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LL - 김대중 정권 때부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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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구로 작성일13-08-05 18:13 조회3,482회 댓글2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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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정권 : 1998 ~ 2003. 2. 24
제1차 연평해전 : 1999. 6.15일
북괴의 '서해 해상 군사분계선' 일방적 주장 : 1999년 9월2일
북한은 ‘조선 서해해상 군사분계선’을 선포하고 NLL은 무효라고 주장하며 이 수역에 대해 자위권 행사를 하겠다고 주장.
김대중 방북 김정일과 정상 회담 : 2000.6.15
제2차 연평해전 : 2002. 6. 29일
김대중 한일 월드컵 구경 차 도일 : 2002. 6.30일
노무현 정권 : 2003 ~ 2008. 2. 24
노무현 방북 김정일과 정상회담 : 2007. 10. 4일
이명박 정권 : 2008 ~ 2013. 2. 24.
서해 천안함 폭침 : 2010. 3. 26일
서해 연평도 포격 : 2010. 11. 23일
1. 제1연평해전(第一延坪海戰)은 1999년 6월 15일에 일어난 대한민국 해군과 북괴군 간의 전투로 대한민국 해군이 승리한 해전이다. 북괴군 경비정이 연평도 서쪽 NLL을 2km 침범하여 일어났고 북괴군의 경비정 1척 침몰, 5척 파손, 사상자 50(전사 20, 부상 30)여명이 발생하였다. 같은 해 7월 3일, 공식적으로 연평해전이라 명명되었다.
1차연평해전댱시 NLL상 해군 작전예규는
경고방송과 퇴각요구 -> 경고사격 ->위협사격 -> 격파사격 이었다
1차연평해전을 개기로 변경된 교전수칙은 '김대중 4대 교전수칙'
북방한계선(NLL)사수 -> 선제사격 금지 -> 적 발포시 교전규칙에 따른 격퇴 -> 확전방지 에 따라경고방송-시위기동-차단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 으로 변경된다
1999년 6월 6일부터 조선인민군 해군 경비정이 매일 북방한계선을 침범, 몇 시간씩 한국 영해에 머물면서 반응을 살피고 돌아갔다.
1999년 6월 15일, 조선인민군 해군 경비정의 반복되는 북방한계선 침범 행위가 9일째 되는 날인 오전, 조선인민군 해군 경비정 4척이 어선 20척과 함께 북방한계선 남쪽 2㎞ 해역까지 내려왔다. 이에 대한민국 해군은 참수리급 고속정과 초계함 10여 척을 동원하여 해군 교전 수칙에 따라 경고 방송을 했다.
오전 8시 45분, 조선인민군 해군 경비정 7척, 대한민국 해군 고속정에 접근하여 충돌 공격을 감행했다.
오전 9시 7분, 대한민국 해군 1차 '밀어내기' 경고 실행
오전 9시 20분, 2차 밀어내기' 경고 실행
오전 9시 28분, 조선인민군 해군 경비정 684호는 25㎜ 기관포로 공격을 가해 왔으며, 어뢰정 3척도 가담하였다. 684호는 대한민국 해군의 참수리급 고속정, 포항급 초계함의 반격으로 반파되어 퇴각하였다.
이날 교전에서 참수리급 고속정 325호의 정장 안지영 대위를 비롯한 장병 7명이 부상당해 국군수도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다. 이에 반해 북괴는 어뢰정 1척 침몰, 경비정 1척 반파, 3척 파손되었고 5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위와 같이 북괴는 자신들에 우호적인 김대중 정권 때 '제1차 연평해전'을 일으켜 김대중의 대응방침을 확인해 봄 - 김대중이는 북괴가 설마 자신의 임기 내 대한민국을 침범하리라 예상을 못하였으나, 우리의 용감한 박정성 제독을 위시한 해군이 북괴군을 격침
그러나 북괴는 대한민국에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였고 이에 따라 김대중은 당시 교전을 지휘한 해군 제 2 함대의 사령관이던 박정성 제독을 2함대사령관 보직만료 후 인사주기가 맞지않는다는 이유로 참모총장 특별보좌관에 임시보직으로 좌천시킨 후 해군본부의 군수참모부장과 정보작전참모부장을 거쳐 해군군수사령관을 최종적으로 지낸 뒤 2004년 4월 소장으로 예편시켰다.
박제독은 자신이 보직을 옮긴 것은 당시 김대중 정부가 북한의 요구를 수용하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또한, 지난 10년간 이른바 ‘햇볕정책’ 때문에 연평해전이 왜곡된 평가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박제독은 “당시 선제사격 금지 등의 지시로 우리의 손발은 완전히 묶였었다”며 “맞고 나서야 대응하라는 것으로, 우리는 웅크린 상태에서 죽을 고생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2. 북괴는 자신들이 먼저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하였으나 오히려 김대중이가 북괴군을 용감히 침몰시킨 박정성 제독을 좌천 시킨데 용기를 얻어 '서해 해상 군사분계선'을 일방적으로 선포를 하게 됩니다.(1999.9.2일)
3. 김대중 방북, 김정일과 정상회담 : 이 때 두 사람 간 차안에서 무슨 밀담을 나눤지 아무도 모릅니다.(2000. 6.15) - 이 때 NLL 문제에 대해 얘기를 나눈 건 아닐까요?
