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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펌]김대중의 분탕질과 전두환의 등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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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홍팍퇴치 작성일13-06-12 22:30 조회3,8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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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2월 24일 전두환은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과 이학봉 대공처장에게

 

“김대중을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주선해 달라”

 

는 지시를 내렸다. 이학봉은 나중에 검찰 조사에서 그 배경을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전 장군은 김대중씨가 곧 사면 복권될 예정인데 김대중에게 정치를 재개하면서 사회 소란 행위를 하지 말고 시국안정에 협조를 구하기 위해 만난다고 했습니다.

제가「김영삼, 김종필 총재도 만날 것이냐」고 물었더니

소요사태를 일으킬 우려가 있는 김대중만 만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김대중만 만나면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우려가 있다」면서 반대했습니다. 권정달 정보처장도 제 의견에 동조하여 전 장군은 약속장소에 나가지 않고 저와 권정달 처장만 나가게 한 것입니다.

 

이학봉은 평소 알고 지내던 김대중 계의 이용희 의원에게 말하여 자리를 마련했다.

 

2월 26일 김대중과 권정달 이학봉은 보안사령부 安家에서 1시간 30분 정도 회동했다.

 

이학봉은 전두환의 불참을 사과하고 김대중의 대중경제론과 동경 납치 사건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이학봉은 김대중에게 사면복권 후 사회 혼란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쓸 것을 요구했으나 김은 거절했다.

 

그럼에도 그 직후, 정부 각료들은 모두 김대중의 사면 복권에 반대했으나 전두환의 요구에 따라 사면복권이 확정되었다(전두환이 김대중을 사면․복권시키면 정치를 재개하면서 사회혼란을 유발할 것이라고 우려를 하면서도, 사면복권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결과를 볼 때 김대중이 야권을 분열시키고 장외정치활동을 전개할 것으로 예상하고, 이를 빌미로 군부 집권의 명분으로 삼으려 했기 때문인 것 같다. 김대중의 활동을 살펴보면 느끼겠지만 대개는 상대방의 집권이나 재집권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전두환은 1987년에도 김대중을 사면 복권시켜 야권분열을 재차 유도하였다).

 

1980년 2월 29일 최규하 정부는 김대중을 포함한 6백87명을 3월 1일자로 복권시켰다.

이중 학생이 373명이었다. 김대중과 함께 윤보선 전 대통령, 정일형 전 국회의원 등 정치인 22명, 지학순 주교, 함세웅 신부, 문익환 목사 등 종교인 42명, 백낙청, 이영희, 김동길 교수 등 교직자 24명, 언론인 9명, 기타 217명이었다(김대중은 사면복권이 안되었을 경우 1976년 명동사건의 판결에 따라 1981년 3월 10일까지 정치를 재개할 수 없었다).


김대중의 복권은 신민당 총재 김영삼과의 대통령 되기 경쟁의 시작을 의미했다.

전두환 일당이 예상하고 바라던 일이었다. 전두환도 3월 1일 소장에서 중장으로 승진하였다. 복권되자마자 김대중이 한 것은 김영삼 총재에 대한 비난이었다.

 

3월 1일 뉴욕 타임즈의 헨리 스코트 스톡스 기자와 동교동 자택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이날의 인터뷰를 뉴욕 타임즈는 3월 2일자로 보도했다.

“어제 복권된 반정부 지도자 김대중은 오늘(3월 1일) 김영삼이 그들 공동의 적인 박정희 대통령이 지난해 10월에 암살된 이후 신민당을 효율적으로 이끌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신민당의 김영삼 계보는 이에 즉각 반격을 내놓았다. 임시대변인 정재원 의원은 “김 총재의 헌신적인 민주화 투쟁으로 인해 김대중씨를 풀어준 공로에 대해선 일체의 언급을 않고 비난부터 시작한 것은 대통령 후보에만 집착하고 있는 저의로밖엔 볼 수 없다”고 공개 비난 성명을 냈다.

 

3월 6일 김영삼과 김대중은 남산에 있는 외교구락부에서 만났다.

오찬을 겸해 두 시간여 밀실회담을 한 후 “우리는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보다 민주회복이 더 시급한 문제라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하기 위해 범야세력의 대동단결에 노력하기로 했다”고 합의문을 발표했다(이 회담에서 김대중은 신민당에 입당한 바 없는 만큼 앞으로 재야인사들과 함께 협의한 후 정치적 거취를 결정하겠다는 주장을 했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1979년 5월 30일 총재로 선출된 직후 윤보선과 김대중을 신민당 상임고문으로 발표한 바 있다. 이것은 본인들로부터 승낙을 받아 발표한 것이었다. 김대중은 이것을 부인하고 입당한 적이 없다는 해괴한 주장을 했다).

