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재전파되어야 할 거짓된 5.18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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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현우 작성일14-02-04 12:45 조회1,98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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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되고 거짓역사는 반드시 수정되고 재전파 되어야 한다.
5.18측의 거짓의 사슬 vs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 증거
↓원본출처 아래주소클릭
http://www.study21.org/518/doc/nk-Kang.htm
http://www.youtube.com/watch?v=YxqlxnHakLY&feature=share&list=PLJ8nGDOhUEnZAi-c0Smg2e26zz4CQeWTu
그런데 윤상원이 미 항공모함 부산항 입항 사실을 광주시민들에게 알릴 때부터 5.18의 왜곡은 시작되어 있었다. 그는 북한의 남침 도발을 견제하기 위해 미 항공모함 입항해 있는 것이라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 미국이 광주시민군을 지원할 목적으로 항공모함을 보낸 것이라는 거짓말을 지어내었다. 윤상원이 이런 거짓말을 한 이유는 오랜 시민군 통치에 염증을 느낀 광주시민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였다. 무장반란 열기가 식어가고 있다는 것은 도청 궐기대회에 운집하는 시민들의 숫자가 날로 줄어가는 것을 보면 역력하였다. 무장반란을 나중에 정치꾼들이 광주민주화운동이란 용어로 정당화시킨 것이었지 무장폭동의 본질은 무장반란이었으며 무장폭도들이 취하고 있던 행동은 무장폭동이었다. 여러 해 후에 김대중과 김영삼 등 민주팔이 정치꾼들이 정당화시켜 주기 전이었던 광주사태 당시에는 무장폭동을 어떻게 광주시민들에게 정당화시켜 말할 수 있었는가? 달리 방법이 없이 거짓말을 하였던 것이다.
광주운동권 중에서 녹두서점 주인 김상윤이 김대중의 측근이었고, 김상집은 그의 동생이었다. 광주사태 유언비어는 맨처음에는 녹두서점 전화를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남민전 사건 관련자들 등 운동권의 소굴이었던 녹두서점은 전국 운동권에 연결되는 전화 연락망을 가지고 있었고, 그 전화를 이용하여 광주사태 유언비어 확산에 기여했던 인물이 바로 김상집이었다. 5월 18일 오후 시위대에 인질로 납치된 경찰 45명을 구출하기 위해 오후 4시 반에 7공수 2개 대대가 동원되어 3시간 가량 시위 진압이 있었을 뿐 아직 아무도 사망자가 없었을 때 벌써 사망 유언비어들을 퍼뜨렸던 사실을 김상집은 자기 입으로 이렇게 말한다: "녹두서점에 앉아 광민, 돌베개, 일월서각, 대구양서조합, 부산양서조합 등 책에 적힌 전화번호와 전국 각지에 있는 사회과학 서점에 전화를 걸어 광주의 학살소식을 전달하였다."
2007년 오마이뉴스는 영화 "화려한 휴가"를 지원하기 위해 이 김상집(참여21 대표)이란 인물의 그때의 활동을 특별기획으로 보도하였는데, 미항공모함 두 대가 한반도로 급파된 사건에 대해서 김상집은 이렇게 주장했다:
여기서 "외신 기자들은 우리에게 20일 첫날에는 열 손가락을 활짝 펴보이며 '열흘만 투쟁을 계속하면 우리가 이긴다'고 격려했다"는 말은 시민군 홍보반 김상집이 5월 20일과 23일에 힌츠페터를 만났음을 시사한다. 20일에 광주에 들어온 유일한 외신기자는 힌츠페터였고, 21일 일본으로 갔다가 23일 다시 돌아왔을 때 영자신문을 들고 왔을 뿐 '열흘만 투쟁을 계속하면 우리가 이긴다'고 말한 바가 없다. 전옥주를 차에 태우고 다니며 가두 선무방송을 하게 하던 김상집이 5월 20일 오후 목포 별동대와 더불어 광주로 진입한 힌츠페터 기자를 만났다면 이것은 광주사태를 조직한 세력의 규모에 대한 또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다.
