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은 민주화 운동인가 아니면 지역적 불만이 분출된 폭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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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일석 작성일13-06-09 06:46 조회3,11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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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은 민주화 운동인가 아니면 지역적 불만이 분출된 폭동인가?
최근 5.18 당시 북괴측의 개입 여부를 둘러싸고 상당한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이 문제는 물론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5.18의 성격을 어떻게 규명 것인가이다: 5.18은 광주의 5.18세력들이 주장하는 대로 민주화 운동의 일환인가 아니면 애국우파 세력이 주장하는대로 무장 폭동인가? 5.18에 대한 북괴측의 개입여부가 중요한 것은 이 것이 5.18의 성격을 가늠하는데 있어서 논란의 여지가 없는 대답을 주는 확고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사실 바로 이런 이유로 5.18 세력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이를 부인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입에 완력으로 재갈을 물리려 광분하는 것이라고 판단된다. 그렇다면 북괴의 개입 여부를 떠나서 과연 5.18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인가? 먼저 이 문제를 생각해 보자
이 문제에 대한 실마리는 아마도 4.19와 5.18을 비교해 보는 데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4.19를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민주화 운동이라고 한다면 5.18은4.19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고 보인다.
먼저 4.19와 5.18의 시대적 배경, 내지는 당시의 상황을 보자. 4.19가 일어난 시대적 배경이나 상황은 충분히 4.19의 역사적 정당성을 받쳐주고 있다는 데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5.18이 그 시대적 배경이나 상황 만으로 무장 폭력을 동반한 광주 사태를 정당화 할 수 있을까? 당시 최규하 정권은 대통령 직선제 등을 포함한 진정한 민주화를 위해 여러모로 애쓰는 중이었다고 듣고 있다. 김대중을 필두로 한 세칭 ‘민주화’ 세력들이 조금만 참고 기다렸더라도 이런 폭력적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북괴 개입을 상당기간 연기시켰을 가능성이 많다. 5.18은 상황적으로 정당화 할 수 없다고 보인다.
두번째로, 4.19는 전국적 규모의 운동이었다. 반면 5.18은 광주라고 하는 지극히 제한된 지역의 지역적 운동이었다. 4.19는 참여자들이 학생 뿐만 아니라 넥타이 부대 등 대부분의 중산층이 그 주류를 이루는 운동이었다. 반면 5.18은 그 운동의 주류세력이 일부 불온한 학생을 제외하면 양아치들 등등 대부분 사회 하류층들로 구성된 사회 불만 세력이었다
셋째, 4.19는 그 동인이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었지만 5.18은 초기의 요구사항이 “김대중 석방하라”로 시작된 반 정부 운동이었다. 이는 당시 정치적 상황을 보면 명백해 진다.
필자가 알기로 김대중은 5.18 직전에 체포되었고 그를 체포한 주체는 서울 시경 (특수조사과?) 이었다. 전두환의 보안사령부가 아니었다. 필자는 김대중이 직 간접적으로 호남 지역의 반정부 봉기를 지원 내지는 획책한 인물이라고 믿는다. 필자가 알기로 그는 호남지역의 학생운동에 자금지원은 물론 그들의 이념적 정당성을 부여해 준 인물이었다. 그는 정녕 정부 전복을 획책하였고 그에 대한 전두환 정권의 재판은 공정하였고 정확하였다고 본다. 김대중이 5.18 하루 전날 5월 17일 자정무렵에 자택에서 체포될 당시 그는 그가 구성할 새로운 내각의 내각명단까지 갖추고 있었다 한다.
넷째, 4.19에서는 그 어느 시민도 총으로 무장한 사례가 없다. 고작해야 시민들이나 학생들이 행한 폭력적 행위라면 돌팔매질 정도 였다. 그러나 5.18에서는 시민(?)들이 무기고를 습격하여 탈취한 칼빈 총으로 무장하고 장갑차를 몰았으며 교도소를 습격하고 시청에 폭탄을 장치하였었다. 명백한 무장 폭동이었다.
(2부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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