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 기자 주장에 대한 반박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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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사논객 작성일13-05-19 12:57 조회3,231회 댓글1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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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 기자의 주장에 대하여는 제가 조목조목 반박할 수 있지마는 우선 북한군이 광주로 침투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 자료를 드립니다. 아래 링크로 들어 가시면 반박 자료를 보실 수 있으며 특히 두번째 댓글에서 목포 주재기자의 취재일지를 인용하여 쓴 글을 자세히 읽어 보세요.
댓글목록
海眼님의 댓글
海眼 작성일
518에 북 특공대가 안왔다고 박박 우기는 놈은 종북 아니면,빨갱이,간첩입니다.
북한,지들이 했다는데, 정교한 증거를 다 보여주면서 진짜로 했다는데,
무슨 목적으로 박박 우기는 것이야?
조갑제는 교회장로 라면서, 좀 양심을 쫌 딱고 다녀라.
알고싶다님의 댓글
알고싶다 작성일
조갑제 기자가 확실한 우파인 것은 백번 맞다. 그런데 지 박사님의 논리를 카더라로 폄훼 하는 이유가 뭘까?
내 생각- 우파의 주도권 때문일 것이다. 종북좌파의 선거연대와 참 비슷한 점이 있다.
지 박사와 맞장 뜰 수는 없고, 국민행동본부에 이론을 제공하고 전사는 국민행동본부 서씨가 담당한다.
천제지자님의 댓글
천제지자 작성일
우파의 주도권???
조갑제의 우파 주도권 이라면,,,
종북좌파 세력들을 앞에두고 힘을 합쳐도 될까 말까 할판에,,, 우파의 주도권 때문에, 분열을 시키려고 하는것으로 밖에 판단이 안됩니다....
적을 앞에두고,,, 고작 개인의 명예때문에 주도권잡기 위해 우익들을 망치는 것은 아무리 검증된 우익이라도 도저히 용서가 안됩니다....
다른생각을 가지고 있고, 기회주의자 처럼,,, 행동을 한다면,,, 종북좌파 보다 더 위험한 적이 될것입니다.
아군인지 적군인지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이죠...
현산님의 댓글
현산 작성일
시사논객님께서 이번에 5.18에 관한 4권의 역저를 내신 분 아닌가요?
아직 사서 읽어보진 못했습니다만 님께서 이 게시판에 들어오셨으니 꼭 여쭈어 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5.18일 오후 공수부대가 광주시위현장에 투입된 상황입니다.
엊그제 조갑제씨가 자신의 홈피에 2007년도 글을 그대로 올린 걸 보면 이 중요한 부분을 잘못 처리했습니다. 5.18 측이 공수부대의 과격진압으로 폭동이 일어났으니 그 이후 시위대의 폭력은 당연하다는 논리를 펴는데, 바로 그 상황을 공수부대나 객관적 자료없이 광주시민측의 목격담만으로 시작한 겁니다. 공수부대가 도착해서는 일련횡대로 늘어서 지휘관이 핸드마이크로 몇번 경고하고는 바로 무지막지한 진압으로 들어갔다는 겁니다. 더구나 그 상황은 공수부대 출현으로 대부분의 시위대는 흩어지고 없었다고 합니다.
지만원박사님 글을 보면 분명 차량무력시위를 먼저 했다고 합니다.
무력시위는 차량 탑승한채 할 수도 있으나, 데모진압 충정훈련 받은 수경사출신에 따르면 착검 총을 메고 행군형태로 하는 게 원안이라 합니다. 목표지점까지 엄정한 열과 오를 맞추어 행진하고 그 지점에서도 흩어지지 않으면 곤봉으로 진압한다고 합니다. 돌멩이가 날아와 부상을 당해도 일체 동요없이 목표지점까지 행군함으로서 겁을 먹고 도망가도록 한다는 것. 부상자는 행군 중 한 줄씩 뒤로 돌려 피를 흘리는 채 맨 뒤로 뺀다고 하더군요.
따라서 공수부대 첫 투입 당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관한 사실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를 당시 지휘관 혹은 장병에게도 물어 있는 그대로 사실을 좀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무력시위를 방석모 쓰고 했는지도 중요한 사실입니다. 일반적으로 방석모를 쓰지 않는답니다.
당시 사진을 보면 처음 무력시위 때는 방석모를 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럼 공수부대 맨얼굴에 돌멩이질 한 것이지요.
또 조갑제 글을 보면 공수부대가 18일 2~3시에 이미 일부 현장에 투입된 것으로 나옵니다.
