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북한군 사실에 논리도 과학도 거부하는 조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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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만토스 작성일17-02-06 11:03 조회2,340회 댓글2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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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북한군 사실에 논리도 과학도 거부하는 조갑제
조갑제 기자는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 되고 난 후 언론들이 근거도 없이 마구잡이로 선동적인 기사를 남발하는 난동을 부리고 있다고 맹 비난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조갑제 기자를 논리와 과학을 좋아하며 박학다식하고 예리한 지성의 기자로 그를 칭송하기에 인색하지 않는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그는 유독 5.18의 역사에 있어서만은 논리도 과학도 모두 거부하는 편협하고 꽉 막힌 자세를 견지한다. 조기자는 사실 국민행동본부의 최상위 인물이고 조갑제닷컴을 운영하며 자신의 유명세에 부응하는 꽤 많은 사람들을 몰고 다닌다. 그것은 한편으로 5.18진실 추적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조갑제 기자가 2010년 5월13일 자에 쓴 글을 분석해 보면 대한민국에서 “대기자”라는 존칭으로 불렸던 사람으로써 5.18북한군에 대한 인식 수준에서만은 “정신박약”이라는 판정을 받아 마땅할 정도로 그의 논리와 군사적 상식은 수준 이하로 형편없음이 드러났다고 하겠다. 조기자의 5.18북한군 개입 부정 주장은 임천용 자유북한군인연합 대표가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이라는 책을 발간하고 5.18북한군개입을 주장하고 나선 후에 5.18북한군 개입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 글로 표현했다. 그 글을 옮겨 본다.
(이하 2010. 5. 13일 자 조갑제 기자의 글이다)
"북한특수부대의 광주개입" 주장은 믿을 수 없다!
4년 전부터 한 탈북자가 "광주사태에 북한 특수부대가
개입했다"는 주장을 하고 일부 애국단체에서 이에 동조하고 있다. 이 탈북자는 이렇게 주장했다.
<5.18사태 당시 함경남도에 위치해 있던 우리 부대는 전투동원상태에 진입하라는 참모부의 명령을 받고 완전 무장한 상태에서 신발도
벗지 못한 채 24시간 진지를 차지하고 광주사태에 대해 긴급속보로 전해 들으면서 20여일 이상 출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치부 비 편제 서기로
자주 동원됐던 나는 나중에야 당시 제10군단장이었던 여병남과 7군단
참모장이었던 김두산의 대화를 통해 특수부대 1개 대대가 광주에 침투했었고 희생도 많았지만 공로가 컸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북한군 특수부대 지휘관들 사이에서는 광주에 특수부대가 침투
했었다는 말이 공공연한 비밀로 나 돌았다. 특수부대들에서 선발한 최정예 전투원 1개 대대가 해상을 통해 남파됐으며 그중 3분의 2가 희생되고 나머지 인원이 모두 귀대 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개연성이나 증거가 없다. 사실이 아니라고 단정함이 타당할 것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1. 광주사태는 목격자가 많은 사건이다. 광주시민 수십 만 명과 진압군이 목격자이고, 수백 명의 직업적 구경꾼들, 즉 기자들이 취재했다. 외국 기자들도 많았다. 공개 리에 일어나고 공개적으로 취재된 사건이다. 광주사태를 취재했던 나를 포함한 어느 기자도 북한군 부대가 개입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4. 당시는 계엄령이 펴진 상태였다. 해안과 항만은 철저히 봉쇄되었고
공중감시도 정밀했다. 대대규모의 북한군이 어떻게 침투한단 말인가? 침투
병력 중 3분의 2가 희생되었다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이들을
섬멸한 국군이 있을 것 아닌가? 무장간첩 한 명만 사살해도 부대 표창을 받는데 수백 명을 사살한 국군
부대가 이 자랑스런 사실을 숨겼단 말인가?