김상집이 오마이뉴스 기사에서 외신기자가 '열흘만 투쟁을 계속하면 우리가 이긴다'고 한 말이,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김성용 신부가 뉴스위크 신문을 들고 와 "5일만 더 버티면 우리가 이긴다. 부산에 미항공모함이 입항했다"고 말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김상집이 오마이뉴스 기사에서 외신기자가 '열흘만 투쟁을 계속하면 우리가 이긴다'고 한 말이,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김성용 신부가 뉴욕타임즈 5월 22일자 신문을 들고 와 "이 외신기자가 나한테 얘기했어요. 5일간만 더 버티면 우리가 이길 거라고. 아 그거뿐이 아닙니다. 지금 부산항으로 미 항공모함이 들어오고 있다고"고 말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 신문은 일본 체류 중 5월 23일 광주로 들어온 힌츠페터가 가져와 시민들에게 보여주어 광주 시내 벽보에 붙었던 신문으로서 뉴욕타임즈 지가 아니라 일본 마이니치 신문 영문판이었다.
그런데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이 일본 신문이 미국 신문 뉴욕타임즈로 둔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데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이 일본 신문이 미국 신문 뉴욕타임즈로 둔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똑같은 사진이 뉴욕타임즈 5월 22일자 대문기사 사진으로 실린 때는 14시간 후였다.
그러나 23일 광주 시내 벽보에 붙은 신문은 아래 사진에서 보듯 일본 신문이었다.
그러면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정의구현사제단 김성용 신부를 등장시켜 마치 그 신문이 미국 신문 뉴욕타임즈 지였던 것처럼 관객을 속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마이니치 신문 헤드라인 기사 제목은 "폭도들이 광주를 완전 장악했다"(Rioters Take Full Control Of Kwangju)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 '화려한 휴가'는 신문명을 마이니치에서 뉴욕타임즈로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뉴욕타임즈 헤드라인 기사 속의 사진까지 바꿔 치기 하였다. 정의구현사제단 김신부가 보여주는 22일자 신문 속의 사진은 29일자 합동장례식 사진이다. 어떻게 5.18 사기꾼들의 논리 구조에서는 신문에 한 주 후의 사건이 실리는 것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그나마 진짜 사진이 아니라 위조 사진이다. 사진은 조천호 군이 아버지 조사천씨 영정 사진에 턱을 괴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5.18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사진을 보여주는 것인데, 진짜 사진은 http://www.ilbe.com/1316192984 에서 볼 수 있다. 5월 21일 오후 한 시 반에 시민군 장갑차를 타고 도청을 향하여 돌격하던 조사천 씨는 등 뒤에서 시민군이 쏘는 카빈소총 탄환이 흉부에 박혀 2시에 기독병원에서 사망하였는데, 29일 합동장례식 때 어린 조천호 군이 아버지 영정 사진에 턱을 괴고 있는 모습이 독일인 기자에 찍혀 5.18의 상징과도 사진이 되었다. 어린 소년이 아버지 영정에 턱을 괴고 있는 모습은 누가 보아도 희생자의 슬픔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조작된 사진은 시체 장사를 위해 조작된 사진일 뿐이다. 이것이 영화가 보여주는 뉴욕타임즈 기사 사진이다.
그러나 5.18측의 거짓의 사슬과 달리 실제 기사 사진에서는 누가 보아도 깡패처럼 보이는 무장세력이 군용차량을 타고 이동하는 장면이 박혀 있다.
▲ 위 사진에서 총 들고 지프차 본넷에 앉아있는 폭도가 쓰고 있는 철모 화이버는 그가 오전 8시에 낫으로 20사단 인솔대 장병 몸을 찍으며 지프차와 더불어 탈취한 것이다.
▲ 동아일보 사진기자가 찍은 위 사진에서 지프차 조수석에 서 있는 폭도가 쓰고 있는 철모 화이버는 그가 오전 8시에 낫으로 20사단 인솔대 장병 몸을 찍으며 지프차와 더불어 탈취한 것이다. 이 폭도는 뉴욕타임즈 기사 사진 속의 폭도와 동일 인물이다.
