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군 총정치국장 황병서가 김양건, 최룡해를 이끌고 아시아게임 폐회식에 참석하기 위해 10월 4일 인천을 방문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전쟁협박과, 핵공갈, 무엇보다 박근혜 대통령을 원색적으로 비난까지 했었는데 너무도 뜻밖의 반전이 아닐 수가 없다.
아무튼 3대 세습이 시작되면서 북한의 대남행태가 김정일 정권 때와 다르게 분명히 전략적 일관성을 상실했다. 김정일 생존 때에는 강경의 목표가 명백했다. 대북지원을 강요하기 위해서이던가, 아니면 대외관계에 우회적 영향을 주기 위해, 또는 내부결속을 위한 대남협박용으로 전략적 기간의 설정과 전개의 단계가 뚜렷했다.
과도한 집착력과 전문성으로 대남심리전 기지들까지 동원하여 마치 문학적 스토리를 엮어내듯 감성적 측면까지 고려했다. 그랬던 북한이 김정은 정권 들어와서는 너무 즉흥적이다 못해 심지어는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인천 아시아게임에 보낼 미녀응원단문제를 놓고도 단 이틀 사이에 협의에서 취소로 돌변하기도 했다. 이번 황병서 방한 또한 마찬가지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박근혜 대통령을 맹비난하며 도저히 상종 못할 세력으로 몰아붙였는데 돌연 폐회식 참석을 통보해 왔다.
전략의 혼동은 리더십의 부재를 의미한다. 김정일 생존 때에는 북한의 모든 간부들이 자기들의 책임을 제의서로 떠넘겼다. 김정일의 사인이 곧 법이어서 차라리 그 편리함을 최대한 이용했고, 간부들의 그 복종정신으로 안정된 유일지배 환경이 구축됐다.
그러나 오늘의 북한은 다르다. 수령주의 명분을 살려 사인의 책임은 김정은에게 몰아주더라도 그 전 단계에서 이미 실권자들이 완벽하게 결정해야만 한다. 단순히 김정은이 나이만큼이나 권력경험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수령이란 정점으로 모든 논리를 집중시키는 체제인데 그 수령이 자칫 발언만 실수해도 체제기반이 통째로 흔들리기 때문이다. 수령의 사상도 용모도, 심지어 풍만한 살까지도 닮아야 하는 3대 세습 지도자여서 당 조직지도부는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결국 김정일의 당 조직지도부는 측근들의 이탈을 감시했지만 김정은의 당 조직지도부는 수령의 이탈에 더 신경 써야 할 판이다.
당 조직지도부와 당 선전선동부는 북한의 물리적 독재와 감성독재의 양대 축이다. 그 충분한 경험과 조직력으로 당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는 일단 김정은의 수령 연출은 계속 조작할 수 있지만 문제는 대내외정책과 같은 국정운영의 실무영역이다.
지난 9월 강석주가 유럽 순방을 강행한 것도 그런 권력 내부의 고민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김일성, 김정일 정권에서 어느 일개 간부가 그렇듯 북한 정권의 대변인 자격으로 여러 나라를 장기간 외교 순방한 예가 있었단 말인가?
이번 황병서 방한을 두고 우리 언론은 김정은의 특사 자격이라며 김정은 리더십 안정을 홍보하는데 왜 그렇게 경솔한 판단을 하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황병서는 김정일 정권 때 방한했던 박재경 군 선전부국장보다 지위는 더 높았지만 수령 특사의 발걸음은 더 작았다.
그 근거로서 첫째는 황병서가 경호원들을 공개적으로 대동하고 나타난 점이다. 북한에서 경호란 수령만의 독점물이다. 외부세계가 말하는 것처럼 권력 2인자, 3인자를 용납하지 않는 권력견제 원칙 때문이다. 수령충성의 과시로 겸손의 경쟁에 체질화된 북한 간부들이어서 설사 경호원을 배치해도 기어이 반대했어야 정상이다.
장성택이 건성건성 박수를 친 것도 불경죄로 처형하는 북한이어서 더욱 있을 수 없는 충신 패륜에 가깝다. 황병서가 양복 입은 경호원들을 거느리고 인천공항에 나타난 것은 수령 신격화의 위반을 넘어 노골적 권력과시이다.
