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 기자가 언급한 여간첩 용의자 전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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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사논객 작성일13-07-07 16:36 조회3,93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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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광주사태 16주년을 즈음하여 김영삼 정권 하에서 5.18측 입맛대로 5.18 재판이 진행되고 있었을 때 전옥주 미화 기사들이 일간지와
월간지에 뜨고 있었다. 부산에서 출발하여 5월 23일 광주에 도착한 조갑제 기자보다도 전옥주는 나흘이나 빨리 마산에서 출발하여 19일부터 이미
시민군 지도부와 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5.18측 기록상으로 시민군 지도부는 21일 등장하는 것이지만, 전옥주가 19일 자신이 시민군 지도부로
갔다고 말함으로 밝혀지는 사실이 있다. 19일의 시위주동자들과 21일 이후의 시민군 지도부는 같은 조직, 한 통속이었다. 시민군 홍보반 활동을
하였던 전옥주에게도 인식의 한계는 있다. 그녀의 용어에서 시민군 지도부와 시민군 홍보반은 동일어이다. 실제로는 시민군 지도부는 시민군 홍보반보다
훨씬 큰 조직이며, 시민군 최고 사령탑이 남한이 아닌 북한에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5월 21일부터 25일까지 어디서 누가 시민군 작전을
총지휘하였는지에 대한 목격자가 광주시민 중에도 시민군 중에도 아무도 없기에 시민군 본부 소재지는 여태껏 안개에 가려져 있다. 그럼에도 전옥주의
증언으로 한가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광주 해방구 설치 이전에도 이후에도 시민군 홍보반은 동일 조직이었다는 사실이다.
아래는 전옥주가 1980년 5월 19일 시민군 지도부로 간 사실을 보도하는 “ '5.18의 목소리' 전옥주씨의 삶 탐구”라는 제목 하의 1996년 4월 26일자 한겨레 기사이다.
오늘 (2013년 7월 6일)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을 무르시 대통령 축출 찬반 시위군중이 가득 메우고 있다. 이럴 때 외국인
여행자의 눈에 누가 대통령 지지 시위대이고 누가 강제 축출을 지지하는 시위대인지 육안으로 구별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광주에 해방구가
설치된 직후의 전남도청 내부가 이런 뒤죽박죽 현상이었다. 일반 학생들보다 나이가 많았던 두 명의 전남대 3학년생 김창길과 이재의가 도청 안에
있었다. 22일 아침에 도청에 들어온 김창길은 무장봉기 반대파였으며, 26일 저녁까지 도청에 머물며 무기를 반납시키려 혼신의 힘을 다했던
자였고, 왕년의 빨치산 세력과 연계되어 있던 이재의는 전력을 다해 무장봉기를 지원하다가 24일 아침 광주를 떠난 자였다.
김창길은 22일 민주적 절차에 의해 학생수습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던 자요, 이재의는 스스로 상황실장이 되었던 자였다. 후자는 자기가 가진
모든 정보를 북한세력과 공유하였다는 점에서 분명한 시민군이었다. 그러나 전자는 시민군이 아니었다. 만약 김창길과 그의 학생수습위원회를 시민군 및
시민군 지도부로 조갑제 기자가 오인하였던 것이라면 그의 인식은 처음부터 잘못되어 있었다.
시민수습위원회도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애국시민들이 주축이 되어 무기를 반납시키려 노력하던 그룹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왕년의 빨치산이
장악하고 위장명칭으로서 수습위원회 명칭을 사용하던 조직이었다. 오늘날 광주사태 33주년을 즈음하여 시민군 지도부 주변에 간첩들이 있었다는 견해와
간첩이 없었다는 견해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데, 그 이상으로 두 개의 시민수습위원회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오늘 이집트의 타흐리르
광장에서 두 시위대가 목숨을 걸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 이상으로 두 개의 시민수습위원회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수습위원회라는 명칭을
위장명칭으로 사용하던 종북세력이 있었고, 진정으로 무장폭동을 수습하러 애쓰는 광주시민들이 있었다. 도청 안에 있었으면 모두 시민군이었는가?
아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신념으로 도청에 들어가 수습 활동을 하던 애국시민들도 있었다.
무엇이 조갑제 기자의 주장의 문제점인가? 그는 전혀 이런 사실을 관찰하려 하지 않는다. 물론 도청 안에 김창길 같은 반공 시민들이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반공 시민들이었는가? 아니다. 간첩 조직에 연계되었거나 이용당하고 있는 주동자들 또한 분명 있었다.
조갑제 기자는 시민군 홍보반 주변에서 간첩들이 활동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전면 부정하는 진영의 대표 논객이며, 그는 그의 그런 주장의 근거로서
광주시민들이 간첩 용의자를 연행하여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로 인계한 사례를 든다. 여기서 조기자가 말하는 간첩 용의자는 광주시청 직원 이무길씨가
체포하여 26일 전교사로 데리고 간 전옥주를 일컫는다. 22일부터 광주시민들이 전옥주가 수상하다는 말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마침내 26일
전교사로 인계되었다.