여기서 5.18측의 거짓의 사슬을 살펴보자. 무장폭동이 막 시작될 때의 사진을 무장반란이 진압된 지 이틀 후의 합동장례식 사진과 바꿔 치기 한다. 도대체 광주사태가 끝난 지 며칠 후의 사진을 보여 주면서 "5일만 더 버티면 우리가 이긴다"고 말하는 그 논리가 무엇인가? 그 거짓말을 하기 위하여 또 하나의 사건 조작이 필요하였다. 마치 거짓말의 출처를 외신기자로 해 두면 거짓말에 권위가 선다는 듯 이렇게 말한다: "이 외신기자가 나한테 얘기했어요. 5일간만 더 버티면 우리가 이길 거라고."
정의구현사제단 신부의 말에서 "이 외신기자"란 뉴욕타임즈 기자를 가르키는 것인데, 일본 마이니치 신문 영문판을 가져온 이는 독일인 힌츠페터였다. 5.18 사기꾼들의 눈에는 일본 마이니치 신문 영문판을 사서 광주로 들고온 독일인이 뉴욕타임즈 기자로 보였는가?
5.18 사기꾼들이 이런 거짓말, 즉 외신기자가 "5일간만 더 버티면 우리가 이길 거라고" 말했다는 거짓말을 지어내기 위해 외신 기자들이 점쟁이로 간주된다. 그런데 5.18사기꾼들 중에는 점쟁이가 있는지 몰라도 뉴욕타임즈 등 외신기자는 점쟁이가 아니다. 외신기자는 이미 일어난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도할 뿐 결코 주관적으로 미래의 사건을 점치지 않는다. 여기서 또 하나의 거짓의 사슬은 윤상원이 그 말을 한 것을 은폐하기 위하여 외신기자를 판 것이다.
"5일만 더 버티면 우리가 이긴다"는 말은 '뉴스위크'지의 말이 아니라 윤상원의 말이었으며, 무장봉기 주동자 윤상원이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강민우라는 이름의 택시기사로서 등장한다. 윤상원이 무장봉기를 장기화시킬 목적으로 "5일간만 더 버티면 우리가 이긴다"라고 말한 것이 5.18 사건의 핵심이었는데, 그 핵심을 감추기 위해 주동자의 말을 외신기자의 말로 바꾸고 윤상원을 택시기사로 등장시킨 것이 또 하나의 거짓의 사슬이다. 5일만 기다리면 우리가 이긴다느니 미 항공모함이 광주시민군을 지원하기 위해 입항하였다느니 등의 말이 외신기자나 천주교 신부의 말이었는지 아니면 윤상원이 퍼뜨린 말이었는지는 아래 동영상 2분에서부터 시작되는 윤상원의 후배들의 증언으로 아주 명확해진다. 5.18의 거짓의 사슬이 여기서 깨진다.
그러면 윤상원이 우리가 이긴다고 말하였을 때 도대체 '우리'란 누구를 지칭하는 말이었을까?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택시운전기사 강민우로 신분이 세탁되어 등장하는 윤상원은 실은 김대중의 외곽단체 국민연합 사무국장이었으며, 그의 외곽단체와 사조직들이 민중봉기에 의한 김대중의 집권전략으로서 5월 20일과 22일에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킬 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윤상원은 무장봉기가 적어도 서울까지는 확산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으며, 그러면 최규하 대통령은 하야하고 김대중이 집권하게 된다는 의미로서 그 말을 하였다. 윤상원이 5월 23일 발행한 아래의 투사회보 6호에서 시민군의 첫번째 행동강령이 "광주시민은 최규하 정부가 총사퇴할 때까지 끝까지 싸운다"는 것이다. 이렇듯 윤상원이 말하는 광주시민의 승리는 최규하 정부 총사퇴였다.
