoln (Lincoln Memorial University, 1894), X, p. 66.
미국이 1차 대전에 참전하기 1주일 전 윌슨 대통령은 “전쟁에 임하면서 우리는 잔인하고 무자비해야 한다. 그 같은 정신은 의회, 법원 등 사회 모든 부문에 적용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는 미국이 전쟁에 이기지 못한다면 헌법이 살아남지 못할 것이며 언론과 집회의 자유도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미국이 총력을 모아 전쟁에 임할 수 있을 것인지 우려했다. 1차 대전 기간 중 미국 연방정부는 2천여 명을 간첩 혐의로 체포하여 그중 절반 정도를 투옥했다.4)
4) Burns, Presidential Government, p.284.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어느 대통령도 시도한 적이 없었지만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여 4선에 출마했던 것이다. 역사가들은 대공황, 2차 대전, 그리고 장기간에 걸친 사회혼란으로 국민들이 안정을 희구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루스벨트는 2차 대전 당시 갖가지 비상대권을 발동했다. 물가와 임금을 통제했고 수천억 달러의 예산을 지출했으며 수백만 명을 징집했다. 언론 검열을 실시했고 10만 명 이상의 일본계 미국인들을 강제수용소에 격리시켰다. 이 같은 조치들이 “평시에는 헌법에 위배되며, 비민주적이고 그야말로 독재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었지만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미국인들은 이를 수용했던 것이다.5) 한국전쟁 당시 트루먼 대통령도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고 대통령 비상권한을 행사했다. 예를 들면, 1952년 4월 제철공장에 파업이 일어나 전쟁물자 생산이 어려움에 직면하자 그는 제철공장을 점령하도록 명령했다. 2001년 9월 미국에 대한 테러공격이 있고 나서 조지 W. 부시 (George W. Bush)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의 일환으로 여러 면에서 인권을 제한했다.
5) Rossiter, op. cit., p.4.
한국 민주주의 50년을 되돌아 볼 때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대통령 직접선거가 있었다는 점에서 이승만 시대가 그 이후보다 결코 덜 민주적인 시기라고 말하기 어렵다. 야당 후보인 장면이 부통령에 당선된 것은 이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비록 이승만의 권위주의적인 통치스타일과 장기집권으로 비난받기는 했지만 대체로 정치적 경쟁원리에 따라 운영되었고, 지방자치도 실시되었으며, 자유로운 국회운영이 대체로 보장되는 등 삼권분립의 원칙에 충실했다.6) 민주주의는 단기간에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서서히 단계적으로 발전된다. 영국의 민주제도가 발전되는 데 수백 년이 걸렸다. 신생국들의 민주주의가 대부분 시행착오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6) 김호진, 한국정치체제론, p.251.
이승만은 한국의 조지 워싱턴이 되고자 했으나 그가 직면했던 시대상황이 너무도 어려웠다. 그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헌법을 두 번이나 개정하여 장기 집권을 도모함으로써 한국 헌정사에 오점을 남겼다. 아마도 그가 3선 임기를 끝내고 은퇴했더라면 건국의 아버지로서 길이 존경받았을 것이다. 1950년대와 같이 사회는 혼란스럽고 정치 ․ 경제 제도는 정착되지 못했으며 대통령 연임제도에 대한 전통도 수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승만과 같은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를 교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국민에 대한 이승만의 영향력은 대단했으며 그는 국민을 하나로 뭉칠 수 있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그에 대한 비난 또한 적지 않다. 위대한 지도자들은 그들의 전성기가 지나면 밀려나기 마련이다. 2차 대전 당시 위대한 지도력을 발휘했던 처칠도 전쟁이 끝나고 나서 밀려나고 말았다. 4․19학생혁명은 이승만 정권이 몰락을 가져왔으며 그것은 또한 이승만의 비극적 종말이었다.
그러나 학생혁명의 전례는 한국에서 학생세력을 정부의 ‘제4부’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혁명영웅이 된 학생세력은 자신들은 국가의 이익과 국민의 복지를 보호하고 증진할 수 있다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학생들은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이 있으면 거리로 뛰쳐나갔다. 그래서 일반국민들까지도 시위를 통해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풍조가 나타났다. 학생과 경찰 간의 충돌현상은 현대 한국사회의 하나의 특징적인 현상이 되고 말았다. 이것은 이승만 시대가 남긴 가장 심각한 후유증일지도 모른다.
당시 미국 지도자들은 일반적으로 이승만을 싫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높이 평가한 것도 사실이다. 한국전쟁 후반기 유엔군 사령관으로서 이승만 대통령과 긴밀히 협력했던 클라크 장군은 이승만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한국전쟁을 통해서 이승만은 아시아에서 장제스나 네루와 같은 대표적 지도자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반공지도자인 동시에 많은 아시아 국가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공산주의와의 투쟁을 통행서 뿐만 아니라 가끔 미국에 맞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지도자가 되었다.
이승만은 허수아비가 아니었다. 그는 아시아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강력한 지도자였다. … 그는 반공주의자인 동시에 반(反)식민주의자였다. 그는 한국전쟁을 보다 강력한 동맹국의 뜻대로가 아니라 자신의 의도대로 이끌어 나가려 투쟁함으로써 많은 아시아인들에게 위엄과 긍지를 가져다주었다. 그는 한국을 넘어서서 공산주의에 대항해서 생사를 건 투쟁을 벌이고 있는 많은 자유 아시아인들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7)
7) Clark, From the Danube to Yalu, p.160.
전쟁 마지막 단계에서 미8군 사령관을 지낸 밴 플리트 장군은 “이승만은 우리의 목표를 위해 다이아몬드처럼 값진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라이프(Life)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이승만을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학자, 정치인 그리고 애국자의 한 사람이라고 했다. 8)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시 합참의장이었던 래드포드(Arthur W. Redford) 제독은 이승만은 미국에 부담이 되기보다는 자산이 되었다고 보고 그에게 찬사를 보냈다. “여러 가지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한국의 조지 워싱턴이었다. 한국인들은 그를 매우 존경했다. 이승만만큼 한국을 확고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인물은 없었다.” 9)
8) 같은 책, pp/ 142~143.
9) FRUS 1955-1957, ⅩⅩⅢ, p. 219.
역사가들도 한국의 국가건설 과정에서의 이승만 대통령의 크나큰 공로를 점차 인식하기 시작했다. 역사학자이며 이승만 연구의 대표적 학자인 유영익은 “이승만은 현대 한국의 설계자이다. 그는 전쟁과 그 뒤에 있는 평화시대에 한국을 이끌어 갈 수 있었던 가장 잘 준비된 지도자였다”고 말했다. 남덕우(南悳祐)나 신현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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