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일본 '최고재판소'에 한 빤치 먹이다. 통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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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돌이캉놀자 작성일12-06-09 04:03 조회3,53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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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기본조약 제2조는 대일 외교의 '아키레스건' 이다-
대법원 1부(주심 김능환 대법관)는 1941년부터 1944년 사이에 일본의 미쓰비시중공업과 신일본제철에 강제 동원되어 혹사를 당하고도 임금 등을 받지 못한 여운택 옹(89) 등 피해자 9명이 위 산업체를 상대로 부산지법과 서울지법에 낸 손해배상 및 임금지급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원고를 패하게 한 원심을 깨고, 지난 5월 24일 위 사건을 부산고법과 서울고법으로 되돌려 보냈다.
위 대법재판부는 판결문에서 ‘1965년에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은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개인들의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양 국가 간 국교복원 및 재정적. 채권·채무관계를 정치적 합의에 따라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서 위 ‘협정 적용대상 범위에는 일제에 박해를 당하고 인권침해를 당한 한국국민이 포함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 피해인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는 취지를 밝혔다.
원심 판결문을 보지 아니하였지만, 아마 원심은 일본의 논리대로 1965년에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한 무상3억불 속에 원고의 피해보상금이 포함되었다는 이유로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 모양이다.
그 이전 위 한인 피해자들이 일본법원에 2003년과 2007년에 위 두 산업체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한바 있으나 최종심인 일본 최고재판소는 “한국인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배는 합법적이기 때문에 일본이 국가총동원법과 국민징용령에 따라 일본인과 동일하게 한국인에게 적용 시킨 국가적 의무 부여는 적법하다”는 이유를 들어 배상청구를 기각하였다.
즉 한국인은 말이 다르고 사는 지역이 달랐지만, ‘한일기본조약’ 제2조에 따라 한인은 곧 일본국민 임을 상호 양해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 대법원이 이번에 “일본 최고재판소 판결은 일제의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에 그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대응한 것이다.
그럼 참고로 ‘한일기본조약’이 어떻게 짜여있는지 한글 본으로 옮겨본다.
《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
대한민국과 일본국은 양국 국민관계의 역사적 배경과, 선린관계와 주권상호존중의 원칙에 입각한 양국 관계의 정상화에 대한 상호 희망을 고려하며, 양국의 상호 복지와 공통 이익을 증진하고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양국이 국제연합 헌장의 원칙에 합당하게 긴밀히 협력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또한 1951.9.8 샌프란시스코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의 관계규정과 1948.12.12 국제연합 총회에서 채택된 결의 제195호(III)을 상기하며, 본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여, 이에 다음과 같이 양국 간의 전권위원을 임명하였다.
대한민국
대한민국 외무부장관 이동원
대한민국 특명전권대사 김동조
일본국
일본국 외무대신 시이나 에쓰부로(椎名悅三郞))
일본국 전권대사 다카스끼 신이치(高杉晋一)
이들 전권위원은 그들의 전권위임장을 상호 제시하고 그것이 상호 타당하다고 인정한 후 다음의 제 조항에 합의하였다.
『 한일기본조약 』
제1조 양 체약 당사국간에 외교 및 영사관계를 수립한다. 양 체약 당사국은 대사급 외교사절을 지체 없이 교환한다. 양 체약 당사국은 또한 양국 정부에 의하여 합의되는 장소에 영사관을 설치한다.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제3조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연합 총회의 결정 제195호(III)에 명시된 바와 같이 한반도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확인한다.
제4조 (가) 양 체약 당사국은 양국 상호간의 관계에 있어서 국제연합 헌장의 원칙을 지침으로 한다.
(나) 양 체약 당사국은 양국의 상호의 복지와 공통의 이익을 증진함에 있어
서 국제연합 헌장의 원칙에 합당하게 협력한다.
