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츠페터 배달 성공 사건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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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생 작성일13-06-03 22:04 조회3,01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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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츠페터는 운전기사에 의해서 길을 안내 받습니다.
운전기사는 힌츠페터가 좌빨들이 즐겨쓰는 감성팔이 장면을 찍도록 유도합니다.
계엄군과 폭도들의 진압 시위 장면은 다른 요원들이 찍고있었기 때문입니다.
계엄군과 폭도들의 충돌장면을 찍어야 하는 요원들은 광주를 떠날수가 없었습니다.
운전기사와 일행은 감성팔이 장면과 요원들이 촬영한 영상물을 가지고 해외 언론에
전달할 배달부가 필요했던겁니다.
요원들과 힌츠페터는 옥상에서 접선을하여 영상물을 넘겨 받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광주를 떠나 자신이 촬영한 영상물과 요원들이 넘겨준 영상물을
독일에 전달하기로 계획이 섭니다.
20일 새벽 4시경 총소리가 울렸습니다.
이는 살인사건이 났다는 신호와 동시에 감성팔이 촬영을 오라는 신호이기도 했습니다.
감성팔이 촬영물중 시체팔이 장면을 연출할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날 촬영한것은 밝게 웃고 춤추는 폭도들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변수가 발생합니다. 운전기사와 일행은 힌츠페터에게 나가서 촬영할것을
권유했지만 겁이 많았던 힌츠페터와 녹음기사 헤닝은 나가지 않겠다고 한겁니다.
김재화 김만두 촬영은 이렇게 물건너 갔습니다.
동이 틀때 즉흥적으로 감성팔이 장면을 연출하라 지시를 합니다.
날이 밝아야 촬영할 용기가 날 두사람에 대한 배려차원이었습니다.
총성이 울리고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대학생이라고 우기는 요원들이 그 건물입구를 지키고 있습니다.
힌츠페터에 촬영을 권유한 기사와 함께 건물로 들어갑니다.
여러구의 시체가 나뒹굴고 시체 두구를 건물밖으로 실어갑니다.
이장면을 창가에서 힌츠페터는 촬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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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이 총을들고 장전을 하고 방송국이 불타는걸 촬영하고 싶었지만
운전기사와 일행은 시간을 재촉합니다.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간 힌츠페터는
촬영물을 보내고 마이니치 신문을 한부 삽니다.
일본 언론기사를 통해 21일 광주속보상황을 알고싶었기 때문입니다.
광주폭도들에 의해 광주가 장악되었다는 기사를 읽은 힌츠페터는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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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돌아온 힌츠페터는 운전기사와 일행의 권유로 김영삼이 가택연금당해있는 장면을
찍으러 가지만 실패하고 맙니다.
22일쯤이면 힌츠페터가 보낸 영상물이 전세계를 돌고 세계여론은 한국정부를 질타하게 될것이고
미국정부또한 곤란에 처할것이라 예상합니다.
또 광주폭도들이 광주를 장악했으니 전국적으로 폭동이 번질것이라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광주에 잠입해있던 요원들로부터 긴급히 들어오라는 전갈을 받습니다.
계획에 차질이 생긴겁니다.
일파 만파로 번져나갈줄 알았던 폭동이 총기를 반납하거나 총기를 잘 받지 않고
피난을 가는 겁니다.거기에다 한국언론은 정부 통제에 잘 따르고 있었습니다.
이를 급히 감지한 요원은 작전이 실패한것이라 판단하고 훗날을 위해 감성팔이
촬영모드로 돌입합니다.
23일 제집드나들듯 힌츠페터와 운전기사 일행은 광주로 들어갑니다.
실망이 컷지만 감성팔이 촬영을 멈출수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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