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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좌익도륙 작성일13-11-08 09:59 조회4,11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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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경협의 막후(幕後)' 장치혁(79) 전 고합 회장은 까다로운 상대였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입을 닫았고, "왜 나를 심문하느냐"며 벌떡 일어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네 차례 만났다. 그가 '자신'을 털어놓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1966년 자본금 1000만원의 합섬 이불솜 공장으로 출발해 한때 고합을 재계 16위까지 키웠다. 국내 기업인으로는 처음 미(未)수교국 '중공'에 들어갔고, 요즘 논의되고 있는 러시아 천연가스 송유관의 북한 통과사업도 이미 15년 전 그가 관여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북한의 금강산 개발도 그의 사업이 됐을지 모른다. IMF사태를 맞고 무너지지 않았다면 말이다.
"금강산사업은 통일교가 제일 먼저 추진했다. 정주영 회장도 고향 통천을 방문하고는 한번 해보겠다고 나섰다. 북한은 롯데관광·삼성에도 접촉해 남한 기업들끼리 경쟁을 붙였다. 결국 그 사업이 내게로 왔다."
―왜 북한에서는 그때 장 회장을 파트너로 정했나?
"나도 잘 모르지. 다만 내가 독립운동가(장도빈 선생)의 아들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내 '서열'이 올라간 것은 틀림없다. 그때부터 북측에서 내게는 헬리콥터를 내주며 마음대로 타고 다니라며 특대접을 했다. 모란봉 숙소에서는 해외 정상이 묵는 '흥부각'을 내줬다."
- 장치혁 전 고합 회장은 "김영삼 정부 시절 청와대와 안기부가 종종 내게 북쪽 심부름을 시켰다"고 말했다.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첫 방북 때(1992년)다. 당시 북한의 나진·선봉지구에 사업 투자를 위해 들어갔다. 자꾸 금강산에 다녀오라고 권했다. 내 출생지가 영변이다. 이왕이면 금강산 대신 고향에 한번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평소 '회장 선생, 회장 선생' 하며 점잖게 대하던 북측 인사가 고함을 꽥 질렀다. '여기는 공화국이오. 공화국에 왔으면 우리가 짜준 대로 다녀야지. 무슨 고향 소리를 하시오.' 그런데 누군가가 그를 밖으로 불러냈고 그는 돌아오더니 '회장 선생, 고향에 가게 됐다'며 환하게 웃었다. 바로 30분 만에 차가 출발했다."
그는 북한 정부를 대리한 금강산국제그룹과 사업계약서(1994년 3월 5일자)를 작성했다. 문건에는 '고합그룹은 관광을 목적으로 공화국을 방문하는 여행자들을 려객선으로 (북한의) 장전항을 통하여 왕래케 하는 사업을 수행한다'고 나와 있다.
여기에 홍콩·대만·부산·규슈·장전·원산·선봉·나진·블라디보스토크 등을 운행하는 페리선사업이 포함되어 있다. 또 금강산에서 원산까지 철도를 부설하고, 속초에서 금강산까지 연결하는 사업도 양국 정부의 승인을 받는 즉시 시행하는 걸로 되어 있다.
"넉 달 뒤 김일성이 죽었다(1994년 7월 8일). 김정일은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금강산사업 추진이 일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김영삼·김일성의 역사적인 첫 남북 정상회담(7월 25일)을 앞두고 있었다.
"그 정상회담은 미국의 카터 전 대통령이 만든 걸로 알려져 있지만 중국의 영향력도 있었다. 등소평은 '서양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동양식으로 해야 한다'며 후계자 장쩌민을 평양에 보내 김일성을 설득했다. 내가 중국 인맥을 통해 그 정보를 받아 YS에게 보고했다."
―만약 김일성이 죽지 않고 정상회담이 열렸다면 어떻게 됐을까?
"김일성은 과감하게 개혁·개방을 수용했을 것이다. 김일성이 죽기 일주일 전에 만난 김우중 회장도 그런 확신을 갖고 있었다. 한반도 운명을 결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 정상회담이었다. 하필 그때 예기치 못하게 죽었다. 이게 국운이었다."