제5조 양 체약 당사국은 양국의 무역, 해운 및 기타 통상 상의 관계를 안정되고 우호적인 기초 위에 두기 위하여 조약 또는 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교섭을 실행 가능한 한 조속히 시작한다.
제6조 양 체약 당사국은 민간항공 운수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기 위하여 실행 가능한 한 조속히 교섭을 시작한다.
제7조 본 조약은 비준되어야 한다. 비준서는 가능한 한 조속히 서울에서 교환한다.
본 조약은 비준서가 교환된 날로부터 효력을 발생한다.
이상의 증거로써 각 전권위원은 본 조약에 서명 날인한다.
1965년 6월 22일 동경에서 동등히 정본인 한국어, 일본어 및 영어로 2통을 작성하였다. 해석에 상위가 있을 경우에는 영어 본에 따른다. 라고 되어 있다.
대한민국을 위하여 이동원 김동조
일본국을 위하여 椎名悅三郞 高杉晋一
1. 대법이 말한 대한민국의 ‘핵심적 가치’ 에 관하여.
헌법전문에 보면,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하여 1910년의 일본의 강제병합에 항거한 1919년의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해방 이전까지 국가주권을 유지하며, 일제식민지 통치를 완강하게 저항한 민족자존에 대한 결집된 독립의지가 ‘대한민국의 핵심적 가치’라고 적시하고 있는 것이다.
2. 대법판결의 숨은 의미에 관하여
대법원은 정부로 하여금 1965에 채결된 대일 기본조약 과 청구권 협정이 맺게 되기까지 채결 실무자 간 교섭과정 이면에 있었던 사실관계 등을 숨김없이 파 해친다면 일본의 주장을 궁지로 몰아넣을 정당성이 있음을 지적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과정과 해방 직전까지의 식민통치 과정에 있었던 은폐되어온 진실까지도 낱낱이 밝힐 것을 우리 정부는 물론 일본정부까지도 과감하게 촉구했다는 점이다.
3. 일본의 한국 지배가 합법이라 주장한 일본 법원의 무례에 관하여
일본은 한국을 무력으로 침탈 지배한 후 36년간에 걸쳐 갖가지 자행한 만행을 접어둔 채,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기본조약 및 부대 청구권 협정 등 체결과정 당시에 쌍방의 주장을 미봉한 채, 문서에 기재한 한 어구(語句)를 근거로 ‘일본지배는 합법적’이라고 일본최고재판소가 일본정부를 대신하여 공인한 판결인 것이다.
이에 대항하여 우리 대법원은 한국의 핵심적 가치에 위배된다는 점을 처음으로 과감하게 일본을 향해 본때를 보인 판시한 것이다.
4. 한일 기본조약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1965년 한일 간 국교를 정상화한 후 지금에까지 양국 간에 독도나 일본교과서 문제 등으로 격돌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보다 더 중요한 현안이 남아 있는데 그 것은 바로 한일기본조약과 부속협정에 남아 있는 독소조항에 대한 개정 및 제거 문제 이다.
이 문제점에 관하여 학계나 양식 있는 국민이 정부나 정치권에 꾸준히 제기한바 있었다. 그러나 당국은 양국 간 우호 협력적 관계 유지를 위해 40년을 넘게 덮어두고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이 문제를 다시 꼬집어내기에는 쑥스런 일이 되어버렸는지--, 아니면 위 제2조의 문제점에 대해 아예 먹통이기 때문인지, 지금까지도 외면해 온 것이 현실이다.
5. ‘한일기본조약 제2조의 함정’
위 기본조약 제2조’는 이미 본바와 같이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 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라는 문항으로 우리에겐 ‘계륵’과 같은 현안이다.
