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특수군 600명 팩트로 연관된 기록들 - 지박사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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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빵구 작성일13-07-09 22:06 조회3,984회 댓글2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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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박사님께서 북한특수군 600명의 기록물을 하나 하나 낱낱이 발표하고 있습니다.
이 발표야 말로 누구도 부인을 하지 못하는 기록이고, 또 당사자들 입으로 떠든 것이라 왜곡도 할수가 없습니다.
이 팩트로 원인과 결과를 따진다면, 팩트에 의한 결과를 기록으로 따져서 밝힌다면 북한 특수군 600명은 5월18일 새벽부터 활동을 하였음을 알수가 있습니다.
먼저, 공수부대 대대장 으로서 도청에서 마지막 철수한 분은, 공수부대가 철수한 이후 도청을 바로 접수한 이들은 광주공원에서 온 무장시위대 500명이라고 진술을 한 기록을 찾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공수부대 지휘관들은 연고대생 600명에 대하여서는 알수가 없는 상황이어서 그런 언급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들 광주공원에 있던 시위대는 바로 연고대생 600명의 일원이었습니다.
그 근거는 5월18일 오후2시 25분경 유동삼거리와 광주공원에서 각각 학생 300명이 시위를 했다고 한 기록 입니다. 그 기록에서 수상한 점은 바로 다른 시간대의 모든 시위에 대한 기록은 폭력이나 어떤 행동이 수반이 되어 있지만, 그 시간대의 광주공원 시위대와 유동3거리 시위대는 시위를 했다고만 하는 기록이 있을뿐이지 그들이 폭력을 행사했다거나 다른 특이한 행동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는 점 입니다.
왜 이들 각각 300명씩은 아무런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시위만 했을까? 왜 이들 300명씩의 시위대 시위 전후의 시위는 각종 폭력을 수반했을까? 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이는 바로 이들이 연고대생 600명으로서, 단체행동 개시를 시작하기 전에 점호 비슷한 행사를 한 것이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대의 이들 600명은 새벽부터 퍼트린 유언비언의 효과와 앞으로 행동 지침을 내린것으로 봐야 틀림이 없습니다.
이들 600명이 시위를 한 시간 전후로는 화염병과 투석 그리고 극렬시위가 있었고, 시위대 뒤에는 항상 유언비어를 살포하는 별동대가 있었다는 점, 그리고 전남도청을 바로 접수한 시위대가 광주공원에서 온 시위대라는 점을 봤을때는 광주공원에서 시위를 했던 300명이 바로 연고대생들이었다고 할 것 입니다.
모든 기록들을 샅샅이 뒤지고 있지만, 5월18일 그날엔 연고대생 이야기를 언급하거나 할 상황이 아니어서 쉽지는 않지만, 반드시 찾아 내겠습니다. 5월 18일 새벽부터 유언비언을 살포하고, 21일 도청을 접수한 그 무리들이 바로 연고대생들이었고, 실체는 북괴군들이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은 아마도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으로 봅니다.
다시 한번 정리를 한다면, 결국 연고대생 600명은 5월18일 새벽부터 행동을 했었고, 이들이 5월18일 광주에서 행동을 개시 했다는 사실은 이들이 이미 4월말이나 5월초순부터 광주일원에 침투해 있었다는 계획적인 북괴의 공작이 있었다는 점이지요.
지박사님의 노력의 결실로 국론통일이 이루어지고, 518을 팔아서 대통령까지 해먹고 그 밑으로 국회의원 고관대작을 줄줄이 해먹고, 그 통속들은 각종 잇권을 독점해서 치부한 무리들이 반드시 응징이 되길 바랍니다.
더러운 역사가 깨끗하게 될때가 바로 우리가 제대로 살수 있는 그날이 아니겠습니까?
댓글목록
빵구님의 댓글
빵구 작성일그러니까 기록에는 21일 부터 나오지만, 실제로는 5월 18일 부터 활동을 했었다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은것이고, 5월18일 부터 활동을 했었다는 것은 이미 그 이전부터 많은 계획과 준비가 있었다는 이야기로서 군출신으로서 박사님께서는 많은 부분을 캐취하실수 있다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proview님의 댓글
proview 작성일더 추가적으로 말씀 드리고 싶은것은 600명의 특수부대가 20사단 차량을 탈취한 내용은 아시아 자동차에 가서 신뢰를 갖게끔 유도해서 장갑차를 포획하려는 작전도 있지만 더 추가해서 말씀 드리면 계엄군을 모략하기 위한 작전도 있다고 봐야 합니다 20사단 차량을 타고 다니면서 잔인한 행동을 하면 광주시민들에게 유언비어 효과를 더 먹혀 들어갔을 것입니다 이런 작전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