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읽어야 할 제주4.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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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비바람 작성일14-01-28 22:56 조회2,15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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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 아버지를 잃었다
- 강 병 옥 ( 31년생, 제주시 애월읍 용흥리)
-2012. 7. 24. 증언
강병옥은 45년 해방이 됐을 때 구엄초교 6년생이었다. 이 마을 100여 가구 가운데 그의 동창은 5명이다. 이어 그는 오현중에 진학했다. 제주읍에서는 그의 아버지 강위조와 친구인 하귀에서 술 공장을 하던 고석찬 집에서 자취를 했다. 그 집은 관덕정 앞 제주차부 동녘 집(고석찬 아들인 고태영 산부인과 자리)이었다.
47년 3.1 시위 때 강병옥은 학교는 가지 않고 혼자서 제주북초등학교를 갔었다. 점시 때쯤 자취집에 돌아왔고 점심을 먹고 한참 뒤 총소리가 들리었다. 무서움에 밖으로 나갈 엄두는 내지 못했다.
당시 제주북초등학교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가득 메웠고 점심전 관덕정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으나 많은 사람은 없었다.
강병옥의 6살 위의 형 강병호(23)가 한창 조를 수확할 때인 48년 10월 28일(음력 9월 26일) 오후 마을 강달수(신흥칼라 대표) 부친 집에서 돼지를 잡는다(추렴한다)고 하여 구엄지서에서 근무하다 마을로 왔다. 강병호는 용흥리 청년단 간부로 구엄지서에서 경찰을 도우고 있었다. 누가 연락을 했는지, 또는 그를 유인하기 위한 덧인지 폭도 수십 명이 그가 나타나자 그만을 납치해 갔다.
강병옥의 아버지 강위조(44)는 큰 아들을 찾으러 노심초사했다. 아들을 찾으러 혼자 나섰다가 11월 7일(음력 10월 7일)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그마저 행방불명됐다. 강위조는 당시 마을 민보단장이었다.
강병옥이가 자취하던 그 집 문간 쪽에 창고가 있었는데 이 창고는 당시 2연대의 보급창고로 써졌다. 강병옥은 이때 형과 아버지를 잃고 그의 슬픔은 날로 커졌다. 그는 그의 아버지와 형을 죽인 것은 구엄초교 교사였던 문기호(24, 고성출신)라는 정보를 갖고 있었다. 강병옥의 슬픈 모습 눈여겨 보던 이집 고태영의 할머니가 군인에게 부탁했다. 문기호가 잡히거든 꼭 연락을 해주도록 했다. 문기호가 잡혔다.
49년 5~6월쯤 강병옥이 문기호에게 다그치자 ‘나는 죽이지 않았다. 대장(영락)에게 유수암(금덕)으로 양자를 온 양00(30)이가 죽였다’고 말했다. 그의 부친 시신은 형제봉(노꼬메 오름) 자락 국유지인 속칭 ‘덩어리’밭 남쪽 밭에 암매장됐다고 하여 약도를 그렸다. 신엄지서에 가 그간의 사정을 말하자 지서에서는 강병옥에게 다시 한번 약도를 그려 오도록 했다. 문기호에게 또 한번 약도를 그리도록 하자 처음 약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엄지서가 나서 경찰과 의용 경찰, 마을 어른과 청년 등이 수색에 나섰다. 그려진 약도에 따라 찾던 중 풀이 무성한 곳이 나왔다. 그 풀을 뽑자 풀과 함께 손톱이 묻어 나왔다. 땅을 파들어 가자 신고 갔던 신발인 나왔다. 이윽고 강위조 시신이 드러났다. 총베(말꼬리로 만든 끈)로 강위조의 목을 일곱 번이나 감아 목졸라 죽인 것으로 확인됐다.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를 지냈다.
강병옥의 어머니는 이어 그의 형을 찾으러 나섰다. 보름쯤 후 고성 항파두리 토성 주변에서 뼈가 널려 있는 것을 보았다. 이어 묻힌 흔적을 찾아 파내니 머리 부분이 나왔다. 이를 확인하니 앞니가 포개지(겹쳐진), 형님 생전의 이빨 모습이었다. 목을 잘라 땅에 묻고 나머지는 버려져 개들이 살과 뼈를 물어뜯는 바람에 뼈가 널려 있었던 것이다.
폭도들은 심심치 않게 용흥을 습격했다. 강병옥 형이 잡혀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폭도들은 용흥리의 식량을 약탈하고 강태화(31)를 짐꾼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강태화는 속칭 ‘명단’목장 궤에서 살해됐고 뒤늦게 시신만 회수했다.
49년 1월 9일(음력 12월 11일) 용흥에 폭도들이 습격했다. 이 날은 강병옥의 종조부(작은 할아버지) 제삿날이었다. 폭도들은 그의 이웃집 김기봉 이장과 양도생 청년단장 집을 불지르고 철수했다. 모두 피신하는 바람에 인명피해는 없었다.
또한 경찰관을 했던 양영호(30)가 경찰관을 지냈다는 죄목으로 폭도들에게 납치됐다. 49년 봄쯤 강병옥은 이웃인 관계로 마을 주민 20여 명과 함께 양영호의 시신을 수습하러 갔었다. 양영호는 3mm 쯤 되는 쇠줄을 항문에서 목줄까지 박아 넣어있는 처참한 형상이었다.
강병옥은 납읍에서 애월로 소개한 외할아버지가 용흥을 벗어나도록 했다. 위험하니 애월에서 살도록 하였다. 51년 4월 육군으로 징집되어 6사단 2연대 수색대로 배치되어 6개월 여 동안 생사를 오갔다. 이어 헌병학교를 마쳐 대구에서 근무하다 부산의 육군 형무소에서 근무를 했다. 56년 4울 60개월의 군 생활을 이등상사(중사)로 마쳤다. 2년여의 청년회장, 34살 때부터 5년여의 마을 이장, 2년 동안 노인회장 등을 지냈다.
2009년 3월 강병옥은 6.25 참전 유공자회 중앙대의원으로 상을 받게 됐다. 수상자석 그의 뒷자리에 있던 서울 상이군경회장이 “제주도의 폭도 공원(4.3공원을 지칭)이 어떻게 되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웃기만 했다. 그러면서 그는 ‘맞는 말이다. 중앙에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오히려 다행이다’란 생각을 하였다. 그는 4.3공원을 갔다 왔다. 그곳에서 그의 아버지와 형을 죽인 ‘문기호’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어떻게 가느냐, 다시 안 간다’고 결심해 가지를 않는다고 했다.
2012년 올 1월 하귀 병원에 갔을 때 강병옥의 집 사정을 아는 4.3 유족이 그의 아버지를 국가 유공자로 신청하도록 권유했다. 4월 26일 그의 아버지 강위조가 국가유공자증을 받았다.
용흥리 출신 양00(25)은 구엄초교 교사였다가 하가초교 교장으로 갔다 48년 11월 13일 원동에서 총살됐다. 좌익 활동을 한 혐의이다.
또 양00(48)은 제주읍내 제주중 교감이었다. 일본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해방 후 귀국, 한때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제주중 교감이 됐다. 초대 교장 현경호와 2대 교장 이관석 모두 좌익 활동을 한 혐의로 총살됐다. 제주중학생 상당수가 입산했다. 양00도 좌익활동을 한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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