6. 명지대학교 김명기 명예교수는 위 ‘이미 무효’란 어구가 문서화되기 전, 한국은 ‘당초(1910)부터 무효’라고 표기하자 했고, 일본 측은 ‘1945년부터 무효’ 라고 표기하자고 서로 고집하다가 최종 교섭과정에서 결국 ‘이미 무효’란 어절을 대치하여 쓰기로 절충했다는 것이다. 즉 이를 간단히 표현하면,
1910부터 무효(한국주장) + 1945년부터 무효(일본주장) ⟶ ‘이미 무효’로 되었다는 것이다.
위에서 보듯 ‘이미 무효’ 란 어구 안에는 1910년과 1945년이란 두 시점이 동시에 포함되어 있는 ‘일어이의(一語二意)’의 모순이 그대로 남아 있어, 동 협정 말미에 적시한 영어 본으로 해석해도 해결될 문제가 아님이 너무나 명확하다.
7. 동아일보 1994.9.10자 기사에 의하면, 동경대학 와다하루키 교수도 1994년 9월 7일에 위 조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고 했다.
---‘지난 1965년에 체결된 한일협정은 양측이 각자 원하는 대로 문안을 해석하도록 만들어 놓은 애매모호한 조약이다. 한일합방조약에 관한 제2조의 경우 일본 정부는 한국독립에 의해 비로소 무효화 되었으며, 따라서 일제 통치는 합법적이라고 해석하는 반면 한국정부는 합방조약은 처음(1910)부터 무효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같이 일본 측의 반성 없이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짐으로서 처음부터 양국관계는 왜곡되어 있다. 이 왜곡된 한일협정의 새 해석을 위한 협상을 재개하여 일본은 과거사에 대해 보상을 해야 한다---’라는 취지의 주장을 폈다는 것이다.
8. 위 교수는 일본의 학자임에도 일본의 조선 통치는 불법임을 고발하고 있고, 위 조약 제2조의 개정을 촉구하고 있는데 오히려 우리 역대 정부는 ‘강 건너 불 보듯’남의 일처럼 방관해 온 것이다. 그럼 위 ‘이미 무효’ 가 된 시기를 일본의 주장대로 1945년이라고 하면, 일제가 한국을 병합한 1910부터 해방된 1945까지의 36년간은 한일합방조약이 살아 있어 동 조약이 적법한 조약임을 우리가 동의하는 꼴이 되고, 그들이 주장한 내선일체의 이론인 '한일동조동근론', '임나일본부설' 등 조선민족‘혼’ 말살의 허구의 논리까지도 우리가 수용하는 꼴이 된다.
따라서 그 동안 한일 간에 분쟁이 되어온 독도 소유권 문제나 일본의 역사 왜곡문제, 일본이 그들의 전쟁에 동원한 한국인 군인, 징용, 군속, 위안부 등에 대한 인권유린 등 반인륜적 행위사실까지도 일본정부의 일본인에 대한 통치로 취급될 뿐 아니라, 일본국의 ‘내정문제’라고 우리가 인정하는 자승자박(自繩自縛)의 어리석은 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다. 일제 강점 36년간은 한국이 국가로서의 객관적 지위를 완전하게 잃은 것이고, 1945년까지의 한국인 국적은 한국 국적이 아니고 일본 국적이며, 그 동안의 한국침탈도 이론상 일본국법에 의한 적법한 통치가 된다.
9. 반면에 일본이 한국의 국권을 뺏은 1910년을 ‘당초부터’의 무효 시점이라 지적 하면, 1910년부터 1945년까지의 36년간은 ‘일제강점기’로 한국은 국가 운영권만 잠시 빼앗겼을 뿐, 엄연하게 국가는 존속하였다 하겠고, 따라서 한국인의 지위는 일본인이 아닌 한국국적을 소유한 한국인인 것이다. 당연히 한국인의 전쟁피해에 대한 모든 배상 역시 일본정부에 책임이 있고, 독도 소유권 주장이나 역사 왜곡 교과서 등도 원인 무효로 더 이상 일본이 이의를 제기할 법적 근거를 잃게 된다.
