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을달라" 프랑스 혁명은 이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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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가디언 작성일14-06-29 12:45 조회1,74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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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2년 파리 근교 작은 농촌마을에 자식에게 먹일 빵이 떨어진 부녀자들이 주방을 뛰쳐나와 냄비를 두드리며 “빵을 달라!” 외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두 여인이 고함을 질렸으나 곧이어 마을 모든 여인네들이 후라이팬과 냄비를 두드리며 동네를 돌다 흥분이 절정에 달해 왕이 있는 수도파리의 베르사유 궁전을 향해 행진하기 시작했다.
굶주린 가족을 위한 “빵을 달라!” 여인네의 외침은 하리케인이 됐다. 피 비린내 나는 프랑스 혁명은 이렇게 불붙었다. 혁명의 내란 속에 프랑스국민35.000명이 단두대 이슬로 살아졌고, 두번의 외국과의 전쟁에 15만명 죽었다.
왕 루이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까지 단두대에 목이 잘린 프랑스혁명은 3차까지 이어졌다.
통치자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아 악 단원이 합동으로 연주하는 수 많은 악기 개별음을 정확히 듣고 지적할 수 있어야 지휘자가 돼는 것처럼 대통령은 나라안 크고 작은 소리를 구별해 듣는 열린정치 감각을 필요로 한다.
만약 루이16세가 굶주린 시골마을 여인네의 민생고를 듣는 귀가 있어 빵한 마차만 보냈다면 프랑스 혁명은 뒤로, 다음 시대로 미뤄지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루이16세는 민심의 향배를 철저히 무시했다. 혁명의 불꽃이 타올라도 루이왕은 취미 생활인 열쇄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왕비 마리앙투아네트는 한술 더떠 “빵이 없으면 케이크라도 먹으면 될 게 아니냐?” 는 망발로 민중들 마음 속에 있는 활화산 도그마를 터드렸다.
왕비 마리앙투아네트는 세상물정 모르는 순정녀. 철부지 왕녀였다. 프랑스 왕가에 시집왔으며 친정오스트리아는 잊어야 하건만, 폭정에 고달픈 민중은 악이 바쳐있는 데도 비리세력과 내연 정치를 끊지 못하고 오스트리아로 탈출하다 혁명군에 붙잡혀 단두대의 이슬로 살아졌다.
빵을 달라! 상처받은 민심의 향배를 알지 못하고 어디다 귀 기우리는 건가? 종빨 세력과는 단절이 빠를수록 좋다. 좌파 종빨과 동반 관계는 단두대에 머리 디미는 지름 길임을 깨닭아야 여적죄를 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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