쫑딘쥬를 찾아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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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반도 작성일12-12-01 17:09 조회3,47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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쫑딘쥬를 아십니까?
월남은 북베트남 경제력의 10배에 달하고 또한 막강한 세계4위의 공군력을 보유했으며 거기다 북베트남의 군사 병력의 3배를 넘게 보유했는데도 북베트남군에게 파리협정에 따른 미군철수 이후 월맹의 공세로 50일만에 수도 사이공이 함락되어 패망을 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요? 월남패망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 한반도 적화통일 음모를 만천하에 폭로하고 더러운 반역을 짓뭉개버리는 것이 절실한 때입니다.
好戰必亡 忘戰必危!!
특히 월남은 대통령 선거때 11명의 후보가 난입하여. 정치가 혼란했으나, 그 중 야당대표 변호사 출신 대선후보 쫑딘쥬가 외세의 힘을 빌어 우리민족끼리 싸우지 말자. 우리민족끼리 하루 빨리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자주적으로 평화통일하자고 주장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누가 생각나십니까? 6.15 선언(소위 조국통일강령)을 체결한 김대중입니까? 10.4선언( 소위 6.15선언 실천강령)을 맺은 노무현입니까? 아니면 6.15선언, 10.4선언을 계승하여 낮은 단계의 연방제통일을 꼭 실현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대선에 나온 변호사 출신 문재인입니까?
여하튼 국민들은 이에 동조하여 미군과 한국군 등 외국군대 철수를 외치고 만 명남짓한 그야말로 한 줌의 빨갱이들의 선동에 놀아나 매일 시위에 나섰습니다. 언론과 종교인들은 철저히 이들 편을 들었습니다. 민족주의의 탈을 쓴 빨갱이들의 반전 평화공세에 스스로 무장해제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언론 종교인들은 월남과 판밖이와 같고 자칭 진보가 42%라는 우리 국민들 또한 월남 국민들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월맹의 구정공세에 반격하는 한국해병 청룡여단
특히 월맹의 구정공세는 월맹이 휴전을 제안하여 7일동안 가만이 있다 월남을 기습공격한 사건입니다. 월맹군은 전체병력 15만중 9만명이 전사하여 월맹군전 병력의 80프로이상이 손실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전투에서는 대패했지만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략적 교두보인 미군철수를 이끌어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미국대사관을 한때 월맹군이 점령하여. 미국 정부 및 미국 시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반전여론이 비등해지며 평화협정 체결과 철수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도 월남 국민들은 신이 나서 자주통일. 평화통일을 힘차게 외치며. 반전시위를 벌였습니다.
월남인구 3천만명중 공산주의자는 불과 1만명여명 남짓하는데도 이 소수의 공산주의자의 선동으로 월남국민들은 현혹당하여 매일 반전시위와 외국군대 철수를 부르짖자 마침내 월남정부 또한 평화협상을 통한 휴전 및 평화통일을 모색하는 방침으로 바뀌게 됩니다.
에피소드로 주월한국대사가 월남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만약에 동맹군이 철수하고 북베트남이 자유월남을 공격하면 어쩔거냐고 묻자 티우 대통령은 “월맹군은 현재 하루 두 끼로 연명하고 그것도 소금절임 반찬이 전부인데 전쟁할 능력이 전혀 없는 상태이다. 앞으로 적어도 10년은 걱정없다. 그 이후는 그때가서 생각하겠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티우 대통령마저도 전쟁을 치르면서도 정세판단의 오류와 안보불감증에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한국전쟁을 겪은 주월 한국대사는 북한의 사례를 말하면서 설득했으나 실패했다고 합니다.
결국 할튼 텍토 공세로 미국내에서도 반전시위 그리고 야당대표 쫑딘쥬가 모든 외국군대 철수를 외치고 자주통일, 평화통일을 외치며 반전시위를 일으키자 미국정부는 서둘러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월남과 방위조약을 맺고 현대식 무기를 넘겨준 뒤 즉각 미군철수를 선언합니다. 이에 1975년 북부 월맹군은 총공세를 감행하여 제2의도시 다낭이 그리고 사이공이 50일 만에 함락당하여 패망합니다.
나중에 변호사 출신 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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