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어 환장한 빨갱이 정치꾼 민주화광신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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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만토스 작성일12-07-23 01:34 조회4,65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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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패망의 역사가 再現되고 있는 대한민국
여기에 옮긴 글은 지난 2006년에 전 주 월남 대사관 공사 이대용씨가 패망한 자유월남의 비참했던 과거를 몸소 겪었던 경험을 토대로 기술한 것이며, 자유월남 패망의 진행 과정이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赤化현상과 어쩌면 그렇게도 한치의 오차도 없는지 공포감과 함께 소름마저 끼칩니다. 그 글을 원문 그대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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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월남과 똑같은 방법으로 패망하고 있다
(
"대통령, 학자, 지식인들은 우리와는 거리가 먼 독일의 통일을 말하지 말라.
반면 1960년대 아시아국가들이 소련과 중국에 의해 공산화 되어가고 있었다. 소련과 중공은 베트남, 한반도, 유럽, 아프리카, 중동 등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공격적인 공산화 팽창정책을 벌였다. 1961년 7월 중공과 북한간에 혈맹적 동맹조약이 체결되었다. 소련, 중공, 북한이 이루는 북한 삼각세력의 팽창정책이 공조체제를 가동했다.
1962년 12월,
미국과 한국 등 연합국이 월남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파병했다. 미국은 연 평균 500억 달러를 퍼부었고 53만 6,000명의 병력을 보냈다. 56,000명의 전사자를 냈다. 20만명이 부상 당했다. 한국군도 33만을 파병했다. 5,000명이 전사했고, 5만명이 부상당했다.
하지만 이 엄청난 지원에도 불구하고 월남은 1975년에 망했다.
천만에 이르는 이들이 처형되거나 재교육 캠프에 끌려가 서서히 죽어갔다. 109만여명의 난민이 나라없는 민족이 되어 구사일생으로 보트를 타고 도망쳤다. 패망한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나라를 지키려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부정과 부패가 난무했다. 종교지도자, 학생들이 연일 반정부 데모를 했다. 미국도 지쳤다. 1973년, 드디어 월맹이 제안한 "평화협정"에 속아넘어갔다. 그리고 철수했다. 미군이 나가자 1975년 4월, 월남이 순식간에 점령되었다.
동양에서 가장 아름답다 해서 흑진주라는 별명을 가진 사이공, 제2의 파리라고 불리던 사이공 항구도시가 야만으로 가득 찼다. 사치품들이 있던 자리에 피와 파편이 즐비했다. 총 끝 앞에서 목숨을 구하는 자들의 아우성이 타이타닉호의 최후처럼 처절했다.
스스로를 지킬 줄 모르는 국민이 당하는 최후였다. 하늘이 스스로 돕지 않는 자를 외면한 것이다.
월남 정부에는 간첩이 많았다. 간첩들은 민족주의자와 인도주의자로 위장했다.
이들이 간첩이었다는 사실은 수천만 민족이 공산주의 치하에서 죽고, 갇히고, 신음하고, 도망한 이후에야 알려졌다.
1967년 9월 3일, 월남의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11명의 입후보자가 난립했다. 티우가 대통령이 되었다. 차점으로 낙선한 야당 지도자 쭝딘쥬가 간첩이었다는 사실은 패망 후에야 알려졌다.
그 간첩이 선거 유세에서 이렇게 말했다.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시체는 쌓여 산을 이루고 있다. 우리 조상이 이처럼 '외세'를 끌여들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얼마나 슬퍼하겠는가. 월맹과 대화를 통해 얼마든지 평화협상이 가능한데, 왜 북폭을 하여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가.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북폭을 중지시키고 평화적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하겠다."
그의 이 말이 미국에 반전여론을 자극했다.
미국과 월맹이 파리에서 비밀 평화회담을 했다. 월남사회는 남남분단으로 치달았다. 여당은 강력한 반공정책을 표방하며 파리 평화회담에 반대했고 야당은 포용정책을 들고 나와 정부에 압력을 가하며 악착같이 데모를 주동했다.
