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평화공원에 모셔진 폭도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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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비바람 작성일13-07-28 23:23 조회3,41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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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선 씨는 1928년생 우도출신으로 경찰 경위로 퇴직하여 서귀포시에 거주하고 있다, 2011년에 김덕선 씨는 4.3실무위원회의 실무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 해 3월 20일, 김 씨는 4.3 실무위원회 회의 참석 차 봉개동에 있는 4.3평화공원을 찾게 되었다, 4.3평화공원을 둘러보던 김덕선 씨는 위패 봉안소에서 뜻밖의 이름을 발견하고 몸서리를 쳤다,
평생 잊지 못했던 이름, 김덕선은 보무도 당당하게 희생자로 올려진 '김진태'라는 이름을 보자, 김덕선의 뇌리에는 60여 년 전의 사건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그가 겪었던 '북촌포구사건'은 4.3이 발발하고 두 달 후에 벌어졌다, 당시 제주농업학교 4학년으로 21살이던 김덕선은 4.3 때문에 휴교했던 학교가 개학을 하자, 고향인 우도에서 제주읍으로 가는 배를 타게 되었다,
배에는 우도지서 양태수 경사, 진 순경, 이장 김응석, 지서 급사 양남수, 강 순경의 장모, 백 순경의 임신한 처와 4살 난 아들, 우도초등학교 김 선생 등 모두 15명이 타고 있었다, 우도에서 제주읍으로 가던 중 배가 북촌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풍랑이 거세어져 항해가 곤란할 정도였다, 그래서 잠시 북촌 포구로 피난했다가 가기로 하고 배는 북촌포구로 들어섰다,
4.3초기 북촌은 가장 강력한 좌익 세를 자랑하던 마을이었다, 4.3 당시 북촌 마을을 지나던 군경들은 번번이 인민유격대에게 습격당했고, 군경의 보복으로 하룻밤에 많은 인명피해는 내기도 했던 마을이었다,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춘'의 무대가 바로 이 마을이었다,
배가 북촌포구에 닿자 밀짚모자에 갈베옷을 입은 청년 3명이 다가왔다, 김덕선은 향보단이 임검하러 오는 것으로 착각했다, 그리고 순순히 우도에서 지서 주임과 지서 쌀을 가지러 읍내로 가는 배라고 말했다, 그들 중 2명이 임검하겠다고 배에 올라와 양 경사가 있는 선실로 내려갔다, 이 두 명 중 한 명이 바로 '김진태'였다, 잠시 후 선실에서 격투소리와 함께 총소리가 울렸다,
선실로 내려간 두 명은 양 경사와 진 순경의 총을 뺏으려 달려들었고, 격투 중에 총이 발사된 것이었다, 총알은 배바닥을 뚫었고, 포구에 있던 폭도는 총소리를 들고 배에 올라와 권총으로 양 경사와 진 순경을 쏘아 살해했다, 배는 점령당했다, 김진태는 김덕선의 얼굴을 발로 걷어찼고, 김덕선은 배 밖 바다로 굴러 떨어졌다, 20여 명의 쳥년들이 몰려와 배에 있던 사람들을 포박하고 주먹질을 했다, 그리고 벌건 대낮에 그들은 산으로 끌려갔다,
배에 있던 물건들은 약탈당했고, 그 때까지 숨이 붙어있던 진 순경도 산으로 끌려왔다, 총을 맞은 진 순경은 극심한 고통과 갈증으로 물을 달라고 사정했다, 폭도들은 물을 주겠다고 하더니 결국 김덕선과 양 순경이 보는 앞에서 진 순경의 등을 죽창으로 마구 찔러 살해했다, 김덕선이 김진태라는 이름을 안 것은 폭도들의 아지트에서 하룻밤을 자고 난 후였다,
김덕선의 눈가가 붉게 멍든 것을 보고 김진태는 왜 그렇게 됐느냐고 물었고, 김덕선은 선생님이 발로 찼다고 대답했다, 김진태는 계란을 갖고 오도록 지시하여 김덕선에게 주자 김덕선은 '선생님의 이름'을 물었다, 그러자 그는 '나는 김진태'라고 대답했다, 폭도들은 배에 탔던 사람들을 조사했고, 전부가 경찰이거나 경찰관의 가족임을 알아냈다, 그리고 이들은 전부 인민재판에 회부되었고, 전원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리고 우도지서 일행과 경찰 가족들이 폭도들에게 납치되어 선흘곳 아지트에 감금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경찰과 경비대는 합동작전으로 폭도들의 연대본부를 공격했다, 이때가 김덕선 일행이 사형이 집행되기 몇 시간 전이었다, 폭도들이 습격을 받고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일행은 구출되었고 김덕선과 양남수는 탈출하여, 전원 무사히 생환할 수 있었다,
김덕선과 양남수가 탈출하여 도착한 곳은 함덕지서였다, 함덕지서에서는 기진맥진한 김덕선을 앞세워 다시 선흘곳으로 출동했다, 자정 무렵 선흘곳의 절에서 폭도 1명을 생포했다, 그리고 그 폭도를 심문하여 북촌 마을에 있는 폭도 아지트를 알아내었다, 이튿날 경찰서 지원 아래 북촌마을 굴 안에서 폭도 6명을 생포할 수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김진태'였다, 김진태는 폭도임을 완강히 잡아떼다가 김덕선이 나타나자 고개를 떨구었다,
김진태는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4.3평화공원에서 김진태의 위패를 보는 순간 김덕선의 눈앞에는 총을 맞고 죽어가던 양 경사와 죽창에 무수히 찔리던 진 순경의 모습이 스쳐갔다, 김덕선의 눈에 눈물이 흘렀다, 김덕선은 산으로 끌려가 사형선고를 받고 생을 포기하는 사태까지 갔었다, 그리고 김덕선은 분노가 치밀었다,
김덕선은 '경찰을 죽인 폭도는 위패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4.3위원들과 4.3지원소 관계자는 '희생자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재논의할 수 없다'는 대답만 되풀이 했다, 김덕선은 '죽인 사람, 살인자'를 추모하도록 하는 것에 대해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김덕선 씨는 북촌포구에서 그들에게 다가왔던 과한들을 자기편으로 알았다, 아마도 김덕선 위원이 그 4.3위원들과 4.3관계자들에 둘러싸여 있는 상황은 60여 년 전의 북촌포구 상황과 비슷하다, 자기편이 아니었다, 김덕선 위원에 의하면 10명의 위원 중 4.3을 공산폭동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1명뿐이라고 했다, 그 한 명이 김덕선 위원이었다, 제주4.3상황이 이런 상황이니 폭도들을 추모하자는 것이 아닌가, 빨갱이 박멸하자는 시대는 어디 가고 이제는 빨갱이에게 절하는 세상이 되었는가,
*이글은 제주자유수호협의회 발행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에 나온
김덕선 씨의 증언을 참조하여 쓴 글이다.
비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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