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전쟁'에서 잊지말아야 할 중요한 세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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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피터 작성일17-06-26 00:44 조회2,89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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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전쟁’에서 잊지말아야 할 중요한 세가지
김피터 박사
금년 6월 25일은 ‘한국 전쟁’ 발발 67주년이다. 미국인들은 ‘625전쟁’을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라고 부른다.
워싱턴의 내셔널 몰에는 한국전 ‘참전 용사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 ‘기념비 재단’의 이사장인 윌리엄 웨버 육군대장(예)은 한국전에 참전하여 한팔과 한 다리를 잃은 역전의 용사다. ‘재단’에서는 ‘한국전 기념비’ 관리와 기타 기념물 설치등을 위한 기금으로 5백만 달러를 목표로 모금을 했었다. 그런데 미국인들의 호응이 거의 없었다, 이에 대하여 웨버 대장은 “한국전쟁은 미국에서 잊혀진 전쟁‘임에 틀림없다”고 말했다.
그러면 왜 625전쟁을 잊혀진 전재이라고 하는가? 우선 세계적 대전쟁인 2차 전쟁과 특히 미국인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던저 주었던 월남전 사이에 끼어 있었기 때문에 한국전쟁은 쉽게 잊혀지게 되었다. 또한 기간이 짧았다는것도 잊혀지게 된 이유다. 2차대전은 6년간, 월남전은 무려 19년간 지속되었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3년만에 끝났으며, 더구나 승패가 결정되지않고 휴전으로 어정쩡하게 끝났 다.
그때 한국이란 나라가 미국인들에게는 잘 모르는 작은 나라였고, 한국전쟁의 영향이 미국에 끼친 것도 별로 크지 않아, 한국전쟁을 중요하게 보지않은것도 이유의 하나다. 그래서 처음에는 공식적으로 ‘전쟁’(war)이라고도 하지 않았다. ‘한국 분쟁’ (Korean conflict)이라고 불렀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 ‘미디어’ 문제라고 할수 있다. 그때는 전달 매체가 별로 발달하지 못한때였다. 모든 뉴스는 신문, 래디오 같은것에 의존되어 있어서 생생한 전쟁의 현장이 전달되지 못했다. 하지만 월남전 때는 TV 등 미디어 매체의 발달로 전국민의 관심이 전쟁 현장에 집중될수 있엇다. 반전 데모도 전국적으로 일어났었다. 그래서 월남전을 ‘미디어 전쟁’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중국군의 개입에 의한 ‘장진호 전투’같은 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었다. 따라서 자연히 잊혀지게 된 것이다.
한데 한국에서도, ‘625’를 모르는 젊은 세대들에게 ‘한국전쟁’은 ‘잊혀지는 전쟁’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작년 6월에 한 리서치 기관이 전국의 중고생을 대상으로 조사한바에 의하면, ‘625전쟁’발발 연도를 모른다는 대답이 반수가 넘었다. 6,25전쟁 원인을 ‘북침’이라고 한 대답은 69%였다. (이중에는 ‘북침’에 대한 용어의 잘못 이해도 있었다고 하지만.) 6,25전쟁을 일으킨 국가에 대해서는 일본 13.5%, 미국 13.4%, 러시아 10.9%였다. 33%의 중고생은 만일 한반도에서 전쟁이 난다면 외국으로 도망가겠다는 대답을 했다고도 한다.
세월이 지나면 ‘사실’은 역사속에 묻혀지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게 된다. 그래서 미국인들에게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 한국인들은 ‘6,25전쟁’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특히 기억되어야 할것들이 많지만, 다음의 세가지는 반드시 잊혀저서서는 안될 것이다.
첫째로 ‘625전쟁’이 왜, 누구에 의해서 일어났는지를 잊어서는 안된다. 일부지만 남한이 북한을 먼저 침공한 북침전쟁이라는 주장을 하는자들도 있다. 특히 지난 현충일날, 문 통은 추념사에서, 6,25전쟁의 원인이나 누가 무슨 목적으로 그 끔찍한 전쟁을 일으켰는가하는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고, 간단히 “3,8선이 휴전선으로 바뀌는 동안‘ 수많은 국군의 희생자가 있었다는 식으로 연설을 했다. 6,25전쟁은 ’38선이 휴전선으로 바뀐‘ 단순한 전쟁이 아니지 않는가?
‘625’는 그 당시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둥의 지원 아래 북한 김일성이 적화통일 야욕에 불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20만의 대군으로 일제히 ‘남침’을 개시한 전쟁이다. 이 역사적 사실(사실)이 잊혀져서는 안될 것이다,다.
둘째로,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은 남침 개시 3일만에 서울을 함락시키고 ==일에는 부산 일원을 제외한 한반도 전역을 거의 점령하였다. 이제 대한민국이란 ‘국호’는 지구상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해지게 되었다. 그때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결단으로 미국군이, 그리고 UN의 결정으로 16개 국 UN군이 한반도에 들어와, 국군과 함께 멸망 직전의 대한민국을 구해주었다.
워싱턴 ‘한국전쟁 기념비’에 적혀있는대로‘ '알지도 못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젊은 목숨을 이 땅에 바친 미국군 3만 6천명의 전사자, 수많은 부상자들, 실종자들과 또 많은 UN군의 의 고귀한 희생을 절대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셋째로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것이 잇다. 6,25때 남북의 군사적 ‘힘’의 상황은 어떠했었는가? 북한의 인만군은 총병력 20만 1천명인데 비하여 남한의 총 병력은 그 절반인 10만 3천명이었다. 북한군은 전면에 탱크를 내세워 처들어 왔었으나,남한은 탱크 한 대도 없었다. 군비에 있어서 남한은 전혀 전쟁 대비가 없었다. 언제나 힘이 열세이면 적이 넘보게된다. 그때 만일 남한의 군비가 북한보다 우위였으면 북한이 감히 남침할 계획을 갖었겠는가?
‘유비무환’이란 말이 있다. 평소에 ‘대비’를 잘하면 ‘환란’을 당하지 않게 된다는 의미다. 대한민국과 국민들은 ‘625 상기일을 맞아 이 중요한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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