위와 같이 동 조약 제2조에 대한 해석상으로 양국 간에 큰 차이가 있음에도 일본의 일방적 해석을 우리정부가 묵과해 온 것이 현실이다.
10. 그 동안 우리는 한일기본조약의 부대협정인 어업협정에서 일본의 개정요구를 수용한 전례가 있다.
일본이 1996년 200해리 EEZ(배타적경제수역)를 선포하고.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 부속협정 중 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여 새로운 어업협정을 재체결하자고 요구해 오자, 1997년 7차례, 1998년 8차례의 공식협상을 거쳐 11월 28일 서명한 데 이어, 이듬해 1월 6일 국회 비준을 거친 후, 1965년의 위 ‘한일어업협정’을 ‘신 한일어업협정’으로 대체한 사실이 있음을 기억해야한다.
11. 그런 전례가 있음에도 왜, 우리 정부는 위 기본협정 제2조에 대한 침묵외교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고, 정권을 잡아보겠다고 싸움질 하는 정당이나, 대통령에 뜻을 둔 지도자들조차 위 조약과 협정의 개정문제를 어째서 공약으로 내세우지 못하는가 생각하면, 그들이 한일외교관계에 문외한이 아니면 ‘또라이(멍청하고 머리가 빈)’라는 생각을 금할 수 없고, ‘민족 혼’조차 없는 허수아비 지도자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12. 위 제2조 문장에서 적시한 시재(時在) ‘1910. 8. 22 및 그 이전‘의 보편적이며 객관성 있는 형식논리에 관하여.
가. 일반 관례는 어떤 계약이나 협약이 일단 문서로 완성되어 쌍방이 날인하고 동 문서를 서로 나눠 가졌다면, 그 문서 작성 이전에 어떤 과정이 있었고, 어떤 논란이 있었는지는 상관없이 문서의 기재내용만이 계약당사자를 구속하는 법적효력을 가지며, 법정 시비가 생기더라도 그 문서의 내용이 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나. 가령 20세기 초반에 있었던 한일관계의 역사를 모르는 어문 학자에게 위 한일기본조약 제2조 인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 일본제국 간에 체결 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 한다. 라는 문장을 보이며, 위 문장에서 ‘이미 무효’시기가 언제인가 하고 묻는다면, 어문학자라면 1945년부터 무효라고 지적하지 아니할 것이고, 어문 법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은 ‘이미 무효’의 시점은 1910년이라고 답할 것이 너무나 뻔하다.
왜냐하면, ‘1910년 8월22일 및 그 이전에’ 라는 문장에서 쓰인 ‘그’ 란 의미는 ‘관형사’로 ‘앞서 이미 이야기한 대상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라고 하는 문법칙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일기본조약 제2조의 이미 무효의 시재는 어법 상 ‘그’앞에 쓰여 있는 ‘1910년 8월 22일의 시간대를 지적한 관형사이고 그 때 맺은 조약이 무효라고 지적한 문장임이 명백한 것이다.
13. 1910년의 ‘이미 무효’에 대한 사실적 증거에 관하여
가. 1905년의 을사조약 이후 실질적 통치권을 잃었던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에 편입되고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다. 그 후 1907년 일본은 정미조약을 통해 차관정치로 행정권을 모두 뺏은 후 1909년 7월 일본은 내각회의를 열고 한국의 국호마저 박탈하기로 결정했다.
이듬해인 1910년 6월 30일에 한국의 경찰권을 빼앗은 다음, 7월 12일엔 '병합 후의 대한(對韓) 통치방침'이란 계획서를 만들고, 조선통감으로 임명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이 문서를 휴대하여 경성에 부임함으로써 본격적으로 국권침탈에 대한 공작을 전개하였다.
그 후 위 한일합방조약은 동년 8월 16일 데라우치는 총리대신 이완용과 농상공부대신 조중응(趙重應)을 통감관저로 불러 병합조약의 구체안을 밀의(密議)하고, 18일 각의(閣議)에서 합의를 보게 한 다음 22일 순종황제 앞에서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성립시켰다.
