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여기 이 사람들..(모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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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東素河 작성일10-12-30 14:03 조회6,011회 댓글5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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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용사들의 오늘] - 가난과 냉대(1)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사는 참전유공자 홍모(81)씨는 평일 점심을 주로 서울 종로구에 있는 한 노인복지센터에서 무료 급식으로 해결한다. 6·25전쟁 때 8촌 이내 친척 11명이 같은 날 군에 들어갔지만 살아남은 사람은 홍씨 혼자뿐이다. 휴전 직전 파주 장단역 앞에서 철조망 설치작업을 하다 적 포탄에 왼쪽 무릎 파편상을 입었지만 상이(傷痍) 신청은 하지 않았다.
목숨은 건졌어도 그의 삶은 극빈(極貧)의 그늘진 구석에서 몸부림치고 있다. 그의 한 달 총수입은 33만원쯤이다. 기초노령연금 14만4000원(부부), 6·25 참전명예수당 9만원, 자녀들이 가끔 주는 용돈 10만원 정도다. 홍씨는 "공과금 내고, 쌀 사고 나면 남는 돈이 거의 없다"며 "입이라도 하나 줄이기 위해 점심을 무료 급식으로 해결한다"고 말했다.
1. 가난에 찌든 참전용사들
참전용사들은 대부분 자신을 우리 사회의 중하층이라고 생각했다. 보훈교육연구원 실태조사에 따르면 자신의 생활수준이 '하층'이라고 답한 참전유공자는 절반이 넘는 53.4%에 달했다. '중하층'이라고 답한 33.6%를 합치면 전체 응답자의 87.0%가 경제 수준이 낮다고 대답한 것이다. 밥 한끼 때우려고 무료급식센터를 맴돌거나 아예 식사를 건너뛰는 참전용사들도 많다.
1951년 입대, 9사단에 있을 때 눈에 파편을 맞고도 전투를 계속해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유래회(79)씨의 한 달 수입은 24만원이 전부다. 기초노령연금으로 9만원을 받고 훈장에 따른 수당으로 15만원을 받는다. 하지만 훈장수당으로는 임대아파트 임대료(15만6000원)도 낼 수 없다. 여기에 관리비가 여름엔 10만원쯤, 겨울엔 15만원쯤 된다. 유씨는 "자식들이 한 달에 용돈 20만~30만원 줘서 겨우 살고 있다"며 "평소에 아침·저녁만 먹고 점심은 건너뛴다"고 말했다. 그는 "자존심 때문에 줄 서서 공짜 밥 먹는 건 못하겠다"고 했다.
이행옥(81)씨가 낮 기온이 영상 30도를 웃돌았던 지난 18일 강남 일대를 걸어 다니며 열쇠가게 광고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 오진규 인턴기자) - 6·25전쟁 때 무공훈장 3개를 받음
박용우(77)씨는 서울의 한 복지센터에서 만났는데 "집이 있는 노원구의 복지센터에서도 밥을 주지만 창피해서 지하철을 세 번 갈아타고 이곳에 와서 점심을 먹는다"고 말했다.
변은준(81)씨는 "나라가 돈 적게 줘서 배가 고프다"며 "종로의 무료급식기관엔 줄이 너무 길어서 그냥 점심은 거른다"고 말했다.
전인호(78)씨는 경기도 안양에 사는데 10여년전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부인과 이혼했다. 전쟁 때 중공군 화염방사기에 두 다리에 화상을 입은 그는 지난 2005년부터 상이 7등급 보훈급여를 받기 시작했다. 전쟁 때 자신이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는 사실도 그때야 처음 알았다. 먼 친척의 집 단칸방에 얹혀사는 그는 "아침은 거르고 점심·저녁은 인근 복지관 등에서 해결한다"며 "전쟁에서 공을 세웠는데 왜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지…"라고 말했다.