 

1980년 3월 6일 충정부대장 회의에서「소요대비태세 훈련강화 및 출동태세유지」가 시달되었다(전두환 일당은 1980년 이른 봄부터 충정부대를 점검하면서 시위진압에 대비해 갔다). 한국군은 박 정권 시절부터「충정계획」이란 수도권 소요진압작전 시나리오를 갖고 있었다. 이 진압작전에 투입될 부대는 수도경비사령부, 특전사령부의 1․3․7․9 공수여단, 수도권의 20․26․30사단으로 지정돼 있었고 이들을 충정부대라 칭했다.

 

복권되자마자 김대중은 즉시 비서실, 기획실, 정책연구실 등을 두어 요직을 인선했다.

비서실장은 예춘호, 비서실 차장에 박종률, 기획실장에 김상현, 정책연구실장에 이문영, 대변인에 정대철, 부대변인에 이협을 임명했다. 또한 김대중은 신민당 의원에 대한 개별 포섭과 함께 재야인사를 중심으로 민주헌정동지회(회장 김종완, 79년 중반 발족. 1980년 1월 예춘호 김윤식 김종완 3인을 대표지도위원으로 조직 개편. 김대중계의 지방 조직을 되살리는 작업을 전담), 한국정치문화연구소(회장 김상현, 김상현이 주로 청년 정치지망생을 규합하여 80년 3월 조직), 민주연합청년동지회(회장 김홍일, 김대중의 장남 김홍일이 주로 학생운동 출신자를 중심으로 80년 3월 조직) 등 자신의 사조직을 전국적으로 구성해 나갔다.

 

신민당내의 세력 판도도 확연히 드러났다.

우선 의원 수에 있어서 당권파인 김영삼계와 비당권파인 김대중계는 팽팽하게 맞섰다. 스스로 중도임을 자청한 고흥문(高興門) 국회부의장 등 12명의 향배가 주목을 끌었다. 3월 12일 고흥문 국회부의장은 후보단일화를 위해 김대중 집을 찾았다. 아무도 배석하지 못하게 한 뒤 둘만이 마주 앉았다. 다음은 고흥문 씨의 대화 내용 술회이다.


고흥문 : 현재의 정국은 캄캄한 밤길을 걷는 것과 같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 어두움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이같은 어두움을 해결하는 길은 없겠는가?

김대중 : 민주적인 방법으로 국민이 원하는 야권후보를 하루 속히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흥문 : 당연하다. 그것만이 주변을 환하게 밝히는 태양과 같은 것이다. 내 생각에는 지난번(71년 대통령 선거)에 당신이 야당 단일후보로 나가서 차점으로 실패했으니 이번에는 김총재가 나가도록 하는 것이 어떤가? 야권의 단일 후보로 김총재를 내보내는 것이 의의가 있는 것 같다.

김대중 :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 JP에 맞서 이길 만한 사람이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동시에 출마해서 경쟁을 하다가 보면 판세가 드러날 것이다. 그러면 그때 가서 결정하면 되지 않겠는가?

고흥문 : 어떻게 판세를 비교한다는 것인가? 또 판세가 드러나면 어떻게 한다는 얘기인가?

김대중 : 집회나 유세 때 군중들이 얼마나 모여들고, 또 그들의 반응이 어떤지를 저쪽과 비교해 보면 된다. 그렇게 하다가 판세가 드러나면 선거 직전에 한쪽이 다른 한쪽 후보의 손을 들어주면 되지 않겠는가?

고흥문 : 그것이 어떻게 믿을 만한 척도가 된다는 것인가? 군중이란 으레껏 동원도 되는 것인데…

김대중 : 그렇지 않다. 충분히 비교될 수 있다.

고흥문 : 지금 여기저기서 당신을 중심으로 신당을 만든다는 소문이 많다. 창당해 버리거나 혹은 조직이 짜여지면 지구당위원장들의 입장도 있고 해서 후보를 사퇴할 수가 없다. 기회는 지금뿐이다. 이 시간이 지나면 서로가 후회하게 된다.

김대중 : 나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어쨌든 仁之(고흥문의 호)의 뜻은 충분히 알겠다.

