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굴 보고서(2008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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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땅굴이야기 작성일13-04-23 08:38 조회4,50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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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굴 보고서 이글을 씀은 적의 기습으로 후배 장병들이 포로가 될 수 있음을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알리고자함에 있습니다. 1. 홍광락(프로필) 1967년 1월 강원도 홍천 작은 두메산골에서 2남4녀 중 차남으로 출생하여 홍천양덕상고(현제: 정보화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이듬해인 1986년 4월 단기 하사관으로 논산훈련소에 입소, 그 해 겨울 육군 제9사단 포병연대 51대대 C포대로 배치를 받았습니다. 9사단 백마부대는 1979년 노태우대통령이 사단장으로 계셨던 예비사단이고 특히 월남전도 참전한 용맹스러운 부대입니다. 9사단 포병은 좌로는 한강, 우로는 임진강을 지키는 101여단(무적)을 직접 지원하기 위해 전방 깊숙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때만 해도 대남방송이 낮이나 밤이나 들렸고, 북한은 88올림픽을 저지하기위해 온갖 테러를 자행하던 때입니다. 직업군인으로 복무하던 중 88년 초 어느 날 새벽 지하 발파음을 처음 들었지만 그 정체를 확인하지 못했고, 1992년 SBS땅굴 방송을 듣고 전역을 결심하게 됩니다(92년 4월 2일 제대). 2. 매복 근무시 새벽에 지하 발파음 소리를 듣다 88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3월 초 어느 날 예전에 해오던 대로 매복 근무조로 편성되어 일치감치 장비를 준비하여 날이 어둡기 전 매복 장소로 이동하였습니다. 적 침투로 예상지역에 조용히 크레모아를 설치하고 개인호 속에 몸을 숨긴 뒤 매복 근무를 섰습니다. 3월초라 아직은 날씨가 추운데다 그날따라 이슬비가 내려 우리들은 판쵸우의를 덮어쓰고 새벽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온 천지가 고요했습니다. 철수할 때가 됐는가 싶어 시계를 보니 시계는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땅 밑에서 1.5초 간격으로 폭음 소리가 다섯 번 진동하였습니다. 아주 미세한 소리였지만 저는 포병이라 지상에서 터지는 소리인지 땅속에서 터지는 소리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곳 밑에 적의 땅굴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고, 지휘보고 라인을 통하여 상부에 보고하였습니다. 그러나 확인 작업이 차일피일 미루어지다가 결국 유야무야 되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저는 하루도 땅굴을 잊어 본적이 없습니다. 3. 심야 1시경 대공초소 넘어 골짜기에서 정체불명의 야삽 긁는 소리 저희 부대는 임진강으로부터 4km 가량 떨어진 조그만 야산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땅굴에 관심이 많은 터라 항상 부대원들에게 이 지역엔 땅굴 발파음이 들릴 수 있고, 고량포 땅굴처럼 이미 완공된 땅굴 출구로 인민군이 나올 수 있으니 늘 경계에 최선을 다하라고 강조하곤 하였습니다. 1990년 봄(풀이 나기 전) 근무가 있던 어느 날 이었습니다. 심야 1시경 부대 대공 초소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이상한 야삽 긁는 소리와 새소리가 들린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근무 조부터는 대공초소에 올려 보내지 말라고 일직하사에게 일러두고 저 혼자 실탄을 장전하여 살금살금 조용히 올라가보니 정면 70m 거리의 숲속에서 정말로 제 귀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야삽 긁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야삽 소리는 두 장소에서 땅을 찍는 소리가 아닌, 땅을 간간히 긁는 아주 작은 소리였습니다. 