나. 이같은 사실은 1주일간 비밀에 부쳐졌다가 8월 29일 이완용이 윤덕영(尹德榮)을 시켜 황제의 어새(御璽)를 날인하여 이른바 칙유(勅諭)와 함께 병합조약을 반포(頒布)하였다.
14. 이런 합방조약이 성립되기까지 이면의 세부 과정을 살펴본다.
가. 조선 후기 이준열사의 헤이그 특사사건 후에 친일정치가 송병준은 이완용과 함께 고종 황제 양위운동을 벌여 친일활동에 앞장섰고, 1907년 이완용 내각이 들어서자 농상공부대신, 내부대신을 역임하면서 국권피탈을 위한 상주문을 제출하는가 하면 1909년 2월엔 일본으로 건너가 여러 차례 이토 히로부미와 가쓰라 다로(桂太郞) 수상 등 일본 조야 정객들을 상대로 ‘한일합방’을 설득하고, 자신 주도의 내각구성을 조건으로 정치 흥정까지 벌였다.
나. 한편 통감부에서는 송병준이 이완용 내각을 와해시키고 내각을 구성하도록 할 것이라는 소문을 돌게 하여 이완용과 송병준 두 사람이 충성 경쟁을 하도록 부추기는 전술을 썼다.
이에 놀아난 이완용은 자신의 내각이 붕괴될 것이 두려워 “자신 외에 더 친일적인 내각을 구성할 사람은 없다” 면서 자기가 합방조약을 맺을 수 있는 적격자라고 통감부를 설득하였다.
다. 일본은 이런 정치흐름을 즐기면서 점차 ‘병합’의 시기가 무르익어가고 있다고 판단하여 일진회 고문 스기야마 시게마루를 내세우고, 이용구·송병준 등을 이용하여 ‘합방청원서’를 만들도록 부추겼던 것이다.
한편 일본 제국은 조약계획이 누출되면 반대소요 등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나남·청진·함흥·대구 등에 주둔한 일본제국군대를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야밤을 틈타 서울로 이동시켰다.
라. 1910년 8월 4일 총리대신 이완용은 일본어를 모르기 때문에 일본에 유학했던 이인직을 심복 비서로 삼고, 그를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스 미도리에게 보내 합방을 청원하고, 22일에는 이완용이 내각 회의를 소집하여 합병에 반대하는 학부대신 이용직을 회의장에서 쫒아내고 이른바 경술국적이라고 불리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시종원경 윤덕영, 궁내부대신 민병석, 탁지부대신 고영희,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이병무, 승녕부총관 조민희 등 8명의 친일파 대신들이 조약 체결에 찬성토록 하여 한일 합병 안을 승인케 하고, 29일에 합방을 공식 발표하게 되었다.
마. 합방 직 후 일본은 조선의 왕족, 유생, 효자 등 89,000명에게 총 3,000만 엔을 풀어먹여 저항치 못하도록 입을 막았다. 그 후 위 8명의 친일 국적에게 일본 귀족의 작위를 수여하였다.
15. 합방조약 내용을 보면, 더욱 치가 떨린다.
가. 조약 전문
제1조,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넘겨준다.
제2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 조항에 기재된 넘겨준다고 지적한 것을 수락하는 동시에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낙 한다. 제3조∼7조는 생략.
제8조, 본 조약은 한국 황제 폐하와 일본국 황제 폐하의 결재를 받은 것이니 공포하는 날로부터 이 조약을 실행한다.
두 전권 위원은 본 조약에 이름을 쓰고 조인한다.
나. 위 조약문 제1.2조를 보면 한국임금이 스스로 일본에게 통치권을 넘겨준다고 했고, 일본 황제는 넘겨주는 한국통치권을 마지못해 받은 것처럼 되어 있다. 정말 가증한 짓거리다.