참전용사들은 정부에서 받는 돈은 삶에 별 도움이 안 된다고 했다. 무공훈장 수훈자에겐 '무공영예수당'으로 월 15만원, 참전 사실만 인정되는 참전유공자에겐 '참전명예수당'으로 9만원을 준다. 특히 무공수훈자의 경우 훈장이 1개이든 5개이든 관계없이 똑같은 금액을 받으며, 태극이나 충무·화랑 등 등급에 따른 차등도 없다. 한 참전유공자는 "참전수당 9만원은 한마디로 '애들 사탕 값'"이라며 "이런 대우를 받는 우리의 처지가 너무 서글프다"고 했다.
2. 다른 국가유공자들은 혜택도 많이 받는데.. 상대적 박탈감 심각
지난 17일 만난 김모(81)씨는 "우린 '빽'도 없고 명예 때문에 할 말도 못해 지지리도 혜택을 못 받는다"고 하소연했다. "옛날엔 불평·불만이 적었는데, 다른 유공자들이 돈 받고 혜택받는 걸 알게 되면서 우리가 홀대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도 했다. 실제 보훈제도를 분석한 결과 특히 '일반' 참전유공자들이 받는 혜택은 상대적으로 크게 빈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북파공작원 등 특수임무수행자의 경우 일시불로 평균 1억5600만원(임무수행자의 경우)을 받은 뒤 교육과 취업, 의료 등에서는 국가유공자와 동일한 혜택을 받는다. 5·18 민주유공자도 일시 보상금과 함께 국가유공자 혜택을 받는다. 구금·연행만 됐어도 마찬가지다. 국가유공자가 되면 수업료·병원비가 면제되고, 자녀들은 3명까지 특별 고용된다. 또 저리로 대출을 받을 수도 있고 자녀들이 취업 시험을 치를 때는 5~10%의 가산점도 받는다.
이에 비해 6·25 참전용사의 경우 '상이군경'과 '무공수훈자'는 국가유공자 혜택을 받지만 일반 참전유공자는 혜택이 별로 없다. 월 9만원의 수당과 보훈병원 진료비 60% 감면 정도다. 지난 2008년 국가유공자예우법 개정·시행으로 6·25 참전유공자도 국가유공자에 편입됐지만, 실제 혜택은 참전유공자예우법에 따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관계자는 "참전유공자는 껍데기만 국가유공자일 뿐"이라며 "돈은 좀 적어도 다른 혜택은 국가유공자 수준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참전용사들의 오늘] - 빈곤의 대물림(2)
나라 지키느라 못 배우고 못 가르쳐… 자식들도 가난의 늪에… 공부할 시기에 전장 나가, 부상으로 직장 못잡고 가족들 제대로 못돌봐 형편 어려운 자식들에게 나이 들어서도 의지 못해… 전쟁 때 청력을 잃은 유영한(75)씨는 4남2녀 자식들을 생각할 때면 가슴이 찡하게 저려온다. 17세 때 의무병으로 참전했던 유씨는 1951년 경기도파주 전투에서 적 포탄이 옆에서 터지는 바람에 양쪽 귀 고막이 망가졌다.
의병 전역을 한 유씨를 받아주는 회사는 없었고, 그는 평생 제대로 된 직장에 다녀보지 못했다. 대놓고 "재수 없다"며 내쫓는 회사도 있었고, 어떤 회사는 소금을 뿌리기도 했다. 그는 그 이후 전쟁에서 다쳤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오히려 "귀가 안 들려 군대에 가지 않았다"고 둘러대곤 했다. 그는 자식들을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한 것이 못내 한으로 남는다고 했다. 아내와 결혼한 뒤 50년 가까이 월세 단칸방에서 아이들을 키우느라 뒷바라지를 제대로 못했다. 월세를 맞추느라 이사만 50번 넘게 했다.