만약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서 총기난사범들이 총을 자진 반납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는 총기 강제회수 외에 별도리가 없다. 바로 그것이 5월 27일 새벽 도청에서 시민군 무기 강제 회수 작전이 불가피하였던 이유였다. 민간무장단체가 대한민국 영토 내 도청 소재지에서 "통일" 구호를 외치며 도청 등의 주요 관공서들을 접수하여 무장단체 본부로 사용하고 있었을 때 그 정치적 상징적 의미는 무장반란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북한에 남침의 빌미를 제공하는 무장반란이었다. 실제로, 광주사태 구호 중 가장 많이 외쳐진 구호가 "통일"이었다. 광주사태 선동 논리는 최규하 대통령 정부만 전복시키면 통일이 온다는 논리를 깔고 있었다. 윤상원은 최규하 정부가 총사퇴할 때까지 도청 점거도 풀지 않고 무기 반납도 하지 않고 끝까지 싸울 것이었다.
모든 사건에는 상황이 있다. 왜 1980년 5월에 광주 일원에서 무장반란이 일어났는가? 아래의 광주사태 발생 꼭 50일 전인 1980년 3월 28일자 동아일보 기사와 및 광주사태 발생 꼭 40일 후인 6월 28일자 매일경제 기사가 그 상황을 보여준다. 1980년 3월 28일자 동아일보는 일본 統一日報(통일일보)를 인용하여 "북한은 한국의 정치적 불안정을 틈타 금년봄에 대량의 무장간첩을 남파, 지방도시의 방송국을 점령하는등 본격적인 남파게릴라 활동을 벌일 계획으로 있으며..."라고 보도한다.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 사실을 증언하는 탈북군인들의 기자 회견은 2006년 12월에 처음 있었지만 북한 개입설이 그때 처음 보도된 것이 아니라, 26년 9개월 전에, 즉 광주사태가 발생하기 오십 일 전에 이미 일본 및 한국 언론에 보도되었었다. 여기서 우리는 북한 개입이 불가능하였다고 주장하는 조갑제 기자의 주장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가정에 기초함을 본다. 조 기자는 광주사태가 일어나자마자 북한이 개입을 결정해도 대대 병력을 남파하기까지 소요되는 시간을 계산하면 개입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즉, 북한이 1980년 5월 18일 오후에 개입을 결정하였다고 하더라도 21일에 광주에 도착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그런 조기자의 근본적으로 잘못된 가정과 달리 북한은 5월 18일 오후 혹은 그 이후에 광주사태 개입을 고려하였던 것이 아니라, 50일 전에 이미 광주 일원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킬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위의 1980년 3월 28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그 즈음의 아래 뉴스 동영상을 이해하고, 3월 23일 한강에서의 무장공비 침투사건과 25일 포항 앞바다에 무장간첩선이 출현한 사건은 시민군으로 위장하고 광주 등지에서 게릴라전으로서의 무장폭동을 일으키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3월부터 시작된 침투 작전과 6월 말 만료된 철수 작전까지 합하여 한 작전으로 간주한다.
광주 일원을 무대로 발생한 무장반란의 배후에는 조총련의 암약이 있었으며 북괴의 대남공작총책임자인 김중린으로부터 지령을 받고 있었다. 광주사태가 일어난지 꼭 40일 만인 1980년 6월 28일자 매일경제 신문은 일본 統一日報(통일일보)를 인용하여 북한이 조총련에 제2의 광주사태를 일으키라고 지시한 사실을 아래와 같이 보도한다.
1980년 6월의 신문 독자들 중 혹 이 기사를 읽은 이들이 있었다고 해도 김중린이 누구인지를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북한의 광주사태 배후인물이 김중린이었다는 사실을 처음 책으로 발표한 탈북자는 강서산 북한 전 총리의 사위 강명도이다. 1994년 7월 우리나라로 망명한 강명도는 이듬해 6월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라는 제목의 책을 내놓았다. "김일성은 전두환을 두려워했다"라는 제목 하의 이 책 237쪽부터 251쪽에서 강명도는 그가 북한에서 이해하였던 광주사태에 대한 시각을 토로한다.