간간이 쇠와 돌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간혹 신호를 주고받는 이쪽에서 “오~~~”하면 저쪽에서도“오~~~”하는 새소리 비슷한 신호음이 들렸습니다. 한 밤중이라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다음 날 아침 부대 전 병력이 출동하여 수색했지만 이상 징후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분명히 세 사람이서 들었는데 참 답답할 노릇이었습니다. 이곳은 민통선 안이라 민간인들은 밤에 얼씬도 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또한 밤이라 민간인들이 그 골짜기로 올 이유가 없었습니다. 1990년 10월 자유로가 착공되면서 민통선이 해제되어, 전우들과 회식자리에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84년부터 그 골짜기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고, 어느 날엔 7부 능선 쪽에서 뭔가 살금살금 철조망 쪽으로 기어 올라오다 앞에 철조망까지 와서 사라졌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5분대기조를 수없이 출동하여 올라갔지만 헛수고였고, 처음엔 혹시 간첩을 잡을까 긴장된 마음도 있었다 합니다. 나중엔 잠을 설친 고참들이 졸병들에게 소리가 들려도 간부들에게 신고하지 말라고 얘기했답니다. 고요한 밤엔 조그마한 소음 소리도 멀리까지 들릴 수 있기에 11명의 5분대기조가 올라가는 발자국소리나 장비 흔들리는 소리를 그들이 인민군들이라면 미리 몸을 감추었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4. 92. 4월 2회째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사회 문성근, 서울근교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기계음소리) 방송을 보고 다음날 SBS방송을 직접 찾아가 제가 경험한 땅굴에 관한 설명을 드렸고, 담당PD의 소개로 땅굴을 찾는 민간인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남침땅굴을 찾는 사람들과 동고동락하였으며 현제에 이르렀습니다. 5. 2002년 베트남 구찌땅굴 견학 월남전에 참여했던 선배와 베트남 구찌땅굴을 견학하고 왔습니다. 구찌땅굴은 출구가 바로 앞에 있는 데도 찾지 못하였습니다. 나중에 찾고 보니 출구가 아주 작았는데(15*25cm) 웬만한 사람이면 다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고량포 1땅굴처럼 분명히 인민군들의 출구가 있는데 찾지를 못할 뿐입니다. 6. 북-중 국경지역 땅굴을 직접 팠다는 탈북자 만남 2002년 8월 북-중 국경지역인 두만강 근처에 숨어있던 전 인민군 상좌(대령)출신을 만나 증언을 들었습니다. 그는 연천지역 땅굴을 직접 굴착했고 직접 연천시내까지 땅굴 속 갱도를 확인하고 돌아갔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이분을 모셔 오려고 김포공항 담당 국정원 직원을 만났고, 현직 국정원 직원도 만나 보았으나 이런 저런 이유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연락처 있음). 7. 정지용(남굴사 대표)씨와 땅굴 홈페이지 구축 2001년 ddanggul.org로 홍광락이 관리하였으나 2004년 ddanggul.com으로 도메인을 변경하여 김진철 목사님이 관리자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8. 화성땅굴작업 2002년 7월부터 경기도 화성군 원평리에서 다우징탐사 시작 2002년 12월 10일 정지용씨는 현장에서 운명하셨고, 이후 몇몇 인사들과 종종 마찰을 빚었습니다. "땅굴이다", "땅굴이 아니다."라고 하는 인사들 사이에 마찰이 생겼으며, 그 이후 홈페이지에서 손을 뗐고 지금의 ddanggul.com으로 도메인이 변경되었습니다. 현재 화성땅굴을 주장하는 몇몇 분들이 계신데 보수단체에서조차 인정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객관성을 가지고 "땅굴이 아닐 수 있다"라고 주장하면 곧 간첩이나 빨갱이로 몰아세웁니다. 그러니 땅굴이 중요함을 알면서도 보수단체들은 땅굴 주장하는 분들과 논쟁을 꺼려하며 심지어는 현대전에 땅굴 별거 아니라고도 합니다. 