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 대통령 암살은 김일성 지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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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의천황 작성일17-02-15 11:06 조회2,18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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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암살은 김일성의 지령!!
김일성은 해방후 중국과 러시아의 지원 아래 1950년 6.25를 일으켜서 남한을 적화 통일 하려고 시도 했으나 미군 주도의 유엔군의 참전으로 한반도 적화 통일이 무산되자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침 기회를 엿보다가 박정희 주도하에 1961년 5.16 군사혁명 으로 박정희 군사정권 이후 남한의 자주국방,경제발전,반공교육 으로 인해서 적화 통일이 점점 어려워지자 1968년 김신조 일당을 침투 시켜서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다음에는 좀 더 치밀한 계획하에 일본 조총련 소속 간첩 문세광을 1974년 8.15 광복절 행사장에 침투 시켜서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려 했으나 총알이 빗나가고 대신 육영수 여사가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렇게 두번에 걸친 박정희 대통령 암살 계획이 실패하게 되자 김일성은 대통령 주변의 최 측근을 포섭하고 그로 하여금 대통령 암살을 지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유는 박정희 시절 반정부 투쟁을 벌이면서 북괴의 지령을 받던 남한내의 민주화의 탈을 쓴 북괴 추종자들이 박대통령이 시해되기 몇년 전부터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자주 접촉 했었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 민주투사 라고 하면 대부분 반정부 투쟁을 벌이면서 북괴의 지령을 받던 공산주의자 였다. 그래서 민주투사의 가면을 쓴 공산주의자들이 대통령의 최 측근 중 한사람인 김재규를 포섭해서 박정희 대통령 암살 계획을 모의하고 그 후 전남 광주에서 무장 봉기를 일으켜서 김대중이 권력을 잡고 김대중과 김일성의 합작으로 남한을 적화 통일 하려는 음모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박대통령 시해사건 이후 불과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광주의 폭도들이 도청과 교도소,경찰서,무기고를 습격해서 무기와 장갑차를 탈취하고 군인들을 상대로 총을 쏘았다면 이것은 오래전 부터 남파 간첩들과 치밀한 계획하에 북괴의 지령에 의해서 조직적으로 움직였다고 밖에 볼수없다.
단순한 민주화 운동 이었다면 일반시민들이 이렇게 조직적이고 대범하게 군인들을 상대로 싸울수가 없다.
김재규가 박대통령 저격후 한말이 민주주의를 위해서 총을 쏘았다고 하는데 그 당시 민주주의를 요구하면서 반정부 투재을 벌이던 사람들은 대부분 북괴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던 민주투사의 탈을 쓴 공산주의자 였으며 그런 살람들을 김재규가 대통령 저격 사건이 있기 몇년 전부터 자주 만났다는 사실은 그 사람들과 함께 대통령 암살 사건을 서로 모의하고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고 볼수있다.
그 쿠데타가 바로 김대중과 빨갱이 주도로 이루어진 5.18 광주 폭동이 아닐까?
박정희 암살이 핵개발을 막기 위해서 미국이 개입 되었다는 말은 있으나
미국에 의한 박정희 암살 가능성은 북한에 의한 암살 가능성에 비해서 매우 희박하다.
그 이유는 미국에 의한 독립 및 6.25전쟁 당시 북괴 및 공산주의자들을 상대로 같이 피흘리고 싸운 혈맹이며 우리의 안보를 지켜주기 위해서 주한미군이 주둔 하고 있었고 경제원조 등 정치,군사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하고 가까운 사이였던 미국이 단지 박정희의 핵개발을 저지하기 위해서 남한의 반대파를 매수해서 반공주의자 박정희를 암살했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김재규가 붙잡힌 후 한말이 처음에는 개인 감정 때문에 죽였다고 했다가 그 다음에는 내 뒤에 미국이 있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민주주의를 위해서 총을 쏘았다고 하는데 모두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
김재규는 옥중 수양록에서 박정희의 유신선포후 모두3~4차례에 걸쳐서 대통령 암살을 시도 했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했고 1979년 10.26 당시 에도 자신을 따르던 부하들과 정승화 참모총장 등과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웠음이 드러났다. 김재규의 대통령 암살후 김재규 부하들은 곧바로 대통령 경호원을 사살 했으며 김재규는 저격 사건후 정승화의 차를 타고 도피 행각을 벌였고 정승화는 김재규의 대통령 저격 사실을 알고도 그를 체포하지 않았다.
이것은 김재규가 사전에 박정희 반대세력들과 대통령 암살을 서로 모의하고 치밀한 준비를 했다고 볼수 있다.