다. 또 위 조약은 1910. 8. 22에 조인되었을 뿐 한국황제의 비준이 되지 아니하였는데 한국황제의 결재를 이미 받았다는 제8조의 내용을 보면, 허위임을 증거하고 있다.
16. 대한제국 마지막 임금인 순종황제가 1926년 임종하기 직전 "日韓倂合條約은 무효"라고 선언한 유서를 남긴 사실이 있다.
이점 또한 한일기본조약 제2조의 이미 무효는 1910년임을 입증하고 있다.
가. 연합뉴스가 1997.11.13에 입력한 기사를 옮겨보면, ---서울대 이태진(李泰鎭) 규장각관장은 2010년 8월 13일 "대한제국의 순종황제가 1926년 4월26일 붕어하기 직전 병합조약은 자신이 한 것이 아니므로 파기돼야 한다고 밝힌 유조(遺詔:왕이 백성들에게 유언으로 남기는 조칙)가 1926년 7월8일자 신한민보(`新韓民報)에 보도된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위 신문은 1907년 도산 안창호 선생(島山 安昌浩) 등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한 교민신문으로 李교수는 남가주대(USC)에서 이 신문의 마이크로필름을 확보했다. 李교수는 순종이 궁내부대신 조정구(趙鼎九)에게 조칙(詔勅. 임금의 명령을 일반에게 알리기 위해 받아 적은 문서)을 받아 적도록 했다.
지금까지 순종이 위와 같은 발언을 했다는 주장이 일부 제기되었으나 유조 형식으로 신문에 보도됐다는 사실은 처음 확인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위 신문은 `순종 황제의 칙유문(勅諭文. 임금의 이름이나 말씀의 포고문) 등 병합조약과 관련된 문서에는 국새(國璽)가 찍혀있지 않고 모든 법령에 들어가는 황제의 친필 서명이 없는 대신 행정적 결재에만 사용한 어새(御璽)가 찍혀 있어 국제법적으로 무효'라고 이전부터 주장해 온 李교수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증거여서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한일 기본조약 제2조의 ‘이미 무효’ 시점이 1910년임을 입증 자료이다)
또 순종은 유소(遺詔)에서 "지난날의 병합 인준은 강린(强隣. 이웃의 힘센 나라. 일본을 가리킴)이 역신(逆臣)의 무리(李完用 등을 가리킴)와 더불어 제멋대로 선포한 것으로 나를 유폐하고 협박하여 한 것"이라고 밝혔다.
순종은 이어 "경(卿. 궁내부대신 조정구를 지칭)에게 위탁하노니 이 조칙을 대외에 선포하여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백성들에게 병합이 내가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하면 이전의 소위 병합 인준과 양국의 조칙은 스스로 파기에 돌아가고 말 것"이라고 강조했다. 순종은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어둠 속에서 여러분을 도우리라"라고 덧붙였다. (원한에 사무친 순종의 처절한 외침이다)
한편 李교수는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가 2010년 8월 14일 주최하는 ‘`동아시아에서의 한일관계' 제하의 국제학술대회에서 위와 같은 내용을 학계에 공식 발표한다. 李교수는 "일본 정치지도자들이 병합은 합법적이었다는 `망언을 여전히 되풀이하고 있는 상황에서 순종황제의 공포한 조칙이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고 밝히는 뜻을 유조로 확인한 이상 일본 정부는 한국민과 한국정부에 대해 진정한 사과를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순종황제의 유언 문서가 1910년의 합방조약에 반대하여 자신이 날인하지 아니하였음을 명백하게 증거로 남기고 있음에도 외교 당국은 눈먼 봉사인가 왜 보지 못하며, 아니면 보고도 외면하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18. 또 1910년의 ‘한일합방조약의 전문’을 살펴보자.