김대중은 2000년 6월 13일 오전 10시 27분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김정일이 공항에 마중을 나왔다. 국가원수가 공항까지 영접을 나온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의장대 사열을 마치자 김대중은 김정일의 리무진 승용차의 오른쪽에 탔고, 김정일이 왼 쪽에 탔다.
첫 만남이 곧바로 '차내 정상회담'으로 이어진 셈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수많은 국민들에 의해 빨갱이로 의심받아온 사람이, 대한민국을 끝없이 괴롭히고 전복시키려 한 적장의 차에 올라 50분간 지휘의 공백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나 법률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그래서 단 둘이서 무슨 밀담을 나누었을까 하는 의문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4.제2차 연평해전 :
제2연평해전은 2002년 한·일월드컵 대회의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둔 6월29일 오전 10시25분께, 서해 NLL을 침범해 남쪽 3마일 지점까지 내려온 북한군 경비정 2척이 우리 해군 고속정 참수리 357호를 기습적으로 공격하며 벌어졌다..
1999년 6월15일 제1연평해전이 벌어진 지 3년 만이었다. 우리가 북한의 어뢰정 1척을 침몰시키고 중형 경비정 2척을 대파한 제1연평해전과 달리, 제2연평해전에서는 우리 해군의 피해가 더 컸다. 2008년 4월 전사장병 유가족 등의 주장을 받아들여 제2연평해전으로 명칭을 바꾸기 전까지 이를 ‘서해교전’으로 부른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교전’이 남북간 무력충돌 사실만을 뜻하는 중립적 명칭이라면, ‘해전’은 승전의 의미까지 포함한다. 두차례의 연평해전은 모두 남북간에 수십년 동안 실질적인 해상 경계선으로 기능해왔던 NLL을 일방적으로 무력화하려는 북한의 도발에서 비롯했다.
이 교전으로 한국 해군 윤영하 소령, 한상국 중사,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6명이 전사하였으며, 18명이 부상하였다
“그때 NLL 해상에서 우리 젊은 군인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했다. 그들이 타고 있던 고속정은 침몰당했다. 모두 29명의 군인이 탄 배에서 24명이 죽거나 다치고 배까지 가라앉았다면, 그건 전멸이나 마찬가지다. 대참사였다.”
2001년부터 2002년 10월까지 국군 제5679부대장을 지낸 한철용(67·육사 26기) 예비역 육군소장은 제2연평해전 때 우리 해군 피해가 컸던 이유와 관련해 “우리 군 수뇌부가 북한군의 명백한 도발 정보를 두 차례 모두 묵살한 것이 결정적이었다”고 밝혔다
5679부대는 대북 통신감청을 전담하는 정보부대로 제2연평해전이 일어나기 전이었던 6월13일과 27일 ‘발포명령만 내리면 바로 발포하겠다’ 등 내용의 북한군 감청 정보를 연합사 등에 보냈다
“국방부와 한미연합사가 우리 부대의 북한군 도발 정보를 두차례 모두 묵살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국방부가 우리 부대의 정보를 주요하게 받아들여 해군과 적절한 대응 방안을 마련했더라면 우리 고속정이 NLL 남쪽 해상에서 평상시 교전규칙대로 차단 기동에 나섰다가 적의 기습공격을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당시 김대중 정부가 추진하던 대북 햇볕정책의 영향으로 국방부는 연합사 미군 쪽에 민감한 대북 군사정보를 건네지 않는 분위기였다. 우리 군의 그런 태도를 눈치챈 미군도 군사위성이나 유(U)-2 정찰기 등을 통해 수집한 항공사진 등 주요 군사정보를 우리 쪽에 제공하지 않았다.
김동신 국방부 장관이나 ooo 부사령관 모두 김대중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들이다. 햇볕정책이라는 시류에 편승한 측면이 있다.”
“내가 5679부대장으로 부임했을 때 국방부 등 군 지휘부 전체의 분위기가 그랬다. 정보 부서에서 북한군의 민감한 군사동향을 보고하면 이를 격려해야 할 지휘관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런 거 말고 뭐 좀 좋은 거 없느냐’고 반문하곤 했다. 청와대에 보고할 만한, 햇볕정책 추진의 성과를 보여줄 수 있는 북한 정보가 없냐는 뜻이었다.
이를테면 북한군의 훈련 축소 등에 관한 정보가 여기에 속했다. 우리 군의 이런 평화무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주한미군 쪽에 대북 군사정보에 대해 보안을 유지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서해교전은 명백히 의도적 도발이었지만, 충분히 막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대북 통신감청 정보를 총괄하는 5679부대장 한철용 육군 소장이 2002년 6월13일 이미 북한의 도발 가능성을 경고하는 정보보고를 올렸지만 상부에서 의도적으로 무시했습니다.