 

2~3일 뒤 고흥문 국회부의장은 김영삼을 방문했다. 김대중을 만난 사실은 말하지 않고 대화했다. 고흥문씨의 회고.

 

고흥문 : 저쪽에서 끝까지 새당을 만들 작정인 모양인데 큰일이다. 야당이 이번의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정권 교체가 불가능하다.

김영삼 : 그래서 내가 김대중씨에게 (신민당에) 들어와서 표로서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겨루자고 하고 있지 않나?

고흥문 : 저쪽에서 입당을 포기하고 굳이 새당을 만든다면 당신이 대권도전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김영삼 : (침묵)

고흥문 :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말고 부인에게도 상의하지 말고 대권포기각서를 써서 갖고 있으라. 나도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 눈물을 머금고 써야 한다.

김영삼 : 내가 만약 후보를 포기한다면 김대중씨가 JP를 이긴다는 보장이 있는가? 절대로 이기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고흥문 : 그것은 얘기하지 말라. 일단 야당이 하나가 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닌가.

김영삼 : 그래서 내가 김대중씨한테 당에 들어와서 우선 야권을 단일화시킨 뒤에 후보문제를 결정하자는 것 아닌가. 지난번 대통령 선거 때도 그렇게 해서 김대중씨가 후보로 나선 것 아닌가?

 

고흥문씨는 이후 후보 단일화 설득을 포기했다.


3월 14일 최규하는 새 헌법의 정부 형태로 대통령 중심제와 의원 내각제의 절충형태인 이원집정부제가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시사하여 권좌에 머무르고 싶은 의사를 표현했다(이원 집정부제에서는 전두환에게 실권이 있더라도 명목적으로나마 대통령직 유지가 가능했다).

 

최규하 과도정부에서 전두환에 맞서 헌정을 수호하고, 무난히 민간 정부로 넘어가게 하기 위해 노력한 이는 신현확 국무총리였다. 확고한 소신이 있는 그는 내각을 장악하고 최규하 정부가 제 목소리를 내도록 노력했다. 이 때문에 80년 봄 이른바 안개정국에서는 이름뿐인 대통령인 최규하를 제치고 정부의 실력자인 신현확과 군의 실세인 전두환이 공모하여 집권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80년 5월의 대학생 가두시위에서 “전두환, 신현확 물러가라”는 구호는 빠지지 않았다.

 

3월 17일 김대중은 “崔정권은 강권정치를 다시 연출하려 하고 있다”며 최초로 과도정부를 비난했다.

3월 24일 김대중은 버나드 크리셔《뉴스위크》지 동경특파원과 인터뷰를 했다.

- 지금 김대중씨는 대학 캠퍼스 같은 곳에서 집회를 갖고 대중연설을 행할 수 있습니까?

『아마 지금으로 봐서는 내가 어떤 정책집회를 하고 싶더라도 첫째 장소를 빌리기가 어려울 것이고 집회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시도해 보지는 않았지만 허가를 해 줄 것인지가 회의적입니다. 도무지 그런 것을 생각해 볼 수 없는 환경에 처해 있습니다. 아까 언론 통제 얘기에서 나온 바와 같이 어려울 것이라고 봅니다.』

- 학생들이 당신을 캠퍼스로 초대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도 계엄령이 해제된 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계엄령 하에서 정치 활동은 특히 장외집회를 통한 정치 활동은 어느 나라나 제한하는 법이다. 이것을 김대중은 자신에 대한 정치탄압이라 몰아붙이고 있다.

이 인터뷰에서 김대중은 야당 분열을 매우 우려하는 것 같으나 행동은 달랐다. 또한 전두환 일당은 김대중의 장외 정치활동을 금지한 것이 아니라 조장했다. 이에 김대중은 강연을 통한 정치활동에 나섰다.

 

3월 26일 YWCA 강당에서「민족혼과 더불어」라는 제목으로 연설, 첫출발을 하였다. 강당을 가득 채우고 본관 2~4층 복도는 물론 마당까지 흘러넘친 9천여 청중들이 열광하는 가운데 상기된 모습으로 등장한 김대중은 1시간 40분 동안 떠들었다(이 연설은 나중에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재판에서 증거물로 제출됐다). 강연 내용을 보면 일종의 선거 유세라 할 수 있다. 김대중의 활동을 관찰하면 늘 이런 식으로 사전 선거운동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방조하면서 잘도 이용하는 세력도 있어 왔다. 김대중은 이 강연이 성공적이라 자평하고 그 내용을 책자를 만들어 배포했다.


