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광주사태는 폄훼도 미화도 거부하는 역사일 뿐이다.

 

대한민국 민주화투쟁의 자랑스런 비폭력적 전통과 단호히 결별한 봉기의 역사였다.

80년 광주사태를 민주화운동으로 미화하는 것은 대한민국과 국군, 경찰에 대한 모독이다.

 

5.17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에 따라 배치된 공수부대 계엄군의 초기과잉진압에

분노하고 공포에 젖은 학생시민들이 무기고를 털어 자위적 자발적 무장을 하게 됨으로써
계엄군과의 무력대결이 빚어진 것으로 광주사태를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해야한다는
견해가 일반화되어있다. 대다수 국민들은 그렇게 알고있다.

 

하지만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견해이며 무엇보다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견해이다.

광주에서 나타났던 일시적인 대규모의 무장은 자연발생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 이전의 대한민국의 어떤 민주화 시위투쟁에서도 볼 수 없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장하고 거침없이 군경을 향해 총기를 난사하는

무장투쟁의 전통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김일성의 6.25남침이전의 빨치산투쟁에서나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빨치산투쟁을 민주화운동이라 불렀는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이 빨치산투쟁을 이어받은 것인가.

이것은 이전까지의 민주화투쟁세력과 전혀다른 성격의 집단이 개입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한민국 곳곳에 뿌리내리고 설치는 조직폭력배가 동원돼도 이것은 불가능하다.
조직폭력배가 무기고를 털어 군경과 싸운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순수하게 민주화를 염원하던 학생들과 유언비어에 속아 흥분한 감정으로 가세한 시민들이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일거에 대규모 무장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최소한 두가지 추정이 가능하다.봉기를 예비하고 광주사태 발생 수개월 전부터 무기고 위치 등 관련정보를 꼼꼼하게 수집한 집단이 있었고, 동시에 광주사태 발발당시 단호하게 그것을 실행할 능력이 있는 조직된 집단이 있었다는 것이다.이들은 민주화 운동권이라 불리는 아마추어 집단이 아니다. 무장봉기를 지휘할 능력을 갖춘 직업혁명가집단인 것이다. 

알려진 바로는 대한민국에 유신체제에 반대하던 다양한 저항조직 가운데 무장봉기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적극적으로 준비한 집단은 이재오, 이학영,김남주  등이 결부된 남민전뿐이다.한국의 베트콩을 표방했던 남민전이 북괴인민무력부를 모방한 혜성대라는 무장조직을 표방하는 부서를 두고
무장봉기에 대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하지만 남민전은 79년 일망타진되어 사실상 와해된 것으로 알려졌다.동시에 무장봉기에 대한 주장을 펼치고 예비군무기고 습격 등 훈련을 시행한 적이 있지만

일망타진된 이후 잔당들이 살아남아 광주사태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 일시에 대규모 무장을 가능케할 정도의 실행능력을 갖추었는지는 의문스럽다.동시에 남민전도 계획과 주장이 그렇다는 것이지 실행할 충분한 능력을 갖추지 못한 [직업혁명가를 표방한 집단]에 불과하다. 

여기서 조선노동당 내란깡패집단(직업적 혁명가 무장조직)의 개입이 불가피한 근거가 있다.
포섭간첩과 남파간첩들이 전면남침의 여건을 결정적으로 조성하는 전국 무장봉기의 시발지로

광주를 오래전에 낙점하고 봉기의 근간이 되는 무장의 재원을 무기고습격에 의한 무기탈취로 보고

철저하게 정보수집과 탈취계획을 가다듬어 왔을 개연성이 크다.광주사태 발발 최소 3개월 이전부터 무기고 정보를 수집했다는 증언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놀랍게도 직선제 개헌을 반대하고 최규하 신현확 전두환 등을 유신잔당이라며 무조건 퇴진을 요구했던 김대중의 국민연합은 전국적 총궐기를 공개적으로 선동하고 협박했다. 이들이 내세웠던 전국 총궐기가 바로 무장봉기와 맥락적으로 연결돼있는 것이며 최규하정부의 퇴진시한으로 내건 5월 22일 이후인 것으로 보인다.

 

5.15일 서울역에서의 대규모 시위에도 불구하고 수도권 민심이 의외로 냉랭하고 시민이 가세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전국적 총궐기 또는 무장봉기로 연결되는 내란소요에 대한 선제적 제압조치가 바로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였던 것이다.

 

선제적으로 제압당한 봉기준비세력은 의외의 일격을 맞고 사전에 계획된 것보다 시기가 앞당겨져 학생대중을 동원한 자연발생적 시위로 출발했지만 곧바로 준비된 역량이 총동원돼 무장봉기를 실행할 정도로 능력을 갖춘 집단이었다.


하지만 무장봉기가 발발하자 무고한 시민의 희생을 막고 지휘부와 시민을 교란시키기위해

계엄군이 광주시외곽으로 철수하여 차단공작에 들어가는 바람에 광주꼬뮨으로 고립된 채 날이 갈수록 냉정을 되찾은 시민의 참여저조로 전국봉기로 확산시킬 투쟁동력을 잃고 말았다.

북괴 강성산 총리의 사위 탈북자출신 강명도씨 채널A방송 증언에 의하면

조선노동당 내란깡패집단의 통일전선부장 김중린이 고첩망을 총동원해
전국봉기 확산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흥분했던 광주시민마저도 무기를 자진반납하고 집안으로 꽁꽁 숨어버렸다.
광주봉기, 봉기의 전국확산, 무정부내란상태, 북괴지원요청,전면남침으로
이어지는 김일성의 80년 공산화 시나리오는 광주에서 멈춰버리고 만 것이었다.

 

80년 절대지도자 공백의 극도의 혼란상황에서

대한민국이 적화수렁에서 빠져나온데는

선제적인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와  

전두환을 앞장세운 대한민국의 국군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