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으로 지켜온 5.18성역
2008년 제가 발간한 4권짜리 다코멘터리 역사책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2,730쪽)의 머리말을 대상으로 5.18단체들이 고소-고발을 했습니다. 머리말 글에서 5.18단체들이 문제를 삼은
부분은 아래의 문장들입니다.
“필자는 10.26, 12.12, 5.18, 김대중
내란음모, 1995~97년에 걸친 역사바로세우기 재판 이 모두에 대한 기록들을 열람하였다. 이 모든 기록들을 보면서 필자는 5.18은 김대중
등이 일으킨 내란사건이라는 1980년 판결에 동의하며, 북한의 특수군이 파견되어 조직적인 작전지휘를 했을 것이라는 심증을 다시 한 번 갖게
되었다. 불순분자들이 시민들을 총으로 쏘는 것은 물론 제주 4.3사건에서처럼 잔인한 방법으로 살인을 저질러 놓고, 좌익들이 이를 군인들에게
뒤집어씌우는 소위 모략전을 반복적으로 구사함으로써 민주화 운동으로 굳혀가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심리적 내전’이 바로 5.18이라고 생각한다.”
그해 6월,
5.18부상자회 회장 신경진. 5.18형제자매가족 부상자회장 정수만 등 38명이 저를 고발했고, 이들은 또 제 글을 인용한
전사모(전두환을사랑하는모임) 회원 10명을 무더기로 고발하였습니다. 저는 안양검찰 박윤희 여성 검사로부터 안양법원에 기소가 되었고, 10명의
전사모 회원들은 대구법원에 기소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재판기록 18만쪽을 5년동안이나 연구해서 4권짜리 역사책을 썼다고 고발하는 곳도
한국뿐이요, 이를 기소하는 검찰도 한국검찰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재판(사건 2010고합51)은 2009년 10월 8일 안양지원 405호실에서 첫 심리가 열렸고, 이로부터 1심
14회, 2심 9회 총 23회에 걸쳐 재판을 했습니다. 1심 선고는 2011년 1월, 19일에 무죄를, 2심 선고는 2012년 8월 23일에
무죄를 선고하였습니다. 검찰이 상고하였지만, 대법원은 2012년 12월 27일 검사의 상고를 기각했습니다. 이는 역사의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참으로 험악하였고 진을 빼는 것들이었습니다.
판사들 모두가 기피하려 들었던 5.18 재판
1심에서는
재판부가 3번 바뀔 정도로 판사들이 이 재판 맡기를 싫어했습니다. 5.18을 건드리면 큰일 난다는 사실은 일반 가정주부들까지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2008년 서울교회 이종윤 목사님이 설교 중에 5.18에 북한특수군 개입을 언급했다 해서 5.18단체들이 이를 트집 잡고 동년
10월 이후 수십 명이 세 차례에 걸쳐 술을 잔뜩 마신 상태에서 버스를 대절, 서울교회를 찾아와 교인들이 보는 앞에서 행패를 부리고 온갖 공갈
협박을 했습니다. 결국은 장로들이 광주 5.18묘지를 참배하는 것으로 사건은 질 나쁜 폭력행사는 일단락됐지만 목사님은 5.18단체가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시달리다 결국 승소하셨습니다.
5.18 문제를
건드리면 이처럼 폭력을 당하고 소송을 당하는 것입니다. 5.18 관련재판을 맡는 판사들은 광주사람들로보터 많은 저항을 받습니다. 1996년
서울에서 진행됐던 5.18재판의 법정은온통 광주인들의 북새통으로 점철된 공간이었습니다. 판사들이 가장 기피하고 싶은 재판이 바로 5.18관련
재판입니다.
안양에서 저를
피고인으로 하는 5.18재판을 맡은 단독판사들은 연이어 두 판사들이 재판을 회피했습니다. 5.18재판을 맡아 광주사람들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리면
광주사람들로부터 당할 것이라는 공포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을 가장 먼저 배당받은 단독판사는 첫 회 재판에서 피고인인 저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해주었습니다. “피고인, 피고인은 제가 하는 말을 절대 흘려듣지 마십시오. 이 사건은 반드시 변호인이 필요한 사건입니다.