그러니 땅굴에 생애를 바친 저로서는 더더욱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그럼 여기서 화성땅굴이 아님을 간략하게 적어 보겠습니다. 땅굴 홈페이지를 관리하시는 김진철 목사님과 싸우는 것 같아 글쓰기를 자제하지만 절대 싸우는 것이 아니고 진실을 말함이며, 제가 모시고 계셨던 김한식 목사님이나 화성땅굴을 주장하시는 김진철 목사님 두 분 다 존경합니다. 존경하는 이유는 목사님이라서 존경 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현재 화성땅굴에서 제일 중요시 하는 몇 가지를 밝힐까 합니다. * (시멘트, 노란 우비, 호미, 와이어줄, 사람 목소리)에 대하여..... 다우징탐사한(철사에 의한 방법으로 수맥이나 온천을 주로 찾음) 장소를 포크레인으로 표토층을 8m정도 긁어내니 연한 암반이 나왔습니다. 여기부터는 포크레인으로는 팔 수 없기에 연천과 같이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을 파야 했습니다. 하지만 자금 부족으로 지름이 30㎝되는 T4 시추기를 사용하여 땅굴로 예상되는 심도(지상에서 약21m)까지 5구멍을 W자 모양으로 12~13m씩 더 시추하여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들어가기에 앞서 불도저로 평탄 작업을 했고 근처 냇가에 버려진 커다란 녹강을 포크레인으로 끌고와 5구멍 위에 안착시켜 놓았습니다. 녹강 밑의 틈새로 물이 흘러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시멘트 7포대와 모래를 한 트럭 사왔습니다. 저희가 입다가 찢어진 노란 우비(당시 철물점엔 노란 우비만 있었음)와 주위의 비닐을 주어다가 녹강 밑의 틈새에 깔고 콘크리트를 쳤습니다. 그리곤 도루레를 수원시내 공구상가에서 사다가 녹강 위에 도루레를 설치하였습니다. 녹깡을 설치하려고 불도저로 평탄작업을 했기에 5구멍엔 흙으로 메워져 있었습니다. 고리 달린 페인트 통을 구해 도루레에 연결한 후 떨어진 흙을 삽으로 퍼 올렸습니다. 흙을 퍼올리던 이틀 후 지하 6m정도에서 와이어줄가 나왔습니다. 여기에서 6m란 표토층8m 밑의 6m이며(8+6=14) 그러니 지하 약14m입니다. 땅굴로 예상되는 지점은 약 21m 위치입니다. 게다가 삽으로 흙을 푹푹 퍼 올리다가 나온 것이었고 시추한 옆면은 단단한 화강암이었습니다. 그러니 푹푹 퍼 올리는 흙에 묻혀서 나온 것이니 위에서 떨어졌을 가능성이 100%인 셈입니다. 김진철 목사님은 와이어는 땅굴에서 나왔다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 말이 맞으면서도 틀린 이유는 땅속에서 나온 건 맞지만 우리가 시추해놓은 시추구멍에 떨어져 흙속에 파묻혀 있던 겁니다. 호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지하 19m쯤 팠을 때 5구멍을 똑같은 높이로 시추가 어려웠고 덜 파여진 곳은 곡괭이와 야삽, 그리고 호미로 긁어서 파 올렸습니다. 너무 세게 긁다가 호미 자루가 쑥 빠져 깊은 곳으로 빠졌습니다. 그때 호미를 떨어뜨렸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구찌 땅굴에서 사용했던 호미와 같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땅굴에 관심이 많은 저로선 구찌 땅굴도 견학하고 왔지만 해도 해도 지나친 과장을 하는 것 같아 할 말을 잃었습니다. 말하자면 호미도 땅굴 속에서 나왔다고 하지만 그 말은 맞으면서도 틀린 것은 우리가 시추해 놓은 시추 구멍에서 나온 것이기에 맞으면서도 틀린 것입니다. 호미가 찌그러진 원인은 포크레인으로 암반을 깨다가 호미가 짖 눌려서 찌그러진것입니다. 시멘트도 철물점에서 사온 것이기에 당연히 국산 시멘트인 것입니다. 그 내용이 중요한터라 시멘트를 정밀 분석한 업체도 있는데 국산 시멘트로 밝혀 졌습니다. 모두가 녹강 밑에서 건져올린 것이므로 땅굴이 아닌 것입니다. 모든 것이 땅굴 속에서 나온 것은 확실하지만 시스템적으로 확인하여 보면 모두가 우리가 시추해 놓은 구멍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런 것도 감언이설로 말하면 모르는 이들은 속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 말고도 탐사자 최ㅇ씨는 소형 자동굴착기가 왔다 갔다 하며 인민군이 왔다갔다 한다고 실제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땅속을 훤히 들여다 본다면 공영 방송의 예리한 기자들이 심충 취재하여 제3자가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우리가 시추하여 박아놓은 파이프를 인민군 공기구멍이라 주장하며 사진을 찍어 하우스에 전시했고, 저는 하도 답답하여 그 사진을 떼어 냈습니다. 