1981년 6월 북한군 지도국사령부에서 열린 특전여단 군사정치일군 상학에서 김일성이 ‘지금까지 남조선을 해방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세 번 놓쳤는데 그중에 광주가 제일 아까워. 우리준비가 너무 부족했고 태만했어. 너무 쉽게 생각했어. 광주가 좋은 기회였는데 아쉽게 놓쳤어,,,’라고 발언하였다. 김일성이 광주사태 때 기회를 놓쳤다는 말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가? 1995년의 그의 저서에서 강명도는 바로 그 점에 대하여 다음과같이 기록한다:
1980년 5월 18일 북한 주민들은 깜짝 놀랐다. 남조선에서 계엄군과 학생 시위대가 충돌해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일본 조총련을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비디오 테이프를 확보한 중앙 TV가 매일 그 테이프를 방영한 것이다. (....) 또 복면을 쓴 시민군이 탈취한 계엄군의 지프를 타고 시가지를 달려가는 것도 볼 수 있었다.
남조선에 파견된 간첩을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의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김중린(金仲麟)은 3호청사의 전부서에 전화를 걸었다. 김중린은 당시 대남사업을 총괄하는 대남비서였다. 김중린은 남조선에 구축해놓은 정보망을 총가동해 사태 진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문제는 김중린이 타이밍을 놓쳤다는 것이다. 김중린은 광주민주화운동 발발 직후 정책 초점을 사태파악 및 분석으로 잡았다. 황금같은 초기 시간을 낭비한 것이다. 김중린은 광주민주화운동 발발 후 5~6일 지난 다음에야 김일성·김정일에게 최종정세 판단 보고서를 올렸다.
이 보고서는 "광주사태의 본질은 노동자, 농민, 도시 소시민, 양심적 인텔리 계급과, 매판 자본가들을 등에 업은 군부세력간의 충돌"이라고 정의하고, 따라서 양자간의 갈등 관계를 증폭시킬 경우 이는 공화국에 유리한 국면이 조성될 것"이라고 밝혔다. 또 그는 "폭동이 광주에만 국한된 것이 문제"라며, "만일 우리가 폭동을 남조선 전역으로 확산시킬 경우 대남사업의 결정적 기회가 마련될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김중린은 비교적 사태를 정확히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김중린의 실책은 광주민주화운동 응용·활용보다 사태 파악과 분석에 너무 많은 시간을 들였다는 것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발발한 것은 5월 18일이다. 그 후 사태는 22일에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5일 뒤인 27일 계엄군의 진압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은 종식됐다. 광주민주화운동은 단 9일간 진행된 사건이었다. 따라서 김중린이 정세판단서를 김일성에게 올려 수표(재가)를 받았을 때쯤에 이미 광주민주화운동은 진압국면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광주민주화운동 발발 당시 얘기를 당대외연락부 6과 지도원이었던 임만복을 통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사태가 터지자 김중린은 모든 대남 공작원들에게 비상대기령을 내렸다. 그러나 정작 3호청사 직속 청진 전투연락사무소(일명 121호 연락소)가 상부로부터 대남 침투 명령을 받은 것은 26일이었다. (강명도 1996, 237-240)
강명도가 북한 전 지역의 군사동향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북한 타 지역에서 이미 소규모로 남한에 침투한 특수부대에 대해서는 그는 모른다. 그러나 그가 분명히 아는 것은 5월 26일 북한은 대규모 남침 준비를 완료하고 출동 명령만 기다라고 있었다는 것, 27일은 한반도의 운명의 중대 고비였다는 사실, 그리고 27일 새벽에 광주사태가 진압되었기에 북한은 남침을 위한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5월 20일 김상집이 '열흘만 투쟁을 계속하면 우리가 이긴다'는 주장을 했으며,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5월 22일경 시민군이 "5일만 더 버티면 우리가 이긴다"고 말하였을 때 누가 이긴다는 말인가? 강명도가 보았을 때 시민군이 27일까지 버티었으면 그것은 김일성이 이길 기회였다.
