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正熙, 金大中 두 분 大統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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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몽블랑 작성일14-01-24 21:07 조회2,431회 댓글2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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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金大中 大統領
지난 2000년 6월에 있었던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과 관련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깜짝 놀랄만한 사실들을 보도한
조선일보를 본 많은 사람들이 울분을 금치 못하고 있다.
기사 내용 가운데 2000년 6월 13일 평양 순안 공항에 동원됐던
북한노동당 출신 탈북자 A씨의 증언을 몇 대목 살펴보자.
김대중 대통령이 공항에 도착할 때 확성기를 통해 선동 구호가
계속 이어졌다."절룩절룩 걸어오는 저 꼬락서니를 보라”
“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머리 숙이고 왔다”는 식이었다.
동원된 군중은 일제히“결사옹위 김정일”“만세”등을 외치며 열광
했다. 그 당시 현장의 분위기는 “김대중이 남조선을 바치러
왔다”는 선동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김 대통령의 방북 당일 우리 정부는 공식 브리핑을 통해
“북한 주민이 김정일과 함께 김대중도 연호했다”고 밝혔지만,
그날 활주로에서 “김대중”을 외친 주민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있을 수도 없다는 게 A씨의 말이다. '만세’도 마음대로 외칠 자유가
없는 곳이 북한이기 때문이다.
A씨는 “당시 내가 본, 다리를 절며 걸어오는 김대중 대통령의 모양새는
나라를 통째로 바치러 온 패전장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면서
“그날 북한 주민의 눈에 들어온 김정일은‘개선영웅(凱旋英雄)'이었고,
김대중은‘패군지장(敗軍之將)’이었다”며 그날을 회상했다.
한국에서 정치인의 신체장애는 큰 장애가 아니지만, 북한 주민의
입장에선 김 전 대통령의 걸음걸이가“절룩절룩 걸어오는 꼬락서니”
라는 야유와 선동으로 더욱 부자연스러워 보였다는 것이다.
北은 치밀한 시나리오에 따라 김대중을 병신 만들고 김정일은
그를 밟고 우뚝 선 영웅 만들기 공작과 선동선전에 열을 올렸던 것이다.
그런 속내를 전혀 알지 못했던 국내외 언론은
“김정일 위원장의 이례적 영접”/“파격적 극진한 예우”/
“예정에 없던 승용차 단독회담”등 북이 김 대통령에게 최고의 예우를
한 것으로 보도했지만, 그 날의 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김정일이었다.
김대중도 속고 당시 우리 정부도 언론도 모두 북의 공작에 놀아나
저들이 계획했던 대로 춤을 추었던 어릿광대에 불과했던 것이다.
당초 6.12일에 방북하려던 계획이 북측의 통고로 연기됐던 이유를
우리 정부는 '기술적 준비관계’라고 했던 것도 거짓이었다.
후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김정일은 受金이 다 안 됐다고 김대중의
방북을 연기시켰던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북의 태도에 김대중 정부는 당황했고 북이 구사한
고도의 심리전은 기대했던 것 이상의 큰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위해 현대그룹을 앞세워 4억5000만 달러
(물건까지 포함하면 5억 달러)를 김정일의 해외비자금 계좌로 보냈다는
사실은 노무현 정부 때 특검을 통해 밝혀진 바 있다.
그리고 김대중-김정일 회담은‘돈을 주어가며 정상회담을 구걸했다는
부끄러운 사실'이 입증됐다.
김 전 대통령은 방북 당일 평양으로 가기 직전 대북송금 차질뿐 아니라
김일성 시신(屍身) 참배 문제로 북측의 압박을 받았다는 사실은
2008년 6월 박지원의 증언을 통해 공개됐다.
박지원은“북은‘금수산기념궁전에 참배하지 않으면 정상회담을 할 수
없고, 올 필요도 없다’며 ‘6월 13일 평양 착륙을 거부하겠다’고
통보했지만, 김 대통령은 출발을 결정했다”/
“서울공항 환송식 후 임동원 국정원장의‘금수산기념궁전 참배 문제는
평양에 와서 논의하자는 북측의 통보를 받았다’는 보고를 받고
비행기에 올랐다”고 말했다.
회담장에서 김정일은 남한 대학가의 인공기 게양이 국가보안법위반
이라는 보도를 들먹이며 “이런 분위기에선 회담을 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께서는 환대를 받으신 걸로 만족하시고 푹 쉬신 뒤에
돌아가시지요. 대통령께서도 만남 자체가 중요하다고 하셨잖습니까”
라는 막말까지 했다.
김대중이 국민을 속여 가며 천문학적인 달러를 들여 회담을 구걸하고
이 처럼 북으로부터 갖은 조롱과 모욕을 받아가며 김정일을 만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는 김대중 개인으로서도 기막힌 일이지만 이 나라를 대표하는
대통령이 당했다는 것은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국민 전체가 모욕과
멸시를 당한 것이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모멸감에 치가 떨리지 않는가?
마치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던 인조가 지금의 잠실나루인
삼전도까지 내려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큰 절 세 번에 땅바닥에
아홉 번 머리를 두드리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올리며
항복했다는 치욕의 역사 이상의 굴욕이다.
뿐만이 아니다. 김대중은 북에서 돌아와 공항도착 첫 마디부터
"김정일 위원장은 통일이 된 뒤에도 한반도에 미군이 주둔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기로 했다"는 거짓말로 국민 앞에서 김정일을 두둔했다.
김정일이 '주한미군의 지위가 북의 남침저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동북아지역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평화유지군의 지위로 남는 다면
반대하지 않겠다'고 한 조건부 가운데 핵심적인 전제조건은 빼고
사실을 왜곡하여 국민을 속였다.