‘한국 황제폐하와 일본국 황제 폐하는 두 나라 간의 특수하고 친밀한 관계를 회원(回願)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코자 하는 바 -이후생략- .
위에서‘상호 행복을 증진한다’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코자 한다’고 한 말들은 거짓임을 한일합방조약 체결 후 일본이 자행한 한국민에 대한 차별과 착취, 태평양 전쟁 유발 등을 보더라도 허울 좋은 핑계요 사술임을 증거하고 있다 하겠다.
19. 일본이 한일병합조약의 전권자에 대한 위임장, 조약문, 황제의 조칙 등 형식적인 문서들이 요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합법적이라고 주장하는데 관해 살펴본다.
가. 더욱 중요한 사실은 위 이태진 교수가 근거로 든 1910년 8월 29일 공포된 황제칙유에는 대한국새가 아닌 고종황제가 강제 퇴위될 때인 1907년 7월에 일본이 빼앗아간 칙명지보(국가간의 조약에는 국새가 찍혀야 하는데, 칙명지보는 행정결제용 옥새를 말한다.)가 찍혀 있다는 점과 1907년 11월 이후 황제의 조칙문에 날인해온 황제의 서명 ‘척(拓.순종의 이름)’ 자가 빠져 있는 점을 들었다.
당시 순종은 일본 측의 강제병합에 직면해 전권위원위임장에는 국새를 찍고 서명할 수밖에 없었으나 마지막 비준절차에 해당하는 칙유서명은 완강히 거부했다.
나. 2010년 5월 10일, 한일 강제병합 100주년을 맞아 한국의 대표 지식인 109명은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일본 지식인 105명은 도쿄 일본교육회관에서 각각 기자회견을 열고 ‘한일 병합이 원천무효’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한국병합은 대한제국의 황제로부터 민중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격렬한 항의를 군대의 힘으로 짓누르고 실현한 제국주의 만행이며 불의부정(不義不正)한 행위”로 “조약의 전문(前文)도 거짓이고 본문도 거짓”이라고 밝혔다.
다. 이들은 “조약 체결의 절차와 형식에도 중대한 결점과 결함을 보이고 있으며, 한국병합에 이른 과정이 불의 부당하듯 한국병합조약도 불의부당하다”라고 지적했다.
위 양국 대표들은 한일병합 조약을 애초부터 불법 무효로 해석한 한국정부의 해석이 맞으며, 한국의 독립운동 역시 불법운동이 아니라는 취지의 내용도 포함됐다.
20. 위 이태진 교수가 지난 1994년 갑오경쟁부터 1910년 한일합병 직전까지 조선의 칙령, 조칙, 법률, 의안 등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1905년 ‘을사조약’ ‘정미7조약’ 등 각 조약과 식민지 법령들이 고종황제의 인준을 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수는 일본 측에 의해 황제의 서명이 위조되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가. 위 1905년의 을사조약의 경우 조선의 박제순 외부대신과 주한 일본공사의 날인만 되어 있을 뿐 당시 통수권자인 고종과 일본국왕의 날인이 없으며, 황제가 조약 체결권을 외부대신에게 위임한다는 위임장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순종황제가 즉위한 1907년 8월 이후 반포된 ‘재무감독국관제’ 등 48건의 칙령에는 순종의 서명이 위조된 것을 밝혔고, 규장각 사료연구부는 순종의 황태자시절 서명과 황제 즉위 후 ‘조칙’ 등에 대한 서명을 일일이 대조한 결과 약 48개의 서명 필체가 다른 것을 발견했다.
나. 1907년에 반포돼 일정시대를 통해 언론통제기능을 했던 ‘신문지법’에는 황제나 황태자의 수결 없이 ‘칙령지보’의 어새만 찍혀 있고, ‘광업법 개정안’은 어새를 먼저 찍은 후 그 위에 문안이 쓰여 있는 등을 보더라도 각 조약과 법령들이 황제의 비준을 거치지 않고 일본과 친일 무리들이 제멋대로 위조한 것이어서 무효라고 주장했다.