자녀들은 반에서 1·2등을 다퉜지만 학교에 내는 육성회비는 밀리기 일쑤였다. 큰딸은 초등학교만 마쳤고, 나머지 5명은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시켰다. 유씨는 지난 2000년이 돼서야 상이용사로 인정받아 국가유공자가 됐다. 상이용사는 자녀들의 교육비가 무료로 지급된다. 유씨는 그런 제도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나중에야 알았다. 하지만 이미 자녀들은 이미 다 커버려 기회를 놓친 뒤였다. 그는 "자식 6명 중에 지금 자기 집을 가진 아이가 하나도 없다"면서 "나 때문에 자식들까지 못사는 것 같아 가슴을 치고 또 친다"고 말했다.
1. 못 가르친 恨…가난은 유전되고
참혹한 전쟁에서 빠져나온 참전유공자들은 꿈꿨던 단란한 가정이 깨지고 가족들이 고통에 떠는 모습을 보면서 또 한 번 울고 있다. 참전유공자 중에는 자녀들 교육을 제대로 뒷바라지하지 못해 가슴 아파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한 자녀들은 좋은 직장, 많은 월급, 행복한 가정과는 거리가 먼 삶을 되풀이했다. 가난이 대물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에 있는 상고 졸업을 3개월 앞두고 자원입대한 김모(79)씨는 1남2녀를 대학에 못보낸 것이 마음에 상처로 남아있다. 그는 "막노동을 한 아들은 이미 몇 년 전 소식이 끊겼다"고 말했다.
최귀연(86)씨의 기막힌 사연
결혼 1년 만에 징집돼 전장에 뛰어들게 된 최귀연(86)씨는 슬하에 8남매를 뒀지만, 중학교를 졸업한 자식은 34세짜리 막내아들 하나다. 다른 자녀들은 초등학교를 졸업시켰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자식들은 이삿짐센터나 공장에 다니고 있다. 21일 6·25 참전유공자 최귀연씨가 국가유공자 배지를 모자에 달고 낡은 아파트 현관을 나서고 있다. 최씨는 슬하에 8남매를 뒀지만 중졸(中卒) 이상의 자식은 막내아들 하나뿐이다. / 김용국 기자 young@chosun.com
최씨는 군에서 병을 얻어 평생을 시름시름 앓았지만 군 병원에서 치료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자신을 대신해 가정을 꾸리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던 아내는 50세가 되자마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최씨는 지금도 "굶기를 밥 먹듯이 했는데 약이라도 제대로 써봤겠느냐"라며 "아내가 죽은 것은 결국은 나 때문 아니냐"고 말했다. 방 2개짜리 낡은 17평 아파트에 사는 최씨는 막내아들과 한방을 쓴다. 마흔이 다 된 딸이 시집을 가지 않기 때문이다. 최씨는 "엄마가 그렇게 고생만 하다 갔으니 딸이 시집을 안 가려고 하는 것 같다"며 "죄스러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민준식(78)씨의 슬픈 사연
서울 면목동에서 1500만원짜리 전세로 지하 방 두 개를 얻어 살고 있는 민준식(78)씨는 항상 마음에 두 딸에 대한 미안함이 자리 잡고 있다고 했다. 그는 1951년 1·4후퇴 직후 입대한 뒤, 1956년 상사로 제대했지만 군 경력은 그의 삶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국 공사현장 등을 돌아다니며 일용직을 전전했고, 두 딸을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 둘 다 중학교만 졸업했다. 큰딸은 인천 지역에서 노동일을 하고 있고, 둘째 딸은 몽골인과 결혼했다가 1년 만에 딸아이 하나를 낳고 헤어졌다. 민씨는 "둘째 딸이 바로 옆방에 산다"며 "손녀딸만큼은 정말 정상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하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2. 왕래하지 않는 자식들… 무너진 가정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 보훈교육연구원이 참전유공자를 전수조사한 '참전유공자 생활실태'에 따르면, 작년 9월 말 현재 참전유공자들의 평균 나이는 80.3세다. 이들은 현실적으로 직업을 갖거나 노동을 통해 소득을 올리기는 어렵다. 따라서 부모의 경제적 생활을 지원하는 자식들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 하지만 실제로 자녀로부터 보조를 받는 참전유공자는 절반에도 미치지 않았다. '참전유공자 생활실태' 조사에서 '주 소득원'이 자녀 보조라고 응답한 사람은 44.6%였다. 이어 정부가 주는 보상금이 17.9%, 농수산 10.7%, 근로소득 6.4% 등이 뒤를 이었다.