―김일성이 죽기 불과 일주일 전에 김우중 회장을 만났다는 게 사실인가?
"그때 (김일성의) 아랫사람이 '빨리 나가라'고 해서 김 회장이 나왔다고 하더라. 우리가 해석을 잘해야 한다. 정상회담을 앞두고 김일성이 죽었고 그 뒤 모든 게 무산됐지 않았나."(참고: 김정일이 김일성 죽이려는것을 낌새채고 김우중에게 빨리 탈출하라 했다는 이야기가 있음)
―김일성의 죽음에는 다른 요인이 있었다는 뜻인가?
"그런 판단은 당신의 소관이다."(참고: 김정일이 김일성 죽였다는 설이 있음)
―장 회장이 따낸 금강산사업은 그 뒤로 완전히 무산됐나?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하니 '좋다 하라. 단 북한이 4자회담을 받아들이면 하라'고 했다. 그래서 밀명을 받고 김정일을 만나러 갔다."
―정부 공식 채널도 있었을 텐데 장 회장에게 그런 밀사 역할을 맡겨야 했나?
"당시 청와대와 안기부가 종종 내게 북쪽 심부름을 시켰다. 내가 대북사업을 하는 사람이라 운신이 편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밀지였나?
"4자회담에 나와야 경제·식량문제 등이 해결된다. 4자회담 없이 쌀 주는 것에 남한 여론이 반대한다. 미국은 쌀을 준다고 하지만 소량에 불과하다. 일본에도 큰 몫을 기대할 수 없다. 한국을 제치고 미국·일본과 아무리 협상해도 기대만큼 효과는 없다, 이런 내용이었다. 당시 권영해 안기부장은 별도로 북에 전달할 오더를 줬다."
그는 1996년 5월 15~21일간 방북했다.
―김정일과의 면담은?
"오전 10시 평양의 서산초대소에서 만나는 걸로 잡혀 있었다. 전금철(당시 아·태 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의 안내로 선물까지 준비해 9시부터 기다렸다. 그런데 불발됐다."
―북측에서 약속을 깼나?
"알고 보니 내가 전할 밀지가 다른 사람을 통해 이미 들어간 뒤였다.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 김정일은 '그 제안이라면 만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대통령의 밀지가 중간에서 샜다는 뜻인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지. 김현철(YS의 차남)이가 한 재미교포를 통해 하루 먼저 메시지를 전달했다. 완전히 물먹인 것이다."
―김정일을 면담 못했지만 북측의 답변은 받았나?
"조건 없이 식량을 지원해주면 향후 정치문제는 잘 풀려나간다. 남북 경제회담부터 열자고 했다. 4자회담과 관련해서는 '미국과 먼저 상의해서 좋다면 하겠다'고 답했다. 미국과의 직접 채널을 원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그는 YS에게 방북결과를 보고했다. 그 문건에 자신의 소견을 밝혀 놓았다.
'북은 1년 반 동안(YS의 남은 임기) 참고 기다리면 5년 이내에 북 주도하의 통일(적화통일?)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대통령 재임 중 확고한 통일 지침이 안 서면 다음 정권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현 정권과 다음 정권 사이에 통일정책에 대한 틈이 생기면 안 된다고 생각된다.'
지금 보면 마치 예언을 한 것 같기도 하다.(참고: 북의 지령대로 남한에서 움직인다는 뜻임)
―그 뒤 장 회장이 해보려고 했던 금강산사업은 어떻게 됐나?
"4자회담이 돼야 하는데 거기에 걸렸다. 그러다가 IMF를 맞았고,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다. 그는 당선자 신분으로 우리 안양 공장을 방문했다. 직접 만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첫 대면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나?
"내게 '김우중 회장과 손잡고 경제 쪽을 좀 맡아달라'고 했다. 그 한마디에 내가 우쭐거렸다. 그 뒤로 기업총수들과 함께 몇 차례 만났다. 어느 날 DJ가 '남북경협 방안 보고서'를 내달라고 했다. 남북 정상회담(2000년 6월 15일)을 앞둔 시점이었다."