변호인을 꼭 선임하십시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제 이 말 절대 흘려듣지 마십시오”
우익 번호사
모임이라는 모 변호사모임에 타진해 보니, 1억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재판장에게 국선변호인을 부탁했습니다. 재판부가 정해준
국선변호사를 만나보니 첫 마디가 “구속될 수 있는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사무실에는 한겨레신문 등이 진열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석구
변호사에 부탁했습니다. 이름도 없는 좌익이 재판에 걸리면 늘 5인 정도의 민변 변호사가 이름을 걸고 싸워주는데, 우익 변호사들은 단지 좌익이
아니라는 것뿐이지 우익 투사들을 도울 생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나라에 애국투사들을 무료지원하는 애국우익 변호사는 없습니다. 제게 유익한
힌트를 준 이 첫 번째 단독 판사는 시간을 끌다가 다른 법원으로 전근돼 갔습니다. 두 번째 나타난 단독판사, 매우 투박하게 생긴 그는 마치,
저를 포함해 법정을 가득 채운 우리 측 방청객들을 모두 다 범인 시 했습니다. 금방이라도 저를 감옥에 넣을 듯한 험악한 자세였습니다. 법정에
자리가 남는데도 반 정도만 입정하라고 했습니다. 방청객 쪽에서 조금의 부스럭 소리만 내도 눈을 부라렸습니다. 90분 동안 서변호사의 변론을 들은
후 태도가 좀 누그러졌습니다, 다음부터는 방청객 모두를 입장시키겠다는 누그러진 말도 했습니다. 첫 공판이 끝나자 그는 곧 서석구 변호인에 전화를
걸어 이 재판은 단독으로 가기가 매우 버거운 재판이니, 합의부로 가는 것이 어떠냐” 이렇게 제안했고, 저와 변호사는 이를 쾌히 수락했습니다.
드디어 합의부
재판부가 나타났습니다. 재판장은 이현종 판사, 첫 공판을 열자마자 참으로 기분 상하는 말을 했습니다. “피고인은 지금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지만 언제든지 구속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험한 말을 재판장으로부터 듣는 저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1심에서 무려 17개월, 14회의
공판을 통해 저는 광주에 600여명의 북한특수군이 왔었다는 증거들을 많이 제출하였습니다. 날이 갈수록 송곳처럼 따가웠던 재판장의 눈매가
부드러워졌습니다.
2010년
10월 29일, 이날은 저를 고소한 5.18부상자회 신경진 회장이 증인으로 출석하는 날이었습니다. 신경진은 재판부의 명령을 두 차례 무시하다가
강제구인에 나선다고 하자 이날 법정에 출두하였습니다. 그런데 광주사람들이 70여명 먼저 법원에 들어와 저와 저를 응원하는 분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법정 앞의 넓은 로비를 선점한 광주사람들은 인간들이 아니라 맹수 그 자체였습니다. 젊은 회원들이 자를 에워싸고 검색대를 통과할
때에도 “지만원 이 씨발새끼 어디 얼굴 좀 보자” 하는 소리와 아울러 온갖 쌍욕을 하면서 호위하는 사람들을 제치고 제게 달려들었습니다. “얼굴을
긁어 부러야 한당께” “지만원이 저 개새끼 나올 때 봐라, 뒈질 줄 알아라.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안탕께”
양쪽 모두
방청석은 24개씩만 허락되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법정 밖에 있는 넓은 로비에서 대기했습니다. 방청석을 얻지 못한 어느 한 40대 주부는 대형
창문 앞에서 밖을 바라보다가 광주의 한 남자로부터 폭력을 당했습니다. 뒤로부터 접근하여 투박한 손으로 귀와 얼굴을 밀어 때렸기 때문에 여성의
귀가 찢어져 선혈이 낭자하고 귀고리가 달아났습니다. 재차 때리려는 것을 어느 남성이 가로 막고 엘리베이터를 통해 1층으로 호위한 후 112로
신고를 했습니다. 112가 출동하여 귀에 난 상처와 피를 사진 찍고 곧바로 조사를 받으면 범인을 검거해 주겠다고 하면서 다시 법원 3층으로
올라와 범인의 얼굴을 찾으니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습니다.
