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5·18 무렵, 종편 채널에서 ‘광주사태 북한군 개입설’을 보도했다. 1980년 광주에 1개 대대 600명 규모의 북한군이 급파됐다는 것이다. ‘직접 광주에 왔었고 국군과 교전해 3명을 射殺(사살)했다’는 자칭 북한 특수부대원 출신의 탈북자까지 등장했다. 10·26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후 한반도가 가장 긴장된 시기였던 당시 안보상황을 고려하면 믿기 어려운 말들이었다. 그 뒤 국방부는 ‘북한군 광주투입설’을 공식 부인했고, 종편 방송들도 탈북자들의 증언을 검증,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으나 아직도 믿는 이들이 적지 않다.
광주사태 당시 합참의장으로서 한국 방어을 책임지고 있었던 柳炳賢(유병현) 전 駐美(주미)대사를 만나, 이런 주장들을 물어보았다. 유 대사는 7년 간 對(대)간첩대책본부장을 역임해 휴전 이후 계속된 무장공비들의 침투를 저지했고, 군사정전위원회 한국 측 수석대표로 북한을 상대해 그들의 습성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다. 그는 韓美(한미)동맹의 핵심인 한미연합사 창설의 한국 측 主役(주역)이기도 하다.
“서해는 우리 해군이, 동해는 美7함대가 감시”
먼저 광주사태가 일어났을 때 합참의장으로서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를 물었다.
“우리나라는 그때 10·26 이후 최규하 대통령 체제가 계속되면서 정치적으로 몹시 취약했었다. 북한은 국내에서 소란스러운 일이 일어나기를 바랐을 것이다. 당시 계엄사령관을 육군참모총장이 맡고 있었기 때문에 현지에서 일어난 사태에 대해서 지나치게 ‘이래라 저래라’하지는 못하고, 단지 국방장관실에서 각군 총장과 매일 회합을 가졌다. 계엄사령관은 광주사태를 책임지고 조치하고, 나는 광주사태가 다른 지역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盡力(진력)하는 것이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북한의 무장공비들은 과거 주로 변산반도에 상륙해 광주, 지리산 지역으로 침투했다. 따라서 해군참모총장에게 각별히 부탁해 해군의 可用(가용)한 戰力(전력)을 변산반도 쪽으로 돌려 이북의 특전부대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한국에서 (안보상) 어떤 사태가 발생하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사태가 확대되지 않도록 반드시 미국과 협조해야 한다. 광주사태 초기에 위컴 한미연합사령부 사령관을 만나 일본에 있는 美7함대, 항공모함戰隊(전대)를 한국 水域(수역)에 파견하도록 조치했다. 북한에 ‘절대 광주사태를 악용하려 하지 마라. 그와 같은 행동을 취할 경우 韓美연합군은 철저한 대처를 하겠다’는 경고를 주려는 의미였다. 마찬가지로 일본 아사히(朝日) 신문을 이용해 매일 美7함대의 동태를 보도하도록 했다. 북한에 정보가 들어가도록 ‘쓰고 싶은 대로 써라’며 보도통제도 하지 않았다.
또 하나, 美국무성으로 하여금 ‘북한은 광주사태에 절대 편승하지 말라.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경고를 발표하도록 했다. 당시 우리 외무부는 이와 같은 사태가 일어났을 때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거의 군사정권이었고 당시 외무부에는 안보 분야의 조직이 되어있지 않아서 어떻게 할 도리를 몰랐다. 결국 국방부에서 내가 중심이 되어 조치를 취했다. 후에 최규하 대통령이 당시 외무부 장관을 불?‘당신 봉급의 반은 유 장군한테 드리라’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국내외 언론 이용, 북한에 경고”
柳대사의 증언처럼 1980년 5월23일부터 6월2일까지 우리 언론에도 美항모의 동향이 지속적으로 보도됐다.
-美조기경보기 2대 한국지역으로 급파 (1980.5.23/동아일보) -美E3A 2대 오키나와 도착 (1980.5.24/동아일보) -美국방성 관리, “美항모 미드웨이 등 필요하면 한국 급파” (1980.5.24/동아일보) -美항모 코럴시號 한국해역으로 내달 중순까지 주둔명령 (1980.5.26/동아일보) -美국방성, “美항모 코럴시號 한국해역에 도착” (1980.5.28/동아일보) -[사진] 한국해역을 순항하는 코럴시號 (1980.6.2/동아일보)
당시 美국무성은 광주사태가 절정이던 5월22일(현지 시각) “불안상태가 계속되어 폭력사태가 가열된다면 외부세력이 위험한 오판을 할 위험성이 있다. 미국 정부는 현재의 한국사태를 이용하려는 어떠한 외부의 기도에 대해서도 한미상호방위조약 의무에 의거, 강력히 대처할 것임을 재강조하는 바이다”는 내용의 對北(대북) 경고성 성명을 발표했다.