자녀들의 보조를 받는 참전유공자가 50%도 안 된다는 것은 상당수 참전유공자 자녀들이 경제적 어려움에 있거나 부모와 자식 간 관계가 무너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쟁 때 해군에 자원입대해 중공군을 물리친 공로로 충무무궁훈장을 받은 차모(82)씨는 "아이들이 모두 생활이 어려워 자주 왕래하지를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아들 딸 하나씩을 낳았지만 직업도 마땅치 않은 자식들에게 도움을 청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18평짜리 영구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는 차씨는 "아이들에게 손을 벌리느니 차라리 겨울에도 난방을 잘 때지 않는 식으로 살고 있다"고 말했다.
1951년 학도병으로 참전했다는 김모(82)씨는 "자식들과는 명절 때 한번 보고 전화 한 통화도 하지 않는다"며 "자기들 사는 게 힘든데 어떻게 그 아이들을 탓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참전유공자 중에는 자녀들과 아예 연락이 끊긴 경우도 있었다. 1952년 입대해 만 5년간 복무했다는 송영부(80)씨는 "자식들에게는 한 푼도 도움을 받지 않고 있다"며 "특히 결혼을 안 한 넷째 아들이 3년 전부터 연락을 끊고 있는 게 가장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전영한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참전유공자들의 경우 부상이나 교육의 기회 상실 등으로 어려움에 처할 가능성이 상대적 더 높은 게 사실"이라며 "그러한 어려움이 가정의 붕괴로 이어지는 것은 우리의 불행한 현실"이라고 말했다.
[참전용사들의 오늘] - 높고 차가운 사회의 벽(3)
일도 갈 곳도 없어… 공원 찾거나 TV 앞에서 쓸쓸한 노후 상이용사 신청 퇴짜 일쑤, 일자리 찾는 것도 힘들어… "장애인은 버스라도 무료 참전유공자엔 혜택 없어" 6·25전쟁 때 적 포탄 파편에 오른쪽 눈을 맞은 송재수(82)씨는 시각장애 1급 장애인이다. 1977년 오른쪽 눈 시력을 완전히 잃었고, 5년 전엔 왼쪽 눈도 실명했다. 부상당한 당시 눈과 머리, 허리에 파편을 맞은 그는 1주일 동안 의식불명 상태였고, 이후 몇 달간 대구 육군병원과 야전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상이군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송씨는 2001년 진주보훈청에 상이 등급 신청을 했지만 기각됐다. '육군병원에 입원한 기록은 있으나 자세한 진료 기록이 없다'는 이유였다. 송씨는 "죽기 전에 국가유공자가 돼서 국립묘지에 가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지난 4월 송씨 아들 영호씨는 아버지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다시 상이 등급 신청을 했다. 송씨가 전쟁 때 부상을 입었다는 마을 주민 3명의 증언을 첨부했다. 하지만 받아들여질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60년 전 참전유공자들은 참혹한 전쟁의 포화를 이겨냈다. 그들은 살아 돌아왔지만, 그들을 맞은 사회는 삭막했고 험난했다. 그들은 못 배우고 가난했기에 오히려 사회로부터 따돌림을 받아야 했다. 그들은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지만, 상이를 어떻게 인정받는지도 몰랐다. 수십 년 지난 지금에도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그들은 높고 차가운 사회의 벽을 여전히 느끼고 있다.