이러한 가운데 야당후보 단일화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던 윤보선 전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그의 견해를 밝혔다.

時局혼미는 政治日程 不確實에서

地域對決하면 큰悲劇…候補는 반드시 單一化돼야

-무엇보다 지역감정이 유발된다면 큰일입니다.

『인물보다도 지역을 따져서 道와 道가 대결하는 선거가 된다면 큰 비극이지요. 南北으로 갈린 것도 천추의 恨인데 다시 東西로 편을 가른다는 것은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지역감정해소를 위해서도 野黨후보는 반드시 單一化가 돼야하고 또 單一化 경쟁에서 양보한 쪽은 勝者를 자기 일처럼 성심성의껏 도와야만 지역감정을 해소시킬수 있어요. 옛날에는 두 사람이 出馬했다가 인기가 없으면 한사람이 그만두고 합칠 수도 있지만 이번에는 좀 달라요. 지역대립 때문에 어느 한쪽이 그만두기는 퍽 어려워 질 겁니다.』

『5․16이후 내가 겪은 일과 내 처신에 대해서는 훗날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거외다. 그러나 두 차례 대통령에 출마해서 내가 당하고 느낀 選擧는 결코 잊을 수가 없어요. 우리나라에 참다운 민주주의가 정착하려면 공정하고 명랑한 선거분위기부터 이룩해야 해요. 野黨이 둘로 갈라서서 반쪽 반쪽이 나가서 다퉈보시오. 散票는 말할 것도 없고… 政權交替를 하려면 民主勢力은 어떻게든 하나로 뭉쳐야 돼요.』

<南仲九기자>

(동아일보 1980년 3월 31일자)

 

윤보선 전 대통령의 우려는 1987년에 현실이 되었다. 민족적 비극이 일어날 것이라는 그의 예언은 지금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그는 1987년에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은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며 야당 단일화 중재를 거부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재야 그룹은 70년대 유신시기 중 끊임없이 반유신 투쟁을 벌여 왔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국민연합의 공동의장으로서 재야의 구심역할을 해왔다.

그는 80년 들어 야당의 후보 단일화에 노력해왔으며 김영삼과 김대중도 윤 전 대통령의 지지를 얻으려 애써왔었다. 그러나 윤보선 전 대통령은 뚜렷이 어느 편도 들지 않았었다. 윤 전 대통령의 개인적 인연은 김영삼과 가까웠고(舊 민주당 시절 같은 구파, 김대중은 장면 계보), 70년대 활동은 김대중계와 노선을 같이 했었다. 윤 전대통령이 김영삼 총재쪽으로 기울게 된 것은 김대중의 신민당 입당 거부 선언 때문이었다.


4월 1일 양일동 통일당 총재가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4월 4일 김영삼-김대중 회담이 있었다.

4월 5일자 동아일보에는『3金씨와의 對話』시리즈 3번째 편으로 김대중의 인터뷰가 실렸다. 다음은 내용의 일부이다.

『나는 무엇이 되기 위해서 살아온 사람이 아닙니다. 대통령은 둘째 세째입니다. 국민과 하나님이 주신 양심에 충실하기 위해 살아온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6․25때 공산당으로부터 나를 살려줬고 71년 선거 때 위장자동차 사고에서 나를 살렸고 73년 피납 때 바다에서 살려줬는데 그것은 내가 언젠가는 필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나온 이상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야하는데 하나님의 뜻은 이웃사랑 곧 社會救援에 있다는 것이며 그같은 신앙을 그의 政治觀으로 연결시킨다.

『이 나라에 민주주의만 꽃피울 수 있다면 우리 국민에게 自由와 正義가 회복돼서 또 다시 눈물과 한숨과 비통한 생활만 없다면 나는 무엇이 되건 상관없습니다.』

가톨릭 신자로서 그의 이같은 信仰은 지난 73년 8월 8일 日本에서 납치돼 오고 난 뒤 더욱 굳어졌다는 얘기다.

-「大權」을 바로 눈앞에 두고 어느 한쪽이 선뜻 양보하기란 어려울 것 같은데….

『후보단일화의 성공을 위해 金총재와 나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고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金총재와 나 그리고 신민당지구당위원장들이 정치력을 발휘해서 해결하겠다고만 하면 약간의 方案도 갖고 있어요. 그것은 兩側의 共存原則에 입각한 것입니다.』

 

4월 6일 하오 5시 안국동의 윤보선 전 대통령 자택에서 윤보선과 김대중은 만났다. 이 자리에서 윤 전 대통령은 거의 일방적으로 김대중을 설득하고 나섰다.

