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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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여사 작성일13-04-18 05:00 조회4,206회 댓글15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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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쟁점]21일 도청앞에서 장갑차타고 질주하며다니다 카빈총에맞아 사망한 자다.
테레범.저항세력[민주화 운동]시민군으로 열심히싸운 조 사천[모나미 문구]아저씨이다'
호남인들은 이분의 신원을사실 그데로 공개하고 검증을 받을때
5.18은 광주사태인가? 민주화 운동인가/지정되는것이다.
ㅇ.시민군이 장갑차타고 다닌것은 당연하다{ ]표 아니다[ ]표
ㅇ.장갑차란 군인들만 탈수있는것이므로 호남인의 입장이 난처하니
카빈총으로 쏴서 죽였다.잘했다[ ]표 아니다[ ]표
ㅇ.사망한 자의 장갑차를 멈추지않고 진압군이 쏜것으로하기위해
도청앞에가서 멈춰 뒤집어 씌웠다.잘했다[ ] 아니다[ ]
ㅇ.전쟁이나 다름없었던 그때 그상황.그 시절엔 그어느 누구도 따질수도없었다.
광주사태 연구자료.수사기록.청문회의 기록이 남았을뿐.....
이제와 보니 외국 기자가 사진을 찍어놓았다니 기가 막힌일아닌가?
댓글목록
장여사님의 댓글
장여사 작성일
이 세상에 비밀은 없는법.세월이 폭로한다고했던가?그 당시 호남의광주는 교육도시였다.광주가 광역시가아니고 전남권이었기에 전국 체전에는 항상1순위였고.해태 야구가 으뜸이었으니 체육에도 자부심을갖고 사는자들이 호남인이었다.광역시가 된후론 꼴등을 면치못하니....
5.18주동자들의 윤 상원. 김 영철.등등의 분들이 광천동 주민들이었으니 유언비어란? 그동네서 제일 먼저
번저나간것은 아니었을까?그 소문을 가장 많이들은이유도 우리가게 골목이 그 동네 주민들은 물론 딴동네사는 초.중.고등.대학.생들까지 오가는 거리였으니 많은정보를 알수있었던것은 아니었을까싶다.처음에는 무기가없으니 괭이나 삽.낫이나 부엌.칼까지갖고나와 광천동 다리밑,하천쪽에서 군인들과 밤새도록싸웠다는말도있었다.
장여사님의 댓글
장여사 작성일
21일 조사천 그 분이 사망하자 주동자들은 놀랐고.분노하여 아시아에서 더 많은 차를 끌고나와 진압군과 맞서싸웠건만 기세등등했던 권위주위시대 진압군은 이길수없었고 무릅을꿇고말았다.끝난후의 결과를보니 엉뚱한 약자인 시민들만 희생당한 격이었으니 이얼마나 기가막힌일인가?광주사태는 그렇게끝났다.
그 후.좌파란 자들은 잔 머리 굴려 먼 훗날 누가 따질것인가/ 불리한것은 드러내지않고.유리한 점만 공개하여 진압군에게 뒤집어씌워 민주화 운동으로 지정함.타.지역 인들은 직접본일이없으니 지금도 혼돈하고있는것아닌가?민주화시대 란?지금도 5.18같은 행동하면 당장 구속된다.
장여사님의 댓글
장여사 작성일
법적으로 끝났다하나 그것은 호남인의 주장이고.국방부나 검찰의기록이거짓이었음이 드러난이상
5.18은 제조명하여야함.고위 공직자의 기록이 맞다면 민주화 운동이 될수없었겠죠?
뒤집혀진 역사를 끌어않고는 절대 다시 시작할수없으며
5.18의 마무리없이는 남남갈등 해소는 않될것이며
남남갈등 해소없이는 대 통합이란 무 의미한것 아니겠는가?
zephyr님의 댓글
zephyr 작성일
장여사님 80년도에 해태 야구 없었습니다.
해태야구는 광주의 업적이 아니라
김응용감독의 업적입니다.