제가 운영하는
홈페이지 ‘시스템클럽’에는 필명 정의봉님의 소감이 게시돼 있습니다.
“저는 재판정에 입장하지는 못하여서 대기실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만 말씀드립니다. 호남인들의 피해의식에 가득한 그 당당함에 우리 쪽은 사분오열, 지리멸렬되어 저들의 온갖 욕설과 협박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일례로 많이 쳐주어도 40대 초중반쯤 되었을까하는 자가 60대로 보이는 우리 쪽 회원에게 "아그야! 니가 뭘 알아서
떠드냐"는 선창과 함께 이어지는 저들의 욕설...,칠.팔십대 어르신들이 앉아있는 곳을 향해 시종일관 진한 전라도 사투리로 욕설을 뱉어내는 저들이
진정 "5.18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자들인지요...? 5.18이라고 인쇄한 군대식 머플러를 단체로 맞춰 쓰고 남녀노소가 벌이는 집단적인 발작
증세는 연로한 어르신들이 감당하기에 버거운 일이었습니다. 가끔 바른 소리하시는 어르신들은 이들의 표적이 되어 집단의 광기에 희생양이 되었고 이
상황에 고무된 자들이 더욱 공격적으로 나서서 어느 어르신의 태극기 뱃지까지 뺏으려는 만행을 저지르자 우리 쪽 회원분이 겨우 저지시켰습니다.
어제의 일은 호남에 대한 부정적인 저의 시각을 더욱 증폭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고 이 더러운 일들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기에 글을 올리지 않으려고
했고, 정말 간단히 쓰려고 했습니다. 쪼사버릴 새끼들" "갈아 마셔 버리겠다" "오늘 아무나 년이든 놈이든 한 놈 걸려라, 작살을 내 버리겠다"
"광주에 대해 너거들이 머 안다고 개지랄이냐” “일당 얼마 받고 쓰잘 데 없는 짓을 하느냐” “광주를 비난하는 너거들이 빨갱이 새끼들이다”.
녹음기를 가져 오지 않은 게 후회가 되었습니다. 완전히 정신병동을 법원으로 옮겨 온 것 같았습니다. 뚱뚱한 여자들이 남자들 보다 더
패악질이더만. 전라도 광주의 말투가 그렇게 살벌하고 추악스러운지 새삼 느꼈습니다. 시비가 생길 것을 우려하여 상대 하지 말라는 글을 읽지
않았다면 진짜 욱 할뻔 했습니다. 장이라도 이 나라를 떠나버릴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301호 법정에
들어서자 재판장은 5.18부상자회 신경진 회장과 피고인측의 변호인 및 필자를 재판장실로 불러 양측의 방청객들의 질서를 잘 잡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때 신경진 회장은 방청객들이 검은 바탕에 흰색으로 5.18이라 쓴 머플러를 법정에서 착용하게 해달라고 재판장에 요청했고,
재판장은 피고인측에 동의를 구한 후 이를 허락했습니다. 이 머플러에는 ‘5.18’이 아니라 ‘5018’로 적혀 있었습니다. 5공에 대한
욕이었습니다.