다음에 내 뒤에 미국이 있다는 말은 미국이 박정희의 핵개발 및 자주국방 의지를 꺽기 위해서 박정희에게 압력을 넣고 권력에서 물러나기를 원했고 그 당시 민주투사의 탈을 쓰고 반정부 투쟁을 벌이던 김대중 및 그 추종세력들을 지지하고 있었으므로 자신이 민주투사 인척 하면 미국이 자신을 보호해 줄까봐 미국을 끌어들인 것으로 볼수있다.
그런데 미국에서 아무 반응이 없자 자신의 쿠데타 음모를 숨기고 민주투사 인척 하기 위해서 민주주의를 위해서 총을 쏘았다고 한 것이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 암살은 미국의 남한 핵개발 저지 및 자주국방 억제를 위한 반정부 투쟁 세력의 지원과 북한의 남한 공산화를 위해서 파견된 남파 간첩및 이들에게 포섭된 좌익들에 의해서 이루어 진 것으로 볼수있다.
결국 김재규는 북괴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던 남한내의 민주투사의 탈을 쓴 좌익과 반정부 세력들에게 포섭 되었고 그들과 함께 비밀리에 자주 만나서 박정희 암살을 서로 모의하고 박정희 암살후 혼란한 틈을 타서 서울과 광주에서 쿠데타를 일으켜서 전국으로 확대한 다음에 정승화 참모총장 등과 정권을 잡으려고 한 것으로 볼수있다.
그런데 좌익들은 정권을 잡으면 북괴와 손을 잡고 남한을 공산화 하려고 한 것이다. 박정희 암살후 서울에서 데모가 일어나고 서울과 연락을 주고 받던 광주에서 좌익들과 남파 간첩들에 의해서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쿠바와 월남이 공산화 직전에 좌익들에 의해서 무장폭동이 일어나고 그것이 전국으로 확대 되어서 공산화 된 것과 매우 비슷한 현상이다.
최근에 공개된 미 CIA 문서에 따르면 미국은 이미 79년 초 '박 대
통령의 권력 승계 위기' 문제를 거론하고 있고, 다른 미 국무부 문
서에는 10.26 한달 전인 79년 9월 26일 김재규와 주한 미 대사 글라
이스틴이 만나 '권력승계 문제'를 논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0.26 이후 한 달 뒤에 작성된 이 문서에서 글라이스틴은 '김재규
가 나와 내 전임대사가 박정희에 대항하라고 부추겼다고 주장할
가능성'에 대해 우려했다. 그리고 글라이스틴은 작고하기 전 99년
인터뷰에서 '미국은 10.26에 의도하지 않게 연루됐다'는 의미심장
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최근 공개된 미 국무부, CIA 문서를 통해 김재규가 거사 전에 '최
소한 박대통령의 제거를 미국이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
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에 대해 검토해 본다.
김재규는 왜 형제 같이 지내왔던 박정희 대통령에게 총을 쏘았는
가? 김재규는 육군 형무소에서 자필로 쓴 옥중 수양록에서 국가 권
력 2인자인 중앙 정보부장으로서 '양심과 직책의 틈바구니에서 고
민했다'고 밝히고 있다.
10.26 열흘 전인 10월 16일에는 일반 시민이 대거 참여한 부마시위
가 발생했고 김재규는 부산으로 내려가 현장을 목격했다. 당시 중
앙 정보부 감찰실장 김학호는 '김재규가 부마항쟁의 원인 보고에
서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주요 원인'으로 보고했다고 증언
한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파악한 부마시위는 국민들이 자발적
으로 참여한 체제 전반에 대한 민란 수준의 저항이었으며 이는 차
지철로 대변되는 강경파와 대립하는 '온건파' 김재규의 위치를 보
여준다.
▶丈夫決心七年成, 10.26은 7년만에 이룬 거사였다!
김재규는 80년 2월 육군 형무소에서 '丈夫決心七年成'(장부결심
칠년성)이라는 글을 남겼다. 그가 7년 동안 생각했던 결심은 무엇
이었을까?
70년대 초반 김재규 당시 3군단장이 민주화 운동 인사인 장준하 선
생과 교류가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번 프로그램에
서 김수환 추기경은 74년, 민청학련 사건 배후로 지학순 주교가 구
속되자 김재규 당시 중앙 정보부 차장이 찾아와 추기경에게 "박정
희 대통령을 '환자'에 비유"했던 정황을 증언했다. 당시 유신 정권
의 대변인이라 생각했던 김재규가 '대통령을 환자'에 비유해 추기
경은 몹시 놀랐고, 김재규는 '병든 환자에게는 굳은 음식 대신 연
한 음식을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추기경과 박정희 대통령의 만
남을 주선했다.