조갑제 기자의 논리대로라면 광주시청 직원 이무길씨가 전옥주를 전교사로 인계하였으니 전옥주를 비롯한 시민군 홍보반 주변에서 간첩이 활약하였을
가능성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조기자가 광주시민들이 간첩 용의자로 보았다고 언급한 인물에 대하여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민군 홍보반을 옹호하는 쪽에서는 전옥주를 광주의 쟌다크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녀가 남파간첩이 아닌지 의심했던 시민들은 그녀의 선동적인 말씨와
권총모양의 열쇠고리 등을 수상하게 여겼다. 그런데, 광주시민으로서 동아일보 주재기자였던 김영택은 그녀가 ‘프락치’였을 것이라고 말하여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다. 김영택 기자가 전옥주를 프락치로 본 이유는 남동생 없는 여자가 자기 남동생이 죽었다고 방송하고, 처녀가 자기 남편과 아들이
죽었다며 시체 장사를 하고, 아직 미혼인 32세의 여성이 “두환아, 내 아들 내놔라!”고 울부짖으며 방화와 무장봉기를 선동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이요원이 착한 간호원 신애로 등장하는 전옥주는 김영택 기자의 눈에는 프락치로 보였던 것이며, 그래서 김영택
기자의 기사들에서 그녀가 프락치로 알려졌던 사실에 대하여 위의 한겨레 기사는 그녀가 한때 프락치로 의심받았다고 보도하는 것이다.
그러면 광주사태 33주년인 지금은 전옥주가 있지도 않는 남동생과남편과 아들 시체 장사를 한 것은 잘못이었다고 인정하는가? 아니다. 그녀는 자기는
시민군 지도부와 자기 사이에서 연락하는 누군가가 쪽지를 전해 주는 대로 방송하였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녀가 국장근씨 집에서 시민군 지도부와
처음 접선한 5월 19일은 시민군 지도부가 곡갱이로 도청 뒤담을 허물고 있던 날이었다. (주동자들이 곡갱이로 도청 뒷담을 허무는 것을 도와주었던
국창근은 훗날 1996년 5.18 재판 당시 국회의원으로 출세해 있었다.)
대부분의 광주시민은 5월 19일 시민군 지도부가 어디 있었는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며, 더구나 주동자들이 곡갱이로 도청 뒷담을 허물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전옥주는 19일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시민군 지도부가 있는 곳으로 직행하였으며, 국창근씨 집 물을 길어
갖다줌으로써 곡갱이로 뒷담 허무는 자들에게 일조하였다. 그 날의 시위 지휘부 작전에는 도청 뒷담 허물기가 그만큼 작전의 우선순위였다. 이것이
전춘심이 갑자기 전옥주라는 가명을 쓰며 시민군 가두방송 요원으로서 혜성같이 등장하게 된 사건의 발단이었던바, 김대령 저 “역사로서의 5.18”
127쪽은 그 과정을 이렇게 기록한다:
당시 도청 바로 뒤편에 살고 있던 국창근씨(현 국회의원)는 대문을 활짝 열어놓아 학생들은 그곳에서 물을 길어 시위대에 갖다주는 등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얼떨결에 나 역시 용무를 잊고 국씨집 대문을 드나들며 정신없이 시위대를 돕기에 이르렀고 거기서 나보다 먼저 팔을 걷어붙이고 오가는 차명숙(본명 김범해?당시 23세)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19일 밤 이후 검거될 때까지 줄곧 나와 행동을 함께 한 차명숙은 국민학교 2학년 중퇴자였으나 외모가 곱게 생겼을뿐 아니라 말도 조리가 있고 행동거지가 똑똑해 모두들 그녀의 말대로 전남대 영문과 2학년 재학생으로 알고 있었다). (김대령 2013, 127).
전옥주가 5월 19일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국창근씨 집 물을 길어 도청 뒷담쪽 시위대에게 갖다 준 사실을 남한에서는 언제부터 알게 되었는가? 그것은 신동아 김희경 기자가 1996년 전옥주와 인터뷰하여 그 사실을 “광주항쟁 가두 방송의 여인 전옥주의 충격 고백수기, 간첩조작 성고문도 버텨냈다”라는 제목의 5월호 기사로 게재한 후였다. 그것은 5.18 재판 판결의 가닥이 잡히고, 전옥주 찬미 기사들이 뜨던 때였다.
그러면 북한의 대남공작기관은 전옥주에 대한 그런 사실을 언제 파악하고 책으로 출판하였는가? 무려 11년이나 빠른 광주인민봉기 5주년 기념도서로서 1985년에 출판된 “광주의 분노” 41쪽은 이렇게 기록한다:
32살난 마산무용학교 녀교원 전옥주는 본가가 있는 광주에 왔다가 동생들이 참살당하는 데 분격하여 봉기에 참가하였다. 그는 초기에 봉기군중들에게 돌을 날라다 주고 물을 떠다 주었으나 어쩐지 그것으로 자기 할 일을 다 한 것 같지 않았다. 무엇을 하면 더 잘 싸울 수 있겠는가 하고 궁리하던 전옥주는 방송을 하면 군중에게 더 큰 힘을 주고 놈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안겨줄 수 있다는 생각에 미쳤다. 하여 전옥주는 방송원이 될 것을 자원하여 나섰다. 마산에 어린 자식들을 주고 있는 어머니였지만 광주 사람들, 아니 동족이 무참하게 살육 당하는데 언제 자식들 생각을 하랴 하면서 봉기자들의 대렬 속에 뛰여든 그였다. 전옥주는 확성기를 설치한 군용차를 타고 다니면서 열정적인 선동구호로 봉기군중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조선로동당출판사 1985, 41).