柳대사는 “한국에서 어떤 사태가 발생했을 때 중요한 것은 상대가 어떤 행동을 취할 기회를 주?않는 것, 북한이 사태를 악화시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광주사태 때는 우리와 미국이 이렇게 먼저 그들의 행동을 봉쇄해버렸기 때문에, 북한은 어떤 행동을 취할지 망설이다가 適期(적기)를 놓쳤다”고 말했다.
“북한, 1개 대대 침투시킬 수송능력 없어… 완전 거짓말”
그는 “(광주사태 당시) 600명 규모의 북한군 1개 대대가 서해안을 통해 광주에 침투했다”는 탈북자 임천용 씨의 주장을 여러 가지 근거를 들어 반박했다.
“600명을 수송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의 선박이 필요하다. 북한은 당시 600명 정도의 병력 수송을 할 수 있는, 상비된 선박부대가 없었다. 무장공비를 침투시키기 위한 고속정들은 있었다. 70~80t 정도의 배인데, 20여 명이 정원이다. 600명을 태우려면 몇 대가 필요한가? 이북은 造船(조선) 기술 수준이 낮다. 외국의 구식 배를 헐값에 사와 사용한다. 광주사태가 발생하고 600명을 보낸다? 그럴 만한 수송능력이 없다.”
對간첩대책본부장으로서 다년간 무장공비들을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 말도 전했다.
“광주사태는 예측 가능했던 사건이 아닌 돌발사건이었다. 이런 돌발사건에서 아무리 북한이라고 해도 600명이라는 부대를 편성하고 교육해 출동명령을 내리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이런 작전을 할 때는 사전에 현지에 정찰조를 미리 보내게 되어 있다. 인도하는 병력이 있어야 본대가 들어갈 수 있다. 덮어놓고 600명이 ‘나가자!’해서 광주까지 내려갈 수는 없다. 또 북한이 특전부대를 내려 보낼 때는 우리 국군으로 위장을 시킨다. 잡혔을 때 증거를 남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M1, 칼빈 소총, 우리 군복을 마련해 입혀 내려 보낸다. 600명분을 급히 마련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는 1·21사태와 울진삼척사태 등 북한이 실패한 예와 비교해보기를 권했다. 북한은 1·21사태 때 31명을 보내기 위해 수개월간 준비했다. 청와대 모형을 만들어 공격예행연습까지 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그중 김신조는 생포되고 나머지는 사살됐다. 두명은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다. 울진삼척사태 때는 120명을 보냈다. 태백산 지역에 올라가 인민해방촌을 만들겠다고 했다. 120명 대부분이 사살됐다. 시체들을 증거로 제시하면 우리 장비, 우리 피복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은 ‘남한 내 애국청년들이 궐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 군은 1964년부터 1976년까지 12년 사이에 약 700명의 무장간첩을 사살했거나 생포했다.
유 대사는 “모든 무장간첩들의 시도가 실패했는데, 광주만 성공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고 되물었다. 또 600명에게 무기와 실탄을 주고 작전지역에 들어가라고 하면, 반드시 교전과 사고가 일어나 부상자가 발생하게 되어있는데, 부상자라든가 시체 등 실질적인 物證(물증)을 남긴 게 하나도 없다는 점도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했다. 주장뿐이라는 것이다.
“600명 침투시켰으면 정전협정 위반… 한미연합사, 유엔사 모두 가만 있지 않았을 것”
그는 “만약 북한이 정말 600명을 침투시켰다면 굉장한 사건이다. 停戰(정전)협정의 위반이다. 광주사태가 일어났을 때는 한미연합사가 戰·平時(전평시)를 막론하고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었다. 한미상호방위 조약에 따라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뤘어야 한다. 그러나 한미연합사나 유엔사의 어느 누구도 이를 인지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채널A가 보도했던 북한 특수군 출신이라는 탈북자 김명국(가명) 씨의 “50명이 광주로 들어갔고 국군과 교전해 3명을 사살했다”는 주장은 “완전 거짓말”이라고 일축했다.