74-5년 이후 김재규 당시 중앙 정보부 차장은 시국 사건이 있을 때
마다 김수환 추기경과 교류했다. 30년 만에 김수환 추기경의 입을
통해 최초로 밝혀지는 김재규의 고민과 제안. 김재규는 김수환 추
기경에게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제 3의 안'을 만들자고 권고했다
는데, 과연 김재규가 생각한 제 3의 안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김일성은 해방후 중국과 러시아의 지원 아래 1950년 6.25를 일으켜서 남한을 적화 통일 하려고 시도 했으나 미군 주도의 유엔군의 참전으로 한반도 적화 통일이 무산되자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침 기회를 엿보다가 박정희 주도하에 1961년 5.16 군사혁명 으로 박정희 군사정권 이후 남한의 자주국방,경제발전,반공교육 으로 인해서 적화 통일이 점점 어려워지자 1968년 김신조 일당을 침투 시켜서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다음에는 좀 더 치밀한 계획하에 일본 조총련 소속 간첩 문세광을 1974년 8.15 광복절 행사장에 침투 시켜서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려 했으나 총알이 빗나가고 대신 육영수 여사가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렇게 두번에 걸친 박정희 대통령 암살 계획이 실패하게 되자 김일성은 대통령 주변의 최 측근을 포섭하고 그로 하여금 대통령 암살을 지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유는 박정희 시절 반정부 투쟁을 벌이면서 북괴의 지령을 받던 남한내의 민주화의 탈을 쓴 북괴 추종자들이 박대통령이 시해되기 몇년 전부터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자주 접촉 했었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 민주투사 라고 하면 대부분 반정부 투쟁을 벌이면서 북괴의 지령을 받던 공산주의자 였다. 그래서 민주투사의 가면을 쓴 공산주의자들이 대통령의 최 측근 중 한사람인 김재규를 포섭해서 박정희 대통령 암살 계획을 모의하고 그 후 전남 광주에서 무장 봉기를 일으켜서 김대중이 권력을 잡고 김대중과 김일성의 합작으로 남한을 적화 통일 하려는 음모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박대통령 시해사건 이후 불과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광주의 폭도들이 도청과 교도소,경찰서,무기고를 습격해서 무기와 장갑차를 탈취하고 군인들을 상대로 총을 쏘았다면 이것은 오래전 부터 남파 간첩들과 치밀한 계획하에 북괴의 지령에 의해서 조직적으로 움직였다고 밖에 볼수없다.
단순한 민주화 운동 이었다면 일반시민들이 이렇게 조직적이고 대범하게 군인들을 상대로 싸울수가 없다.
김재규가 박대통령 저격후 한말이 민주주의를 위해서 총을 쏘았다고 하는데 그 당시 민주주의를 요구하면서 반정부 투재을 벌이던 사람들은 대부분 북괴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던 민주투사의 탈을 쓴 공산주의자 였으며 그런 살람들을 김재규가 대통령 저격 사건이 있기 몇년 전부터 자주 만났다는 사실은 그 사람들과 함께 대통령 암살 사건을 서로 모의하고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고 볼수있다.
그 쿠데타가 바로 김대중과 빨갱이 주도로 이루어진 5.18 광주 폭동이 아닐까?
박정희 암살이 핵개발을 막기 위해서 미국이 개입 되었다는 말은 있으나
미국에 의한 박정희 암살 가능성은 북한에 의한 암살 가능성에 비해서 매우 희박하다.
그 이유는 미국에 의한 독립 및 6.25전쟁 당시 북괴 및 공산주의자들을 상대로 같이 피흘리고 싸운 혈맹이며 우리의 안보를 지켜주기 위해서 주한미군이 주둔 하고 있었고 경제원조 등 정치,군사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하고 가까운 사이였던 미국이 단지 박정희의 핵개발을 저지하기 위해서 남한의 반대파를 매수해서 반공주의자 박정희를 암살했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김재규가 붙잡힌 후 한말이 처음에는 개인 감정 때문에 죽였다고 했다가 그 다음에는 내 뒤에 미국이 있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민주주의를 위해서 총을 쏘았다고 하는데 모두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
김재규는 옥중 수양록에서 박정희의 유신선포후 모두3~4차례에 걸쳐서 대통령 암살을 시도 했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했고 1979년 10.26 당시 에도 자신을 따르던 부하들과 정승화 참모총장 등과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웠음이 드러났다. 김재규의 대통령 암살후 김재규 부하들은 곧바로 대통령 경호원을 사살 했으며 김재규는 저격 사건후 정승화의 차를 타고 도피 행각을 벌였고 정승화는 김재규의 대통령 저격 사실을 알고도 그를 체포하지 않았다.
이것은 김재규가 사전에 박정희 반대세력들과 대통령 암살을 서로 모의하고 치밀한 준비를 했다고 볼수 있다.
다음에 내 뒤에 미국이 있다는 말은 미국이 박정희의 핵개발 및 자주국방 의지를 꺽기 위해서 박정희에게 압력을 넣고 권력에서 물러나기를 원했고 그 당시 민주투사의 탈을 쓰고 반정부 투쟁을 벌이던 김대중 및 그 추종세력들을 지지하고 있었으므로 자신이 민주투사 인척 하면 미국이 자신을 보호해 줄까봐 미국을 끌어들인 것으로 볼수있다.