국민의 피 같은 돈을 5억 달러씩이나 갖다 바치고 비럭질하듯
방북해서는 주눅이 잔뜩 들어서 조롱을 당해도 그만, 회담할 것 없이
그냥 돌아가라는 막말을 들었어도 그만, 김정일의 주장대로
연방제까지 합의한 공동선언에 도장을 빵빵 찍어주고...
돌아 와서는 김정일이 통일 뒤에도 주한미군이 지위와 역할을
그대로 둔채 주둔하는데 동의한 것처럼 말함으로써 국민을 속인
이유를 알 수 없다.
마치 미련한 며느리가 시어머니 눈에 들기 위해 새벽같이 부엌에
나갔다가 국 쏟고 생식기 데고 따귀 맞은 격이 아닌가?
이러나저러나 김대중과 노무현은 나라를 적에게 송두리째
갖다 바치려고 했던 반국가적 역적이었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고
역사에 기록으로 남게 될 것이다.
2. 朴正熙 大統領
나는 이 기사를 읽으며 우울해진 마음을 달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의
행적 가운데 1964년 서독을 방문했을 때 서독파견 광부와 간호원들을
눈물로 위로하고 독일 정부 要路에 피 끓는 심정으로 원조를 호소했던
순간을 떠올려 보았다. 그 당시 상황을 정리한 자료의 일부를 살펴본다.
1961년 11월 미국의 원조를 기대하고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찾아간
박정희는 문전 박대를 당한다. 한국에 돈을 빌려 주면 쿠데타를
인정하는 꼴이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 후 정부 경제사절단으로 독일에 갔던 백영훈 박사의 역할로
서독에 파견된 우리 광부와 간호원들이 현지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게 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말 뤼브케 대통령의 초정으로
독일을 방문하게 된다.
서독 갈 비행기조차 없어서 서독 정부에 요청해 여객기 좌석을 얻어
타고 홍콩 방콕 뉴델리 카라치 카이로 로마 프랑크프르트를 거쳐
쾰른 공항까지 28시간이나 걸려 독일 땅을 밟은 박정희는 에르하르트
총리가 베푼 만찬에서 울먹이며 다음과 같은 요지의 연설을 한다.
"우리 국민 절반이 굶어 죽고 있다’우리 국민 대부분이 실업자다.
라인 강의 기적을 우리도 만들겠다’돈을 빌려주십시오. 도와주십시오."
‘우리 군인들은 거짓말 안 합니다. 빌린 돈은 반드시 갚는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는 박 대통령을 보며
다 같이 울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뤼브케 대통령의 안내를 받아 한국의 광부들이 일하는
루르 탄광을 방문했을 때 현지 광부들로 구성된 밴드가 애국가를
연주하기 시작했으나 아무도 애국가를 따라 부르지 않았다. 500여 명의
광부 등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울음을 참느라고 어깨를 들먹거렸기
때문에 애국가를 따라 부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연주가 끝나자 박정희 대통령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코를 풀더니
연단으로 걸어 나갔다. “만리타향에서 이렇게 상봉하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대통령의 준비된 연설은 여기서 몇 구절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이 구석 저 구석에서 흘러나오던 흐느낌이 통곡으로
변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아예 원고를 옆으로 밀친 뒤 말했다.“이게 무슨 꼴입니까.
내 가슴에서 피눈물이 납니다. 광부 여러분, 가족이나 고향 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 알지만…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들에게 만큼은 잘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열심히 합시다.
나도 열심히….”결국 대통령은 말을 맺지 못하고 소리 내어
울어 버렸다.
그 자리에 함께한 서독 대통령도 눈시울을 적셨다.
대통령이 현장을 떠날 때 광부들은 대통령이 탄 차의
창문을 붙들고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통곡했다.
백영훈 박사는 “당시 박 대통령을 보며 그가 나라와
국민을 위해 목숨을 걸었구나 하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독일의 고속도로인 아우토반을 시찰할 때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도중에 자동차에서 내려 무릎을 꿇고 땅에 입을 맞추었다. 수행원들도
모두 울면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육 여사도 서독 방문 내내 눈물을
훔쳤다.
이와같은 박정희와 김대중 두 분 대통령을 생각하며 잠시 상념에
잠긴다. 8.15해방 이후의 혼란, 북의 6.25남침과 폐허, 정치적 혼란과
5.16군사혁명, 국가재건과 경제발전, 세계 10위권에 드는 국력신장과
종북 좌파들의 준동...경제 산업 기술 과학 문화예술 각 분야에서
대한민국의 오늘을 만드는데 긍정적으로 힘을 보태온 사람들은
누구였던가?
반대로 각계각층에 숨어들어 사사건건 반대하며 발전을 저해하고
이적행위를 일삼거나 부정적인 시각으로 불평불만을 일삼으며
사회에 해악을 끼치고 있는 반국가적 반사회적 부류는 어떤 자들인가?
그들은 否定의 歷史를 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패배의 인생을 엮어가는 낙오자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주변의
올바른 충고도 주변의 만류도 듣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국가 사회가 언제까지 그런 자들까지 돌보고 공들여야 하겠는가? http://blog.naver.com/wiselydw/3018391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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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247661님의 댓글
inf247661 작성일!!! + α
enhm9163님의 댓글
enhm9163 작성일
친박 홍사덕은 김대중이가 미국갔을때 부시가 This man이라고 했다 하여
남의 나라 대통령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비판했었다.
오나 가나 국제 인간쓰레기 취급 당했구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