월맹은 한쪽에선 평화회담으로, 다른 쪽에서는 대남공작으로 집요하게 공산화전략을 추구했다.
1973년 1월 27일, 드디어 5년간을 끌어오던 베트남전이 종식되었다.
키신저는 월맹에 40억 달러를 주고 평화협정서라는 종이조각을 샀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 문서였다. 키신저는 확실한 휴전을 담보하기 위해 휴전감시위원단을 만들었다.
캐나다,이란, 헝가리, 폴란드 등 4개국이 250명의 휴전감시위원단을 만들어 휴전선을 감시했다. 월맹의 외무차관이 이끄는 150명의 고문단을 사이공에 인질로 받아 놓았다.
이것도 믿지 못해 미국은 영국,소련,프랑스,중공 4개국 외무장관까지 서명에 참여시켰다. 월남과는 방위조약을 체결했다.
월맹이 휴전협정을 파기하면 즉각 해공군력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하기로 굳게 약속했다.
미군이 보유하던 각종 최신 무기를 모두 월남에 주었다.
월남 공군력은 전 세계에서 4위를 기록했었다.
이처럼 철저한 장치를 마련했기 때문에, 키신저는 주월 미군이 철수하더라도 휴전체제가 최소한 10년은 갈 것이라고 낙관했다.
이로서 세계의 공기는 전쟁에서 평화로 옮겨갔다.
키신저와 월맹의 레둑토가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레둑토는 "나는 한 일이 별로 없다. 나보다 평화에 기여한 사람이 많다"며 수상을 거부했다. 세계는 이를 "동양적 겸양의 표시"라고 이해했다. 그래서 그를 더욱 신뢰했다.
모두가 환상이었다. 환상으로 인해 쥐가 고양이를 잡아먹는 이변이 발생했다. 월맹은 미군의 북폭과 경제봉쇄로 전쟁수행 능력을 상실할 대로 상실해 있었다. 매년 80만 ~ 100만톤의 식량부족,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월남은 힘으로 망한 게 아니라 속임수에 망하고, 간첩에 망하고, 극성맞은 데모에 망하고, 부정부패에 망했다.
베트남 임시혁명정부의 법무장관이었던 쫑뉴탄의 증언에 의하면, 캄보디아 국경에는 수많은 땅굴이 있었고, 그 땅굴 속에는 혁명정부 청사까지 들어서 있었다. 월남정부의 각 부처, 월남군 총사령부에서 이루어지는 극비 내용이 단 하루만에 여기에 보고되었다. 티우가 공산 프락치로 둘러싸여 있었던 것이다. 그의 비서실장도 간첩이었다. 가장 모범적인 도지사로 평판이 자자했던 녹따오를 위시하여 정치인, 관료들이 간첩이었다. 이는 망한 다음에야 드러난 사실들이다.
정보기관에 가장 많은 간첩이 들어 차 있었다.
휴전협정 이후 월남은 월맹보다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에서도 월등히 앞서 있었다.
그래서 월남 지도부와 국민들은 상황을 너무도 쉽게 낙관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의 하나 월맹군이 도발하더라도 즉시 미국의 해공군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할 것이고 이후 월맹경제 원조도 중단하면 당시 세계4위를 차지할 정도로 월등한 월남군 기동력 과 화력으로 월맹군의 공세에 당연히 맞설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누구도 공산군이 남침하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오랜 전쟁에 지친 국민들은 평화무드에 들 떠 있었다. 국방과 안보를 강조하는 사람은 전쟁에 미친, 또는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1975년 9월에 월남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정치인들은 대선 승리를 위해 이합집산과 분열, 반목, 대립, 갈등을 유감없이 연출했다. 고질적인 사회악이었던 뇌물과 마약, 매춘과 도박이 정치 혼란과 어우러졌다. 국민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계층간 갈등이 증폭되었다. 좌익들의 활동공간이 점점 더 넓어진 것이다.