장여사님의 댓글
장여사 작성일
5.18의 진실을 밝히자는것은 호남인의 염원이자 세계인의 의문점이다.5.18 그당시 발포 명령은없었다.
장갑차 주인공 조 사천이 사망하자 진압군과 시민군의 사격은 오고갔으며 큰 비극을 자아냈다."통기책"
5.18연구자료에 상세히 기록되어있음. 시민군이었던 이 용일. 이 수범. 그분들이 살아계시면 민주화 운동
지정된 지금 그때 그 증언은 거짓이었다고 자부 할수있겠는가?
5.18 33주기를 맞이하여 전 국민은 명확히판단하여
대한민국을 짊어지고갈 후손들에게 옳 바르게 알려주어야한다.
5.18은 광주사태인가? 민주화 운동인가?
장여사님의 댓글
장여사 작성일
80년도에 해태 야구가 잘나갔다는것이아니라 예전에는으뜸이었는데 요즈음엔 별볼일없다는것이죠/
해태 야구는 김 응용감독의 업적이라고하는데 아니 선수의 노고가있어 감독이 빛날수있는것이고
지지와 응원의 갈채가있어 선수는 꿈과 용가를내어 최 선을 다해 싸우는겄 아닐까요?
즉 삼박자가 맞아야 된다는것이겠지요.
시사논객님의 댓글
시사논객 작성일
장여사님, 아래 링크 사진에서 보이는 동네가 광천동인지 아니면 어느 동네인지 아시는지 보아 주시겠어요?
http://www.facebook.com/photo.php?fbid=545301835483063
장여사님의 댓글
장여사 작성일
5.18당시 호남의 광주 광천동.유덕동은변두리였으므로 농사짓는 자 들이 많았습니다.농 기구를 갖고나와 싸운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요.저는광주에 오래 살았다하나 인척이나 친구.종교가없어서인지 별로 가깝게 지낸사람은 없었어도 남 달리 악 인이었던 자 도없었다고봅니다.소 규모 자영업을한다해도 그 내에서 최 선을 다해 노력은하였으나 세월 탓인지 문구나.서점은 더 이상 버틸수가없기에 집어치웠을 뿐......
그리고 사진을보니 전당포가있는것으로보아 시내 부근은 아니겠어요.
저는 자전거 배운 후로 가까운 거리만왔다갔다하였지 먼 거리 딴 동네는 가본일없었고
차 타고 한 두번 스쳤을뿐...
푼 돈 벌어 먹고살기 바빴던 사람입니다.
시사논객님의 댓글
시사논객 작성일
정동순씨는 여러 증언에서 조사천씨가 당시 계림동에서 살고 있었던 것처럼 말했습니다. 광천동에 모나미 문구가 있었다는 것 혹은 조씨네가 광천동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만약 광천동에서 농 기구를 갖고나온 시위대가 있었다면 그것은 광천동 천주교회를 중심으로 그곳에 가톨릭농민회 회원들, 즉 농민 운동권이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합니다.
http://www.facebook.com/photo.php?fbid=517848274895086 에서 농사꾼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지프차를 타고 다니는데 목포에서 온 조직일 수도 있고 어쩌면 광천동 운동권일지도 모르겠네요. 여기가 광주공원인가요? 광천동 인근이라고 생각되는데 한번 보아 주세요.
장여사님의 댓글
장여사 작성일
1980년 그 당시 호남의 광주는 농사짓는 자들이 많았습니다.그리고 조 사천씨가 모나미 문구를 하였다는것은 그 시절 광천동에서 자란 아이들은 장갑차 타고 사망한줄은 몰라도 문구사가 있었던것은 기억하고있을것이며 지금도 그 자리는 그데로있습니다'또한 5.18재단이나 그 여자가 아무리 거짓말을하여도
도청앞에서 장갑차 타고 사망한 자는 그 사람 한 분이며 외국 기자가 사진으로찍어놓은이상 더 명확한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어디에선가보니 아시아에서 장갑차4대를 끌고나왔는데 진압군이 3대는 압수하고
1대만 사용했다고했습니다.제가바빠서 그만 두었는데 찾아봐 주세요.광천동[모나미 문구]아저씨가
도청앞에서 목에 구멍이 뻥 뚫려서 장갑차타고 고개만 내밀고 사망했다는것을 그 분의 처에게 직접 전해주었으며 그 당시 어린이들이 그분의 얼굴 주위에 고양이 털이 났다.는것도 알려줬답니다.