“그래도 내가 합참의장이라는 직책에 앉아 있었는데 그 정도의 사태에 대한 정보를 몰랐다면 그야말로 나라에 사죄해야 할 일이다. 완전 거짓말이다. 50명이 걸어서 광주까지 내려간다? 어떻게 들키지 않고 가나? 50명이 도보로 이동한다고 할 때는 50명의 보급품, 자동차 몇 대 분이 필요할 것이다. 탄약, 식량 등 어떻게 수송했을까? 그런 부대이동을 어떻게 합참이 몰랐겠는가? 우리 사병을 3명이나 사살했다? 그러면 戰死(전사)보고가 올라올 것 아닌가? 국민들이 자식을 군에 보내고 있다. 자기 아들, 동생이 소식이 없어지면 국방부, 합참으로 연락이 온다.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인터뷰를 마치며 유병현 대사는 ‘북한군 개입설’을 믿는 사람들에게 “첩보(information)를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첩보를 정보(intelligence)로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증거 없이 말하는 것은 ‘浪說(낭설)’에 불과하다. 국민의 수준이 높으면 첩보와 정보를 구분할 줄 안다. 국민들이 상식적인 판단을 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柳대사는 육사 특7기 출신으로, 초대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지냈다. 1981년 합참의장을 마지막으로 大將(대장) 예편한 후 4년간 제11代 주미대사(1981~1985)로 활약했다.
李知映(조갑제닷컴 기자)
<아래 댓글은 순서가 거꾸로 되었습니다!!> <맨 밑부터 보시길...>
| 성천 2013-07-26 오후 12:45 | 온 나라가 시끄러울 때 각개로 내려와 광주사태 전 내려가 잠입해 있다가 선동하였다면 기본 인식부터가 잘못된 것 아닌지요? 탈북자들이 미쳤다고 허위를 증언합니까? 김신조 일당이 내려왔을 때 누가 알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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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태 2013-07-15 오후 10:02 | 광주 518은 북괴하고 김대중 합작품인것을 국민 대다수가 알아 전두한 전대통령이 김대중 사형 할것을 살려주어 빨갱이가 확산된 오늘에 이르렀는데 과주에 침투했던 특수군 출신 탈북자가 엄연히 증언한것을 그당시 군 책임자는 막지못한 책임 회피하려 아니라고 하는게 정당한데 그것을 믿으면 안됩니다 김대중 잔당 빨갱이들이 좋아하는 것은 민주 투쟁인데 빨갱이 입맛에 맛는 말은 하면 그쪽 빨갱이편입니다. 조갑제 선생의 조갑제 광주 사태 책은 빨갱이들에게 책 팔아 돈벌기 위한것 같습니다.발갱이에게 이로운 글을 쓰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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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지 2013-07-06 오전 12:01 | 맞는 말이다. 만약에 북한군의 침투가 있었다고 발설하거나 시인한다면 당시 군지휘계통은 왕창 역적되는건데.. 어느 미친 놈이 진실을 들먹거리겠나... 최전방 철책선 근무자가 간첩의 침투 흔적이 발견되면 어떡하노? 무조건 덮어야제.. 들키면 감옥행인데.. 누가 그걸 발설하노.. 설혹 간첩이 자술해도 입 봉해 버려야제.. 안 그러면 감옥가야되는데..그걸 어떻게 용납하노.. 안 그렇소? 그러니까 힘있는 사람 말은 무조건 맞다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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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東南風 2013-06-30 오후 8:25 | 그래 조갑제 신도들은 북한군이 안 왔다고 해라. 그 대신 그 당시 광주사람들은 반역폭도라고 주장하라는 거다. 광주사람이 무기고 털었다면, 그 광주사람들 반역폭도 아닌가. 광주를 아니 전라남도를 분리독립시키지 않으면 반역죄로 다스릴 일이다. 이 문제를 어떻할 텐가!