―DJ의 대북(對北)구상이 장 회장의 보고서에 기반을 둔 것인가?
"그분은 머리가 고차적으로 좋은 분이라 모든 걸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자신의 노선으로 밀고 나갔다."
남북정상회담 당시 그는 전경련 남북경협위원장으로 대통령을 수행했다.
"공동선언문을 발표할 때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들어 있어 수행한 기업인들은 깜짝 놀랐다.(참고: 고려연방제는 적화통일의 필수단계) 그런데 동석한 북한의 한 장관급 인사가 '지금 선언을 실행하기 위해선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나 나이로 보아 다음 대통령은 젊고 추진력이 강한 사람을 당선시켜야 한다'며 내게 추천해달라고 했다.(김대중 다음의 노무현이 젊고 추진력이 강한 사람) 내가 '남한은 누가 지명한다고 대통령이 되지 않는다'고 응수하자, '그동안 남한의 대통령 선거 결과를 보니 불과 몇십만 표로 승패가 갈려 얼마든지 조정이 가능하다. KBS·MBC는 이미 들어와 있고 SBS도 앞으로 잘 될 것이며, 조선·동아·중앙 등 신문이 문제지만 정 안 되면 없애버릴 수 있다'(KBS, MBC 는 이미 점령상태이며, SBS, 조선, 동아, 중앙도 점령완료된듯.)고 말했다."
-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수행했던 장 전 회장
―사석에서 한 말이지, 공식 발언은 아니지 않은가?
"공동선언문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개인이 마음대로 말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뭔가 짜인 게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뜩이나 정부가 나서 북한 정권에 현금을 직접 주는 것도 찜찜했다. 그전까지는 가급적 정경분리 원칙을 지켜왔다."
―당시 정부가 기업 측에 북한에 줄 돈을 내라고 했나?
"IMF 사태로 부도가 나거나 자금 압박을 받고 있는데 어느 기업이 자기 돈을 갖다줄 수 있나. 10억달러(당시 환율로 1조6000억원) 가까운 돈인데. 정부가 직접 송금할 수 없으니 기업이 대신 전달해준 것이다. 어떤 기업이 '우리가 전달하겠다'고 나섰다."
당시 현대그룹이 해외법인을 통해 각각 1억달러, 2억달러, 1억5000만달러를 북한의 아태평화위원회로 송금한 사실이 노무현 정부 시절 특검 조사에서 밝혀졌다.
―이런 일로 DJ 정부와 불화가 있었나?
"평양을 다녀온 뒤 이기호(李起浩) 청와대 경제수석을 만나 '북한에 현금을 줄 필요가 없다. 도와주려면 당장 돈을 주는 것보다 쌀, 물자, 의약품, 공장시설을 도와줘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입이 빠른 걸 후회하지만…. 얼마 있다가 전경련 경협위원장에서 물러났다. 그때부터 쫙 무너졌다."
―이는 고합그룹이 부실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어찌 정권 탓으로 돌리나?
"IMF 사태가 닥쳤을 때 우리 계열사는 대부분 흑자였다. 자금 유동성 위기를 맞았을 뿐이다. 당시 삼성과 LG를 빼고는 은행이 안 막아주면 다 부도날 판이었다. 막아주면 살고 안 막아주면 죽는 것이다. 당초 고합은 살리려고 했던 걸로 알고 있다. 정부의 주문대로 '워크아웃(기업구조개선)'에 제일 먼저 들어갔다. 하지만 그 일이 있고서 워크아웃 협정대로 이행이 안 됐다. 은행이 그렇게 안 해줬다. 예금보험공사에서 갑자기 고합을 '부실기업 1호'로 찍어 조사를 벌였다."
그는 심한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으로 1년 반 이상 병상에서 지냈다. 하지만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한때 해양심층수, 연어양식장 사업에 손대기도 했다. 현재는 러시아 쪽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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