 

내일 신민당이 중앙 상임위 회의를 한다고 하니 나도 나갈 테니 金의원도 같이 나가서 金泳三과 함께 단결된 모습을 보여 줍시다. 우리가 이렇게 나오면 유신 잔당들도 더 이상 맥을 추지 못하고 선거를 앞당기게 될 것 아니겠소. 나도 신민당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오. 유신 체제 아래서 朴씨의 유신 독재에 협력한 책임은 면할 길 없어. 못된 자들이 더러 있기도 했었으나 金泳三 총재 같은 사람은 마지막에 와서 朴씨와 잘 싸워주지 않았나.

 

윤보선 전 대통령은 자신과 김대중이 박정희를 상대로 각각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를 회상하며 군부독재와 싸우는 데는 절대적인 단결이 필요하다고 길게 설명했다.

 

김대중은 한동안 듣고만 있다가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의 말씀이 지당합니다(김대중이 선생님으로 부르는 사람도 있구나 라고 놀라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공화당이 망한 이상 신민당이 정권을 맡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입당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만 재야의 동지들과 함께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金총재는 중앙상임위원회의 영입을 100명으로 한정하고, 그것도 자기가 선정하는 사람들로 채우고 소수만 저에게 배당하겠다는 것입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이 다시 설득했다.

 

내가 金총재를 불러 100명 증원을 당규로서 확정해 놓도록 하겠소. 또 그 100명은 반체제하던 사람과 재야인사를 우선적으로 선임토록 말할 테니 그 점은 염려 말아요. 그렇지 않겠다면 민주 세력의 분열책임은 金泳三이 져야 돼.

 

윤 전 대통령은 분명히 말한 뒤 “내일 하오에 함께 당사로 나가자”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예, 알겠습니다.”

 

김대중은 윤보선 전 대통령에게 절을 꾸벅하고 물러 나왔다. 김대중은 趙鍾昊 비서를 바라보며 “해위(海葦 : 윤보선 전 대통령의 호) 선생께서는 성자같은 말씀만 하신다. 당내 조직을 너무나 모르신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미 김대중은 신민당 입당 포기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김영삼과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승산이 적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4월 7일 김대중계 의원들은 아침 일찍 김대중 비서들인 권노갑, 설훈으로부터 호출령을 받았다. 오전 8시경 현역 신민당 의원 20여 명과 원외 중진인사 30여 명이 동교동 응접실을 메웠다. 김대중은 입당포기 의사를 밝혔다.

 

우리는 5일의 신민당 정무회의 결과를 보고 신민당이 재야인사를 받아들일 의사가 없다는 판단을 갖게 되었으며 따라서 입당교섭을 포기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대통령 후보를 투표 없이 결정하겠다면서 왜 재야 사람들은 받아들이는 숫자를 제한해야 하는가. 유신체제와 싸워 온 재야인사를 신민당이 무슨 자격으로 어떻게 심사하겠다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정치경험이 없는 재야인사를 가볍게 보고 경계하는 신민당의 자세로 보아 입당해서 정치생활을 하기가 어렵다고 생각됐다.

 

이어 김대중은 “정당 차원의 활동에 대해서는 당분간 일체 참가하지 않고 오직 민주회복을 위한 노력에 전심전력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김대중의 신민당 입당 포기 성명은 상오 10시 라디오 뉴스를 통해 전국에 알려졌다. 이날 오후 라디오 뉴스를 듣고 이 소식을 안 윤보선 전 대통령은 노발대발했다. 다음은 윤보선 전 대통령의 비서였던 이한두(李瀚斗) 씨의 증언이다.

 

海葦는 장충단 공원의 양일동 총재 장례식장에서 김영삼 총재, 김대중씨, 김종필 공화당 총재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고, 하오 1시 가까이 돼서야 안국동으로 돌아왔다. 잠시 후 해위가 불러 서재로 들어갔더니 라디오 뉴스를 듣고 있었다.


“뭐, 이것이 사실이야?”

 

해위는 평소와는 달리 크게 흥분하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비서 尹起大씨가 안타까운 듯이 설명했다.

 

“사실입니다. 아침 일찍 동교동으로 불러서 모두 무슨 일인가 하고 갔더니 신민당 입당을 포기하겠다는 말을 하더랍니다. 일부 인사들이 그러면 안된다고 말렸다는데 더 이상 말하지 말라며 미리 준비했던 성명서를 돌렸답니다.”