북한군 개입설은 광주사람들에겐 면죄부인데, 아니어도 떠넘길 일인데 도리어 명예훼손? 민주화 보상금 돈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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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춘추 2013-06-29 오후 1:11 | 당시 합참의장 증언을 근거로 대며 대리인을 내세워 북한군개입설을 전면 부정하는 이런 식의 대응은 소탐대실이다. 아울러, Dr. Gee는 주장을 폄에 있어 상대 감정을 건드리는 말투로 인해 연구성과를 전달하는 힘을 잃고 있다. 그런 말투는 전장에선 유용하지만 국민을 상대로 설득하는 방법에서는 빵점이다. 쓸데없이 적을 만든다. 각자의 역사관, 세계관, 국가관에 기초하여 논리를 펴면 된다. 각자 논리에 따라 북한군 역할이 사건 구성의 중요한 골격 일수도, 일부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어느 한 사람의 주장이 어떻게 역사의 모든 것이겠나? 그리고, 북한군이 오지 않았다고 우기는 것도 우습다.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면 검토하는 것이 역사 아닌가? 법원, 국방부 판결이 역사 평가의 절대적인 근거가 된다면, 518 판정은 처음부터 뒤집어 져서는 안되는 것이고, 그것을 뒤집은 자들이 범죄를 저지른 것이 된다. 따라서 柳炳賢 증언 역시 518을 평가함에 있어 하나의 참고자료에 불과하다. 역사적인 재료를 가지고 자신의 철학과 역사관을 펴는 것이 목적인가? 왔다안왔다 알아 맞추는게 목적인가? 왜 알아 맞추기 게임을 하는가? 그것은 한국 전체 역사의 맥락을 구성할 능력과 통찰력, 철학의 부재로 인함이다. 부분적으로 보았을 때는 참인 것도 더 높은 곳에 올라서 보면 아닐 수도 있다. 그 누가 보고 듣는 것이 세상 모든 것이라 하는가? 하늘의 신묘함이여! 그래서 하늘이라 한다.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이었는지, 지역에 기반한 지역독립운동 이었는지는 국민이 판단한다. 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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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상록수 2013-06-25 오전 6:44 | 선구1은 완전히 똘아이로구만,, ㅎ 야, 이늠아 무기고가 광주만 털린줄 아느냐, 전남 전지역이다. 이 등신아. 뭐, 지키는 자가 없어?? 광주에서 꿩총메고 근무하느라 애썼다. 똥이나 마저 싸라. 여기 기도보는 애들 수준이 보통이 아니구만,, 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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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평선 2013-06-24 오후 6:32 | 이해됐네요, '선구자1' 님 의 말씀이 설득력 있습니다. 무법천지 !!! 힘있는자가 주인 , 그걸 민주화운동이라구 여 , 무기고든 뭐든 지키는 자가 없었다.명답 이십니다 . 지키는 자가 없었는지 있었는지 , 광주 시민들이 너무 잘 알것 이 아니겠습니까 ? 선구자님1 : 간단명료~ 명쾌, 상쾌, 통쾌, 하게 잘 경청 했습니다. 도둑 가저가라구 대문이 활짝 열린~격 이니 ... 더이상 논쟁은 불필요 해보이는데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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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구자1 2013-06-24 오후 6:21 | 별 놈 다 있네 내가 거짓말을 한 다면 네 자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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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구자1 2013-06-24 오후 6:06 | 나는 1981년 3월 그러니까 광주사태 난 후 10개월 만에 광주에 발령 받아 광주에서 3년 동안 근무한 적이 있다 당시 사람들이(난 군무원이 많은 부대에 근무) 모이면 맨 광주사태 이야기 만 했는데... 지금 소문난 북한군 ... 그런 징후 같은것은 전혀 들은 적이 없었고... 군에 대한 무슨 조직적인 대응을 할수도 없었다고 하드라. 누가 누구말을 들어... 서로 들 잘 났다고 싸우다 끝났대.당시에 조카 애들이 3명 모두 고교생 내지 중3 이었다 애들로 부터 혁혁한(?) 전투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었는데.... 당시에 무기고... 이런데 가 보면 지키는 사람도 없고..은행에 가봐도 아무도 없고.. 경찰서 파출소에 가 봐도 아무도 없었단다. 그리고 차량이 있으면 누가 운전 하느사람 없냐 하면 ...할줄 아는사람이 몰고 다녔대. 누가 지휘고 뭐고 우왕좌왕 오합 지졸이었대. 차량이 뒤집히고 ...벽에 부딛히고...누가 지휘를 한다해도 따를사람도 없고 아무튼 무법 천지 였다네 그런데 여기에 댓글 다는 사람들은 어떻게 무기고가 털렸냐고 자꾸 의문을 다는데... 무기고를 지키는 놈이 아무도 없는데... 마음 먹으면 초딩도 털수가 있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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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상록수 2013-06-24 오후 1:13 | 딱총알은 알바로, 여기서 기도 보냐,,?? 지금 민주당 놈들은 북의 주문대로 서울을 다시 한번 촛불!!로 발광을 하고 대학 총련놈들 동원해서 제2의 광우병 발광질을 획책하는데,
