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10대 불가사의와 천안함 격침(4년 전 글, 수정없이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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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인강 작성일14-03-25 20:58 조회1,71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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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직면한 대한민국
금년은 6.25전쟁 발발 60주년이 되는 해로 지난 60년을 회상하고 반성과 감사와 결의를 다지는 기념사업과 행사들이 광범위하게 계획 및 추진되어 왔으나, 3월 26일 발생한 천안함 침몰사건으로 국민적 관심이 분산되어 그 의의가 반감된 것을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천안함 격침은 6.25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일깨워주는 일대사건이기에 북한의 불법 만행부터 규탄하며 온 나라가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대응조치에 나선 우리 군과 정부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계속되면서 국회에서 조차 북한의 사과와 반성을 촉구하는 대북 결의안 하나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지방 선거에서는 여당 찍으면 전쟁 나고 전쟁나면 핵이 터져 다 죽는다는 북한식 협박이 통한 듯싶더니 곧 이은 월드컵에서는 전국규모의 거리응원 함성 속에 모든 것을 통째로 묻어 버리는 듯한 분위기도 한편으론 불가사의 한 바, 이 불가사의들을 풀어내지 못하면 천안함 침몰이 대한민국함의 침몰로 연결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떨칠 수 없어 이 글을 씁니다.
역사는 지구상의 모든 국가가 외부의 위협보다는 내부의 갈등으로 무너졌음을 보여주며 오늘의 대한민국에는 내 외로부터의 위협이 공존합니다. 위협의 핵심은 대한민국을 통째로 부정하는 북한이 연방제의 공산화통일 야욕을 버리지 않은 채 집요한 대남공작을 계속함에 있으며, 국무총리 예하의 4.3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위원회에서 활동했던 필자의 눈에는 그 규모와 범위가 방대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한민국에 미군이 주둔하면 미국의 식민지입니까? 독일에도 일본에도 프랑스에도 미국군대는 주준하고 있지 않습니까? 빈부의 차이는 우리나라에만 있습니까? 미국 중국 일본에도 있으며, 특히 북한의 빈부 격차는 세계에 그 유례조차 없지 않습니까? 대한민국의 과거에 한 때 독재로 인한 희생이 있었다지만 북한에는 지난 60년간의 부자 세습독재 하에 어떤 희생이 오늘까지도 강요되고 있는 것입니까?
따라서 대한민국을 미국의 식민지라고 주장하며 자유민주적 체제와 가치를 부정하는 이 땅의 종북세력은 북한의 선동에 박자를 맞추는 것으로 밖에는 볼 수가 없습니다. 공무집행 중의 경찰을 납치 감금하고 동료를 구출하려는 경찰들을 불태워 죽인 살인방화범들에게도 민주화 국가 유공자의 호칭부여가 가능한 것이었습니까?
진정한 민주화 유공자였다면 북의 부자세습 독재 권력에 대하여 더 크게 진노하고 질타하면서 신음하는 북한 동포의 자유와 인권의 향상을 위해 진력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끝내 함구하면서 오히려 민주화에 성공한 대한민국의 과거사 공격에만 전념하지 않았습니까?
온 세계가 인정하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성공에는 눈을 감고 과오와 실수만을 찾아 대한민국의 정통성 부정에 매달렸던 것이며 누란의 위기에서 우리를 구하고 지원했던 우방국에 대한 감사의 표시는커녕 오히려 맥아더 동상 철거운동을 벌렸던 것입니다.
지혜를 모아 국론을 통일하고 국정을 미래 지향적으로 선도해야 할 국회의원들은 오늘까지도 끝없는 당쟁과 정쟁으로 분열만을 조장하고 있어 천안함 침몰 이후의 정국은 그야말로 해방정국의 혼란을 방불케 하고 있습니다.
4.3사건의 불가사의
필자는 국방부의 위촉으로 2000년 8월부터 2003년 10월까지 4.3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제주도 밖으로부터의 지령이 분명히 작동했던 4.3 무장 폭동을 순박한 제주도 주민들만의 순수한 봉기로 해석하면서, 초대 건국 대통령이 하달한 계엄령 하에서 진압임무를 수행해야 했던 국군의 선배들을 양민학살의 주범으로 몰아가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1948년 4월3일, 인민무장대의 경찰지서 공격으로 시작된 4.3 사건은, 대한민국 건국이전의 미소 군정기간에 발생하였음으로, 공산주의 지향세력과 자유민주주의 지향세력간의 대등한 쌍방충돌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탄생된 1948년 8월 15일 이후에도 한라산에 인공기를 올리고 확대되었든 무장 폭동은 대한민국에 대한 무장폭동이며 반란이었던 것입니다.
순박했던 제주도민의 희생에 대해서는 그 아픔을 함께 하며 국가의 책임임을 인정하면서도 당시 대통령이 하달한 계엄령 하에서 폭동 진압 임무를 수행했던 군과 경찰을 양민학살로 몰아 간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의 채택은 결코 인정할 수 없어 국방부와 경찰 측 위촉위원 3명 전원은 2003년 10월 15일, 협조 란에 동의할 수 없다는 서명을 하고 일괄사퇴를 했던 것입니다. 4.3폭동이 진압되지 않고 전국으로 확대되었으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속될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었으나 이 사실조차도 사회에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신문들이 침묵을 유지해왔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6개월 전인, 4.3사건 발생 55주년 하루 전인 2003년 4월 2일, 4.3위원들은 청와대 오찬에 초청되었으며, 기회를 포착한 필자는 노무현 대통령의 우측에 앉아서 4.3사건의 배경에 관련한 다음 내용을 설명한 바 있었습니다.