7. 광주사태는 1980년 5월18일부터 시작되었다. 그
직후 광주 일원은 봉쇄되었다. 5월21일 계엄군은 광주시내에서
철수, 외곽을 포위했다. 이때 市外로 빠져나가던 시민들이 매복하고 있던 계엄군의 총격을 받아 죽기도 했다. 대대규모의 북한군이 이런 상황에서 광주로 잠입했다면 국군과 대규모 전투가 발생했을 것이다. 정규군끼리의 충돌은 한 건도 없었다. 김일성(또는 김정일)이 5월18일 광주 상황 보고를 받고 특수부대의 출동을 명령했다고 해도 그 부대가 광주 부근에 나타나려면 빨라도 20일 이후일 것이다. 그때는 이미 광주가 철통같이 포위되어 있을
때였다. 수백 명의 북한군이 등장할 무대는 없었다.
애국단체들이 북한군 개입 주장에 동조하는 것은 위험하다. 진실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희망적 기대를 갖고 근거가 약한 의혹 수준의 첩보에 근거해서 행동하면 逆攻을 당할 것이다. (이상은 조갑제 기자의 글에서 발췌)
필자는 이상과 같은 조갑제 기자의 “5.18북한개입 부정”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1) 북한군이 인민군 복장을 하고 광주에 대대병력으로 일거에 침투하여 5.18 기간 동안 계엄군과 전투를 벌이는 모습을 목격하지 않았으니, 북한군개입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한 조기자의 군사적인 인식수준은 가히 몰상식이라고 평가해야 할 정도다. 북한은 남한의 광주가 그들의 적진 깊숙한 후방지역인데, 계엄하에서 “북한특수부대”라는 자들이 신분을 기자들에게 밝히지 않았으니 5.18북한군개입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꼴이다. 조기자는 북한특수군이 인민군 복장을 하고 광주를 휘젓고 다녀야 비로소 북한군의 5.18개입을 믿겠다는 뜻인가?
2) 5.18북한군은 특수부대였고 전투조와 공작조로 나뉘어 5.18광주에서 신출귀몰하는 폭동반란 확산 작전을 수행했다는 것이 최근 지만원의 시스템클럽에 의해 1980년 5월 당시에 힌츠페터 기자가 남긴 사진에 의해 대부분 밝혀졌다. 조갑제 기자의 특수부대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명확하게 폭로시켰다. 조갑제를 포함한 수 많은 기자들의 눈에 띄고 작전이 노출되는 그런 허접스런 북한군특수부대는 절대로 아니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기자들의 눈에 쉽게 노출될 자들을 어찌 특수부대라고 하겠는가?
3) 5.18을 “민주화운동”이라고 못 박아 놓으면, 5.18북한군개입 문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사건으로 밀어 부쳐야 하는 것이 앞뒤가 맞는 논리전개일 것이다. 조갑제 기자의 논리가 바로 그것이다. 1997년 대법원의 5.18인민재판 과정이 정확하게 조갑제 기자의 엉터리 논리전개와 일치한다. 1981년 5.18폭동반란의 역사를 민주화운동으로 뒤집기 위해 5.18특별법 괴물을 위헌을 감수하면서 급조했었고, 그 법에 따라 광주폭도들을 준헌법기관으로 전제한 후에 내려진 1997년 대법원 5.18민주화운동 판결을 상기해야 한다.
조기자는 아래에 게시된 5.18북한특수군의 시체놀음 연출 사진을 자세히 보기 바란다.
댓글목록
도사님의 댓글
도사 작성일
조갑제를 몰라서
애국진영이 추대하는가
조갑지를
자기 어머니 재사상에 올릴 사람들
경찰관님의 댓글
경찰관 작성일
조갑제식 발상도 있어야 밥벌이 하나 ? 광주 5.18에 대해서 다아는 사람은 없다
외국인 사진사는 엑스트라로 광주에와서 많은 물증만 남기고 죽었다 그물증이 나중에 족쇄가 되니 사진
진사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