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이 보훈연금을 받는다? (7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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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재학 작성일11-01-12 08:11 조회5,08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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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이 보훈연금을 받는다? (7부)
김대중의 출생의 비밀과 이념적인 정체를 파헤치려는 애국지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익히 공산주의자들의 전술전략을 깊이 이해하고 있던 분들이었다. 남한 적화를 위해 김일성과 그 무리들이 얼마나 오래도록 깊이 있게 음모를 진행해 왔는지, 그리고 그 음모에 김대중이 얼마나 관여하였는지를, 애국지사들은 세상에 알리고자 하였다. 그것은 김대중의 친 대북정책의 허구성과 대북송금을 파헤치려는 일련의 과정에서 엿볼 수 있는 결과물이었다.
이미 알려지다시피 김대중이 집권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대북공안 라인을 없애는 일이었다. 대한민국이 건국 이후 50여 년 동안 길러온 국정원, 그리고 공안 검사나 경찰들이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축적된 빨갱이 자료 역시 모두 없애버렸다. 심지어 전교조 자료까지 모두 없애버렸다. 그리고 나서 김대중은 이에 대항하는 애국지사들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분이 손충무 선생이었다. 필자는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이 어떻게 2년 감옥살이를 해야 하는 지를, 그 판결의 이유를 지금까지 모르고 있다. 일반적으로 명예훼손은 벌금형이며, 설령 징역형을 때린다 하여도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것이 통상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2년 징역을 실형으로 살았다는 것은 김대중과 박지원의 음모가 개입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권력에 아부하는 검사와 법관을 동원한 사법살인이라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대한민국 검판사들을 믿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당시 김대중 편에 서서, 법을 어겨가며 2년 구형과 2년 징역형을 내린 검판사들은 언젠가는 도태시켜야 할 대한민국의 암적 존재들일 것이다.
다음은 손충무 선생에 대한 일화(逸話)다. 손충무 선생이 1996년부터 INSIDE THE WORLD 주간지에 ‘김대중 X-파일’을 연재하기 시작하자, 97년 5월 박지원은 봉투에 ‘큰 것 5장’을 넣어 어느 날 밤 편집국을 방문 편집부장에게 맡겨 놓고 갔다. 그러나 손충무 선생은 그것을 새벽에 돌려준다.
그 다음날 고종사촌 형인 조우승 박사 병원에서 만나자고 연락이 와서 현장에 갔을 때, 박지원이 있었고 박지원은 ‘큰 것 다섯장’이 든 봉투를 다시 꺼냈다. 그래서 그 자리에 화를 내며 물리쳤다. 박지원은 몹시 서운해 하면서 헤어졌다.
20여분 후 조박사가 “주간지 경영이 어려운데 받아쓰지 그랬어. 특별히 큰 것 다섯장이라는 거금이라고 했는데” 하면서 몹시 아쉬워했다. 그 봉투에 얼마나 큰 액수가 들어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으나, 박지원이 형에게 “큰 것 다섯장 인데 이런 촌지는 준적이 없다. 총재께서 손사장에게는 큰 호감을 갖고 전해 달라고 했는데”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총재란 이는 김대중이었을 것이다.
98년 2월 청와대 대변인으로 입성한 박지원이 조우승 박사에게 인사를 하러 왔을 때, 조박사는 “잘 해야 한다. 정권이 끝난 후에라도 감옥에 가지 않고 청문회에 불려 나가지 않도록 매사에 조심하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그때 박지원이 “형님 요즈음도 손충무 사장을 자주 만납니까?” 하고 물으며 “이제 만나지 마십시오. 우리가 손을 봐 줄 것입니다. 이번에는 빠져 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야당 대변인 5년 하면서, 한국 언론계에 내 돈 안 먹은 놈 없는데, 손충무한테만 무시를 당했습니다.”하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위 사연은 박지원으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전해들은 조박사가 평소 골프를 함께 치는 A박사 J대사와 인사이더 월드 취재부 차장이 함께 있는 장소에서 들려 준 이야기라고 한다. 그리고 98년 5월 중순 박지원은 손충무 선생을 단단히 손을 봐주기로 결정하였다는 말을 지인들에게 전한다.