그런데 미국에서 아무 반응이 없자 자신의 쿠데타 음모를 숨기고 민주투사 인척 하기 위해서 민주주의를 위해서 총을 쏘았다고 한 것이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 암살은 미국의 남한 핵개발 저지 및 자주국방 억제를 위한 반정부 투쟁 세력의 지원과 북한의 남한 공산화를 위해서 파견된 남파 간첩및 이들에게 포섭된 좌익들에 의해서 이루어 진 것으로 볼수있다.
결국 김재규는 북괴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던 남한내의 민주투사의 탈을 쓴 좌익과 반정부 세력들에게 포섭 되었고 그들과 함께 비밀리에 자주 만나서 박정희 암살을 서로 모의하고 박정희 암살후 혼란한 틈을 타서 서울과 광주에서 쿠데타를 일으켜서 전국으로 확대한 다음에 정승화 참모총장 등과 정권을 잡으려고 한 것으로 볼수있다.
그런데 좌익들은 정권을 잡으면 북괴와 손을 잡고 남한을 공산화 하려고 한 것이다. 박정희 암살후 서울에서 데모가 일어나고 서울과 연락을 주고 받던 광주에서 좌익들과 남파 간첩들에 의해서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쿠바와 월남이 공산화 직전에 좌익들에 의해서 무장폭동이 일어나고 그것이 전국으로 확대 되어서 공산화 된 것과 매우 비슷한 현상이다.
최근에 공개된 미 CIA 문서에 따르면 미국은 이미 79년 초 '박 대
통령의 권력 승계 위기' 문제를 거론하고 있고, 다른 미 국무부 문
서에는 10.26 한달 전인 79년 9월 26일 김재규와 주한 미 대사 글라
이스틴이 만나 '권력승계 문제'를 논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0.26 이후 한 달 뒤에 작성된 이 문서에서 글라이스틴은 '김재규
가 나와 내 전임대사가 박정희에 대항하라고 부추겼다고 주장할
가능성'에 대해 우려했다. 그리고 글라이스틴은 작고하기 전 99년
인터뷰에서 '미국은 10.26에 의도하지 않게 연루됐다'는 의미심장
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최근 공개된 미 국무부, CIA 문서를 통해 김재규가 거사 전에 '최
소한 박대통령의 제거를 미국이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
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에 대해 검토해 본다.
김재규는 왜 형제 같이 지내왔던 박정희 대통령에게 총을 쏘았는
가? 김재규는 육군 형무소에서 자필로 쓴 옥중 수양록에서 국가 권
력 2인자인 중앙 정보부장으로서 '양심과 직책의 틈바구니에서 고
민했다'고 밝히고 있다.
10.26 열흘 전인 10월 16일에는 일반 시민이 대거 참여한 부마시위
가 발생했고 김재규는 부산으로 내려가 현장을 목격했다. 당시 중
앙 정보부 감찰실장 김학호는 '김재규가 부마항쟁의 원인 보고에
서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주요 원인'으로 보고했다고 증언
한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파악한 부마시위는 국민들이 자발적
으로 참여한 체제 전반에 대한 민란 수준의 저항이었으며 이는 차
지철로 대변되는 강경파와 대립하는 '온건파' 김재규의 위치를 보
여준다.
▶丈夫決心七年成, 10.26은 7년만에 이룬 거사였다!
김재규는 80년 2월 육군 형무소에서 '丈夫決心七年成'(장부결심
칠년성)이라는 글을 남겼다. 그가 7년 동안 생각했던 결심은 무엇
이었을까?
70년대 초반 김재규 당시 3군단장이 민주화 운동 인사인 장준하 선
생과 교류가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번 프로그램에
서 김수환 추기경은 74년, 민청학련 사건 배후로 지학순 주교가 구
속되자 김재규 당시 중앙 정보부 차장이 찾아와 추기경에게 "박정
희 대통령을 '환자'에 비유"했던 정황을 증언했다. 당시 유신 정권
의 대변인이라 생각했던 김재규가 '대통령을 환자'에 비유해 추기
경은 몹시 놀랐고, 김재규는 '병든 환자에게는 굳은 음식 대신 연
한 음식을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추기경과 박정희 대통령의 만
남을 주선했다.
74-5년 이후 김재규 당시 중앙 정보부 차장은 시국 사건이 있을 때
마다 김수환 추기경과 교류했다. 30년 만에 김수환 추기경의 입을
통해 최초로 밝혀지는 김재규의 고민과 제안. 김재규는 김수환 추
기경에게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제 3의 안'을 만들자고 권고했다
는데, 과연 김재규가 생각한 제 3의 안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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