지박사님 글에는 정웅소장이 오후 4시에 공수부대투입 명령을 내린 것으로 나옵니다.
이 부분도 대대별로 투입시간이 달랐던 것인지 조갑제 증언이 잘못된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또 조갑제 글에는 죽은 시민이 칼에 찔린 자상이 4명인가 있다 하며 공수부대가 대검을 사용한 건 사실이라 결론내렸는데 이것도 의문입니다. 공수부대는 총을 메고 곤봉으로 타격 진압하는 데, 백병전 상황이 아니면 대검을 사용하기가 거의 불가능하지요. 더구나 2~3명 소수가 공중에 노출된 채 움직이는 데, 메고 있던 총을 내려 많은 사람 앞에서 대검 사용한다는 건 실현가능성이 없지요. 만약 공수부대가 대검도 사용했다면 이는 이미 백병전 상황이므로 사실대로 설명하는 게 중요합니다. 자상은 오히려 오열의 짓일 가능성이 더 많다고 봅니다.
또 옥상에서 취재하던 기자의 목겸담도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많은데 조갑제가 사실로 만들었습니다.
3층까지 추격온 공수부대가 시위대의 머리를 때려 피가 폭포수 처럼 치솟고 핏물이 계단을 흘렀다는 기술입니다. 그럼 이 정도면 이미 죽었을 텐데 그 시신에 대한 언급은 없고, 죽지 않았으면 공수부대가 잡아갔을텐데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이런 사람을 3층에서 데려가자면 공수부대원 혼자서는 불가능하지요. 이 증언은 취재기자의 실명이 나와 있으니 사실확인여부가 가능하고 중요한 부분이라 봅니다.
박병장님의 댓글
박병장 작성일
조갑제씨는 그 입을 다물어야 할 것입니다.
잘 모르면 입을 다물어야 하고 입을 다물면 중간은 갑니다.
북괴 특공무장력과 그들의 공작이 조갑제씨의 눈에 띌 정도로 허접하지 않습니다.
육체나 정신이 들짐승같이 훈련된 집단입니다.
감쪽같이 속여 국군과 시민을 이간하고 반정부소요를 일으킨게 4.3을 비롯해 한 두번이 아닙니다.
짐작과 감과 느낌으로 적의 불개입을 단언하는 조갑제씨는
나서고 싶어 안달하는 글장삿꾼 일 뿐이오.
군사전략과 전술에 관하여 조씨가 아는게 얼마나 될 것이며 첩보전 게릴라전술에 관해 무얼 알겠소.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명명백백 밝혀지는 진실에 재를 뿌리면 자손만대 얼굴에 분칠합니다.
그 입 다무시오.
당신 잘 모르고 하는 소리잖아.
천제지자님의 댓글
천제지자 작성일
박사님과 시스템클럽 그리고 조갑제와 조갑제닷컴은 크게 2가지가 다른 차이점이 있죠..
첫째는 5.18에 대한 입장
둘째는 핵무장에 대한 입장
하지만, 두번째는 그렇다고 해도,,, 첫번째 5.18에 대해서 민주화운동 으로 규정하는것은 우익이라고 단정 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이미 탈북자들 진술들과 수사기록들 증언들이 들어나고 팩트가 되었죠...
5.18이 반란폭동이였다고 조갑제씨가 다시 해명하길 바랄뿐입니다....
조고아제님의 댓글
조고아제 작성일
조갑제가 유일하게 부정 하는 것이 5.18 북괴군 침투입니다.
좋게 본다면 일시적 판단 미스로 없엇다고 한 것을 번복하지 않나 생각되고
아니면 뭔가 약점이 잡혀서 진실을 숨기고 있지 않나 합니다.
시사논객님의 댓글
시사논객 작성일
현산님, 제 책이 퍼져나가면 조갑제 기자의 주장이 무너질 것입니다. 현산님이 질문하신 내용에 대한 답변은 저의 책에 그 사건 전개 과정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습니다.
5월 18일 정웅 31사 사단장이 현장 지휘하던 7공수 2개 대대의 진압작전은 오후 4시 반에 시작되었습니다. 안병하 전남도경국장의 요청으로 윤홍정 전교사 사령관이 정웅에게 지시 내려 33대대와 35대대가 출동 대기하고 있던 때는 오후 2시 반이지만 작전은 두 시간 후에 시작되었습니다. 총정작전이 불가피했던 이유는 오후 4시 경에 전경 40 여명이 시위대에 인질로 납치된 채 돌과 몽둥이로 맞고 중상자가 생겨 긴급 구조가 필요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아직 조갑제 기자는 광주에 없었는데 어떻게 그가 증언합니까? 그의 기록이 틀린 것입니다.
