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에서 연고대생들 활동시기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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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빵구 작성일13-07-06 22:42 조회3,74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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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518 진실규명에 대한 작업을 하면서 갖고 있는 한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518을 저지르고 기획하고 주동을 하고 현장을 뛰었던 사람들은 중요한 사실들은 다 감추고 파기했을 것이고, 부득이 그렇지 못한 경우는 무조건 부인을 하는 악다구니로 버티거나 왜곡을 하는 행위를 반복을 할 것인데, 이런 것을 뛰어 넘는 것은 바로 객관적인 자료를 많이 확보하고, 당사자들의 모순된 주장을 반복적으로 연구해서 꼬투리까지 잡아내는 것입니다.
외신기자들 사진과 기록, 동영상, 518측의 반복적인 선전물, 수사기록과 계엄일지등을 계속 대조를 해보면, 518 연고대생들은 518일 새벽부터 활동을 했고, 19일 부터는 머리띠와 목도리 비표시를 시작했고, 20일 부터는 복면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외신 기자들의 취재 동영상을 보면 명백하게 드러나 있고, 518측에서 30년 동안 울거먹은 동영상이나 사진을 돋보기로 들여다 보면 명확하게 드러나 있기에 절대로 부인을 할수가 없습니다.
아쉽게 5월18일은 동영상이 많이 없고 뉴스자료만 있는데, 뉴스자료는 수사기록과 일치를 합니다.
명백하게 5월18일 새벽부터 화려한 휴가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트리기 시작하는게 바로 연고대생들이었고, 그날 광주공원에서 시위를 했던 집단이 바로 연고대생들이었고, 광주공원에 있던 시위대가 도청을 바로 접수했다는 공수부대 지휘관들의 무심한 진술이 증명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공수부대 지휘관들은 계획적인 폭동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그냥 눈으로 본 사실을 무심하게 진술하고 있지만, 연고대생에 대한 자료만 갖고 집념을 갖고 보는 시각에는 바로 "아, 그게 바로 연고대생 들이었구나 " 하고 감을 잡고 파고 들어 확인을 하는 겁니다.
공수부대가 도청에서 철수를 하면서 지휘관들은 도청을 바로 접수하는 집단은 광주공원에 있던 시민군 500명이었고, 이미 무장을 하고 들이 닥쳤다는 것을 무심히 진술을 하였지만, 바로 그 광주공원이 연고대생들의 상황실이었고 작전본부였다는 것을 구글 지도를 보면 확인이 됩니다.
명백하게 5월18일 새벽부터 유언비어를 퍼트리기 시작을 한 일당들이 연고대생들이었고, 19일엔 머리띠와 목도리로 20일 부터는 복면과 머리띠와 목도리로 구분을 하는 비표시를 하고 작전을 하였기에, 이들은 이미 5월 18일 이전에 광주에 잠입을 했다는 결론을 내릴수가 있는 것이고, 이는 바로 518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연대생과 고대생으로 나누었는데, 역사학도님 자료에 의하면 22일 도청앞에서 환영대회를 한 집단은 고대생들로 원산에서 출발한 집단과 일정이 딱 맞아 떨어집니다.
물론 연대생들은 북괴서해안쪽에서 출발을 한 다른 부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더 조사가 필요한 부분인데, 탈북군인들이 많이 알고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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