고딘디엠 대통령은 독재를 했지만 매우 청렴결백했다. 그 때의 월남군이 가장 강했다. 하지만 티우 대통령은 강력한 방공주의자였지만 부패했다. 그의 사위가 군에 입대했지만 이름만 군적에 두고 외국 유학을 떠났다. 그러니, 다른 고관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지도층 아들들은 입대 영장이 나오면 일단 입대한 다음 뇌물을 써서 선진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부정축재가 판을 치고, 황금 만능주의, 천민자본주의가 기승을 부렸다.
정의감이 사회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일선 군인들은 "저따위 썩은 정권과 나라를 위해 내가 목숨을 바쳐야 하는가"하며 전의를 상실했다. 화해와 평화의 분위기가 퍼져나가 공산군에 대한 경계심이 사라져버렸다. 월등히 높은 경제력과 막강한 화력을 가졌던 월남부대가, 식량부족으로 고민하던 월맹군에게 허수아비처럼 붕괴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내가 체포되기 전 사이공에서 직접 목격한 것이 있다.
월맹군인들은 소금만 가지고 하루 두 끼 식사를 했으며 속옷은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군화를 신은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타이어를 잘라 발에다 끈으로 묶은 채, 질질 끌고 다니며 전투를 했던 것이다. 이런 군대가 최신무기로 무장한 월남군을 붕괴시킨 것이다. 부패한 군대, 분열된 사회는 최신무기를 고철로 만든 것이다.
좌익이 시민, 종교단체를 장악했다. 천주교의 짠후탄 신부, 불교계의 뚝드리꽝 스팀 등이 “구국 평화 회복 및 반부패 운동세력”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활동했다. 이 산하에 사이공대학 총학생회, 시민단체들이 시민연대를 구성하여 반부패 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이 순수한 반부패운동에 공산당 프락치들이 대거 침투하여, 거대한 반정부 반체제 세력으로 변질시켰다.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미군과 한국군이 철수하자 사이공에는 100여개의 애국단체, 통일단체들이 수십개의 언론사를 양산하여 월남의 좌경화 공작에 앞장섰다.
목사, 승려, 학생 그리고 좌익인사들이 한데 섞여 반전운동, 인도주의운동, 문화운동 등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운동단체들을 총동원하여 티우 정권 타도를 외치고 반정보 시위를 벌였다. 월남은 군사력으로 망한게 아니라 이들 좌익 단체의 선전-선동술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이다.
암살과 각종의 압력들이 사회적 공포감을 확산시켰다. 반공을 외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우익인사, 언론인들이 다음날이면 시체로 발견되어 그들의 친척들이 불이익을 받았다. 지식인과 중산층, 언론이 침묵했다.
1974년 10월, 유전이 발견되었다. 온 국민이 흥분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더욱 자유분방해지고 안일해졌다. 티우 대통령까지도 58만이라는 막강한 군사력에 도취되어 방심하고 있었다. 1975년 1월 8일, 드디어 월맹군 18개 사단 총병력이 월남 공격에 투입되었다. 3월 26일 다낭이 함락되고 월맹군 18개 사단이 사이공을 향해 무인지경으로 달렸다.
부패했던 군인들이 앞을 다투며 가족을 데리고 배와 비행기로 탈출했다. 남침 후 한달이 지났지만 미국은 방위공약을 지키지 않았다. 4월 30일 정오, 월맹 탱크부대가 독립군을 점령했다. 5명의 월남 장군들이 자결하고 나머지는 모두 미국으로 도망을 쳤다.
사이공 함락 후, 월남의 군인, 경찰은 수용소에 연행되었다. 공무원, 지도층 인사, 언론인, 정치인들은 “인간개조 학습소”에 수감되었다. 월남군 부대시설을 개조한 것이다. 한 번 가면 이슬로 사라졌다.
반정부, 반체제 운동을 벌이던 교수, 종교인, 학생, 민주인사들은 예외 없이 모조리 처형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던 인간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똑 같은 짓을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층의 월남 국민들은 소형 선박을 이용해 목숨건 탈출에 나섰다. 보트피플의 숫자는 약 106만명. 이 중 바다에 빠져 죽거나 해적에게 살해당한 숫자가 11만명이었고, 살아서 해외로 이주한 사람이 95만 명으로 집계 되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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