둘째는 김정은의 전용비행기를 타고 왔지만 대표단의 방한 일정에는 이상하게도 김정은 신격화가 전혀 강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김정일 생존 때 같았으면 전용기 배려로부터 시작하여 북한 체육인들에게 주는 현장 감사문 전달, 등 자유언론 앞에서 신격화선전의 최대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그러나 황병서는 김정은 이름이 생략된 격려로 북측 체육인들을 만났고, 기자들 앞에서 김정은이 북측 체육인들을 축하해주라고 전용기까지 보내줬다는 당연할 법한 발언조차 전혀 하지 않았다.
셋째는 북한 언론의 행태이다. 만약 처음부터 김정은 리더십 홍보를 앞세운 방한이었다면 체육인들을 격려해주기 위해 친히 전용기를 보내주었다며 온갖 미사(美辭)를 동원하여 난리쳤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당 선전선동부는 황병서 외 최룡해, 김양건이 방한한다는 사실 전달 수준의 짧은 보도만 했다.
넷째는 황병서 일행이 오히려 김정은 신변 이상설을 사실로 확인시켜주는 오류를 범했다.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 김정은 신변을 걱정하자 최룡해는 괜찮다고만 대답했다. 사실 수령의 신변이상설은 북한에서 “최고존엄” 모독에 해당되는 발언이다.
원칙대로라면 화를 내거나 단호히 일축해야 하는데 최룡해는 질문에 답하는 수준으로 매우 온화하게 대응했다. 이는 특히 적국에서 “최고존엄” 수호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노동당원의 양심과 도리의 탈선이다.
이런 추측을 근거로 우리는 황병서 방한에서 크게 세 가지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는 대남비서인 김양건이나 국가체육지도위원회 위원장인 최룡해만 와도 족한데 굳이 황병서 총정치국을 단장으로 하는 북측 대표단의 요란한 구성이다.
북한이 정말로 남북고위급회담으로 정세 돌파를 원했다면 황병서의 존재를 최대한 아꼈다가 단계적 절차를 밟아 최종적으로 마주앉아도 될 일인데 성급하게 등장한 것이다. 과거처럼 주도세밀한 전략적 타산이나 명분, 부분적 비약과 같은 계산이 없이 말 그대로 통 큰 방한을 한 셈인데 거기에 비해 내용은 매우 공허하다.
둘째는 황병서가 군복 입고 인천으로 온 점이다. 북한이 남북관계에서 극도로 절제하는 부분이 군사대표단 파견이다. 북한 형편상 평화협박 밖에 전략적 주도권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그 카드를 최대한 부풀리기 위해서이다.
그런 북한이 인천 아시아게임 폐회식 참가명분의 방한 대표단에 군 장성도 아닌 북한군을 대표하는 총정치국장을 포함시켰다. 지금껏 수령유일지도체제만큼이나 대남관계에서 엄격히 준수했던 민, 군 이중전략의 리듬을 완전히 깨버린 것이다.
셋째는 북한 대표단의 온화한 표정들이다. 그 어떤 전략적 속셈을 준비해 왔다면 면담 대상과 내용, 분위기, 좀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 기자의 질문내용에 따라 준비된 심리의 표정들로 바뀌는 것이 원래 전통적인 북한 대표단의 방한전술이자 대응전략이다.
그런데 황병서 부터가 사람 좋은 미소와 평온함으로 일관했다. 심지어 환담이란 용어도 사용했는데 설사 그 환담이 외교적 술어라 할지라도 표정만은 품위를 지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비굴해보이기까지 했다.
현재 우리 언론들은 김정은 특사요, 체제안정 과시의 방한이요, 하면서 북한 스스로가 놓친 선전효과까지 대신 열심히 홍보하며 호들갑을 떨고 있다. 마치 김정일의 장기독재에 북한 주민들보다 우리 언론과 학자들이 더 세뇌된 듯하다.
통전부 출신 탈북자의 눈으로 보건대 이번 황병서의 방한과 일거일동은 장성택 처형만큼이나 북한체제 상식에서 심히 어긋나는 거대사건의 연속이다. 한마디로 유례없는 변화이다. 그 변화가 과연 북한 내부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남한과의 대화를 위해 변화를 자처한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