시위대는 낫과 도끼를 가지고 있었기에 자상은 시위대의 낫과 도끼에 의한 것입니다. 21일 아침부터 운전이 미숙한 시민군이 전남 13 개 시군을 과속으로 돌아다니며 무기를 탈취할 때 대형 교통사고가 많이 났으며 자상에 의한 사망사건도 시민군 교통사고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21일의 50 명 사망자들 중 대부분은 무기탈취하러 다니던 시민군 교통사고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5.18 사진전에서 보신 23일 상무대애 안치된 관들은 시민군 교통사고 사망자 시신들을 각 병원 영안실에서 운구해 온 관들이었습니다.
출동된 진압군 중에는 광주시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5월 18일과 19일 계엄군 병력 중 상당수가 광주의 방위병들로 채워져 있었는데, 광주의 방위병들에게 계엄군 복장을 착용시키고 진압군으로 동원하였을 때 대검을 지급했습니다. 기록과 증언으로 본다면 오로지 계엄군으로 동원된 광주시민들(방위병)만 대검을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계엄군에 방석모는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옥상에서 취재하던 기자의 목겸담은 사실이 아니고, 18일과 19일에 머리를 다친 시위대는 시위대 돌에 맞아 다쳤습니다. 시위대가 뒤에서 돌을 던지면 앞에 있는 시민 뒷머리에 맞았습니다. 그런 사건들의 시간과 장소와 현장 증인이 저의 책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산님의 댓글
현산 작성일
하~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의문이 다 풀려 시원하고 감사합니다. 빠른 시일내 책을 사보도록 하겠습니다.
근데 제가 드린 질문 중 단 하나가 답변에 빠졌습니다.
이와 답변해 주신 김에 18일 오후 4시30~5시 사이 시위현장에 투입된 공수부대의 첫 충정작전 모습을 제가 위에서 질문한 걸 참고 삼아 간략히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시위현장에 투입되어 무력시위없이 막바로 곤봉타격 진압에 들어갔는지 무력시위에도 굴복하지 않는 데모대를 타격 체포한 것인지 하는 겁니다. 제 생각으로는 무력시위 다음 타격 체포했다면 강경진압이란 용어자체가 성립되지 않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대장님의 댓글
대장 작성일
눈깔도 없는모양이지요
종편 채널 17번 19번에서 탈북자들 직접나와서 방송하는거 보고서도 엉뚱한 소리한다면 죽일 놈이지요.
수사기록으로본 1212와 518 책도 읽어보지 못했는지 탱자 탱자 하고있구만요
상판때기 자체부터 보기 싫은 놈입니다
시사논객님의 댓글
시사논객 작성일
총정작전에는 곤봉 타격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총정작전은 시위대가 돌을 던져도 대오를 갖추어 행진함으로써 도로상의 시위대가 해산되게 하는 작전입니다. 그래서 곤봉도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부족한 전경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동원되었기 때문에 대대장이 자비로 진압봉을 주문하여 부대원들에게 지급하였던 것입니다.
문제의 발단은 정웅 31사단장이 안병하 도경국장의 진압방법을 그대로 따랐다는 것입니다. 경찰과 전경의 작전이 주동자 연행이었는데, 정웅 31사단장이 그렇게 하는 것인 줄 알고 7공수 33대와 35대 대대장들에게 주동자들을 연행하라고 시켰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터진 것입니다.
경찰 40 여명을 인질로 납치하여 폭행응 가하는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서도 진압봉을 들어야 했고, 화염병들이 날아올 때 진압봉이라도 들어야 했습니다.
누가 주동자인지 대대원들이 무슨 수로 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주동자들을 연행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자들을 주동자들로 간주하고 연행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힘이 황소 같고 도무지 연행에 응하지 않으니 숫적으로 상대적으로 힝이 딸리는 공수부대원들이 진압봉이라는 물리력을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주동자들을 31사로 연행해 오라는 사단장 명령은 엄한데 도저히 맨손으로는 힘이 황소같은 시위대를 연행해 올 재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때 부득이 진압봉이 사용된 것은 사실입니다.
문제는 정웅 31사단장이 충정작전대로 하지 않고, 엉뚱하게 광주경찰과 전경의 방법을 모방하여 주동자 연행 명령을 내린데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