1998년 7월의 인터뷰에서 황장엽씨가 조선노동당 대남부서에 소속된 사람들 상당수가 광주민주화운동 끝난 후에 일제히 훈장을 받았다"고 말하였을 때 그 '조선노동당 대남부서'란 김중린 관리 하의 대남공작기관을 가리킨다.
1998년 7월의 인터뷰에서 황장엽씨가 조선노동당 대남부서에 소속된 사람들 상당수가 광주민주화운동 끝난 후에 일제히 훈장을 받았다"고 말하였을 때 그 '조선노동당 대남부서'란 김중린 관리 하의 대남공작기관을 가리킨다. 이미 그 사실을 황장엽의 인터뷰 18년 전인 1980년 6월 28일자 매일경제가 보도했었다. 동 신문은 동 기사에서 "북괴의 대남공작 총책임자인 노동당정치위원 김중린"이라고 기록한다. 북괴의 대남공작기관은 조선노동당 정치위원이 총책임자였을 만큼 막강한 부서였다. 강명도가 증언하듯이 김중린은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직접 보고하는 인물이었고, 그래서 김중린이 조총련에 내리는 지령이 곧 김일성과 김정일이 내리는 지령이었다.
사실이 이러할진대 북한세력이 조종하는 대로 무장반란에 가담한 자들은 설사 모르고 그랬다 하더라도 북한 인민군에 부역한 셈이었다. 그런 과오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해야 할 자들이 지난 해 5월 되려 큰소리 치며 종편A와 TV조선 허가 취소 등의 협박으로 압력 행사를 하며 진실 규명을 가로 막았다. 그러나 북한 고위층 탈북자 강명도의 책이 1980년 3월 28일자 동아일보 기사와 동년 6월 28일자 매일경제 기사 내용이 사실과 부합함을 확증하며, 다시 또 한 명 고위층 탈북자 황장엽씨의 인터뷰 발언이 강명도가 그의 저서를 통해 증언한 내용이 사실임을 확증해 준다. 즉, 북한이 광주사태에 개입해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황장엽의 5.18 발언이 강명도의 기록의 사실성을 확증해 줄 뿐만 아니라,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5.18 기록물 또한 그 사실을 확증하여 준다. 김중린이 광주사태 발발 후 김일성·김정일에게 올린 최종정세 판단 보고서에 이런 문구가 있다: "광주사태의 본질은 노동자, 농민, 도시 소시민, 양심적 인텔리 계급과, 매판 자본가들을 등에 업은 군부세력간의 충돌" (강명도 1996, 240).
여기서 매판 자본가들이란 수출 기업인들을 가리키는 광주사태 주동자들 특유의 용어이며 우리도 30여년이 지난 이제서야 5.18 성명서 용어들을 파악하기 시작하는데, 광주사태가 일어나자마자 북한의 김중린이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었다는 말인가? 그러면 광주사태 주동자들이 광주사태를 선동할 목적으로 이 용어를 사용했던 용례 몇 건을 5.18 성명서들에서 살펴보자, 왕년의 빨치산 박현채가 작성하고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와 조선대학교 민주투쟁위원회 명의로 5월 8일 발표된 제1시국선언문 둘째 단락은 이런 말로 광주사태를 선동한다:
이어 5월 14일 중고생 봉기위원회 명의로 "5천만 겨레여!"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성명서에서도 "그런데 현 정부관료, 군장성, 매판적 독점자본, 기회주의 간신배로 구성된 유신잔당들은" "매판정부를 유지하며 언론의 탄압과 노동자 농민의 정치적 결사를 막고 있다" "유신잔당놈들과 매국노들의 앞잡이인 매판기업가놈들은 민족의 땅을 착취하여 그들의 배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등의 문구가 등장한다. 중고생들이 수출기업은 매판자본이라는 경제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박현채가 대필해 준 성명서였다.