그 말이 있은 2주 후인 98년 6월 1일 손충무 선생은 긴급 구속을 당한다. 그러나 그들이 문명자를 내세워 모의하고 꾸민 음모는 증인들의 증언으로 허위로 밝혀져 무죄가 선고 됐는데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죄’로 2년간 징역살이를 하였다.
이에 민보상법 개정안을 통해 나라의 참된 정의를 바로 세우고자 불철주야 애쓰고 있는 한나라당 전여옥 의원은, 정권 교체 후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통해 “무능 좌파 10년은 역사에 씻기 힘든 죄를 지은 세월”이라고 분노하고, “진정한 애국투사 민주투사들을 욕보인 10년”이라고 했다.
전여옥 의원은 또 “무엇보다 중요한 나라 발전은 뒷걸음질 쳤고, 젊은이들의 미래는 그들의 싸구려 민주화 논쟁에 판돈으로 쓰였다”며 “그러나 좌파들과 투쟁한 애국 투사들은 10년 동안 감옥에서 해외에서 망명객이 되어 참으로 힘든 고통을 겪고 있다”고 울분을 토했다.
한편 언론인 손충무 씨는 2년 실형을 살고 미국에 정치 망명 중, 지난 2010년 10월 77세 일기로 하늘에 오르셨다.
또한 지난 1997년 김대중 좌파정권 탄생을 막기 위해 몸을 던지며 투쟁한 애국투사 권영해 전 안기부장은 오랜 투옥생활을 하였고, 1년 6개월 감옥살이를 한 이대성 당시 안기부 북한국장은 일본에 망명 중이며, 손창식 씨는 추운 겨울 서울 시내 길거리에서 쓰러져 고인(故人)이 됐다.
또한 1년 6개월 징역살이를 마친 함윤식 씨는 교회 일을 하고 있고, 집행유예를 받은 언론인 이도형 씨는 한국논단을 발행하고 있으며, 출판인 천봉제 씨는 출판사 문을 닫았다. 이분들이 바로 김대중을 바르게 세상에 알리려다가 탄압을 받은 애국지사들이었다.
더 상세한 내용을 열거하면, 1997년 김대중이 대통령에 출마,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대결할 때 언론인 손충무(주간, 인사이더월드 발행인) 이도형(월간, 한국논단 발행인) 천봉재(월간, 월드코리아 발행인)씨 등 언론인 3명과 함윤식(한길 발행인) 손창식(한길 편집인)씨와 출판인 3명, 소설가 3명 등 9명이 체포되어 손충무 선생은 무려 징역 2년, 함윤식 씨는 징역 1년 6개월을 살았다.
그 외 나머지 7명은 불구속재판으로 1년-2년, 혹은 6개월 집행유예 및 벌금 실형을 받았다. 또 권영해 안기부장과 박일룡 안기부 차장, 고성진 수사국장, 이대성 북한국장등 10여 명이 징역 5년-1년 6개월의 실형을 살고 나왔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분들의 투쟁 덕분으로 대통령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 이명박 정권은 하루빨리 애국투사들을 사면복권, 해외에서 귀국하도록 하고, 국가는 이들에게 참다운 마음으로 명예를 회복시키고, 나라와 민족을 지킨 그 수고에 대해 진정을 다해 보상해야 할 것이다.
정재학
(IPF국제언론인포럼 편집위원, 시인정신작가회 회장, 데일리안 편집위원, 전남자유교조 고문, 자유지성300인회 회원)
다음 8부는 박지원이 출세를 위하여 전두환에게 어떻게 접근 하였는지, 그 과정에서 호적을 고친 이유가 밝혀집니다. 그리고 5.18을 기리는 광주 사람들을 어떤 식으로 모욕했는지 그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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