 

“그럴 리가 없어. 오늘 하오에 나와 함께 신민당대회(중앙상무위원회의)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단 말이야.”

 

해위는 전날(4월 6일) 가졌던 김대중씨와의 밀담 사실을 얘기했다. 윤기대씨가 거듭 동교동의 ‘상오 상황’을 설명하자 해위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金군 집에 전화를 해.”

 

“金군이라면 누구를….”

 

어리둥절한 조종호 비서가 되물었다.

 

“김대중 말이야.”

 

해위의 신경질적인 호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동교동쪽에선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는 연락뿐이었다.

 

“다시 전화를 해. 김군이 이리로 오든지, 아니면 내가 간다고 해.”

 

하오 5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신민당의 중앙상무위 회의도 이미 끝나가고 있는 시각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동교동 김군의 집으로 가야겠어. 차를 대기시켜.”

 

뭔가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던 해위가 벌떡 일어섰다.

 

“집에도 없다는데 가서 뭐합니까? 연락을 해주겠다고 했으니 기다리시지요.”

 

나와 조종호․윤기대씨는 필사적으로 말렸다. 한참 후 동교동의 비서실차장인 金載偉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김대중씨가 밖에 있어 연락이 늦었답니다. 김씨가 오늘은 머리도 아프고 심경도 복잡하고 하니 4~5일쯤 후에 안국동으로 찾아뵙겠답니다.”

 

조비서의 전언에 해위는 눈을 감아 버렸다.


4월 10일 안국동 윤보선 전 대통령 자택에서 국민연합 상임집행위원회가 열렸다. 김대중이 신민당 입당 불가를 발표한지 사흘만이었다. 윤보선과 김대중 공동의장이 주재했고 문익환․함세웅․김승훈․계훈제․고은․이문영․예춘호 씨등 7명의 상임집행위원과 김윤식․김종완씨 등 헌정동지회 인사, 서남동․이우정 교수 등 13명이 참석했다.

 

다음은 예춘호씨의 회고이다.

 

4월 10일 저녁 6시 국민연합 관계자 10여 명이 안국동을 방문했다. 김대중씨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김씨는 이 자리에서 자신이 신민당 입당을 포기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김씨는 “신민당에서 나와야겠다. 앞으로 재야 쪽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모두 김씨의 그 같은 이유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海葦는 강력하게 반대했다. “국민연합의 공동의장으로서 김대중씨의 입당포기 선언은 조급한 결정이며 따라서 공식적으로 이를 수용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다. 별다른 결론을 얻지 못하고 헤어졌다.

 

이튿날인 4월 11일 아침, 조간신문을 받아든 윤보선 전 대통령은 또 한번 깜짝 놀랐다. “국민연합의 집행위원 13명은 어젯밤 안국동 尹潽善 전 대통령 집에서 모임을 갖고 金大中씨의 신민당 결별을 만장일치로 지지했다.”는 기사가 게재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대중의 언론플레이였다.

 

윤 전 대통령은 즉각 신민당 기자실로 연락, 기자회견을 갖겠다고 알렸다. 윤 전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김대중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김대중씨가 신민당에 있을 때는(윤보선 전 대통령은 김영삼이 총재로 선출된 79년 5월 30일의 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이 신민당 상임고문으로 추대된 것을 기정사실화했다) 대통령후보감이 두 명이어서 이를 단일화하려고 노력했으나 이제 김씨가 신민당에서 나왔으니 단일화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됐다”

 

면서 김대중 비토를 분명히 선언했다. 윤 전대통령은 나아가서 “정당은 집권이 목표이지만 국민연합은 국민계몽단체”라고 하면서 “김씨가 신당을 만들어서 정당 활동을 하겠다면 국민연합을 떠나서 해야 할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이날 오후 文益煥 목사가 안국동을 방문했다. 문 목사는 이날 大田문화회관에서 가톨릭농민회 주최의 김대중 강연회에 김대중과 동행했다가 윤 전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가졌다는 소식을 듣고 온 것이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문익환 목사에게 “문 목사는 교회나 학교로 돌아가세요. 이제 종교인은 교회로, 교수는 강단으로 돌아가고,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겨두시지요”라고 자신의 지론(持論)을 폈다.

 

신민당에 입당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김대중은「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을 주축으로 한 재야의 유력인사들과 접촉을 강화하면서 신당 창당을 모색했다.