그 파이프엔 몇 년 몇 월 몇 일 어느 회사에서 제작했다라고 인쇄가 되어있다고 말씀드리니 윗분들은 이미 남한첩자들하고 연결이 되어 있다고 한탄하였습니다. T4시추기 로트가 떨어졌을 때(약 1t) 인민군이 질질 끌고 간다고 최ㅇ탐사자가 얘기 했습니다. 나중에 파 들어가 보니 떨어진 위치에 그대로 박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심령사가 얘기하듯 했습니다. 화성땅굴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습니다. 사람 목소리는 더욱 더 반대했습니다. 녹음 소리 중에 재채기하는 소리는 저이며 "예예"하는 전화 받는 목소리는 사천의 문사장님 아들이며(이분은 저의 고향에서 군대 생활 하였음), "하하하" 웃으면서 호남목소리로 "mbc"가 라고 한사람은 그들과 함께 왔던 운전기사라고까지 꼭 집어서 말씀 드렸는데 어찌된 일인지 모두가 인민군 목소리로 둔갑이 되어 소문이 났습니다. 그 당시 저는 총무였기에 자재 구입 영수증은 지금도 보관하고 있으며 더 의심이 가면 자재 구입 장소도 알고 있습니다. 김진철 목사님께선 외국 방송에서 땅굴이라 보도했다고 하지만 그들은 남굴사에서 주장한 그대로를 방송했을 뿐입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땅굴의 중요함을 알리는 것 자체로 목사님을 존경합니다. 다만 사실이 아닌 땅굴 주장은 생을 바쳐 땅굴을 찾으려는 후배들에게 결코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9. 국방부 육군땅굴 탐지과를 찾아가다. 민간인들과 관계가 좋진 않지만 2003년 12월 11일 국방부에 직접 찾아갔습니다. 탐지과장 ㅇ 대령님과 ㅇ사무관님이 나오셨습니다. 국방부 후문 조그만 커피숍에서 만났습니다. 땅굴에 대한 자초지종을 말씀 드렸지만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땅굴 찾는 사람들의 그 흔한 고소 고발도 저에겐 내키지 않는 방법입니다. 우리 형제들은 누구하고 멱살 잡고 싸우고 다툰 적이 없고 저 또한 누구하고 다투고 법적으로 소송 걸고 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지식도 없지만 그러기가 싫습니다. 10. 땅굴에 관심이 많으신 한사랑 교회 김한식 목사 개인운전 2003년 땅굴에 관심을 많이 갖으신 김한식 목사님을 직접 모셨다. 목사님은 97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셨고 남달리 대한민국 안보 및 경제에 걱정을 많이 하셨습니다. 시청 앞 광장 구국집회 행사도 직접 주관 하셨기에 재향군인회 및 여러 보수단체와도 친분이 두터웠고 안보와 경제 살리기 국민운동본부(안경본) 본부장을 역임도 하셨다. 땅굴에 관심이 많으신 터라 다우징 탐사자가 주장하는 한반도 어느 곳이든 (장거리땅굴) 믿으셨다. 어느 지역을 가든 다우징 탐사자들은 땅굴이라고 주장했고 온 산천이 땅굴이었다. 다우징 탐사자들은 말재간이 좋았고 저는 언제나 반대하는 입장에서 설득했지만 힘들기만 하였습니다. ㅇ탐사자는 강남구 대치동에 있던 교회 뽕나무 3m 밑에도 땅굴이 들어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제발 우리 교인들에게만은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였습니다. 이런 저의 마음도 모르고 교인들은 홍광락이가 목사님을 꼬들겨서 목사님이 교회보단 땅굴과 교회 외적인 일들을 계속하게 만든다. 라고까지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둘 교인들이 빠져 나갔습니다. 목사님께선 나라를 구하려는 열정 때문이지 하찮은 저 때문에 땅굴을 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목사님께선 다우징 탐사자와 함께 미국 디펜스포럼에도 다녀오셨습니다. 땅굴을 찾아야한다는 생각은 같았지만 찾는 방법론에서 차이를 느꼈습니다. 지금 목사님과 헤어졌지만 그때가 못내 아쉽습니다. 11.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 가다 2006년 서대문역 주변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 갔습니다. 