다. 위 자료들을 검토한 서울대 국제법 교수 백충현씨는 ‘군주제도 하의 국제조약’은 외부대신에 대한 국왕의 위임장과 국왕 자신의 날인이 필수적인데 을사조약과 정미조약은 국왕의 비준 자체가 없어 국제법상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통감부에 의한 조선의 합방조약과 그 후 조선의 통치는 모두 무효라고 강조했다.
21. 고종황제의 ‘을사늑약 무효’ 친서 발굴하다.
가. 동아일보 1993.10.24 자 기사를 보면,
‘을사조약무효’ 란 제하에 서울대학 김기석(사범대교육학과)교수는 하바드대 ‘한국학연구소’에 파견 중 고종황제의 ‘을사늑약 무효’ 친서를 발견했다. 이친서에는 첫째 을사조약이 위협과 강제에 의한 늑약조약이며 둘째 자신이 황제로서 정부에 조약체결을 허가한 적이 없으며 셋째 소위 정부회의는 국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대신들을 가두어 둔 채 이루어진 회의임으로 을사조약은 당연히 불법이며 무효라고 지적했다.
고종황제는 친서에서 “짐은 어떤 경우에도 결단코 이 조약을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고 “그러므로 어떤 나라가 짐이 이 조약을 응낙했다고 주장하는 일이 있더라도 원컨대 믿지도 듣지도 말며 그 것이 근거 없는 말임을 알아주길 바란다.”고 간절히 호소하고 있다.
고종은 또 “이같은 불의를 네델란드 헤이그 만국공판소의 공판에 붙이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고종은 당시 미국인 교육가 호머 B 헐버트를 특사로 임명 특사 위임장을 주어 이 친서 9통을 작성 열강의 국가 원수들에게 전할 것을 명하였다.
그 후 고종의 강제 퇴위로 결국 각 원수들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이 친서는 컬럼비아대 도서관에 맡겨졌다. 위 김교수는 “이 친서는 지금까지 알려진 어떤 문서들 보다 가장 확실하게 을사늑약이 불법이며 무효임을 밝혀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 했다.
서울대 신용하 교수는 “지금까지 국내 학계에서는 고종황제의 친서가 있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그 원본이 발견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고 말했다.
결론
필자는 역사바로 세우기니 민족문제연구소니 친일청산이니 하는 문제를 다루는 식자들이나 단체가 있으면서도 한일기본조약 제2조를 개정하자는 목소리가 왜 없는지 모르겠다.
일본이 한국의 친일청산 진행과 친일 인명사전을 만드는 그 간의 여러 행적을 보면서 어떻게 우리를 생각하겠는가 하고, 생각해 본 사람이 있는가.
일본은 원흉이 우리요, 그 원인 제공자는 일본인데 한국에선‘꼬시래기 제 살 뜯어 먹듯’ 자기내들 끼리 치고 박고 야단법석을 뜨니 우리를 얼마나 비웃겠는가 생각하니--,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내 얼굴이 부끄러워 달아오른다.
정부는 제발 저번 헌법재판소의 한일청구권 경제협력에 관 한 헌법소원의 인용판결로 위 협정 제2조1항에 대한 개정을 일본 정부에 재해석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이번 대법원의 판결을 달성하기위해 기본조약 제2조의 재해석문제를 위 논리와 증거를 바탕으로 총력을 다해 대응해주기 바란다.
이런 조약을 맺게 된 역사적 진실을 우리 정치인들이 알고 있는지 의문이고, 모른다면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또 정부당국도 우리대법원의 판결을 보고 새로운 각오로 한일관계에 관하여 파고 들어 국익에 소홀함이 없고, 민족자존 즉 헌법적 핵심가치를 수호하는데 노력을 경주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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