1952년 강원도 금성 전투에서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김상업(81)씨는 10년 동안 정부와 힘겨운 싸움을 벌이다 자포자기에 빠졌다. 왼팔에 파편상을 입은 그는 요즘도 궂은 날만 되면 팔이 시큰거리고 아프다고 했다. 그는 육군본부가 발부한 상이 확인증도 갖고 있지만 보훈청은 "병원 진단서를 가져오라"고 했고, 병원은 "언제 어디서 다친 건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김씨는 "전쟁에서 다친 사람에 대한 특별대책 같은 건 왜 없느냐"고 말했다. 지긋지긋한 생활고를 벗기 위해 일자리를 찾는 일도 힘들다. 평균 연령 80세를 넘은 참전유공자들은 고령과 건강 때문에 구직 대상에서 제외되기 일쑤다.
1951년 해병대 12기로 입대, 만 4년간 복무했던 방창효(84)씨는 기초생활보호대상자다. 정신지체장애 2급인 딸과 당뇨합병증·골다공증·백내장으로 고생하는 아내(76)의 병수발을 혼자 도맡아 한다. 방씨는 "가족들 약값이라도 벌어보려고 취로사업이나 전단지 배포 일을 찾았지만 모두 안됐다"고 말했다. 그는 "장애인은 버스라도 무료인데, 우리 참전유공자는 그런 혜택도 없다"고 말했다.
사회로부터 소외됐다고 느끼는 참전유공자들은 마땅히 갈 곳도, 즐길 것도 없다고 하소연한다. 실제 보훈교육연구원의 '참전유공자 생활실태' 조사에 따르면 참전유공자 10명 중 6.4명이 TV를 보거나 산책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강원도 화천에서 포병으로 참전했다는 박태일(78)씨는 "2~3일에 한 번씩 인천에서 전철을 타고 서울 종묘공원을 찾는다"며 "하루종일 집에 멀거니 앉아있기도 심심해 이곳에 나온다"고 했다. 종묘공원엔 매일 오전부터 국가유공자(참전유공자) 배지를 단 참전용사 수백 명이 바둑·장기를 두거나 시국강연회를 듣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자신의 전문성이나 경륜, 경험을 사회에 돌려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쟁 때 화랑무공훈장을 두 개나 받은 김용철(80)씨는 요즘 군이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는 6·25전사자 유해발굴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여주·이천·가평·화천 등 자신이 싸웠던 전장을 찾아가, 전투가 치열했고 전우가 묻혀 있었던 장소를 알려주고 있다. 김씨는 "전우들이 아직도 차가운 땅속에 묻혀 있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고 했다.
서울대와 이화여대 의대 교수를 역임한 성낙응(85)씨는 4년 전부터 6·25 무공훈장 수훈자들을 대상으로 건강관리 강의를 하고 있다. 그는 의대를 졸업한 1950년 입대해 1956년 소령으로 전역할 때까지 군 복무를 했다. 전쟁 때는 충무·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성씨는 "국가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운 참전용사들이 어렵게 사는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며 "별것 아니지만 배운 것으로 동료 참전용사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이 글을 읽고 국가에 간곡히 청원합니다]
내가 사는 이 나라는 과연 국가인가? 국가를 수호하고 국가존립을 위해 목숨마저 내 던진 참전용사를 냉대하는 이 나라 정치인들은 정치가 무엇이고 국가가 무엇인지를 손톱만큼이라도 생각을 하고 있는가? 위정자들은 인간의 근본이 무엇이며 전쟁터에서 전우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적군의 찢겨진 몸둥이를 본 이들이 어떻게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보는가? 대한민국이 진정 국가다운 국가라면 위정자들은 굶는 한이 있더라도 참전용사에게는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를 해야 한다는 것을 그대들은 보고 들어서 알지 않는가?