북한판 5.18 도서에서 전옥주가 이처럼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5월 19일 전옥주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조선로동당이 어떻게 이렇게 소상하게 알고 있을 수 있었겠는가? 전옥주가 가두방송하지 않은 사실, 그녀가 시민군 지도부라고 호칭하는 극소수의 인물들만 알고 있었을 사실을 북한 당국이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시위 주동자들이 그 날 곡갱이로 도청 뒷담을 허물고 있었을 때 그 패거리 중에 간첩이 끼어있었을 때에만 북한으로 넘어가는 것이 가능한 정보였다. 이토록 북한세력이 시위 초창기부터 깊이 깊숙되어 있었다는 것이 사실일진대, 왜 19일에 시위 주동자들이 도청 뒷담을 허물려고 시도하였으며 누가 왜 그런 파괴 행동을 지원하였는지 5.18옹호론자의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19일 밤부터 시위군중 앞에 혜성같이 등장한 전옥주에게 군중 대부분이 선동당하고 있었던 와중에도 지각있는 광주시민들은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채고 있었으며, 그런 낌새가 타당하다는 것이 북한 자료들로 충분히 입증된다. 간첩들이 시민군 홍보반 아주 가까이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럴진대, 광주사태 당시 간첩들이 활동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전면 부정하는 조갑제 기자의 주장은 무모한 흑백논리이다.
조갑제 기자는 광주시민(시청직원 이무길)이 간첩 용의자(전옥주)를 전교사로 인계한 사례를 들며 간첩이 광주에 침투해 있었을 가능성을 일축하지만, 이무길씨는 시민군 홍보반이 아니라 시민군과 싸우는 입장에 있던 시청 직원이었다. 간첩들이 시민군 홍보반 주변에 있다는 낌새를 알아챈 시민들이 있었다.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견해를 묵살해야 하는가? 현장에서 그런 낌새를 느꼈던 광주시민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 보아야 하지 아니하겠는가?
탈북자들은 그들이 북한에서 읽은 5.18홍보물들에 대하여 증언하는데 조갑제 기자는 탈북자들의 말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 도대체 조기자가 전옥주에 대하여 아는 바가 무엇인가? 시위 주동자들이 곡갱이로 도청 뒷담을 허물고 있던 날 전옥주가 국창근씨 집 물을 길어 도청 뒷담쪽 시위대에게 갖다준 사실에 대하여 북한 기록이 정확하다. 이것이 전옥주 본인의 입으로 말하는 사실이며, 남한측 보도기사 자료들이 재삼 재사 확인하여 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전옥주 본인도 그렇게 말하고, 북한측 자료와 남한측 자료가 정확하게 일치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 객관성을 인정해 주어야 하지 아니하겠는가? 이것이 조기자가 그의 흑백논리로 무조건 전면부정한다고 부정될 수 있는 사실인가? 무모한 흑백논리로 객관적 진실을 억압하는 것이 기자의 일인가?
2013년 7월 6일 역사학도
간첩과 황석영이 공저한 5.18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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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환의 K-Talk] 이주천 : 역사로서의 5-18 제1권을 읽고
http://www.youtube.com/watch?v=vxZeJ62SaBM
신간도서 “역사로서의 5.18 유튜브 동영상”
http://www.youtube.com/watch?v=oIHYFgmEyUw
5.18 재판 도중 있었던 두 기이한 사건
http://cafe.daum.net/issue21/3IBb/797
<김동문의 세상바로잡기>와 함께 역사바로알기 여행 "역사로서의 5.18" 신간 역사도서 편
https://www.facebook.com/photo.php?v=471566976271485
탈북군인 김명국씨의 증언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계엄군 김응래의 증언
http://cafe.daum.net/issue21/3IBb/790
북한의 첫 5.18 영화 ‘광주는 부른다’
http://cafe.daum.net/issue21/3IBb/784
"5.18 역사책 - 역사로서의 5.18을 읽고"
http://blog.naver.com/rrfv0506/60192769288
"시민군은 무장폭도임을 입증한 조갑제의 책”
http://cafe.daum.net/issue21/3IBb/780
"강운태와 조갑제의 광주폭동 옹호론"
http://cafe.daum.net/issue21/3IBb/777
"윤한봉의 위장구호에 낚인 인요한과 조갑제"
http://cafe.daum.net/issue21/3IBb/775
"조갑제 기자의 주장에 대한 반론"
http://cafe.daum.net/issue21/3IBb/7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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