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는 걷다가 넘어진자도 유공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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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하족도 작성일13-05-27 18:28 조회3,402회 댓글2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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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8 광주 민주화운동 유공자 숫자가 5천700명이 넘었다고
한다.
같은 성격을 가졌던 부마항쟁의 민주화 운동 유공자는
몇명인가?
아마 한사람도 없을것이다.
광주사태 후 사법처리 대상자 486명
부마사태 후 사법처리 대상자 1,500명
그렇다면 부마사태후
민주화 운동이라면 부마사태가 먼저인데
어째서 여긴 민주화운동 유공자는 한 사람도 없고,
광주사태가 끝난후 구속자 486명은 민주화 운동 유공자가
된다고 쳐도 현재 엄청나게 불어나서 5,700명이 훨씬 넘은
유공자들은 무엇인가?
걷다가 넘어져도 유공자가 된것 같다.
그에 비하여 부마항쟁의 민주화 운동 유공자는
왜 없으며 왜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하는가?
부마사태당시 5만명이 가담했으니
5만명의 민주화운동 유공자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없다...
이유는 딱 한가지...
광주는 총들고 게엄군에게 대항했으면 유공자가 됐고
부마는 총들지 않았기에 유공자가 못되었다.
적어도 유공자가 되려면 지서 무기고 탈취하여
총 정도는 쏘면서 난리부르스를 쳤어야 유공자 반열에
오른다.
또 김대중이 있어서 광주는 유공자가 양산되었고
김영삼이는 대한민국 경제 깡통만 차게했을 뿐
같은 동향인 부마사태에 유공자 한명도 내지 못했으니
김영삼이는 김대중이 한테 졌어^^
게임이 않되는 것이었다...
◎부마항쟁 1979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
대한민국 의 부산광역시와 경상남도 창원시에서
유신 체제에 대항한 민주화 운동을 말한다
시위인파는 5만명으로 불어났다.
폭발한 민 심은 도심 곳곳에서 방화를 일으켰고
공공건물에 대한 습격은 이튿날도 계속됐다.
파출소와 공화당 지부 사무실은 시위대의 집 중 타격 대상이었다.
10.16- 11개 파출소 파괴, 방화
10.17- 21개 파출소 파괴,
경찰차 6대 전소
부마항쟁에 구속자 1500여명 가운데 학생은 수십명에 불과했다.
@@@ 파출소 32개 파괴하였어도 그곳에 있는
예비군 무기고는 건드리지도 않았다.
결론은
예비군 무기고 파괴하고 총들고 싸운 자들은 민주화 유공자고
총 안들고 동맹이만 던진 사람들은 민주화 운동을 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차후 민주화 운동의 열사로 남으려면
총들고 경찰과 게엄군을 향하여 쏘면된다...
댓글목록
하족도님의 댓글
하족도 작성일
1943년 경기도 광명시 옥계동(현 주소)에서 야학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던
이효순옹은 1925년생이셨다.
일제치하에서 울분을 글로 남겨서 기록하고 있었다.
이것이 일본 놈들에게 발각되어 1943년- 1944년까지 (소화18년 2월10일 기록)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며 고문을 당하여 평생 손가락이 뭉그러진채 살았다.
그런데 서대문형수소의 수인번호가 기록된 자료가 소실되었다
단지 그당시 영치되었던 책에 수형번호만이 증거로 남아 있고,
2573번 이분은 사망하셨다.
단지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이 분은 독립유공자로 포상도 받지 못했다.
그 자손들은 비통해 하며 산다.
반면
왠 놈의 유공자들이 그리 흔해 빠졌나?
그들이 일제 때 독립운동을 했냐?
6. 25때 북한군과 싸운 참전 용사들인가?
아주 웃기지도 않는 대한민국이다.
현우님의 댓글
현우 작성일
100만번 동감함
그동안 받은 보상금도 다 토해내야 마땅함..
이런 웃기는 짓이야말로 해외 토픽감에 올라갈 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