 

김대중은 국민연합의 규약을 개정, 종전의 3인 공동 의장단 중심으로 운영하던 것을 중앙상임위원회 중심제로 바꾸고 중앙상임위원회 위원장에 문익환 목사, 부위원장에 고은 씨와 함세웅 신부를 선임토록 했다. 이제 국민연합은 김대중의 사조직으로 전락한 것이다. 또한 집권을 대비한 자체조직으로 ‘한국 민주제도 연구소’를 4월 16일 발족하는 등 4월 중순부터 선전․조직․정책 분야를 망라한 세력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한국 민주제도 연구소란 기존의 김대중 방계조직인 한국 정치문화연구소․민주헌정동지회․민주연합 청년동지회 등을 통합하여 인맥을 보강하되 정책개발에 치중한 집권전략 지휘본부 역할을 담당할 조직이었다. 신민당의 김대중 계 의원들도 신민당사 근처의 가든 호텔에서 거의 매일 모임을 가졌다.

 

4월 11일 김대중은 한국 가톨릭농민회 주최 민주농정 실현을 위한 농어민 대회에 참석, 「민주주의와 농민의 권리」란 제목으로 연설을 하였다. 다음은 중앙일보 보도 내용이다.

 

安保를 執權者가 逆用하면 國民 不滿 터진다

金大中씨 大田 연설

【大田=韓南圭기자】金大中전신민당 대통령후보는 11일『安保가 집권자의 부귀영화를 위한 것으로 전락할 때 국민들의 불만이 촉발되어 제2 越南, 제2「캄보디아」가 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金씨는 復權후 처음으로 지방강연에 나서 이날 하오 2시 농민회가 大田「가톨릭」문화회관에서 주최한「민주農政실현을 위한 전국농민대회」에 참석,「민주주의와 농민의 권리」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이같이 말했다.

김씨는 이날 신민당 入黨포기선언등 정당차원의 문제에 관해서는 일체 언급을 하지 않고 民主化문제를 거론 ▲대통령중심제와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를 위해 계속 투쟁할 것이며 ▲정치범의 석방 및 復權을 실현시키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金씨는『美지상군이 한반도에 남아있는 한 金日成의 南侵은 없을 것으로 단언할 수 있다』고 말하고『농민들이 잘살고 인간답게 생활하고 싶으면 모든 일에 앞서 민주政府를 수립하는데 제1차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장내에 1천명, 장외에 약 3천명의 청중이 모인 이날 대회에는 국민연합공동의장인 咸錫憲씨와 金哲 統社黨 고문, 신민당의 芮春浩․李龍熙․申相佑․韓英洙, 統一黨의 金顯秀의원등도 참석했으며 초청을 받은 金泳三총재는 不參했다.

(1980년 4월 12일자 중앙일보)

 

4월 11일을 시발로, 김대중은 본격적으로 대중연설에 나서기 시작했다.

한국신학대학 개교 40주년 기념 강연회(4월 16일), 동국대학교 학생회 주최 초청 강연회(4월 18일), 안양성당 강연(4월 20일), 관훈클럽 초청강연(4월 25일), 충남 예산의 윤봉길 의사 의거 48주년 기념 강연(4월 29일), 정읍의 동학제 강연(5월 11일) 등에 참석하여 수천, 또는 수만 명의 청중들을 대상으로 연설을 했다.

 

한국 가톨릭 농민회 주최 연설에서 드러나듯이 김대중은 ‘군부 출현의 불가능’을 확신하고 있었다. 12․12사태 자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에 대해 김대중의 전위조직이던 민주헌정 동지회의 金鍾完 이사장(나중에 14대 국회의원을 지냄)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당시 우리 모임은 주로 외신을 들여와 이를 번역해서 유인물로 만들어 배포하는 일을 맡았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소장 장성 그룹의 신군부가 한국의 실권을 장악해 나가고 있으며 그들이 재집권할지 모른다”는 요지의 외신 보도가 자주 들어왔다. 그때마다 東橋洞을 방문해서 우려를 얘기했다. 東橋洞측 대답은 그러나 “한국군 작전권은 미국이 갖고 있으니 군부의 재집권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며 염려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12․12사태마저도 “미국측 묵인이 없이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특히 “9사단 전투병력을 움직인 것은 여러 곳에서 합의된 사안일 것”이라며 12․12사태 자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東橋洞측은 미국을 단단히 믿고 있는 것 같았다.