넌, 그렇게도 좋은거냐?? 박근혜OUT도 나왔더구만,, 이게 모두 북의 지령 아니냐,,?? 모르냐,,?? 원탁의 빨갱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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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ullet 2013-06-24 오후 12:39 | 아래 댓글을 보니 ㅎㅎㅎㅎ 댓글 단 사람들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모양이다.ㅎㅎㅎ 각양각색, 그러나 한결같이 <못 믿겠다>, 이 정도면 마치 집단 환각증세에 빠진 것 같다. 형여 누가 이걸 보고는 <조갑제 닷컴>은 죄다 이런 사람들만 모인 이상한 동네라고 오해할까 두렵다. 그러면서도 이제는 웃음이 터진다. 코미디 영화도 아니고 단체로 ㅋㅋ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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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TB 2013-06-24 오전 11:52 | 이 인터뷰는 의혹만 가중시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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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깨자 2013-06-24 오전 10:44 | "원천봉쇄"라는 말이 의문의 원천. 경적필패(輕敵必敗) 스스로를 볼 수 있어야 이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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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연그럴까 2013-06-24 오전 10:29 | 지난 수년간 조갑제닷컴을 접속하면서 많은 것을 접했고, 때로는 분노했고, 안타까와했고, 국가를 아끼는 그리고 수고하는 많은 분들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수많은 글을 접하면서 올라오는 글들에 대하여 대부분 수긍과 약간의 부정의 입장을 가졌었으나, 허나 이번에 이 제목의 글을 보면서는 글을 처음으로 댓글을 올릴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조대표님의 그간 많은 일을 존중하기에. 최근에 5.18사태에 대해서 더욱 이슈화가 되는 것은, 한마디로 단정할 수 없는 객관적이고 수많은 자료와 기록들이 있고 계속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각 개개인의 증언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사회적 공인으로서 국가를 사랑하는 사람의 대표적인 한 분으로서, 이런 일에 대하여 조대표님이 말하시는 기자의 정신을 가지고 기록을 살펴보시고 연구, 분석하여 조대표님의 의견을 다시 추려 내시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지박사님과의 의견대립이라던가 감정을 가지고 서로의 의견을 비판이 아닌, 오히려 두 분과 관계없는 전혀 다른 분의 수많은 시간을 통해 기록된 자료를 분석하여 만들어낸 “역사로서의 5.18(김대령)” 를 조대표님이나 이 글을 쓴 이지영기자님에게 필히 읽으시라고 부탁드립니다. 이기자님의 기사를 볼 때,,, 유병현님의 화려한 약력과 상훈기록을 그렇게 자세하게 기록해 놓으신 것은, 어떤 상품을 팔기 위해 유명 분을 마케팅 수단으로 곁들이는 것 같은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런 화려한 약력과 위치에 있던 우국지사의 말이니, 나(유병현)의 의견이 맞다라고...이런 글이 오라와 며칠간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것을 보면, 조대표님을 변호하고자 하는 기사로 여길 수 밖에 없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이 노신사님에게 또한 권합니다. 위에 추천한 책을 읽어보시라고요. 강호동이라는 인물이 수십년간 한국의 텔레비전 각종 방송이나 많은 미디어에 나오는 수 많은 공인들 중에 최초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무슨 최초?,,,,즉시 자신에 대한 잘못이 방송에서 드러나자 ”내가 잘못(탈세)했습니다” 그리고 행동했지요.대부분의 국민들은 손가락질이 아니고 오히려 인간의 어리석음을 인정하는 동조를 보냈지요. 이 이야기는 조대표님에게 반박이라가 잘못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위치의 저도 아니지만, 조대표님이 사회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의 위치에 있으시기에, 뒤로 발걸음을 갖으시고 다시금 의견을 내놓으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한 평범한 사람으로서 부탁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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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나다 방랑자 2013-06-24 오전 7:07 | 잘 모르는 일에 관하여 횡설수설하는 사람이 가장 보기 싫은 것이다. 광주 난동이 합리화되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잡것들의 허황된 주장질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아무것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의문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다만, 광주 깡패-사깃꾼들의 국기 문란 난동이 합리화 노력을 계속하는 그 근본 원인을 분명히 밝혀 내야 한다. 무슨, 빌어먹을 "민주화 운동"이라는 훈장은 당장 떼어 버리라. 유 장군이나 조갑제의 "광주 민란 옹호 발언"이 더이상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 광주놈들이 저희들의 면죄부를 만들려는 필사적인 이유를 설명하는 쪽이 오히려 정상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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