예비역 대령과 소령도 있었지만 그들은 땅굴에 관해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언론에 땅굴설이 많지만 군의 특수 업무라 여기선 땅굴 내용을 국방부에 그대로 얘기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도 뾰족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지금껏 각 정당이나 높으신 분들을 만나서 얘기 했지만 처음엔 모두가 관심을 갖습니다. 관심을 갖고 시작하다 육본 탐지과의 말을 듣고는 관심 없어 합니다. 결국 돌아오는 답변은 땅굴이 아니라고 하든지, 탐지과에서 항상 써먹는 요즘 땅굴 신고하는 골칫거리 민원인들이라고 듣습니다. 청와대에 땅굴 민원을 올려도 종착역은 육군본부 탐지과로 갑니다. 12. 2땅굴을 찾은 정명환 장군도 1초 간격으로 발파음 청취 지금까지의 땅굴발견은 최초 발파음을 듣고 찾기 시작했고 그 결과 4개의 땅굴을 찾아낸 것입니다. 홍광락이 1.5초 간격으로 5발을 들었다고 이야기했을 때, 제2땅굴을 찾은 정명환 장군님께서도 저와 비슷하게 1초 간격으로 발파음이 터졌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땅굴 발파음을 직접 들은 정명환 장군은 주위의 비아냥과 만류에도 개의치 않고 집념을 갖고 찾아내었습니다. 이유는 발파음 소리를 두 귀로 직접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귄가 민가 하면 진작 포기했을 것이다. 말을 잘하면 말로 사기를 쳤을 것이며, 글을 잘 쓰면 문서로 사기를 쳤을 것인데 전역한지 17년이 지난 지금에 비로소 문서로 남기니 참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3. 1994년 이후에도 남침땅굴을 굴착했다 "김일성 사망(94년)이후에도 남침땅굴 굴착했다" 월간조선 보도…북 고위기술자 출신 탈북자 증언 조선닷컴 internetnews@chosun.com 입력 : 2007.04.03 14:12 / 수정 : 2007.04.03 14:14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1994년 이후에도 북한이 남침땅굴 굴착 작업을 계속했다는 증언이 나왔다고 월간조선 2007년 4월호가 보도했다. 월간조선에 따르면 북한 고위기술자 출신의 한 탈북자는 “1994년 이후에도 남침땅굴 굴착과 관련된 기술문제가 현장으로부터 제기돼 올라왔다”고 말했다. 또 “열 개 정도의 남침땅굴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상태일 것”이라며 “굴착 가능 길이는 10km 이내”라고 했다. 현재까지 남한에서 발견된 땅굴은 네 개로, 1990년 3월 강원도 양구 북쪽에서 발견된 제4땅굴이 마지막이다. 우리 군은 1980년대에 땅굴 굴착이 끝났을 것으로 보고 있다. 1978년 10월 발견된 제3땅굴. 이 탈북자는 북한에서 남침땅굴 굴착에서 발생하는 기술적 문제를 해결해주는 일을 했으며 땅굴 현장엔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특히 굴착 작업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됐던 산소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관여했다. 잠수함에서 사용하는 산소발생장치를 이용해 문제를 어느 정도 완화시켰으나, 이 장치에서 발생한 열로 갱내의 가스가 인화돼 폭발사고가 자주 났다고 전했다. 이 때문에 작업을 하던 병사들 가운데 사망자가 많았다고 말했다. 이 탈북자는 땅굴을 북한에선 ‘기통수(機通手·군대에서 신문이나 문서를 배달하는 일종의 연락병)’라고 부른다고 했다. 또 땅굴 굴착은 인민무력부 직속의 583부대(군수건설국)가 맡고 있으며, 이 부대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숙소나 별장 등에 관련된 건설사업과 비밀군사시설 건설을 전담한다고 전했다. 이 탈북자는 한국 측에 발각될 것을 우려해 한국에서 터널을 뚫을 때 쓰는 자동굴착기 TBM은 쓰지 않으며, 착암기로 바위에 구멍을 뚫어 다이너마이트를 넣고 폭파시킨 다음 정이나 망치로 굴을 넓혀 가는 방식을 사용한다고 전했다. 그는 “6명씩 교대를 하면서 하루 24시간씩 뚫으면 한 달에 수십 미터를 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14. 5발의 발파음 소리는 지하 광장을 만드는 소리 북한에서 갱도를 팠던 탈북자들은 저의 의견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의견을 정리 한다면 직선 코스에선 여러 발을 동시에 발파하여 한 번에 버럭을 떼어 내지만 단발로 들었다면 직선 코스가 아닌 넓히는 작업, 즉 광장을 만들 때 한발 한발 터트려 암반을 떼어낸다고 합니다. 