시사논객님의 댓글
시사논객 작성일
21일 금남로에서 장갑차가 최소한 세 번 나타났습니다. 오전 9시 반에 구용상 시장 연단을 들이받고, 오후ㅣ시에 군인들 깔아죽이고, 1시 30분에 조사천씨 장갑차가 나타났습니다. 한 대가 세 번 나타난 것인지 세 대가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금남로에서는 진압군이 시민군 장갑차를 압수한 일이 없습니다.
전남대에도 시민군 장갑차들이 몇 대 나타나 3공수와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시민군 장갑차들이 3공수가 임시 막사로 쓰던 전남대 운동장까지 들어왔는데 그것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장갑차에 올라가 해치를 열고 최류탄을 넣어 장갑차 운전자가 나오게 하는 방법으로 압수하였습니다. 장갑차 안에 들어가 보니 술병이 가득히 있었다고 합니다.
참, 전에 시숙이 조사천씨 시신 확인을 도왔다고 하셨는데, 조사천씨는 독자였기에 정동순씨 시숙이 있을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장여사님의 댓글
장여사 작성일
상세한것은 전화로 하던지 직접 만나뵙고 대화를해야할것같습니다.
제가 제보한 모나미 문구 아저씨는 딴동네 형님과 시 어머니가 살고계시다고 했습니다.
장여사님의 댓글
장여사 작성일
21일 도청앞에서12시59분에서2시사이 조사천 그분이 탄 장갑차가 질주하며다녔고.진압군을밀어 1명사망.1명부상.그 후에도 질주하고 다니니 시민군이 카빈총으로쏴버렸음.그러나 장갑차는 그곳에서 멈추지않고.전쟁이나 다름없었던 도청광장으로 밀고들어갔으니.그때 그 상황.호남인은 물론 진압군까지도 상대방인 진압군이 쏜총에맞아 사망한줄알았음.[흰 머리띠를 두르고 태극기를 든 청년이 피격되었다.]
ㅇ.지 만원...12.12와 5.18[231쪽]
ㅇ.최 영태...5.18 그리고 역사.[99쪽]
ㅇ.5.18광주사태 연구사료집 시민군 이 용일[증언]
ㅇ.시민군 이 수범[증언] 김 영택 기자가 보았음.뾰족한 장갑차
위 인은 동일인물임.조 사천[광천동 모나미 문구]아저씨 이었음.
장여사님의 댓글
장여사 작성일
호남인들은 테레범.저항세력[민주화 운동]시민군 조 사천.이런분들의 신원을 떳떳히공개할수있을때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 받을수 있는것이다.[예]조 사천...이 분은 도청앞에서 장갑차타고 국군과싸우다가
시민군이쏜 카빈총에맞아 사망 하였음.
사진속에 드러나는시민군[가까운 거리에서 조 사천을 쏜 자는 누구인가?
장갑차 운전자는 누구였는가?
죽은 자는 말을할수없다.지만
산 자...주동자는 누구였든가?
[주동자]는 분명히 조 사천을 알고있었으며 장갑차 운전자도 알고있었다는것이다.
장여사님의 댓글
장여사 작성일
그 당시 발포명령은 없었고 조 사천 그 분이 사망하자 분노하여 아시아에서 더 많은 차를끌고나와싸웠다.
5.18광주사태를 민주화 운동으로 뒤집었다면 둔갑을시킨 좌파들의 기록은 왜곡되었다는것이다.
사기를칠것이 따로있는것이지 어찌 역사를 왜곡시킨단말인가? 파렴치한것들/
그러기에 5.18은 제조명하여 후손들에게 옳바로 인식시켜야함