그해 10월 제가 정보본부장에 취임한 후 당시 관련 비밀자료를 보니 한철용 소장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이 어떻게 한국 정부를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 후 노무현 정부에 와서는 한-미 간 정보교류가 사실상 단절됐습니다.”(김충배 예비역 중장, <월간조선> 2008년 12월호, 353쪽)
김 중장이 말한 ‘이런 상황’이란 ooo 당시 연합사 부사령관이 북한군의 명백한 도발 징후를 포착하고서도 관련 정보를 미군 쪽과 일절 공유하지 않은 상황 등을 가리킨다.
대북 햇볕정책의 틀 속에서 남북 관계를 관리하고자 했던 김대중 정부와 대북 감시태세를 늦추지 않던 주한미군의 입장이 엇갈리다 보니 한-미 간 군사정보 교류가 끊겼고, 제2연평해전 직전 북한군 도발징후에 관한 ooo 부사령관의 ‘대미보안’도 이런 맥락에 놓여 있다는 지적이었다.
이에 대해 군 검찰부장 출신 최강욱 변호사는 “국가안보를 책임져야 할 군인이 정부의 대북정책을 핑계삼아 자신의 안이한 대응을 합리화하려는 것은 비겁한 짓”이라고 지적했다.
한철용 소장은 김동신 전 국방장관 등 제2연평해전 당시 우리 군 지휘부가 북한군 도발 정보를 무시한 것을 2002년 10월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 폭로했다. 한 소장은 국정감사에서 “서해교전(제2연평해전) 직전 북한의 도발 가능성을 경고하는 정보보고서를 올렸으나
당시 군 수뇌부가 이를 묵살하고 ‘단순침범’으로 보고하도록 했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국방부는 국감 직후인 10월22일 군인징계위원회 의결을 통해 그에게 정직 1개월의 처분을 내렸다.
5. 김대중, 일본으로 날아 가 한일 월드컵 관람
제2차연평해전으로 국군장병들이 서해에서 피를흘리며 순국할 때 당시 대통령이던 김대중은 일본에 가서 일왕과 함께 한일월드컵을 구경하고 있었다.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도 마찬가지였다. 북괴 해군이 NLL을 무단으로 넘어 우리군함과 우리해군을 공격하였는데도 말이다.
6. 노무현 방북, 김정일과 정상회담 :NLL 포기냐 자진 상납이냐?
NLL에 대해 "쌍방이 다 법을 포기한다" "예, 좋습니다"
노무현은 김정일이 김대중 때부터 추진하던 NlL무력화에 대하여 김정일과 호흡이 척척 맞게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7. 이명박의 중도 정권
안보관이 확립되지 않고 군 미필인, 겁많은 장사치 이명박은 대내적으로는 중도정부를 표방하여 김대중, 노무현의 좌파, 좌익, 야당 정권의 불법, 비리, 부패를 단죄하지 않은 결과, 그들로부터 오히려 대선불복종 운동의 하나인 '광우병 촛불' 파동을 격으며 정권 초부터 원동력을 상실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천안함 폭침을 당하고도 북괴에 대한 원점 보복 공격을 감행치 않아 또다시 연평도 포격을 당하여 국민들로부터 겁많은 쥐박이라는 모욕과 외면을 당하고, 북괴의 간을 키워준 장본인임.
결론
이상과 같이 김대중 정권 때 부터 NLL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김대중의 햇볕정책과 사상을 이어 받은 노무현이도 김정일에게 NLL 포기(?)하겠다고 주장을 하니 마침 북괴는 잘되었다 싶어 이명박 정권 때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을 가하는 등 계속적으로 NLL무력화에 혈안이 돼 가고 있는 것입니다.
김대중 정권의 제1, 2연평해전 때 북괴의 도발에 단호하게 대응을 하고, 공을 세운 장병들에 예우를 해줬다면, 더 이상 북괴의 서해, NLL 도발은 없었을 것이고, 노무현이와 김정일의 NLL 포기(?) 발언도 애초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명박이 천안함 폭침 때 원점 보복 공격을 단행하였다면 연평도 포격은 없었을 것입니다.
박근혜 정부는 전 정권을 거울 삼아 좌,우 중도정부를 표방하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좌파, 좌익,북괴의 도발에 단호하게 대처를 하여야 북괴가 더 이상 대한민국과 국민을 침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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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람님의 댓글
한가람 작성일슨상은 여적죄인... 사형감.
뉴클리어님의 댓글
뉴클리어 작성일
일본에 독도팔아쳐먹고 중국에 이어도 팔아쳐먹고
대구와서는 박정희기념관 짓는다해놓고
여론이 어쩌네하면서 지놈 기념관만 거대하게 지어놓은
사기꾼중의 사기꾼. 매국노중의 매국노.
이명박정권때 천벌을 받아 뒈진게 아닌가 싶습니다.
공중점프한 인간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