 

바로 이 증언에서 김대중이 계엄령아래서도 초청 강연을 빙자한 정치활동을 활발히 한 이유가 잘 드러난다. 그러한 선동 활동은 군의 정치 개입구실이 된다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면 다 아는 일이다. 위의 증언에 대해 김대중은 상반된 말을 한다(너무 짧았던 80년 서울의 봄 참조).

 

사회 혼란을 집권의 빌미로 노리고 있는 전두환 일당에게 김대중의 장외연설 행각은 바라던 바였다. 80년 봄 학내시위로 출발한 대학생시위는 언제 가두로 진출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4월 중순에 들어서면서 대학은 병영집체훈련 거부를 이슈로 내걸었다.

학내시위로 국한시키며 자제하던 대학생들은 4월 10일부터 산발적으로 거리에 나오기 시작했다.

 

4월 14일 최규하 대통령은「최근의 내외정세에 관한 대통령 담화문」을 통해『내외정세가 어려운 때에 사회일부에서 국민단합을 저해하는 언동을 하는가 하면 학원가에서 군사교육을 거부하는 등 사회질서가 소란해지고 있는 것은 유감』이라고 했다.

“勉學 해치는 學園소란은 유감”

崔大統領 최근 內外정세에 관한 談話발표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80년이 되자 중앙정보부장을 겸임하기 위해 노력했다. 막대한 정보부 예산을 정권창출에 쓰기 위해서였다. 신현확 국무총리는 최규하에게 전의 요구를 거부하도록 여러 차례 권했으나 임명권자인 대통령 최규하는 전두환이 자신을 미는 줄로 알고 수용하지 않았다.

최규하는 전을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임명해 보안사령관직과 겸임하게 하였다.

현역 군인은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서리(署理)’라는 꼬리를 달았다. 전두환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정치에 관심이 없다’라고 하였다.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함으로서 공직 서열상 부총리급으로 격상되어 국방부장관보다 서열이 올라갔다.

 

戒嚴令 해제위한 對備策

日紙들, 全部長서리任命 크게 보도

【東京15일合同】日本의「요미우리」(讀賣)「아사히」(朝日)「마이니찌」(每日)등 전 주요일간지들은 全斗煥보안사령관이 中央情報部長서리에 임명된 사실을 모두 외신면「톱」또는 중「톱」으로 크게 보도하면서 全장군이 軍전반을 비롯 국내외정보․치안 등 민간부문에 관해서도 실권을 장악한 것 같다고 보도했다... 日本신문들은 또 全장군의 중앙정보부장서리 취임은 韓國정부당국이 戒嚴令을 곧 해제하려는데 대한 대비책이라고도 분석했다.

(1980년 4월 15일자 중앙일보)


1979년 12월의 쿠데타직후부터 한국의 실질적 권력자는 전두환이라고 해외언론들은 보도해왔다. 전두환이 80년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으로 부임하자 국내 언론도 외신을 인용해 전두환의 위상을 보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전두환이 원하는 짓만 하고 돌아 다녔다. 야당 분열, 장외 유세 등. 김대중은 또한 軍部와 접촉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다. 4월에 들어 박종규를 통해 접촉하려 했으나 실패했었다.

 

신민당과 결별한 김대중의 다음 전략은 김영삼 총재와 신민당에 대한 공공연한 비난이었으며, 5월에 들어 가시화되었다.

김대중이 이 시점에서 강행한 위험한 모험은 대학을 강연 장소로 택한 점이었다. 그는 학생들의 자제를 당부한다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대학에서 대규모 군중집회를 가짐으로서 계엄령으로 유지되던 불안한 정국의 뇌관을 건드렸다. 이것은 전두환을 두목으로 하는 신군부에게는 좋은 명분을 주었다. 연설의 예를 들어본다.

 

민주 민권세력의 구심점은 유신 7년 동안 온갖 박해를 받고도 굴하지 않고 싸워온 재야인사들로, 한국신학대학이나, 서울대학이나, 고려대학이나, 여러 대학에서 싸운 이러한 동지들이라고 나는 이 자리에서 단언할 수 있습니다.

(80년 4월 16일 한신대에서「하나가 되자-도덕정치의 구현」이라는 제목으로 연설)

 

어떤 사람이 나를 보고 과격하다고 하는 게 신문에 났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과격합니다. 악에 대해서 나는 과격합니다. 국민을 괴롭힌 자에 대해서 과격합니다. 자유를 짓밟고 정의를 유린한 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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