이어 동광주와 목포의 전문대학들 명의로 5월 15일 발표된 제2시국선언문에서도 이런 문구가 발견된다: "외세 매판과 독점자본주의 희생물인 8백만 노동자의 생존권은 곧 민족의 생존과 직결되는 바."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5.18 성명서 전체를 살펴보면 이런 용례들이 더욱 많이 발견된다. 상당히 많은 단체 명의로 "매판"이란 용어가 사용되었으나, 무수한 5.18 성명서들의 실제 대필 작성자는 북한과 내통하는 동일인이었기에 똑같은 의미로서 '매판'이란 용어가 무수히 반복되어 사용되었던 것이며, 그래서 김중린은 "광주사태의 본질은 노동자, 농민, 도시 소시민, 양심적 인텔리 계급과, 매판 자본가들을 등에 업은 군부세력간의 충돌"이라고 그가 김일성·김정일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밝힌 것이다.
박현채가 북한과 내통하며 여러 5.18 성명서들을 작성하였을 때 5.18 성명서들에마다 "매판자본"이란 용어를 삽입한 것은 반정부 심리를 부추기려는 심리전이었다. 김중린이 남한의 간첩 조직망에 유언비어 살포 지령을 내린 것도 심리전의 일환이었다. 운동권 외에는 사람들이 그 뜻도 모르는 "매판자본"이란 용어를 더덕더덕 붙여 5.18 성명서들이 작성된 것으로는 대규모 폭동을 선동하기에 충분치 않다는 것이 김중린의 판단이었다. 사랑의 대상 없는 사랑이 존재할 수 없듯이 중오심의 대상이 없는 증오심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김중린은 전두환이란 인물이 증오심 표출 대상이 되도록 작전을 짜고 전두환 관련 악성 유언비어들을 유포하도록 남한의 간첩 조직망들에 지령을 내렸다. 구례 천안사에 있었기 때문에 광주사태를 전혀 본 적이 없는 김현장이 어떻게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이라는 악성 유언비어 문건을 제작할 수 있는가? 천안사에서 광주사태 공작을 하던 간첩들이 그를 도구로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광주사태 유언비어는 사투리가 각기 다른 전국 8도를 돌면서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았다. 만약 그 유언비어들이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졌다면 그것은 불가능했다. 광주사태 유언비어가 전국으로 퍼져나갔을 때 주로 말보다는 문서로 퍼져나갔던 것이기에 전국에서 그 유언비어들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았다. 광주사태 유언비어들은 문서화된 유언비어들이었으며 그런 유언비어 문서들이 있었기에 2011년에는 그 문서들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언비어 문서들은 전단지 형태였으며, 광주사태 당시 악성 유언비어들을 유포할 목적으로 사용된 그 전단지를 북한에서는 삐라라고 불렀던바, 강명도는 그의 저서에서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치 않게 이화섭을 만났다. "뭐 하느라고 그렇게 바쁘냐?"고 묻자, 얼굴이 핼쓱해진 이화섭은 "말도 마라. 오줌 누고 뭐 볼 시간도 없다."고 하소연 하는 것이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터지자 그는 몇 주간 밤잠도 못 자고 광주민주화운동을 부추기는 삐라를 만들어 살포했던 것이다 (강명도 1996, 241).
* 윗글 관련 보다 상세한 내용과 자료들은 역사로서의 5.18 제1권: 광주사태의 발단과 유언비어 제1장과 2장 및 역사로서의 5.18 제2권: 5.18 무장봉기 주동자들의 실체 제5장 등에서 읽고 참고하실 수 있습니다.
글 작성일: 2014년 2월 2일
이 글을 옮겨가실 때 사용하실 출처 링크는 http://www.study21.org/518/doc/nk-Kang.htm 입니다.
☞ 광주 무장반란 주도한 외지인의 정체 실마리가 담긴 1980년 5월 22일자 뉴욕타임즈 지 사진
☞ 복면에 가려진 5.18의 비밀을 복면 암호 해독으로 풀기
☞ 힌츠페터와 김영택이 목격한 목포 별동대가 광주에서 무기 분배
☞ 목포 김대중 계열 별동대 5월 20일 총기 무장하고 광주 침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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