이제 위정자 당신들도 이들이 죽기만을 기다리지 말고 진정 하나의 국가로 발돋움 할 수 있는 올바른 정치의 초석을 세우고 국가의 부름을 받아 애국한 자에겐 모든 것을 바칠 준비를 하여야한다. 이렇게 함에 앞으로 국난이 닥치면 모든 국민은 국가를 위해 서슴없이 목숨도 내놓을 수 있는 것이다. 진정 이 나라의 대들보는 누구였는가? 앞으로 대한민국의 무궁하고 영원한 성장과 발전을 위한 첫 번째 수순이 모든 참전용사를 엄격히 심사하여 그들이 대한민국이란 포근한 품안에서 여생을 마칠 수 있을 때 대한민국은 더욱 더 굳건해지고 강해지리라.
나는 참전용사들이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이 나라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정부가 하루 빨리 방법을 모색하여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으로 마지막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또한 국가에 진정으로 요구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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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素河님의 댓글
東素河 작성일이글은 어느 참전용사가 자기와 같은 참전용사들의 비참한 삶을 하나하나 직접 접하고 얘기해서 올린 글을 모아 둔 것이다. 새백달님의 글을 읽다 지난 글들을 다시 정리하면서 보게 된 겁니다. 문득 연말이요 추운 이겨울에 이분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계실까해서 이글을 모아 올려 봅니다. 금년 여름에 쓴 글이니 거의 모든 분이 생존해 계실 것이고 하루빨리 정부의 따뜻한 손길이 여기 이분들에게 닿았으면 하는 바램뿐입니다.
다투기님의 댓글
다투기 작성일
남침한 인민군을 맞아 싸운 참전용사로서 이글을 읽으니 가슴이 뛰고 당장이라도
국개놈들을 죽이고 싶은 충동을 금할길 없습니다 옛 전우님들의 고생을 눈앞에 그리니 극도의 분노로
국희 의사당에 포탄이 떠러젔으면 합니다 할말은 많으나 가슴 뛰고 손이 떨려 그만 쓰려 합니다
전쟁이 나면 총으로 국희의원 한놈들 다 죽일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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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습고 구역질 나는 이야기 들러보세요 6개월에 한번씩 죽었나 살았나 그놈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본인 공중을 맡아서 보내야 합니다 한예로 1월에 하고 6월에 합니다 5월에 죽으면 6월 공중을 못하니
알량한 9만원을 안줘도 도지요 한번 공중에는 미국서는 $10입니다 두번하니 $20 일년에 한번하면
그래도 이해가 되나 5월에 죽은놈 6-12월 까지는 안줘도 되니 save 하겠지요 ㅎㅎㅎㅎㅎㅎㅎ그지랄로
국고를 절략하여 재난(구제역손실) 에 보태야지요 월남 참전용사에게 줄돈도 안주고.. 제놈들은 죽을때까지 130 만원씩 타먹자는 놈들이 그러나 참전하고도 그 작은 헤택도 못받는 전우님 어찌해야 합니까
가슴이 메입니다 내 아마도 한국이라면 의사당앞에 1인 시위라도 할것 같습니다 빨갱이 때려잡고 난후 대한민국 정치하는놈들 때려 잡읍시다
正道님의 댓글
正道 작성일
좋은 東素河 님 글 앞에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내 진정 바라는 조국은 이게 아닌데?
형사반장님의 댓글
형사반장 작성일
열 받아서 자살이라도 하고픈 심정입니다,
어쩌다 나라 꼬라지가 이모양이 되었는지,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이 나라는 생존해 계시는 참전 용사분들은 진짜 대우를 받아야 될 분들인데
어찌되었던 정부가 빨리 나서주길 바랄뿐입니다
안탑깝읍니다...
새벽달님의 댓글
새벽달 작성일이런걸 자세히 알면 우리 국군들 파업이라도 하지 않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