신경진
회장으로부터 법정질서에 대해 간곡한 부탁을 받았지만 광주사람들은 성난 맹수처럼 설쳤습니다. 변호인이 질문을 하나씩 할 때마다 소리를 지르고
변호사에게 쌍욕을 퍼붓고 일어서서 삿대질을 했습니다. 재판장이 수십 차례 주의를 주었지만 그 효과는 불과 몇 분이면 소멸됐습니다. 너무
소란스러워 재판장이 인내할 수준을 넘어 서면 재판장은 시원한 냉수를 마시고 마음을 진정시키라는 부탁과 함께.휴정을 선언했습니다. 이런 휴정이
3번이나 있었습니다. 재판장은 휴정을 3번씩이나 하는 재판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고 했습니다. 재판장은 궁여지책으로 변호인이 신경진을 향해 묻는
질문지(신문내용)를 여러 개 복사해서 질문지는 재판장, 검사, 신경진(증인), 변호인, 피고인에 하나씩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재판장은
방청객이 변호인이 신경진에게 묻는 질문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게 “74번, 그게 사실인가요?” 하는 식으로 암호를 사용했습니다. 1시간이면 끝날
재판이 2시간 20분 정도나 걸렸습니다. 1980년 5.18때 가두방송을 하여 계엄군이 쏘아버리고 싶었다고 했던 전옥주(전춘심)가 방청석에서
가장 시끄럽게 소란을 피웠습니다. 그리고 재판이 끝난 다음에도 “에이 봅시다. 재판장님, 나 할 말 좀 있으니 들어보소” 하며 재판장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이런 여인을 질서를 유지하는 법원 직원들이 에워싸고 간신히 내보냈습2니다. 그리고 저는 비밀통로를 통해 나왔습니다. 5.18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도 5.18사람들이 저런 사람들이라는 것을 구경을 하면 5.18이 무엇인지를 저절로 알았을
것입니다.
신경진 회장은
재판장 앞에서 필자와 변호인에게 악수를 청했고,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에서도 꼬박꼬박 “지만원 박사님”이라는 말로 예우를 했습니다. 가장 놀라웠던
사실은 휴정을 했을 때 신경진 회장이 변호인과 제가 나란히 앉아있는 자리에 와서 의외의 말을 하였다는 점입니다. “지만원 박사님께서 법원에 제출된 답변서들을 읽으니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갑디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문서를 덮었습니다.”
그리고
2011년 1월 19일, 재판장은 제게 무죄를 선고하였습니다. 판결의 취지는 이러했습니다. “5.18의 범위는 매우 넓다. 5.18 시위에 가담한
사람, 5.18을 지지하는 사람, 5.18단체에서 근무하는 사람 등 그 범위가 실로 넓다. 피고인은 5.18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했고, 그
과정에서 그 어느 사람의 이름도 지칭한 바 없고, 좁은 의미의 단체도 지명한 적이 없다. 단지 5.18은 역사적 사건임으로 그 역사적 사건에
대해 연구를 했을 뿐이지 사람이나 단체의 이름을 적시한 바 없다. 피고인은 역사책의 머리말을 썼다. 피고인이 쓴 역사책의 분량은 매우 많다. 그
많은 분량은 역사를 규명하기 위한 것이지 특정인의 명예를 훼손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니다. 그런데 그 중 극히 일부의 글을 따로 떼어내 그것이
글의 전부인양 확대하여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러한 판결은
2심과 3심에서도 계속 유지됐습니다. 1012년 12월 27일, 대법원이 최종으로 검사의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북한특수군이 광주에 참전했다는
표현은 얼마든지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5.18의 ‘5“자만 건드려도 폭력이 쏟아지고 법원의 처벌을 받던 ’5.18의 세도와 횡포‘는 더 이상
존속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오자 저는 트위터를 통해 5.18의 진실을 알리는 수많은 단문을 써서 세상에 알렸습니다.
트위터가 갑자기 요란해 졌습니다. 트위터가 요란하니 종편방송들이 이야기나 들어보자며 가벼운 매너로 저를 불렀습니다. 먼저 2013년 1월
16일, 채널A가 저를 초청하였습니다. 저는 이것이 기회이자 싶어 북한책들과 제가 쓴 책을 한 아름 안고 출연히였습니다. 아래 사진에서 제 옆에
쌓인 책들이 바로 그런 책들이었습니다.
2014.9.27.
지만원 http://www.systemclu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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