(1) 4.3폭동의 배경으로 작동된 45년 9월 20일자 스탈린 비밀지령이 1993년에 발견되었고, (2) 소련군의 정치부사령관이 남노당 당수 박헌영에게 지침을 내리고 공작자금을 제공한 기록이 실린 스티코프 비망록이 발견되었으며, (3) 4.3폭동의 주동자 김달삼이 폭동 발발 4개월 후, 북한 해주의 민족 대표자회의에 참석, 4.3사건 전과를 보고하며 말미에 "우리의 조국 해방군인 위대한 소련군과 그의 천재적 영도자 스탈린 대원수 만세!" 를 부른 연설문이 발견되었고, (4) 북한의 애국 열사능에 있는 그의 가묘에 ‘남조선 혁명가’의 비문이 쓰여져 있는 것이 발견된 사실 등을 얘기하면서, 4.3무장폭동의 배후에 소련과 남노당의 개입이 있었음을 강조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는 어떤 반론도 없었고 고건 국무총리도 참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무총리는 6개월 후인 2003년 10월 15일, 국방부와 경찰 측 위촉인원 3명 전원이 부동의했던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채택했던 것이며, 이 보고서를 기초로 대통령 노무현은 4.3폭동의 진압과 관련하여 정부차원의 공식사과를 했던 것입니다. 4.3사건 당시의 유아가 17대 대통령이 되어 초대 대통령의 군 통수권 행사에 관해 5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공식 사과하는 불가사의가 발생했던 것입니다.
필자가 4.3위원으로 활동하는 동안 가장 곤혹스러웠던 것은 4.3 무장폭동의 진압임무를 맡았던 11연대장 박진경 대령 암살사건(48.6.18) 후의 군법회의 때 좌익계 부하들의 상관 살해를 민족정기의 발로로 극구찬양하고 피살된 연대장을 친일파 매국노로 질타하는 ‘조선중앙일보’의 보도였습니다. (제주 4.3사건 자료집 제2권의 조선중앙일보 48.8.20, 8.25, 8.28일 기사 참조). ‘조선중앙일보’를 ‘중앙일보’의 전신으로 알고 있었기에 황당할 수밖에 없었던 필자는 4년 후인 2007년 10월, 이 불가사의를 풀어주는 열쇠 하나를 얻었습니다.
1997년 5월 26일자 노동신문 특집보도
그것은 한 북한 전문가가 제공해 준 북한 노동신문의 특집보도로서 이미 10년이 지난 구문이었습니다. “민족의 영수를 받들어 용감하게 싸운 통일혁명열사”라는 제목아래 상상도 못했던 내용들이 담겨져 있었는데 특히 필자의 눈을 끈 것은 김일성의 비밀특사인 성시백이 “남한의 각 정당과 산하단체를 정당협의회로 묶는 ‘통일전선’ 형성과 ‘선전공작’을 하면서 ‘조선중앙일보’와 ‘광명일보’등의 10여개 신문사를 경영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조선중앙일보의 4.3사건 관련 당시 기사들을 다른 신문들과 비교만 해도 김일성의 4.3사건 개입이 증명됨으로서 대통령의 공식사과 수정도 가능하게 되어 국군과 경찰의 명예도 회복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이 특집보도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제 나름의 글쓰기를 계속해 왔으나 이미 3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묵묵부답입니다. 북한과의 화해협력이 진행되는 중요한 시기에 무슨 엉뚱한 소리냐 정도로 여겨지는 것이 저에겐 한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이 특집보도는 4.3무장폭동 발발 1년 4개월 전인 1947년 초에 성시백이 평양에 올라가 김일성을 만나 회중 금시계를 선물 받는 장면으로부터 서울복귀 후 전개하는 대남공작활동들을 소개하는 데, 육군의 ‘사단’ 예하 ‘대대’와 ‘헌병대’, ‘사관학교’, ‘육군정보국’까지 ‘조직선’을 늘려 국군의 와해공작을 했고 당시 서울에서 활동했던 ‘유엔 임시조선위원단’ 조직의 와해 및 방해공작은 물론, 김구 선생에게 접근하여 김일성의 특사임을 밝히고 1948년 4월의 ‘남북연석회의’ 초청장을 전달하고 참가하게 하는 성과를 올렸다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전문은 www.rokfv.com 인강칼럼 헤드라인의 “10년전의 노동신문 특집보도” 참조)
이 형근 대장과 6.25전쟁 10대 불가사의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이형근 대장은 “군번 1번의 외길 인생”이란 회고록에서 “6.25전쟁의 10대 불가사의”를 열거하면서 이 불가사의가 풀려야만 국가의 백년대계가 보장될 것이란 기록을 남기셨는데, 노동신문 특집보도가 그에 대한 답을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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