이곳은 임진강 남쪽으로 약8km 떨어진 좀 큰 고지이며 탈북자 차도수의 증언대로 남한 쪽에서의 휴전선 땅굴 탐사로 인하여 휴전선 근처엔 깊게 파고 들어와 어느 위치에선 지상으로 파고 올라와 출구를 낸다고 하였습니다.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저들은 전면전은 못한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18만의 특수부대를 활용하여 하루아침에 수십만 또는 수백만을 포로로 잡아 흥정할 것입니다. 15. 2008년 파주시 아쿠아랜드 및 불당골 탐사 실시 군 시절부터 땅굴에 관심을 가졌던 이창근씨에게 연락을 하였습니다. 이창근씨는 김포 애기봉 근처에서 OP관측병으로 근무 중 땅굴 징후를 포착하고 전역 후에도 집념을 가지고 땅굴 찾는 일을 해오다 연천땅굴을 발견한 당사자입니다. 이창근씨는 탈북자들의 진술을 통하여 여러 지역을 탐사했고 홍광락씨가 제보한 곳으로도 땅굴이 들어왔다라고 탈북자들의 증언을 비교하며 확신을 가져 주었습니다. 땅굴에 미쳐 있는 나를 보고 한번 해보자고 하였습니다. 전역한지 16년 만에 희망이 보였습니다. 모든 물리탐사 비용과 작업비용을 책임진 이창근씨는 발굴단장, 홍광락은 기획단장으로 2008. 8. 1일 일산의 (주)ㅇㅇ물리탐사회사에서 아쿠아랜드 및 불당골 물리탐사를 실시하였다. ① 08. 8. 5 물리 탐사결과 불당골에서 지하공간으로 추정되는 암질이 나타났다고 통보받음 ② 08. 8. 11 물리탐사업체에서 포인트를 찍어준 위치에서 좌우 1.5m 간격으로 3개 공을 80m 깊이로 시추하였으나 관통에는 실패하였다. 24시간 자동녹음 할 수 있는 청음기를 만들어 녹음을 시작하였습니다. 저희 청음방법은 지하 60m 시추기속에 마이크를 집어넣고 암반의 매질과 충격에 의한 자동녹음을 합니다. 물론 소리가 없으면 전혀 녹음 안됩니다. (92년 월간조선과 98년 SBS에서 1시간짜리 연천땅굴 보도하며 청음장치 성능을 실험했습니다.) 이후 낮에는 전혀 녹음이 되지 않다가 야간에만 녹음이 되며 하룻밤 사이에 테이프 하나가 다 녹음이 된다고 발굴단장과 현장에 계신 김ㅇㅇ씨와 김ㅇㅇ씨가 확인하였습니다. ④ 탐사팀은 더욱더 확신을 갖고 땅굴 공간을 찾으려고 정밀탐사를 하였습니다. 2008. 8. 31일 120m 깊이로 14m 이격하여 시추를 하였고 (주)ㅇㅇ회사에서 한쪽 시추공에서 다른 시추공에 전파를 쏘아 탐사하는 토모그래피탐사를 실시하였습니다. ⑥ 토모그래피탐사결과 업체에선 지하 공간 층이 3개 층일 수도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⑦ 08. 10 수 개월간을 작업하다보니 자금이 부족하여 더 이상 작업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중단할 수 없어 여기저기 알아보니 우리들의 이야기를 어디에 호소할 때가 없었습니다. 사기꾼들이 득실한 이 시대에 누가 알아듣고 도와주겠습니까? 우리편이 되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보단 모든 책임을 진 발굴단장이 더 힘들어 했습니다. 혼자 자금 문제로 곤욕을 치러야 했고 제가 도울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이번 작업을 마치며 또다시 마음 아픈점은 개인이 하기엔 역부족입니다. 예비역지휘관들이 나서서 육본 탐지과장과 국방부장관을 설득한다면 땅굴 찾는건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군과 민을 따지며 잘잘못을 가리기보단 우리 모두는 같은 배를 타고 가는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번 작업은 21년동안 마음속에 간직해 두었던 곳을 처음으로 과학적인 장비로 물리탐사를 하였고, 물리탐사 업체에서 선정해준 지하 공간 층에서 24시간 자동 녹음한 결과 밤에만 이상한 녹음이 녹음 되었다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아야 했습니다. 끝으로 이창근 발굴단장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며 다시한번 기회가 왔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도 봅니다. "땅굴이야기" ddanggool35@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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